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 Part 5. YouTube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art 5 : 농촌 전도활동과 일제의 박해 ☞지난 호 보기
유화례는 안식년 기간 동안, 가족들이 있는 뉴욕 락포트에 머물렀고
남부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선교보고를 했다.
한국으로 복귀하기 전 유화례는, 고향 친구들이 선물해준 캐나다 밴프 Banff 와
로키산맥을 여행하는 기회를 가지면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평온한 쉼을 누렸다.
오랫동안 일에 지치고 몸이 상하여 있던 그에게 안식년의 기회와
대자연을 호흡하며 힐링의 시간을 갖는 것은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유화례을 사랑하는 고향 친구들의 배려가 없었다면,
이렇게 값진 쉼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캐나다에서 보낸 힐링 여행은, 한국으로 복귀하는 여정에 포함된 것이었다.
유화례는 선교지로 돌아가기 위해 로키 산맥을 경유하며
밴쿠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한국으로 복귀한 유화례는 광주에서 가족처럼 지냈던 독신 여성 선교사들과
재회하는 기쁨을 나누었다.
광주 독신 여성 선교사 숙소에서, 가족과 같이 지내던 이들이 오랜만에 모두 모였다.
유화례을 포함하여 도마리아, 구애라, 변마지 였다.
Mary Dodson, Anna McQueen, Margarret Pritchard
그들은 오랫동안 한 집에 살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동고동락하였던
동료 이상의 가족과 같은 식구들이었다.
부부 선교사들이 서로서로 의지한 것처면, 독신 여성 선교사들에게는
함께 생활하며 우정을 나누는 동료 선교사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구애라, 도마리아, 유화례, 변마지와 같은 독신 여성 선교사들이
장기간 한국에 머물며 선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교에 대한 사명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동료 여성 선교사들과 나누는 우정도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한국에 돌아온 유화례는 함께할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1937년 10월, 두 번째 안식년을 떠나서 1938년 11월에 복귀한 유화례는
그 이후 풀타임 전도사역자로서 복음 전도에 집중했다. *수피아 여학교 패쇄로
그의 전도 활동은, 다른 독신 여성 선교사들 및 한국인 전도부인과
인근 시골에 찾아가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하고,
교회나 학교를 이용하여 저녁 집회를 열고,
사경회와 성경반, 성경학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유화례는 남장로교 성경학원 위원회 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39년 선교부 성경학원위원회 명단에 유화례가 포함되어 있다.
여자 성경학원 위원회는,
각 스테이션에서 여성 선교사 한 사람의 대표로 추천하여 구성되었고
이들이 성경학교 운영에 전반적인 책임을 맡았다.
유화례는 광주 스테이션을 대표했다.
1939년 2월 11일자 서신에서 유화례는
4주 과정의 스테이션 성경 학원과, 여성을 위한 10일간 사경회에 대해 언급했다.
성경학원에서 공부하는 여성들의 연령대는, 15세부터 66세까지 다양했고,
대다수는 30대였다.
유화례는 학생들의 열띤 반응도 기뻤지만,
4주간 매주 6일 동안 진행되는 수업을 준비하는 공부 시간을 축복으로 여겼다.
또한 10일간의 사경회에는, 날마다 성경 두 과목을 가르쳤는데
230명의 여성들이 참석하여 성경과 새로운 찬송가를 배우며 성황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교회의 여성 지도자와 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성경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러한 성경교육에 여성 교인들의 호응이 컸다.
특히 헌신적인 여성 선교사들이 "여성을 위한 성경 교육"을 통해
한국 교회 여성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성들을 위한 성경학원이, 여자 신학교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볼 때
성경학원과 성경학교는, 한국교회 여성지도력 개발을 위해 매우 중요한 기간이었는데,
여기서 여성 선교사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5년 과정에 매년 한 달씩 진행하는 <여자 성경학원>을 졸업한 여성들이
3년 과정에 매년 2개월~3개월 진행하는 <여자 성경학교>에 진학했다.
▲<여자 성경학교>는 1923년에 전주에 설립된 여자 성경학교와 *아다 해밀턴 성경학교
기존의 이일학교를 1924년에 선교부가 승인한 광주의 여자 성경학교가 있었다. *이일 성경학교
이후 두 기관은 <한일 여자신학교>로 통합되었다.
유화례가 전도활동에 전념하던 이 시기는
일제가 전시체제 아래 한국교회를 압박하며
제국주의 확장 전쟁을 위해 식민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던 시기였다.
대표적인 것이 '국민정신 총동원'이었다.
일제는 1938년 4월에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민간차원에서 전쟁을 위한 선전 및 선동과, 대중 동원을 담당할 기관으로
<국민정신 총동원>을 관변 단체로 활용했다.
서울과 지방의 행정 단위는 물론,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중앙과 지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촘촘한 조직으로 구성되었으며
교단 총회와 노회와 지역사회를 산하기관으로 편입시켜서
한국교회를 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사실 기독교 학교와 한국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이었다.
신사참배는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했고, 최후의 목적이 아니라
일제의 제국주의 국가 시책과 전쟁 노력에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제 경찰이 배속한 가운데 열린 1938년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첫 안건으로
신사참배를 굴욕적으로 수용하면서 발표한 성명서의 내용이 이를 증명한다.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수행하고, 추가로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
신사참배 강요는 천황제 국가에 대한 종교적 충성을 요구함으로써
먼저 정신적으로 굴복시킨 이후
한국교회를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동원하려는 의도였다.
신사참배 결의 직후, 총대들이 신사로 함께 가서 집단적으로 참배했다는 사실은
교회가 종교화된 세속권세에 굴욕적으로 복종한 역사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순교를 불사하고 신앙을 지켰던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영성과
그들의 숭고한 신앙에 대한 교회의 기억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서 너무 쉽게 희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장로교는, 1938년 9월 27일에 소집된 임시위원회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일제의 통제를 받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선교사들이 노회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선교부가 동의하지 않는 결정과 행동에
간접적으로라도 동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고,
모든 선교사가 소속된 노회에서, 맡은 직책을 사임하기로" 결의했다.
선교사들이 노회의 구성원으로서
한국교회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관계는 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한국교회 창립에 기여하고,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동참했던 (장로교)선교사들로서는
가슴 아픈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선교부는,
한국 교회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사명감과
교회의 영적 유익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과 영적인 번영을 위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위한 봉사를 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노회와 지역 교회와 협의하여
설교, 심방, 개인전도, 성경교육, 부흥회 인도에 참여하고
선교부의 정책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성경반과 성경학원을 계속 운영하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결정은, 한국교회와 전도활동에는 협력하되,
직접적 연결관계는 정리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한국교회를 경유하여, 장로교 선교부와 선교사업에 영향을 미치면서,
선교부의 목적과 원칙을 훼손하는 것을 차단하는 조치였다.
전시체제의 돌입한 일제는, 남장로교의 전도 활동을 방해하고 통제했다.
선교사들이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금지하고
지역 및 순회전도 활동을 방해하고
한국 교인들의 위협하여 선교사들과 거리를 두게 하며
이들 사이를 단절시키려고 했다.
유화례가 활동하던 광주 스테이션은, 1939년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회람서신을 통해, 일제가 전도 활동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조선총독과 협상할 위원회 구성을 요청했다.
일본 경찰이 선교사들의 설교와 집회를 금지하고
한국 목회자와 교회를 협박하여
선교사들에게 '교회에 출입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내게 하는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은 일제의 방해와 통제가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시골로 찾아가서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며 전도했다.
시골의 가정방문 전도회에서, 여성 선교자들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1939년 5월 23일 서신에서 유화례는
시골에 비기독교인 마을에 찾아가 전도활동을 한 내용을 소개했다.
차로는 갈 수 없는 한국의 좁은 논 길을 걸어서, 마을에 이르는 여정을 묘사하며
시골의 풍경은 어디나 사람의 숨을 멎게 할만큼 아름답지만
인가가 가까워지면 곧 '후각이 덜 발달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고 말했다.
마을의 풍경은 아름다우나, 인분과 축사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는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화례는 이 마을에서 기독교 여성의 안내로
불신자 여성들을 찾아가 전도했고, 이들은 복음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여성들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려고 소책자를 받아갔다.
일제의 통제 아래, 선교활동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여성 선교사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농촌의 깊은 마을까지 찾아가서
전도부인과 기존 교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마을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교육의 기회를 전혀 받지 못했던 조선의 여성들이
여성 선교사들의 전도 활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움의 기회를 얻고
기독교 신앙과 근대 문화를 접하면서
주체적 존재로서 여성 정체성의 자각과 함께 자기계발의 열망을 갖게 되었다.
이를 통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의 자의식과 태도가 변화되었고
적극적인 활동과 역할을 하게 되면서, 교회의 여성지도자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서신에서 유화례는 1939년 3월 18일~ 5월 1일까지 전주에서 진행된
'특별 여성성경반'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진리에 대한 간절함과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성경반은, 당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여성들에게
전도의 기회는 물론, 지식과 교육의 기회도 제공함으로써
기독교 여성 지도자로 양성하는 역할을 했다.
교과 과정은 1년 3학기제에, 총 3년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경 각권에 대한 강의가 주를 이루었지만
교회사, 교회법, 여성 조력회 운영법, 민주적 의사진행을 위한 회의법,
위생학, 합창 및 악기 연주, 심리학, 사회학, 표현법, 고고학 등의 강의도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위협과 방해로 인하여 상황은 매우 열악했지만
유화례는 시골 전도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1939년 10월 18일 서신에서 유화례는,
인근에 교회가 없는 비기독교인의 마을로 여러 차례 10일간 전도 여행을 하면서
커다란 열정과 보람을 느꼈고,
예전에 학교 행정 업무를 하던 단조로운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
다채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무당이 귀신숭배 장비를 던져버리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가난하고 무지하고 나이 많은 여성이 '주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구원의 메시지를 깨닫는 모습 속에서
유화례는 전도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았다.
유화례는 시골 전도가, 자신의 모든 사역과 열정과 기쁨을 주었다고 고백했다.
▲이 시기에 유화례는,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을 가르고
자신의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부흥의 경험을 했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으며
이로써 완전히 새로워진 중생의 체험을 했던 것이다.
유화례는 새롭게 거듭난 1939년 9월 5일을, 자신의 생일로 여겼다.
그동안 유화례는 적극적인 전도 활동을 하면서도 내적인 갈등이 있었다.
유화례는 이렇게 말했다. "점점 더 나는 불만족스러워졌다.
성경만에서 가르칠 때, 가끔씩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 사람들이 네가 아는 그 마음을 알았다면, 과연 너를 성경 교사로 받아주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은 선교사역의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내 친구에게 말하는 단계로 이끌었다."
유화례는 여러 해 동안 스스로 부흥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기도하고 있었고,
1939년 여름 휴가 때 강원도 화진포에서
성결교 선교사들이 초청한 부흥집회에서, 부흥을 체험하는 계기를 얻었다.
부흥회 강사는 알레타 제이콥스 Aletta Jacobs 로서
남아공 앤드류머레이 성경학교 출신의 네덜란드 개혁교회 소속 선교사였다.
제이콥스는 휴가를 맞아 친구들을 만나러 한국에 와서 집회를 인도했다.
유화례에 따르면, 제이콥스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완전히 양도하고, 성령이 그를 지배하게 되면
숨어있던 죄가 밝히 드러나고 치유되어, 성경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회개와 죄의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개혁교회 전통에 케직사경회의 영성과 연결되는 '성결부흥운동'의 흐름이었다.
유화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까지 행한 일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마땅히 해야하는 사과나 관계 회복을 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죄책감과 패배감을 느끼며 마음의 평화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 부흥회에서, 그간의 실수와 죄악과 실패를 깨닫는 갑작스런 경험을 하면서
돌같이 무겁고 답답한 마음이 부드러워짐을 느꼈다.
또한 남장로교 동료 선교사들의 동의를 얻어
제이콥스를 광주 스테이션에 초청하여 일주일간 부흥회를 가지면서
그가 전한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의 메시지'가
그들의 부족함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이 집회를 통해 광주 스테이션에도 부흥이 일어나면서
유화례 뿐 아니라 다른 선교사들도 새롭게 거듭나는 체험을 했고
선교사들은 기도와 성경공부에서 부흥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유화례는 그 이후로는 '한국에 대한 소명'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고
그의 사역에서, 그 이전에 10년 이상 동안의 결과보다
더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고 회고했다.
이전까지 선교사로서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서양 문명에 대한 우월감,
그리고 복음 전도가 문명의 개선을 가져온다는 문화적 접근에서 탈피하여
영혼과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인식과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내면과 영혼에 대한 근본적 관심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심화됨으로써
한국에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한국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유화례는 1939년 12월 서신에서이 "부흥의 파급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부흥의 영향이 계속 퍼져나가면서, 100명의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그들의 죄를 씻어 주시는 능력을 삶에서 체험했기 때문에
새로운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유화례도 "전과 달리 성경의 생생하게 나에게 다가온다"고 말하며
하나님이 나의 삶을 완전히 주장하시도록
극장이나 영화나 소설과 같은 오락거리를 포기하기로 결단했다고 고백했다.
또한 "부흥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아직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희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부흥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들여 기도한다면,
자신과 공동체는 물론 온 나라에도 유익이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고 권면했다.
이로 보건데, 한국에서 선교사들의 전도 활동은
교단과 교파의 범위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남아공 선교사를 초청 부흥회 가진 것을 볼 때)
부흥운동의 국제적 초교파적 연결망 속에서 상호작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말기의 엄혹한 환경에서, 선교활동의 외적 조건들은 갈수록 열악해갔다.
쌀과 농작물, 생필품과 의류, 연료의 부족으로 극심한 겨울의 추위를 겼었고,
유화례는 굶주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미국 교회의 원조와 도움을 호소했다.
선교편지를 통해, 한국의 물자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므로
면이나 모wool 로된 입던 옷은 버리지 말고, 조금이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선교사들은 한국전쟁 이전 일제강점기에도
이미 물자부족으로 곤궁을 겪는 한국인들을 위해
미국 교회의 원조를 요청하여 나누어주는 구호 사역을 했다.
식민지 근대화의 허상은, 일제(일본제국주의) 말기
대중들의 겪었던 굶주림과 헐벗음과 극심한 고통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곤궁을 돕기 위한 선교사들의 수고는
일제의 권위주의적 억압적 통치와 대비되면서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 선교가 커다란 사회적, 문화적 의미와 영향력을 가지게 했다.
남장로교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는, 갈수록 심해지는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었다.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천황제 국가주의 체제에 맞춰서 아예 기독교를 대대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미 1915년에 통과된 포교 규칙과 더불어
1939년 일본 제국 의회를 통과하여 1940년에 시행된 종교 단체법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종교를 일제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는 법안이었다.
특히 '종교단체법'은 애국주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고
'종교 보국'을 실현하고자 했다. *종교가 나라를 보호, 지킴
이를 통해서 "일본적 기독교"를 주창하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기독교의 요소들을 과감히 제거하여
기독교를, 일제의 국가인형과 시책에 맞도록 개편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일례로 1940년 10월 3일에 조선총독부 보안과장은
장로교총회 상치위원 7명과 간담회를 하면서
장로교회에 대해 혁신안을 요구했고
장로교는 이에 부응하여 1940년 11월 10일에
총회장 곽진근의 담화로
'조선 예수교 장로회 혁신 요강'을 발표했다.
"국체國體의 본의에 기초하여, 국책에 순응하고
과거 구미 의존의 사념邪念을 금절禁絶하고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 경정更正에 노력하는 동시에
교도로 하여금 각각 그 '직역'에서 *직분과 역할
멸사봉공의 성의를 받들어 협심육력
동아 East Asia 신질서의 건설에 용왕 매진하기를 기한다."
일제는 한국교회를 일본적 기독교로
순화경정, 곧 불순물을 제거하여 바르게 고친다는 목적으로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을 서로 철저히 분리시켰고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서 설교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시키면서
남장로교의 전도 활동을 방해했다.
이 당시 인돈(윌리엄 린튼)의 서신에는,
일제 경찰이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를 분리시키려고 방해 공작을 벌였던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교인들을 협박하여 선교사들에게 '교회를 방문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내도록 하거나
선교사가 설교를 부탁받은 교회에 '선교사 초청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넣거나
선교사가 교회를 방문할 때, 경찰이 교인들에게 협박해서
'선교사님,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가시라'고 사주했고,
선교사가 전도 활동을 하는 동안 경찰이 보란듯이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행동 등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예배당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무례하고 위압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유화례와 반리라(리나 폰테인) 선교사는
시골 전도여행 중 일본 경찰이 숙소의 주인을 협박하여
더 이상 머무를 곳이 없어져, 전도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40년 6월에 이르자, 선교사들은
교회는 물론 비기독교인 마을에서 더는 전도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1940년 가을에는, 여자 성경학교인 전주의 아다 해밀턴 클락 성경학교와
광주의 이일학교 Neel Bible School 도 결국 문을 닫았다.
▲이 시기에 유화례의 선교 편지에는, 일제의 기독교 탄압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1939년 5월 23일 편지에는, 일제의 핍박으로 고통을 당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간절한 애정이 드러나 있다. 그는 이렇게 기도 부탁을 했다.
"이곳에 있는 교회는 여러분들의 기도만을 언제나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도우려고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잊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940년 6월 18일 서신에서 유화례는 그의 1월과 2월에도
여자 성경학교에서 가르쳤고, 광주 스테이션의 여자성경학원의 책임을 맡았는데
일본 경찰이 교인들의 위협했기 때문에, 예전만큼 많은 사람이 참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당시 일제 경찰의 정책은, 한국교인들과 선교사들의 접촉을 지속적으로 막는 것이었다.
한국 전역에서 일제는 사경회와 성경학원을 여는 것을 완전히 금지시키면서
이러한 정책이 기독교의 위해가 되지 않는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광주 스테이션에서는 성경반과 성경학원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라고 말했다.
유화례는 반리라 와 겪었던 일을 소개했다.
두 여성 선교사가 전도 여행 중에 여성 교인들의 우연히 만나
함께 비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데
일제 경찰이 이들을 따라다니며 사람들에게
'외국 여성들의 설교를 듣지 말라. 지금은 종교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보다 뛰어나다'라고 말하면서 방해했다.
유화례는 경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전도 활동을 했다.
1940년 3월에도, 시골로 일주일간 전도여행을 하면서 25명의 결신자를 얻었고,
이후 전도부인이 이들을 돌보며 매주 예배를 드리는 모임으로 발전했다.
또한 북장로교 스테이션 두 곳에서 전도 부인과 주일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부흥회를 일주일씩 인도하면서, 누구보다도 자신이 은혜를 받았고
참석한 사람들이 풍성한 영적인 축복을 누렸다고 전했다.
일제는 이곳에서도 목회자들에게 위협을 가하여
선교사들과 접촉하지 말라고 협박했지만, 집회는 중단되지 않고 진행되었다.
오전에 60명, 오후와 저녁에는 80~100명이 모였으며
주일에는 여러 교회에서 모인 250명의 여성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유화례는 '한국인들은 전보다 더 갈급해 하고 있지만,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공포가, 종종 하나님의 약속을 잊게 하지만,
주님은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위해 싸우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한국 교회를 향한 응원이면서, 또한 자신을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박해하는 일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더욱 신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유화례는, 박해받는 한국 교회에 대하여
'나의 마음은 그들을 도우려는 간절함으로 그들에게 향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 교인들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한국 교인보다 더 나을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유화례는 자신의 선교 편지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교회를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믿기로는, 사람들은 전에 없이 복음의 목말라 하고 있으며
또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제가 그들에게 가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 마음은 그들을 돕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940년 가을에 이르자, 선교병원만 유일하게 운영되는 남장로교 기관이었다.
교육선교는 이미 1937년에 중단되었고,
1940년 6월 무렵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선교병원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는 1940년 10월, 가족이나 사무실에 설치하는 작은 신사인 가미다나를
모든 병원에 환자와 직원에 의해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요구에 대응하여 선교부는, 미션스쿨 폐쇄의 원칙에 따라
선교병원도 폐쇄했다.
이로써 선교사들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여수 한센인 환자촌만이 유일한 운용기관으로 남았다.
일제의 미국에 대한 적대 수위가 높아지고, 전쟁의 위기가 감도는 상황에서
미국 총영사 마쉬 Gaylord Marsh 는 미국 시민 수송을 위해 특별 배편에 마련하면서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들에게 철수를 권고했다.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도 전문에 보내어
현 상황에서는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선교사들의 총 철수령을 승인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선교사 개인에게 맡겼다.
이미 모든 선교사업이 중단된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교회의 모든 활동은, 일제 국가주의 정책에 순응하도록 통제되어
남장로교 선교부는 선교의 원칙을 지키기 어려웠다.
또한 일제 당국의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선교사들의 존재가
그들과 관계하는 한국 교회에 오히려 방해와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선교부는 이 문제를 임시위원회에서 다루었다.
1940년 임시위원회 위원은
서국태 Donald Swicord, 위인사 Samuel Winn, 타요한 John Talmage,
두애란, 유화례, 타마자, 김아각, 조하파, 백미다, 우월순 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 중, 유화례는, 총영사의 권고를 따르지 말자고 주장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화례는 한국을 떠날지 말지 하나님께 여쭤보고
그러한 결정에 대하여 마음의 평화를 달라고 기도했고
한국에 계속 남아있기로 결정했을 때 마음의 평화가 임했으며,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다.
광주에서 오랫동안 가족처럼 지낸 도마리아도 함께 남기로 결정했다.
유화례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0년 미국 영사관에서 갑자기 소식이 왔다.
가능한 빠른 시일 안으로 본국의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모여 우리의 장래 문제를 의논했다.
70명~80명의 선교사들이 모두 조선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아직도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오랜 시간의 기도가 끝나고, 분명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광주에 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다."
마침내 남장로교 선교부는, 7명을 제외한 모든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1940년 11월 16일 인천 항에서 메리포사 S. S. Mariposa 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 배에 탄 219명의 미국인 대부분이 선교사와 자녀들이었고
남장로교 사람들은 50명이었다.
끝까지 남은 7명은 유화례와 도마리아를 포함하여
타마자 부부, 우월순 부부, 구례인 이었다.
우월순은 여수 한센인촌을 계속 운영할 수 있는 책임있는 단체에 넘기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남았고
타마자는 남장로교 법인 대표였으므로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인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남았다.
유화례와 도마리아는 오랫동안 섬겼던 고향 같은 나라를 떠날 수 없어서 남았다.
그러나 또다시 1941년 초에 철수령이 내려져
우월순 부부가 떠나면서 한센인 촌의 책임을
타마자 부부와 유화례와 도마리아가 맡게 되었다.
구례인 John C. Crane 도 본부의 강력한 철수 권고에 따라 뒤이어 떠났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타마자 부부, 유화례, 도마리아 네 사람만이 한국에 남았다.
한센인촌 운영과 감독을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광주에 타마자 부부와 유화례와 도마리아가
여수 한센인 촌을 교대로 방문하며 관리 책임을 담당했다.
타마자 John Van Neste Talmage 부부는,
원래 1941년 9월에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예정되었지만
일제는 선교의 모든 법적 권한을 넘기지 않으면 출국을 허락할 수 없다고 압박했고
타마자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타마자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2월 8일
간첩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었고,
계속하여 선교부 재산을 넘기라는 협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거부했다.
그래서 1942년 4월 9일에 갑자기 석방될 때까지
총 121일간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당시 상황에 대하여 유화례는 선교 편지와 자서전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선교부에서 유일하게 남은 4인은, 광주 스테이션에 머물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일주일간 교대로 여수 한센인 촌에 가서 업무를 보았다.
타마자가 일주일, 유화례와 도마리아가 함께 일주일,
이렇게 돌아가며 한센인촌 사역을 했다.
1941년 7월 14일자 선교편지에서도,
유화례는 1941년 3월 이래로 매달 한 주씩 도마리아와 함께 한센인촌에 머물며
행정업무와 한센인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유화례는 한센인들의 신앙을 지켜보면서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그들의 가슴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흔치 않은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센인들에 대한 유화례의 인상은 이러했다.
"전체적으로 그들의 마음은 복음에 열려 있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은 배척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복음은 장례의 삶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복음은 장래에 대한 줄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을 위한 용기와 평화와 기쁨을 주고 있다.
주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을 보시며
그분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딸로 보시며
내면의 모든 것이 영화로운 사람으로 보신다."
유화례와 도마리아는 한센인 촌에서 어린이들을 돌보았는데
그곳에서 한센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여자아이를 입양하여 광주로 데려와 길렀고
미션스쿨 기숙사에서 학생들의 밥을 지어주던
가난하지만 신앙의 신실한 보모를 고용하여 아이를 돌보게 했다.
남자아이도 입양하여 기르다가, 대구에 있는 고아원에 맡겼다.
광주를 중심으로 유화례는 시골 전도 활동을 계속했다.
여전도사와 함께 담양에 전도하러 갈 때, 경찰의 방해와 간섭을 예상하고
사전에 담양경찰서를 찾아가 10일간 그 지역에 머물며
비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전도 활동을 하겠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소재지 관할인 광주에서, 사전에 허락을 받지 않았기에
담양에서의 전도사업은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다.
유화례가 선교사업의 자유를 들어, 어디에서나 전도 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자,
그들은 신분증을 요구했고,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고 있던 유화례는, 여전도사를 보내 신분증을 가져오게 했다.
그 후 일본 경찰은, 한국인 여전도사는 일제 관할 아래 있는 사람이니
전도를 허락할 수 없다고 트집을 잡았고
전도사를 위협하며 경찰서 내에 가미다나에 절하라고 명령했다.
전도사가 거절하니 그를 구금하고,
이번에는 취조실에서 천황의 사진에 절하라고 위협을 가하였으나
그녀는 끝까지 거절했다.
유화례는 그녀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며, 경찰서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유화례는 경찰 책임자와 면담할 때,
그 책임자는 '일본 정부는 한국 백성들에 대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도 그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결국 경찰은, 유화례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여전도사를 감옥에 보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전도사를 풀어주었다.
일제의 간섭과 통제 속에서 간헐적으로 전도 활동을 하던 것도
1941년 6월 이후로는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면서 가로막혔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직전
광주 스테이션 밖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안받았으며
외출시에는 경찰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통보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교회와 동네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이동이 금지되었다.
한국인들은, 일본 경찰의 눈치를 보며 선교사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렸지만
조용히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다.
유화례는 일제의 눈의 피해 찾아오는 젊은이들과 방문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300명 이상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쳤다고 회고했다.
또한 한국 교인들은, 늦은 밤에 음식을 가지고 찾아와
광주에 남아있는 선교사들에게 공급해 주었다.
선교부 부지의 밭에 채소를 심어 가꾸었고
창고에는 통조림과 같은 저장 음식이 있었지만, 신선한 먹거리는 부족했다.
유화례는 '이들이 하나님이 홀로 남은 엘리야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어 먹였던
까마귀와 같은 존재들'이었다고 말하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비록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와 위협 속에서
드러내놓고 선교사들과 접촉할 수는 없었지만
감시망을 피하여 선교사들을 찾아와 자기들을 돌봐주는 한국 교인들과
선교사들은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일제의 압제로 고통받는 한국인과
고난 당하는 선교사들의 신앙적 정서적 유대와 공감대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유화례와 한국 교인들은
서로를 향한 신뢰와 우정을 주고 받으며, 믿음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일제의 선교사들에 대한 핍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타마자 John Van Neste Talmage 선교사의 투옥 사건이었다.
타마자는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혐의와 함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과 승리를 믿는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다.
타마자의 옥중 수기에 따르면 그의 혐의는 3가지였다.
첫째는, 경찰에 이미 허가받은 것이었지만, 권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레크레이션을 위한 사냥용이나,
야생 짐승들의 출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호신용으로
선교사들이 권총을 소지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둘째는, 라디오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수신용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통치에 방해가 되는 외국인들의 선전선동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여
라디오 소지를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라디오는, 수신만 가능하고, 무전기처럼 송출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셋째는 지도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도는 선교부의 재산에 표시한 것이었으나
당시에 지도 소유는 위법이었으므로, 당국의 신고해야 한다고 해서 등록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남장로교 법인 대표인 그로부터
선교부의 재산을 빼앗고자 협박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처음에는 자진 양도를 요구하다가
타마자의 왕강한 거부로 한 발 물러나
선교부 재산을 임대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일제는 임대라는 방식이, 남장로교 선교부 재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회유하며 이러한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타마자에게 서명을 강요했다.
일제가 임대로 재산을 확보하면 정당한 사용의 근거가 되어 그들에게 유리했고,
반대로 일제가 전시에 선교부의 재산을 동결하고 강탈하면
선교부가 전쟁 후에 재산을 되찾고 보상을 받는데 유리했다.
따라서 타마자는, 선교의 재산을 임대하는 서류에 서명하라는 강요를
완강히 거부했던 것이다.
타마자는 선교부 재산을, 선교부의 허락 없이 자기가 임의로 처분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광주 스테이션에 가택연금되어 있던
타마자 부인과 유화례, 도마리아를 호출하여 이들을 압박하면서
타마자를 볼모로 잡고, 재산권 처분의 동의하는 서명을 하라고 협박했다.
일제는 공포에 질린 여성 선교사들을 협박하면
쉽게 서명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 오해했다.
타마자는 이것이 그들의 전략적 실수였다고 말했다.
유화례는 이미 미션스쿨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문제와 관련하여
일제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
유화례는 일제가 선교부의 토지의 신사를 건립하거나
선교부 건물에 가미다나를 설치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코 서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제는이 주장에 반박할 수 없었다.
도마리아는 유화례의 대답에 동의를 표하면서
선교부의 재산 처분과 같은 중대한 사안은, 남아있는 4명이 결정할 수 없고
선교부의 모든 회원 과반수의 결정으로만 서명할 수 있다고 답했다.
타마자 부인도 두 여성 선교사 의견에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타마자는 법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법인 이사가 10명인데
과반수 동의로 승인되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경찰 책임자는, 나머지 여성 선교사들도 모두 감옥에 넣겠다고 흥분하면서
일본 정부의 호의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면
선교부의 재산은 관리되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이들 4명은, 잘못된 목적으로 사용되느니
차라리 허물어지는 것이 낫다고 대답했다.
이들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선교부의 목적과 원칙을 끝까지 지켜냈고
그 중심에는 옥고를 치른 타마자 뿐만 아니라
여성 선교사 유화례 와 도마리아, 타마자 부인의 신앙적 용기와 담대함이 있었다.
타마자는 3년~4년의 고된 노동이 부과되는 징역형을 설계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고, 구속되어 있다가 1942년 4월 9일 갑자기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 해 6월 1일에 남장로교 최후의 4인 선교사는 광주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된 것이다.
이들 일행은 일본 경찰의 호송으로 대전으로 가서
서울과 북쪽에서 내려온 선교사들과 합류하여 열차로 부산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페리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요코하마에서 다른 미국인들과 합류하여 일본 선적 아사마 마루를 타고
싱가포르에서 이탈리아 선적의 배로 옮겼다고
인도 양을 지나 동아프리카의 포르투갈 령 로렌스 마르키스,
즉 오늘날 모잠비크에서 내렸다.
거기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미국 뉴욕에 도착한 것이 1942년 8월 25일이었다.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었다.
이로써 유화례의 험난했던 일제강점기 한국 선교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