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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6

LNCK 2023. 12. 10. 08:33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 Part 6. 다시 한국으로 - 해방 후 선교지 복귀와 선교 활동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art 6 : 다시 한국으로 
해방 후 선교지 복귀와 선교활동                          지난 호 보기 

일제(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추방당하여 미국에 도착한 유화례는 
먼저 귀국한 남장로교 한국선교사들과 해외 위원회 풀턴 총무의 환영을 받았다. 

유화례 와 동료 선교사들은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지키시고 무사히 돌아오게 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유화례는 뉴욕주 쿠퍼스타운 고향집에 머물면서,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간호하며 
지친 몸과 마음의 휴식을 가졌다. 
병약한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어서 기뻤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여겼다. 

이후 남장로교 해외선교 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거의 1년 동안 지역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 보고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언제 전쟁이 끝날지, 
그리고 언제 다시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유화례는 늘 한국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유화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직업을 찾아 일을 해야 했다. 
남장로교 해외선교 위원회가 미국으로 철수한 선교사들의 생활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 동남부 노스캐롤라이나 오렌지카운티의 5개의 공립학교를 
순회하면서 성경을 가르쳤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보수적인 남부지역에서는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고 
공립학교와 지역교회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또한 힐스보로 Hillsborough 지역에서 유화례는 
그를 후원하는 신앙 공동체와 깊은 교제를 나누었고 
국립중고등학교에서 성경 공부반을 지도하는 일을 하면서 생활했다. 
이때는 교회 후원으로 사례비를 받았다.

이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이후 유화례가 한국에 복귀하여 
선교를 마무리할 때까지 그의 선교활동을 후원한 그룹이 되었다. 

유화례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으며, 그의 마음은 늘 한국과 한국 교회에 있었다. 

또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5개 공립학교를 돌아다니며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한국의 소박한 농촌을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세 들어 살고 있는 방에 돌아와 혼자 있으면, 한국에서의 생활만이 아른거렸다. 
그러던 중 유화례는 라디오를 통해 일제의 패전 소식을 전해 들었다. 

또한 신문에서 한국의 해방 소식을 접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유화례는 본부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1946년에 남장로교 해외 선교위원회에 한국 복귀에 대하여 문의했지만 
아직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의 기다림은 1947년 10월까지 이어졌다. 

▲1945.08.15. 일제의 패전 이후,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는   
선교사들의 복귀와 조선 선교의 재건을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한국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위원들은 선교사들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추천받아 임명했다. 

한국 조사위원회는 인돈 William Linton 을 위원장으로 하여 
구례인 John Crane, 김아각 Daniel Cumming, 
조하파 Joseph Hopper, 우월순 Robert Wilson 으로 구성되었다. 

조사위원회 위원들은 선발대로서 한국에 들어가 전후 상황을 파악하고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복귀하는데 필요한 사전 준비를 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7년 2월 21~22일 순천 우월순 선교사 사택에서 열린 조사위원회 공식회의에는 
조사위원 5명과 부인 선교사들, 
그리고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 풀턴 총무와 엘리어트 박사 William Elliott 도 참석했다.

이 회의는, 그때까지 조사위원들이 활동하며 정리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복음전도, 교육선교, 의료선교의 방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며 
남장로교의 선교사역을 재개하기 위한 중요한 결정을 했다. 

먼저 전도와 관련해서는, 한국교회 총회나 노회 구성원으로 참여하지 않고 
비공식적 협력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한국교회의 자립을 키워주는 조치. 선교사들이 점차적으로 손을 뗌)

교육 선교와 관련하여, 선교회가 학교를 직접 다시 열지는 않고, 
지역 노회들이 현재 설립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지원하고 협력하기로 결의했다. 

다만 재정이 허락된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이나 학교 운영에 관한 조언을 하면서 
지원하기로 했고, 선교사들이 당분간 임시 교장으로서 
학교에서 일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의료선교와 관련하여, 스테이션에 선교회 병원을 다시 열기로 하고 
중앙의료원을 설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사역기간을 부부 선교사는 5년, 독신 선교사는 4년으로 정하였고 
1947년에 한국 선교 현장으로 복귀해야 하는 선교사들의 명단을 
본부에 요청하기로 했다.

이 명단에, 광주의 독신 여성 선교사 구애라, 도마리아, 유화례, 변마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스테이션을 재개하면서, 군산은 제외되었고 
한국 선교부 재건 계획과 더불어 새로운 프로젝트로, 대학 설립계획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선교사 복귀계획에 따라 마침내, 유화례는 한국에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한국에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유화례는 이미 하나님께서 부르신 딸이라는 생각으로 떠나기로 결단했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고 찾아온 유화례에게,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너를 다시 볼지 모르겠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유화례는 아버지가 1950년 5월에 결국 사망하셨다는 부고를, 한국에서 들었다. 
그날이 아버지와 유화례의 마지막 만남이었던 것이다. 

유화례의 한국을 향한 사명감은, 그만큼 엄숙하고 진지하고 결연한 것이었다. 
한국으로 복귀하기 위한 선교사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하기 전까지 광주에 남아 
생사 고락을 함께한 도마리아를 다시 만나서 오랜 시간 회포를 풀었다. 

유화례와 선교사들이 몸을 실은 한국으로 가는 배편은 
미국의 수송선 에드머렐 메이오 Admiral Mayo 호였다.

이 배에는 군인들과 군인 가족들, 그리고 19명의 선교사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배는 1947년 10월 11일에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항하여 
10월 22일 저녁 중간 기착지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1942년 6월에 유화례가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송환될 때도 
부산에서 요코하마로 이송되어, 그곳으로부터 출발했는데 

1947년 10월에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미군 소송선을 타고 도착한 요코하마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미군 군악대가 항구에서 미군의 입항을 맞이했고 
항구에는 미군 수송선들이 속속 입항하고 있었으며 
여기저기에 지프와 미군 트럭, 군인들이 가득했다. 

드넓은 지역을 미군이 가득 점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곳이 일본이 맞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세상은 변해 있었다. 

일본에 도착하여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의 참상을 지켜보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온 세상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온 세상에 치안을 유지할 필요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상호 신뢰 속에서 함께 살아갈 날이 올 것이다.. 라는 소망을 가졌다. 

▲요코하마에서 다시 출항하여 인천에 도착한 것은 10월 28일이었고, 
서울에 며칠 머물고 광주로 돌아온 것은 1947년 10월 31일 밤이었다. 

선교사들이 서울에 도착하자 미군정은 호의를 베풀어 
그들이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호텔의 방을 내어주고 음식을 제공했다. 

이후 광주에 도착하니, 송정역에는 타마자 선교사와 노라복 선교사가 
차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마리아와 유화례는 이들의 환대를 받으며 광주 스테이션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마중과 환대는, 추방당했던 선교사들의 복귀와 
무너졌던 한국 선교의 재개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반갑기도 했거니와 감사함이 넘쳐났다. 
유화례는 그들에게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다. 

유화례가 광주에 복귀하여 무엇보다 감사하게 여겼던 것은 
그가 온 힘을 다해 헌신하였던 수피아 여학교의 발전상이었다. 

신사참배 강요로 폐교했던 수피아 여학교는, 해방을 맞으면서 
1945년 12월 5일에 다시 개교했다. 

1945년 9월 15일에 수피아 동창회가 금동제일교회에 모여 
수피아 여학교의 복교를 결의한 이후 
동문회장 조아라를 비롯하여 이옥술, 노육례, 이인성 등의 동문들이 
재개교를 위한 모금 활동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미군정의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개교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수피아 여학교의 교감을 역임한 김필례의 남편인 최영욱 박사가 
전남도지사로 부임하면서, 수피아 여학교의 개교에 많은 지원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학교는 12월 5일에 재개교하였고, 김필례가 교장을 맡았다. 

(*김필례 1891~1983,

1907년 미국북장로교 선교사가 설립한 서울 연동여학교 지금의 정신여중고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해 1913년 일본 동경여자학원 중등부를, 1916년에는 고등부를 졸업했다. 
1926년 미국 조지아주 액네스스칼 여자대학에서 학사학위를, 
1927년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16∼1919년 정신여자중학교 교사, 1922년 교감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김활란과 함께 중국 북경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학생대회(WSCF)에 참석하였다. 
6월에는 하령회를 조직, 김활란과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만든 뒤 
총무가 되어 농촌운동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에는 미국 프린스턴에서 개최된 WSCF에 참석하였다.

그후 1937년까지 광주시 수피아여자중학교 교감을 지냈으며, 
1928년 인도에서 개최된 WSCF에 참석하였다. 또한 각종 토론회의 강사로 활약해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와 YWCA 활동에 활력소 구실을 하였다.

1945년 광복과 동시에 수피아여자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1947년 정신여자중학교 교장이 되었다. 
1950년 미국북장로교 여신도4차대회에 참석했으며, 
1962년 정신학원 이사장, 그 뒤 명예교장·명예이사장을 지냈다.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다.)

수피아의 재개교에는 동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는 남장로교의 해방 이후 교육선교 원칙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즉 선교부가 설립한 학교들은 직접 재개교 하지 않고 
한국교회가 학교를 운영하는 것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유화례가 한국으로 복귀할 당시에 
수피아의 교장은 백영흠 목사가 맡고 있었다. 

김필례 교장이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1947년 6월 12일에 그의 모교인 서울의 정신여중 교장으로 초빙되면서 
후임으로 백영흠 목사가 수피아 여학교의 교장을 맡게 된 것이다. 

유화례는 광주 선교지에 복귀하여, 수피아 여학교가 백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300여 명의 학생들의 학교로 성장하고 있는 것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특히 기독교 정신을 굳게 지키며, 학교의 설립 목적에 충실하게 
학생들을 교육하는 모습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기독교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앞장서서 폐교를 단행했던 유화례로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신앙의 정신을 지켜나가는 수피아 여학교의 노력을 보는 것은, 
큰 감격이고 기쁨이었다. 

「광주의 기독교인 친구들이 수행하고 있는 대범한 방식에 대한 보고들이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현재 수피아 여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는 훌륭한 목사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에, 마음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헤어졌습니다. 

그분 외에 그 누구도 이미 300명의 달하는 학교의 학생들을 위한 
더 훌륭한 목적의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극심한 재정적인 문제들의 직면하면서도, 그분은 한결같이 비기독교인들로부터 
기금을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식으로건 그들이 제공한 기금에 대한 의무감으로 
스스로를 묶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일본의 감옥에서 고초를 당한 우리 친구들 중 한 분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바울의 고백의 진리를 알고, 
학생들이 그것을 알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광주에서 유화례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감사했다. 

당시 일제를 내몰고 한국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정부의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던 미군들이 바라보는 한국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유화례는 그들 대부분이 바라보았던 한국의 모습이 아니라 
더 좋은 측면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그들과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선교사들이 속해 있고 
또한 그들의 섬기는 그리스도를 
주한 미군들의 배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유화례는 뼛속까지 "전도자"였다.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모든 상황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었고 사명이었다. 

유화례가 한국을 아름답고 귀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의 말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유화례가 광주 선교지에 복귀했을 때, 전도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주변의 모든 마을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을만큼 많은 기회가 열려 있었으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유화례는 준비가 되는 대로 광주에 여자성경학교와 남자성경학교에서 
성경반을 인도하기로 하고, 
타마자 선교사와 지프를 타고 작은 마을에 돌아다니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주일학교를 열었다. 

유화례는 그가 후원하는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미국 교회에 물품 원조를 부탁했고 
헌 옷, 헌 신발, 면 제품, 스타킹, 솜, 바늘과 실, 세탁용 비누, 옷핀 등을 목록에 포함시켰다. 

그러면서 물질 후원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영적 발전과 영혼 구원을 위한 중보기도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유화례와 선교사들이, 일제로부터 수탈을 당해 피폐해진 한국사회의 열악한 여건 속에서,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미국 교회의 원조를 받아 구호 사업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를 비롯한 해외 단체의 구호활동과 원조사업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통로와 매개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활동은 한국 전쟁 전후로 더욱 확장되었다.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는, 국제 구호 사업의 통로가 되면서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활짝 열린 전도의 기회를 활용하여, 유화례는 적극적으로 전도 활동을 했는데 
특히 독신 여성 선교사들과 함께 시골 순회 전도를 했다. 

유화례는 마태복음 5: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구절이 
한국교회를 지칭한다고 말하면서 
한국 교인들이 어디에서든지 복음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복을 누리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1948년 2월 20일 서신에서 유화례는 
작은 마을에서 5일간 전도 활동을 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하루 일과는 오전 5:30분에 새벽 기도회, 
10:30분~12:30분까지 성경공부, 
오후에 비기독교인들을 찾아가 전도, 
저녁에 전도 집회 후에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 들려줌 

이러한 시골 전도 활동은, 해방 이전에도 유화례가 일제의 방해와 위협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행했던 전도 활동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유화례와 여성 선교사들의 시골 전도여행은 가슴 벅찬 일이기도 했지만, 
어려운 환경을 견뎌야 하는 힘든 여정이기도 했다. 

마을에 들어가면 보통은 교인의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지냈다. 
일어서면 천장에 머리가 닿고, 두 사람이 눕기에도 비좁은 방이었다. 

당연히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상하수도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특히 화장실이 문제였다. 위생적으로도 문제가 많았지만 
무엇보다 악취가 큰 고통이었다. 

변소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우물이 있었기에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기 어려웠으며 
씻거나 목욕을 할 별도의 공간이 없어 불편을 겪었다. 

선교사들이 전도여행 중 쉽게 이질에 걸렸던 주요한 이유가 
깨끗하지 못한 식수와 비위생적 환경 때문이었다. 

전도 여행 중 먹는 음식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현지에서 얻을 수 있는 계란을 주로 날것으로 먹었다. 
프라이나 스크램블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밥과 국이 주식이었고, 김치를 반찬으로 곁들여 먹었다. 
일부 선교사들은, 가난한 집일수록 김치가 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 반찬을 덜 먹게 하려는 이유에서가 아닌가 싶다. 

선교사들이 전도 여행 중에 그나마 누렸던 호사는 
커피를 끓여 마실 수 있었던 것이었다. 

깨끗한 물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보통 보리차를 끓여 마셨고 
선교사들은 전도 여행 중에 마시기 위해서, 물에 타서 마시는 커피를 휴대했다. 

잠자리에서 출몰하는 벼룩 또한 고통이었다. 
시골 전도여행은 이러한 불편을 감수하고 5일~10일간 이루어지는 여정이었다. 

보통 선교사들은 부유한 교인의 집에서는 머물지 않았는데 
일부러 그러한 선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선교사들이 부유한 교인의 집에서 머물렀다면 
상대적으로 좀 더 편안했겠지만 
그것이 가난한 교인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지는 자명하다. 

어쩌면 선교사들이 전도여행 중에 겪는 불편은 
평범하고 가난한 한국인들은 매일 겪는 일상이었다. 

전도여행은 이렇게 한국인 같이 되어가는, 
한국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선교사로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그저 전도 대상들에게 전하고 가르치기만 해서는 안되는 성육신의 관계이다. 

▲유화례는 이러한 환경의 불편을 따로 호소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한국의 농촌을 아름답다고.. 
사람들은 따뜻하고 순박하고 열정적이라고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것이 결코 가식이나 위선은 아니었다.고 본다. 
1948년 5월 10일 서신에서 유화례는 
그해 4월에 여수의 한센인 촌(애양원)의 성경학원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한 내용을 언급했다. 
*이 때는 손양원 목사님이 계셨던 시절, (1950년에 순교)

한센인 촌은 남장로교 선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선교의 결정체였다. 
(*백미 : 흰 눈썹,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일)

그곳에 200여 명의 한센인들과 성경 공부를 하면서 
150명의 성경반에서는 구약 역사를 가르치고 
25명의 소그룹 반에서는 요한복음과 여호수아서를 가르쳤다. 

한센인들의 성경공부 열기는 매우 컸고 
유화례는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벅찬 기쁨을 느꼈다. 

한센인 촌은 유화례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 전까지 돌보았던 남장로교 선교부의 최후의 운영기관이었고,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치면서 
한센인들이 병으로 망가진 얼굴과 몸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던 곳이었다. 

또한 그곳은 해방 이후 남장로교가 우월순 선교사를 통해 제일 먼저 재개한 운영기관이었다. 

유화례는 선교지에 다시 복귀하여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큰 은혜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편지에서 유화례는, 기독교 세계봉사회를 통해 도착한 많은 옷가지들을 
한센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들은 헌물에 너무나 감사했다고 보고했다. 

기독교 세계봉사회 Church World Service 는 미국의 여러 교단이 참여하여 
1946년에 창립된 국제 구호 및 재난 지원단체로 
한국에서 특히 한국전쟁에 구호활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돌보고 지원하는데 앞장섰던 것은, 교회가 사회에 뿌리내리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밀착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화례는 구호사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선교활동을 하는 과정 속에서 만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구호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인데, 
이것이 이후 한국이 전쟁에 참화 속에 철저히 무너졌을 때 
큰 물줄기가 되어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살리는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부작용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자립하는 선교정책이 특징이었는데 

(*19세기 장로교 선교사였던 존 네비우스가 중국에서 자치, 자양, 자전의
삼자원칙을 근간으로 '네비우스 선교방식'을 소개했는데, 
당시 한국의 선교사들도 이 방식을 따랐다)

한국전쟁 전후로 외국의 구호와 원조를 받으면서 
후원과 도움에 익숙해지다 못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게 되었고
이는 이전의 자립과 헌신의 전통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가 기관 유지와 사무실 운영에 공을 들이면서 
오히려 선교하는 본연의 노력과 열정을 잃어버렸다는 쓴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유화례는 이후에 한국교회가 제도화되고, 교권 다툼을 하며 분열할 때
이 문제를 지적한다. 

1948년 4월에는 남장로교 한센인 선교 40주년 기념식이 있었고 
선교부는 이 일을 주관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오랫동안 한센인 촌에서 의료와 행정의 책임을 맡으며 
한센인 사역에 헌신한 우월순 박사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월순은 선교사 은퇴를 하면서
이 감격스러운 기념 예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화례는, '그가 자리에 있었더라면 한센인들의 기쁨이 더욱 컸을 것'이라고 말하며 아쉬워했다. 
(*광주 양림동에 가면, 우월순 선교사 사택 및 선교사 묘역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유화례는 지치지 않고 전도 활동을 했다. 
여성들의 위한 성경반, 남성들의 위한 성경학교, 
시골지역에 있는 교인들과 교회들을 위한 전도의 사명을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볼거리에 감염되어 '10일 성경반'을 인도하다가 
끝내지 못하고 하루 전에 마치고 몇 주 요양을 했다. (*볼거리 : 목 주위의 근육이 뭉쳐지는 병)

그러나 몸이 회복되자마자 또다시 7월 중순에는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와 
남자성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유화례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자신에게 큰 기쁨을 준다고 말하면서 
미국 교회에 동일한 열정을 촉구했다. 특히 유화례는 당시 미국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한 판결소식을 듣고 이를 강력하게 성토했다. 

 

「우리를 침울하게 만든 한 가지는 미국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반대한 결정의 소식을, 고국으로부터들은 것입니다. 
정말로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나태하게 앉아 있으면서 밖으로 뛰어나가지 않고 
그러한 결정에 대하여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나라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그 기초를, 우리 자신에게서 완전히 떼어 놓으려는 것입니까?」 

1948년 5월 10일은 대한민국에 총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유화례는 위의 편지에서 대한민국 총 선거를 언급하면서 
나태한 미국의 그리스도인과, 열정적인 한국의 그리스도인을 대조시켰다. 

'한국의 교인들은, 주일에 총선거를 진행하려는 유엔 당국에 항의하여 
날짜를 변경하도록 힘을 모았고, 
사회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나타내었다'고 말하며 미국 교회를 꼬집었다. 

한국의 선교지에서 유화례는, 미국 교회를 각성시키고 있었다. 
「오늘은 한국의 총 선거일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얼마나 많은 분이 이달 9일에서 10일로 선거일이 바뀐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유엔은 날짜 변경을 공지하였는데, 어제 있었던 부분개기일식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은 무엇보다도 삼팔선 이남의 그리스도인들이 
총선거를 주일에 하는 것을 반대한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당국은 이에 대하여, 선거일 변경을 요청하는 10만명의 서명이 있지 않으면 
변경할 수 없다고 답변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즉각적으로 응답하였고, 그래서 선거일이 변경되었지만, 
그 이유는 '개기일식 때문'이라고 공지되었습니다.」 

▲1948년 5월 27일~ 6월 4일까지 전주의 인돈 선교사 사택에서 개최된 
남장로교 제2회 (태평양전쟁) 전후 연례회의에서는 
'대학 설립 문제'가 주요한 안건으로 논의되었다.

이 회의에는 이미 남장로교 대학설립 계획을 알고서 
한국교회의 노회 대표들이 참석하여 
각 노회지역에 대학을 설립해 줄 것을 경쟁적으로 요청했다.

이 회의에서 교육위원회는 대학 설립과 관련한 보고서를 아래와 같이 제출했다. 
「기독교 지도자, 교사, 미래의 목사를 양성하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한국의 서남부에 인문대학을 설립하도록 제안한다. 

노라복 박사, 인돈, 조하파 박사, 구바울 박사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하여 
위의 청원을 실행하도록 제안한다. 

다섯 노회에서 파송한 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당분간 계약의 감독권을 선교부가 갖도록 하지만 
관련된 노회를 대표하는 위원회와 협의하도록 실행위원회에 지침을 줄 것을 제안한다. 
대학의 위치 문제는 이번 회기에 선교회가 정하도록 제안한다.」

이 회의에서 남장로교는 선교부는, 교육위원회에 보고에 따라 
대학 설립을 추진할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명칭을 '대학위원회'로 정했다. 

대학 부지는 우선적으로 광주에서 찾아보고 
여의치 않으면 전주에 부지를 마련하여 대학을 설립하기로 했다. 

또한 대학위원회의 남장로교 교육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왔던 김아각 박사를 추가하고, 
안식년 중이었던 김아각 박사가 돌아올 때까지 
유화례가 대학위원회에 참여하도록 결의하였다. 

이로써 유화례는 1948년 6월, 남장로교 선교부가 추진하는 
대학 설립 계획을 이끌어 나갈 대학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는 김아각 박사가 복귀할 때까지 맡는 임시위원이었지만 
이후 1954년에 대학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때 
유화례는 광주 스테이션을 대표하는 대학위원회 위원으로 이름을 올린다. 
유화례가 남장로교 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영향력과 위치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유화례는 남장로교 선교부의 교육선교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서신을 보면, 대학위원회 활동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가 교육관련 사업을 위해 여러 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최선의 다했지만, 
그의 관심과 열정은 주로 전도활동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본업은 전도다'라는 생각이 유화례를 지배했다. 

▲1948년 9월 1일자 선교 편지에서 유화례는 
남장로교 선교지역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심각해졌다는 것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는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날 비극의 불길한 전조였다. 

유화례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다른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부정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 장로교는 남북전쟁으로 남장로교, 북장로교로 분리되었다가 1983년 통합된다.
재한 선교사들의 '지역분배' 정책에 의해, 호남은 남장로교가 맡아서 선교했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 선교사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우려와 비판은 
공산주의의 교회에 대한 핍박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박해로 인한 것이었다. 

그것은 교회를 핍박하는 일제에 대한 비판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가 교회를 박해하고,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고, 교인들을 억압하였기 때문에 
이에 굴복하지 않고 교회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선교사들은 분투했다. 

마찬가지로 남한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며 
교회와 교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신앙 활동을 방해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유화례는 이에 대하여 경계와 우려, 비판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례의 강경한 입장은, 
한국전쟁에서 교인들이 학살을 당하고 교회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반공이 단순한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감정의 문제가 된 계기는 
결정적으로 한국전쟁이었다.  *625 

유화례는 한마디로 반공주의의 투사였으며 
이러한 그의 의지와 신념은 계속 강화되었다. 

한편 유화례는, 공산주의자들을 향하여서도 영혼구원의 열정을 놓치지 않았다. 
전쟁 포로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들을 도우려고 애썼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좀 더 상술하고자 한다. 

유화례의 1948년 9월 서신은, 제주에서 4.3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쓴 것이었다. 
4.3 사건은 남한사회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무장봉기와 
이들을 토벌하려는 경찰과 군대, 
그리고 '서북청년단'으로 잘 알려진 우익단체의 무력충돌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 시민들이 좌익 혹은 동조자로 몰려 무참히 학살된 사건이었다. 

사태의 시작은 1947년 3월 1일에 삼일절 기념 대회에 운집한 시민들을 향해서 
경찰이 총을 발사하여 사상자가 나오자
이를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이 선동을 주도한 것이었다. 

이에 경찰과 당국이 강경하게 대응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군경의 무력 충돌이 이어졌다. 

5월 10일 총 선거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여 
진압군 병력을 증강하여 강도 높은 토벌 작전을 폈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와 피해자의 수가 급증했다. 

공산주의 무장대와 시민들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행해진 테러와 폭력, 학살은 그 도를 넘었다. 

유화례는 서신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으로 
제주에서 예정된 8월의 전도 활동이 무기한 연기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지 못했던 선교사로서 
제주에서 일어난 4.3 사건을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무장 봉기'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에서 일어난 국가폭력 사태가, 공산주의자들의 무장 테러에 대한 진압이었다는 
일방적인 정보 전달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화례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진 상황에서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느꼈다. 

「공산주의 선전과 활동 그리고 많은 한국인들이 
최근에 얻은 독립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이곳의 상황을 크게 불안하게 하는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한국의 분쟁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은 끝도 없습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때문에, 낮 동안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긴급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날이 얼마나 빨리 올 것인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지혜로만 
장차 그 영혼이 밝게 빛나게 될 (지금의) 무지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등불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꾼이 심히 부족합니다. 
주님이 추수하실 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선교 현장에 있는 여러분들의 대표자들을 
기도로 계속 후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은 해방 후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황 속에 있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 한국사회는 폐허처럼 분열되어 있었고 
사람들간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좌표와 목표가 너무도 달랐으며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의 국제정세도 매우 복잡하게 돌아갔다. 

결정적으로 우익과 좌익간 이념대립이 극심했다. 
테러와 내전과 공방이 끊이지 않았다. 

이처럼 해방 이후, 안정적인 정부와 정의로운 국가체제를 이루어 
민주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정은, 너무나 멀고 험난했다. 
단 한 번도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한국인과 한국사회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속에서 사회의 혼란은 깊어졌고, 이념대림은 한국사회의 압축된 갈등을 폭발시킬
가공할 위력을 지녔다.

유화례는 '일할 수 없는 밤이 언제 올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날은 생각보다 너무나 빨리 갑자기 다가왔다.                
밤이 오기 전에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유화례를 사로잡았다. 

▲유화례는 위의 서신에서 동료 여성 선교사들인 반리라 구례인 선교사와 
여름휴가 때 군산의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언급했다.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 제자가,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군산의 고아원과 깊은 관계를 맺고 
이곳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있었다. 

그는 여름휴가 때 쉬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성경도 가르칠 겸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군산의 고아원을 방문했다. 

유화례와 선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고 찬송가도 가르쳐 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날에는 55명의 아이들 중 가장 어린 8명이 
마치 튼튼한 군인들처럼 앞에 서서 우렁차게 우리말로 배운 찬송 
"군사와 같이 선한 싸움을 싸우라"를 불렀다. 

아이들은 찬송을 마치고, 전에 배웠던 성경 구절을 암송했다. 
유화례는 이것이, 성경을 배운 것에 대하여 아이들이 감사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고 (편지에) 말했다. 

열심히 가르친 성경을 줄줄이 암송하고 
즐겁게 가르친 찬송을 힘차게 부르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고 보람이 있었을까? 
그것으로써 그간의 모든 수고에 보답이 되었을 것이다.

이 아이들의 대부분은 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왔었지만 
모두 고아원에서 신앙의 부모를 만나서 사랑과 돌봄을 받으며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 반란 사건 때,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공산주의를 따르는 학생에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1948년 11월 서신에서 유화례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이렇게 알렸다. 
「여러분은 우리 한국 선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소요 사태에 대하여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의 민주정부가 출범한 이후 곧바로 시작되었습니다. 

끔찍한 잔학 행위들이 저질러졌고, 많은 가족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한 마을에서만 25명 이상의 기독교 가정이 불에 탔습니다. 

그러나 한센인 촌의 목사(손양원)와 그의 두 아들의 증언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전율과 감동을 끼쳤습니다. 

그들과 같은 학교 학생들이, 공산주의 교사들에 의해 선동되어
이 크리스천 학생들을 죽였습니다. 

한 학생이 그들 중 형(손동인)을 살해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는 죽어가면서도 그를 살해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은 구세주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에게도 주님을 믿으라고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이때 동생(손동신)이 그의 형을 보호하려고 달려와서 
자기 형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를 대신 죽여달라고 외쳤습니다. 

이들 형제는 예수의 참된 증인들로 죽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손양원 목사)는 이미 감옥에 갇혀서 사형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의 집으로 가서 
그의 부모를 위로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심지어 경찰에 그 학생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였고 
자신의 돌보면서 그를 참된 믿음, 
곧 죽음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믿음으로 양육하겠다고 간청하였습니다. 

경찰은 이러한 요청을 처음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자녀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증언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련으로 한국교회는 정결하게 되고 강건해져서 
그들의 위대한 머리가 되시는 분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유화례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도처에 활짝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하여 
더욱 힘써 전도 활동을 해나가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사실 이 서신을 보면, 공산주의의 위협과 테러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시골지역 전도활동을 하면서 유화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탐욕과 추악함과 극도로 냉담한 절망에 가득한 현실에 부딪혔다. 

그의 서신 속에 절망과 탄식이 진하게 묻어날만큼.. 깊은 실망감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믿음으로 어려움을 돌파해 나갔고 
특히 손양원 목사와 그의 두 아들 손동인, 손동신이 보여준 위대한 신앙의 증언이 
커다란 감동과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들의 순교와 증언은, 실의에 가득 차 있었던 유화례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고 
강력한 선교의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1948년 10월 14일 유화례는 다시 수피아 여학교의 교장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학교 일을 하느라 바빠졌다.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도 
유화례는 여전히 시골로 전도여행을 다니며 교회를 돌보고 싶은 열정이 가득했다. 
유화례는 "나는 시골 교회들을 열망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두 달 동안은 여러 차례 초청을 거절해야 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유화례는 학교가 방학을 할 때마다 부지런히 전도 활동을 하면서 
전도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1949년 3월 1일에 개학을 하기 전까지 겨울방학 동안 
유화례는 '10일 성경반'에서 성경을 가르쳤고 
교회에서 초청을 받아 전도 집회를 열었으며 
시골의 여러 교회들의 방문하며 전도 활동을 했다. 

특히 유화례는 성경반을 통해, 여성들이 교회 지도자로 훈련받아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을 하는 모습을 잘 스케치했다. 

1949년 3월의 서신에서 유화례는 광주에서 열린 노회에 참석했을 때, 
성경반을 마치고 노회에 참여한 많은 여성들의 보며, 큰 감동을 느꼈던 일을 소개했다.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지도자로 세우는 일은,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었다. 

「약 2주 전에 나는 광주의 노회에 참석하였고 
28개 교회들의 보고서를 즐겁게 경청하였습니다. 
특별히 흥미로웠던 것은, 많은 여성들이 방문자로 참석하였던 부분이었습니다. 

28개 이상의 교회에서 300명은 충분히 되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그날 밤에 종강한 '10일 성경반'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남성과 여성들이었습니다. 

노회 모임이 성경반이 진행되는 동안 열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시골 교회에서 온 많은 여성들이 들어와 경청하면서 
그들의 작은 교회에서 앞으로 일해나가는데 자극을 받을 것입니다. 

이미 여성들은, 이 지역의 섬에서 국내 전도사역을 시작했고 
그곳에 교회 하나를 건립하고 있습니다.」 

유화례는 위의 서신에서, 광주에 있는 한 학교에서 
100명이 넘는 학생이 공산주의 성향에 대하여 엄격한 조사를 받기 위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국의 불안한 정체 속에서도, 수피아 여학교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운용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특히 서울의 교육부 담당자가 내려와 
호남 지역의 중학교 교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수피아 여학교를 칭찬하며 
학교의 청결상태와 질서에 있어서 다른 학교들의 모범이 된다고 언급하여 
크게 고무되었다고 전했다. 

특히 교육부 공무원은 유화례에게 직접 
'한국의 미래의 희망은 기독교 교육에 있다'라며 그의 확신을 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 유화례는, '교회와 신도들의 잘못이 있을지라도 
비기독교인들 앞에서 기독교의 증언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기뻐했다. 

▲이즈음 독신 여성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숙소에 도둑이 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화례, 도마리아, 구애라가 2층에서 자고 있을 때 
유화례가 아래층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내려가 보니 
도둑이 커튼을 뜯고 있었다.

그것으로 자기가 훔친 물건을 가져갈 꾸러미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유화례가 소리를 치자, 구애라가 촛불을 들고 내려왔다. 
도마리아는 이 야단법석 속에도 곯아떨어져 있었다. 

구애라가 내려왔을 때, 유화례는 도망가는 도둑을 뒤쫓고 있었고 
구애라가 도둑을 코너로 몰았다. 

구애라가 도둑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촛불을 갖다 대었더니 
그는 촛불을 입으로 불어서 껐다. 
도둑은 그가 들어왔던 곳으로 거의 빠져나갈 뻔 했으나 
용감한 여성들의 끈질긴 추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도둑은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유화례가 도둑을 도망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심지어 경찰은, 여성들에게 붙잡혀버리고만 도둑을 야단쳤다고 한다.

이 사건은 결국 도둑이 두 여성 선교사들에 의해 제압되어 붙잡힌 해프닝으로 끝났다. 
당시 궁핍했던 한국에는 도둑이 들끓었고 
선교사들도 종종 도둑질의 대상이 되었다. 

전주의 인돈과 위인사 선교사도 집에 들어온 도둑을 잡으려고 했지만 
도둑이 붙잡힌 겉옷을 벗고 도망가는 바람에 결국 놓치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여성 선교사들은 용감하게 도둑을 붙잡았지만, 
남성 선교사들은 도둑을 놓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오랫동안 농담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1949년 6월 27일자 편지에서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가 새로운 기숙사 건물을 건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숙사 건물은, 남장로교 여성들이 생일 헌금을 모아 전달한 것과 
재한 선교부의 재건 자금을 활용하여 건립하는 중이었다. 

수피아 여학교는 건물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선교사들이 떠나고 난 후 
낙후된 학교 시설도 개선하여 새롭게 꾸미고 있었다.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가 훌륭한 졸업생들을 배출하여 
그들이 교회와 교육과 경제 방면에서 신뢰받는 자리를 차지하고 
한국사회와 교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러한 성과를 보면서 유화례는 '기독교 학교들의 가치를 새삼 깨닫는다'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 학교들은, 선교회의 지원금이 없이는 운용될 수 없다고 언급하며 
더 훌륭한 교사를 확보하고, 더 많은 여학생들이 적은 학비를 내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후원을 요청했다. 

유화례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과 여러 가지로 피폐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교회의 복음 전도자들이, 무너진 교회를 돌보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목자 없는 양떼 같은 교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전도자들이 있는 한 
한국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선교활동은 실패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일제 치하에서 억압을 받으며 많은 지도자를 잃어버린 한국교회였지만 
기독교 학교들을 통해 교회의 일꾼들을 길러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희망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은 계속 전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한 장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한국에서 선교활동은 과연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분은 어제 5~6마일을 걸어서, 지도자가 없는 교회에 기도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이 지역은 최근 공산주의자들의 습격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다시 오늘 3마일을 더 가서, 다른 마을에 있는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 일은 사례를 받지 않고, 자기를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은 청지기로 인식하며 
자기 시간을 들여 다른 이를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이곳 동복 지역에서 보고 있는 것을 보신다면 
말씀을 전하는 일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요? 

이곳에 있는 교회는 몇 해 동안 사실상 쓰러져 있던 곳입니다. 
새로운 몇 사람의 신자들이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를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이 오늘 내(유화례)게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로 드리기를 배우라'는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을 알고 
얼마나 흥분되었는지 말하였습니다.

이 지역을 맡은 설교자가 16일에 올 때 
5명이나 6명의 학습교인들이 시험을 볼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집을 불태우거나, 더 악한 행동을 하지 않게 하려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렇게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순회 설교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주로 걸어서 이 폭도들로 가득한 골짜기들을 돌아다닙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기에 연로할지라도 
자신은 아직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인정하며 
힘차게 그의 길을 가면서, 목자 없는 양떼들에게 용기와 원숙한 권면을 전해줍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없이 소망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 정권 아래 전쟁기간 동안, 한국은 많은 지도자들을 (순교로) 빼앗겼습니다. 

지금 우리 선교부의 기독교 학교들은, 
더 많은 기독교 지도자를 길러내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은 짧고 세월은 악하지만, 우리는 모든 기회를 선용하여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광주 인근 화순의 동복지역은, 공산주의자들이 출몰하여 교회에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유화례는 안전에 보장하기 어려운 이곳 교회를 수시로 방문하면서 전도 활동을 했다. 

위의 편지에서 유화례는, 산악지역에 공산주의자들이 피할 곳이 많아서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있고 
많은 마을들이 경찰의 명령에 의해 일부러 무너뜨려져서 (강제 소개)
거주자들이 생활하기에 더 안전한 마을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니고 있다고 전했다. 

'동복지업도 15개 마을 중에서 12개 마을이 파괴 명령을 받았고, 
이로써 약탈자들로부터 물자 공급원을 제거하려고 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빈곤한 상태라고 말했다. 

유화례 '이보다 더 희망 없어 보이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서 
'그래도 사람들은 근근히 살아가고 있고 
어디에서나 복음을 들으려고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유화례는 1949년 8월 31일, 임시로 맡았던 수피아 여학교 교장직을 그만두고 
시골지옥 전도활동에 집중했다. 
전도 활동을 할 때는 미국에서 배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음악을 가르쳤다. 

노스캐롤라이나 오렌지카운티의 학생들과 교인들이 선물한 이 아코디언은 
전도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화순의 동복지역으로 전도활동을 가는 길은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위험했으므로 
때로는 경찰이 트럭을 타고 나와 호위해 주었고 
유화례는 도마리아와 함께 선교부 지프를 운전하여 마을들로 찾아갔다. 

그러나 경찰이 돌아가고 나서 유화례 일행이 동복지역에 들어섰을 때 
공산주의자들이 마을의 인가에 불을 질러 집이 불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교인의 집에 여장을 풀고 전도 집회를 했지만 
당시에 공산주의자들이 양식을 얻기 위해 마을로 내려오곤 하던 상황이었는지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출몰하여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려오는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유화례는 전도 활동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