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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7

LNCK 2023. 12. 14. 17:44

 Part 7.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 유화례의 피난일지 - YouTube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지난 호 보기 

Part 7 :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유화례의 피난일지 

마침내 한반도에서 미소 냉전체제의 대결 양상이 
남과 북으로 분리된 정권으로 고착되었고 
민족통일과 해방을 앞세운 동족간에 치열한 이념투쟁과 체제 대결은 
한국전쟁 (625의 공식명칭) 이라는 참상으로 이어졌다.

이 파괴적인 전쟁은 수많은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으며 
수많은 이로하여금 가족과 집,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잃게 만들었고 
모든 사람에게 죽음, 이별, 질병과 장애, 가난, 슬픔과 증오 등 
인간의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고통을 남겼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던 이 전쟁은 
한국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살육과 폭력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되었다.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는, 전쟁에 참상을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해방 이후 어렵게 재개된 남장로교의 선교활동은 또다시 전면 중단되었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철수와 피난의 길로 들어섰다. 

선교사들은 폐허와 잿더미로 변한 선교지에서 
처참하게 무너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치유하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다. 

1950년 6월 25일은 남장로교 연례회의가 6월 21일부터 전주 스테이션에서 
개최되어 진행 중이었다. 
선교사들이 저녁예배로 모여서, 유아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나누고 있는데 
미군 관계자로부터 북한의 침공 소식과 함께, 즉시 부산으로 피신하여 
미군의 배편으로 '한국을 떠나라'는 공지가 전달되었다. 

6월 27일 새벽에는,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가급적 신속히 대피하라는 긴급한 공지가 전해졌다. 

이에 따라 남장로교 선교부는 철수를 시작했다. 
각 스테이션에서 2명씩만 남기고 모두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6월 27일 오전, 자동차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하여 
배를 타고 남장로교 일본 선교부가 있는 고베로 대피했다. 

선교부의 대피 결정에 대하여 유화례는 조용히 생각이 잠겼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생각에 잠겨 있다기보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깊은 기도 속에 있었던 것이었다.」 

예전에도 유화례는 일제가 중일 전쟁을 벌인 후 
선교사들과 선교사업에 대한 압박의 수혜가 높아져가는 상황에서 
미국 영사와 선교본부의 철수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선교지(광주)에 남았었다. 

그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실행에 옮긴 바 있었다. 

이번에도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다. 
그리고는 떠나지 않고 끝까지 선교지에 남기로 결정했다.  

전주에서 광주로 돌아온 유화례는 
벌써 그곳으로 몰려든 피난민을 구호하기 시작했다. 

「나는 광주에 오자마자 우리 지프를 타고 비난민들이 들끓고 있는 학교와 창고 
등을 돌아다녔다. 어떤 창고에 들어갔다. 
피난민들이 얼마나 꽉 차 있었는지, 마치 콩나물 시루 같았다. 

한 가족이 한 평만 쓰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5~6명의 식구가, 피난 짐보따리와 함께 한 평에 쪼그리고 있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따뜻한 물과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아침이면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초췌한 모습의 얼굴을 대하고 나면 
나는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웠다. 

이러한 비극과 참상의 책임을 과연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 
선교사로서 고통 중에 있는 피난민들에게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열심히 발품을 팔아서 물과 음식을 제공하고 
그들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최후까지 남아 선교지를 지키는 소수 인원을 제외하고 
모든 선교사들이 선교부 결정에 따라 황급히 피난 행렬에 올랐을 때,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자신의 사명을 다했던 
유화례의 신앙의 결단과 용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유화례라고 전쟁의 위협이 공포스럽지 않았을까? 
앞으로 닥칠 예기치 못할 위험이 걱정스럽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겠다'고 결정하게 했던 힘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구하는 담대한 신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 나면, 목자 없는 양떼와 같이 방황할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이었을 것이다. 

유화례와 함께 한 집에서 동고동락하였던 도마리아와 구애라(여성 독신 선교사들)도 
부산으로 철수했다. 그만큼 전쟁의 상황은 심각했다. 

신임선교사 미철 Herbert Petrie Mitchell 부부가 
유화례와 함께 광주에 남아 피난민들을 돌보고 있었다. 

전주 선교지를 지키고 있던 인돈(윌리엄 린튼) 선교사도 
7월 15일에 미국 국무부 관리가 전주에 와서 철수를 권고하자 
전주에 남아 있었던 구바울 선교사와 
병원 의료 선교사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광주로 왔다.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었던 미철 부부와 유화례를 태우고 부산으로 대피하고자 했다. 
결국 미철 부부는 선교사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함께 떠나기로 했지만, 
유화례는 끝까지 남기로 한 결정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다른 선교사들로서는 유화례가 너무 무모하고 고집이 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새벽 1시까지 유화례를 설득하다가 실패한 선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광주에 홀로 남겨두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부산으로 대피했다. 

인돈은 부산에 내려와서도, 유화례의 소식에 촉각을 세우며 
그를 강제로라도 데려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유화례도 광주 선교지에 끝까지 남을 수는 없었다. 
7월 23일에 인민군이 광주에 근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화례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7월 23일 주일에 예배드리러 가려고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 
안식이가 인민군이 광주 외곽에 와 있다고 알려주었다. 

몇 분 후 조용택 전도사가 찾아와서 
이현필 선생과 자기가   *소위 '산중파' 지도자
광주시 외곽에 있는 고아원 바깥의 동굴에 (피난처를)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맡겨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동의하였고 피난민들의 행렬에 끼어서 
그들을 따라 선교부 병원문으로 나가, 탈메이지의 마당으로 갔다. 

이현필 선생이 보낸 젊은이들이 도착해서 
나를 자신들이 급하게 만든 들 것에 태우고 갔지만 
(이미 피난온)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들이 준비한 곳(동굴)에 나를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메뚜기처럼 하루종일 숨어 있었고 
어둑해질 무렵 그들은 나를 지게에 태우고 몇 시간을 이동하여 
한밤중에 무등산 아래에 도착했다. 

그리고 몇 분씩 두 번을 쉬고, 능주 면의 청소 골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몇 시간 쉬고 나서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가파른 산을 올라 10리 가량 걸었고 
그곳에 있는 외딴집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농업을 하면서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돌보는 공동체(동광원)가 있었다. 
유화례는 7월 23일에 피신하여, 10월 6일에 다시 광주에 복귀할 때까지  *약70일
동광원 사람들의 보호 아래 산에서 은신하며 지냈다.  

유화례는 자신의 피난 이야기를, 신문과 잡지와 여러 글에서 반복적으로 소개했다. 
그의 스토리는 미국 교회와 사회에 큰 화제가 되어 
1952년에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유화례는 신문과 잡지사 인터뷰를 하며 유명세를 탔고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간증을 했다

유화례의 피난일지 1차 자료는, 현장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일지로 정리한 것을 
1950년 11월 24일에 조지아 주 하비 월터스 Harvey Walters (후원자)에게 보낸 서신 안에
첨부한 내용이다.

이 서신은 10월 24일 유화례가 하비로부터 받은 편지의 질문에 대한 
답신 형태로 작성되었다.

이 일지의 일부가 남장로교 선교잡지 Presbyterian Survey   
1951년 3월호에 실려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유화례는 피난 생활을 회고하면서, 그 내용을 1975년 5월에 
전남매일신문에 자세하게 연재한 바도 있다. 

유화례가 현장에서 느낀 날 것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이후에 작성된 자서전이나 회고록보다는 
그 당시 기록한 일지를 중심으로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일지의 인용이 다소 길지만,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서 
중요한 내용을 줄여서 인용하고자 한다. 

먼저 편지 서문에서 유화례는 
이 글을 쓰게 된 목적과 동기에 대하여 
그를 보호해 준 동광원 공동체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겪은 고난의 경험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현필 선생이 이끌고 있었던 
<자생적 기독교 수도원 공동체>인 동광원을, 유화례가 자세하게 언급한 부분이다. 

유화례는 동광원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느끼며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과 선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들처럼 살아가는 삶이며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부탁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공산주의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라고 역설하였다. 

「친애하는 월터스 씨에게 
당신이 보낸 10월 24일 편지가 방금 도착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질문한 내용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8월 15일 이후로 일지 같은 것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저는 연필은 있었지만, 종이는 없었습니다. 

저는 7월 말부터 10월 6일까지 저의 보호자가 되었던 사람들에 대하여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고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일지에서 언급한 이 단체는 '단순한 삶'을 신념으로 삼는 그리스도인 그룹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비참한 형편을 깨닫고 
외진 산 지역으로 들어가 땅을 경작하고 살아가면서 
많은 (신앙의)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산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작은 농지를 가꾸고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공동체의 어머니(할머니들), 바느질과 살림을 책임지는 젊은 여성들, 
농업을 하는 젊은 남성들, 교사와 고아들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스파르타식의 엄격한 스케줄로 이루어져 있으며 
젊은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는 생각으로 
고난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저는 11주 동안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거기서 한국적 모델의 삶의 종교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이 그리스도의 소중한 피의 값으로 그들을 사셨음을 잊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추구하지 않고, 날마다 이타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항상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을뿐만 아니라 
150명의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고, 얻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지만 
왜 그들은 그렇게 할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살았고, 
그들의 주인 Jesus으로부터 잘 행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제가 저를 위한 그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할 때마다
그들은 '주님의 종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들에게 빚을 졌고, 한국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항상 깨닫게 합니다. 
저는 또한 하나님께 제 생명을 빚졌으며 
그렇기에 고국과 한국에서, 저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기도를 해주신 것에 
응답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계속적인 기도의 도움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린 사람들(산중파, 동광원)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즐거운 자기 훈련, 그리고 다른 사람의 위한 자기 희생적인 봉사의 삶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며 성장할 수 있다면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저하지 않는 삶입니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필요로 할까요? 
한국에 필요로 하는 물질적 도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도움보다 더 많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한국은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은 공산주의에 대한 응답이시며, 최종적인 유일한 대답이십니다. 

십자가를 짊어진 선교사들은, 자기 나라의 물질적 안락을 뒤로하고 
바울과 함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말하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탁월함을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들 자신의 삶마저 아끼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모두 바치고 사용되는데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선교사들만이 오늘 한국에 가장 큰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유화례는 십자가를 짊어진 선교사가 
공산주의의 위협과, 전쟁의 비극에 빠져 고통받는 한국을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한국에 꼭 필요한 최종적인 대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야말로 물질적 도움보다도 
한국의 가장 필요로 하는 도움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화례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선교사는 
십자가를 짊어진 선교사였으며 
그는 그러한 삶의 전형적인 모습을 
동광원 공동체의 자기 절제와,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희생의 삶에서 발견하였다. 

아래에서 유화례가 그날그날 기록했던 일지를 살펴보면서 
그의 경험을 뒤따라가 본다. 

「1950년 6월 25일 
우리 선교부가 전주에서 연례회의를 하고 있을 때, 이 뉴스가 전달되었고 
28일 새벽에 대부분의 선교부 인력은 부산항으로 출발했다. 

미철 부부와 나는 7월 15일까지 광주에 남아 있었고, 
미철 부부는, 전주에 남아 있던 선교사들과 합류하여 부산으로 떠났다. 

일주일 동안 이곳저곳으로 선교부 트럭을 보내며 
한국인들이 여러지역의 안전한 곳으로 피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일주일 후에 용택이 찾아와서 함께 피난을 떠나자고 하였다. 

인민군이 몇 시간 안에 광주로 들어올 것 같다는 소식이 전달되었고, 
모든 사람은 철수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이현필 선생은 그의 고아원 인근에 있는 피신처를 제안했다. 
아침 10시경 탈메이지의 집마당에, 한국인의 집에서 급조한 들 것에 타고 
나는 이불에 덮인 채로 옮겨졌다. 

용택은 나에게는 형제와 같은 훌륭한 전도사였다. 
여러날 동안 그는 이현필 선생을 도와서 
광주에서 3~4마일 거리에 있는 동굴을 마련했다. 

나는 이러한 대비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북한군의 접근 소식을 내가 처음 접했을 때 
나에게는 피할 대책이 전혀 없었다.

이현필 선생은 내가 광주에 혼자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용택에게 '자기 목숨을 잃어버릴지라도 나를 보호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 여러 명도 같은 말을 했다. 

그때 나는 '나의 보호자요 인도자'가 누군지 보았다. 
정인세(동광원 창립 주역)가 이동의 책임자였고, 
두 명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등에 나를 지고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3명의 젊은 여성들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김금남(후에 동광원 10대 원장)이었다. 
그녀는 10월 6일까지 나와 늘 함께 했던 동무였다. 

이들은 모두 이현필 선생이 지도자로 있는 단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고아원(동광원, 산중파)에서 농부와 교사와 조사로 살고 있었다. 

우리는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하루 종일 이동했고 
아침에 잠시 쉬어가면서 수박과 참외를 먹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그날 여정의 마지막 구간을 지나, 광주에서 25~30마일 떨어진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나의 기독교인 친구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그곳 역시, 내가 머물기에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또다시 7월 25일 새벽에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소박하게 보이게 하려고 한복으로 갈아입었고 
신발이나 스타킹도 신지 않았다. 한국 고무신을 빌려서 신고 
내 앞에 사람을 뒤따라 거칠고 가파른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몸이 처지고 식량이 부족한 채로 이틀의 여정으로 마지막 10리를 갔는데 
거의 3배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처음으로 현기증을 경험했고, 자주 현기증 증세가 나서 종종 지게에 타야 했다. 

정인세 선생이 우리의 인도자였고 
두 명의 청년과 세 명의 여성이 우리와 동행했다. 

언덕 꼭대기에 오르기 직전에, 3명의 공산당 보안대가 나타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용택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보안대 : 아마 마을 사람들

우리가 길을 나섰을 때, 그는 첫 번째로 언덕에 오르는 사람이었지만 
어두워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보안대는 몇 가지 질문을 했고, 마침내 미국인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해 
머리에 덮어쓰고 있었던 흰 옷을 잡아채며 놀랐다.

"이 여자는 한국인이 아니군" 
그러나 그들의 리더가 정인세 선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보내 주었고, 산 아래로 속히 내려갔다. 

그 보안대 리더는 한때 기독교의 관심이 있던 사람이었고, 
정인세 선생으로부터 '자신이 거절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공산당 보안대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되었다. 

그 보안대는, 전에 순천에서 전에 나를 보았던 것 같다. 
나는 2년 전 순천의 선교부 학교에서 아침 채플을 인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그 학교 학생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전 7시경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끼니를 잠시 해결한 뒤 
그 다음 이틀 동안 잤다. 

그 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마가복음을 가르치는 성경반을 시작했다. 
하루 이틀 후에는 창세기 성경반을 시작했다.

이 집은 그 단체에 속한 곳이었다. 
한 명의 어머니, 7명의 남자 고아, 두세 명의 젊은 남자, 3명의 젊은 여자가 
나와 함께 성경반을 공부했다.

이는 이현필 선생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산속에 있는 피난처는 우리 모두에게 영성 수련회가 되었다. 

8월 24일 
15일 저녁에 용택과 안식과 단체의 청년들 몇 명이 
다른 지역에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17일에 내가 3일 정도 소화불량 증상이 있었기 때문에 하루 정도 금식하며 
기도하기 위해 너무 멀지 않은 협곡에 있는 큰 바위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날 오후에 약 12명의 공산주의자들이 갑자기 집에 들이닥쳐서 
여성들에게, 젊은 남자들과 무기에 대하여 질문했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이것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서 멀리 나가 있어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아셨다. 
우리의 아버지가 얼마나 놀랍게 그분의 자녀를 돌보시는가? 

그때부터 나는 이현필 선생의 조언에 따라 
날마다 집과 길에서 떨어진 곳으로 가서 성경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18일부터 나는 집에서 잠자는 것도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비가 오는 밤을 제외하고는 집 밖에 언덕에서 잠을 잤다. *8월이라서 가능

나는 남순이 체포되었고 일주일 동안 감옥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문을 당하고서 '나를 찾아내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고 한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이시며 그분의 영원하신 팔 아래 품으신다. 
그분은 나를 한 달 이상 지키셨다. 

계속해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일을 선포할 것이다.'  시118:17

8월 27일 일요일 
어제 이른 아침에 15명이, 내가 있는 집으로 찾아와서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그곳에 있는 여성은, 내가 떠난 후에 왔기 때문에 나를 모른다. 
그곳에 빈번하게 인원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탐문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사람은 매를 맞았다고 들었지만, 아무도 체포되지는 않았다.
이현필 선생과 정인세 선생 모두, 그 밤에 마당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잤다. 

이현필 선생은 이른 새벽 거의 어두울 때, 칙칙한 색의 옷을 입고 몰래 떠났다. 
정인세 선생은 흰 옷을 입고 있었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 떠날 수 없었고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들은 나와 금남과 함께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나는 외로움을 느낀다. 
때때로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고 있다. 

첫째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를 말하기에는 너무 유치하다. 
빌4:4~7절을 암송하며 해독제로 쓰고 있다. 약효가 있다. 

9월 6일 
수요일에 금식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원한 바를 9월 5일 "나의 날"까지 계속했다. 
그러면서 금식은 나의 자아가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더 많이 배운다. 

그리고 주님이 '이 훈련의 기간 후에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배운다. 
나는 꼬박 이틀을 금식하였고, 금요일 저녁에는 동굴에서 떠나야 했기 때문에 
약간 요기를 했다. 

우리는 그 단체에 속한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해 산에 올랐다. 
그러나 월요일 밤까지 가파른 경사 위에 그늘이 거의 없는 풀밭에서 첫날을 보냈다. 

음식은 어두워지고 나서 저녁에 한번 먹었다. 
익숙하지 않은 긴장에 놀라, 뼈마디 여기저기에 통증을 느꼈고 
두 번이나 자기연민(눈물?)에 굴복하기도 했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처럼 다른 모든 사람도 그랬고 
특히 나의 젊은 동료 금남이 그랬다. 

4일 월요일 밤에, 우리는 조금 더 멀리 가서 잠자기에 편안한 장소를 찾았다. 
그러나 비가 와서, 큰 바위 아래 샘물에 있는 쉼터로 이끌려갔다. 

그곳에서 남자 아이들이 집에서 가져온 저녁을 나누어 먹었다.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먹었다. 

이 소년 중 하나는, 광주에서부터 줄곧 나와 함께 있었다.
이 두 청년은, 산 아래로 오가며 우리에게 물자를 공급해 주었고 
무언가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전해주었다. 

10~20마일의- 거리는, 그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밤새 그리고 아침 내내 비가 퍼붓고 바람이 불었다. 
나는 정오까지 그치기를 기도했는데,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오후 늦게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친구는 흠뻑 젖었다. 
누군가 그쪽으로 오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우리가 샘물 근처 덤불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어둡기 전에 식사를 했고, 마른자리에 앉은 채로 다소 불편한 밤을 보냈다. 
새벽에 우리는 그곳을 떠나, 오늘 우리가 있는 큰 수풀로 왔다. 

어제였다. 바람이 젖은 나무를 스쳐 지나갈 때 
천상의 오케스트라가 나를 위해 하루종일 연주를 했다. 
영혼의 고향 Tho Home of the Soul 올드랭 싸인, 올드 블랙 조, 
그리고 내가 찬송가를 요청했을 때.. 그것이 울려났다. 

'보라 주님이 부르는 소리, 
구주 예수 의지함이,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신 주' 

어떤 노래는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 
그때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이 울려퍼졌다. 

이들 찬송은 며칠 동안 내 마음속에는 없었지만 
"나의 날"의 11주년에 나에게 기쁨을 주었다. 

*"나의 날"은 유화례가 거듭난 날을 뜻한다.
앞서 유화례는 1939년 여름 휴가 때 (*1927년 입국 후 12년 후 시점) 
강원도 화진포에서 열린 선교사들 부흥집회에서, 
알레타 제이콥스의 설교를 듣고, 부흥(또는 성령세례 또는 회심)을 체험했다고, 

본인이 밝힌바 있다. 이 후 그 날짜를 꼭 기억하고 있었다. Part 5)
 
나는 이현필 선생에게 '비도 오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행복한 날을 경험했노라' 말했다. 
하나님이 불게 하신 바람은 진실로 악기었다. 

9월 7일 
나를 찾아내려고 (프락치가) 잠입하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이선생과 정 선생을 찾는다면, 나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 선생이, 나의 인도자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9월 11일 
우리가 동굴로 돌아온 후, 이틀 동안 주기적인 폭우가 내렸다. 
담요와 이불과 모든 것이 젖었다. 
(*폭우가 내린 것이, 공산당들이 유화례 찾기를 어렵게 했을 것임)

나는 첫날밤까지 마른 채로 있었던 바위 벽에 기대어 
절반가량 서 있으면서 잠자려고 애썼다. 

둘째 날 밤에, 나의 발도 밤새 물에 젖어 있었다. 
비가 오기 전부터 우리와 함께했던 TS와 젊은 교사가 토요일 아침에 떠났고 
우리도 떠날 준비를 했다. (*한국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 어려워 이니셜로만 기억)

그러나 산 아래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막았다. 
그 밤에 그 단체에 또 다른 장소인 출입구를 향해 떠날 때 
보안대가, 그날 우리를 찾기 위해서 ksr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화순군 광사리)

그러나 우리는 다른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안전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 

집에서 아주 멀지 않은 풀밭에서 저녁을 먹고 
밤새 큰 수풀을 가로질러 난 길로 출발했을 때는 아주 캄캄했다. 

출입구라고 부르는 커다란 바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어떤 집으로 인도하는 길을 따라 계속 걸었고 협곡 위로 올라갔다. 

우리는 바위 위에 넓은 공간에서 멈추고 새벽까지 잠을 잤다. 
잠을 잤을까? 그렇다고 생각했다. 
무릎이 아팠고 무릎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힘차게 마사지를 한 후에 쓰러져, 이불을 완전히 뒤집어쓰고 편안하게 잤다. 
그 후 마지막 길을 나서, 아름다운 화강암 바위 위로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협곡 위로 올라갔다. 

가장 깊은 곳까지 누군가의 등에 업혀갔지만 
대부분은 한 손으로 SY의 강한 손을 붙잡고 걸었다. 

우리는 마침내 나무 사이에서 시내가 흐르는 장소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위로만 갔고, 그곳에 도착해서야 우리의 인도자들은 안심했다. 

우리는 계속 아래로 내려갔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두 개의 마을을 지났다. 
그러면서 나도 한 번 넘어졌고, 금남이도 넘어졌고, 
그 과정에서 신발 하나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간단히 함께 예배를 드렸고 
정오 즈음에 음식을 먹은 후에 휴식을 가졌다. 

갑자기 숨으라는 신호가 있었다. 
우리는 큰 수풀로 가서, 6시 반까지 말 그대로 산바닥에 납작 붙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30도 각도의 경사면 같았다. 그런데 그 사이, 두 번의 꿀잠을 잤다. 
그 후 '아무 이상 없다' 라는 신호가 왔다. 
우리를 찾으려는 보안대가 바로 산등성이 위해서 우리를 지나쳤다. 

9월 13일 
좋은 소식이 있다. 미군이 군산과 인천에 진입했고 
남한에 있는 북한군이 그들 당국과 단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나갈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9월 17일 
나는 누가복음 15장의 말씀으로 복된 시간을 가졌다. 

9월 20일 
깨끗한 물이 흐르는 시냇가 옆의 기분 좋은 장소에서 6일을 보낸 후 
그리고 첫 세 밤이 지난 후에 
오두막에서 잠을 자다가는, 인근의 산등성이에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위험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우리는 시내를 건너서 이동하여 
그곳에 오두막을 다시 짓기로 했다. 

비가 많이 오고 춥고 흐린 날씨이다. 
낮에 따뜻하게 있기 위해서 모든 이불을 다 가져갔다. 
십자가의 일곱 말씀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마음이, 오늘 나에게 복을 주신다. 

9월 22일 
어제 고린도전서 4:11~13절을 읽으면서 선교사 바울과 그의 고난을 보았다. 
'주님, 당신께서 나에게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도 바울처럼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고난의 받으며 나의 손으로 수고하려 합니다.' 

오두막은 이제 3면을 막아서, 가을 바람으로부터 큰 도움과 보호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고린도전서 1:9절에 있다. 
바울은 17절에서 '사람의 지혜로 설교하지 않았다.' 

9월 26일 
청년 중 한 사람이, 유엔군이 군산뿐만 아니라 목포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우리는 멀리서 총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광주가 곧 유엔군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곧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나갔던 두 아이들이 오늘 아침에 돌아오면서 
우리 모두를 위해 따뜻한 옷을 가져왔다. 

10월 1일 
KJ (능주면 금전리로 추정) 에서 푸른 토마토가 도착하여 
우리는 기뻐하면서 그것을 구웠다. 
그런데 불이 너무 뜨거워서 우리의 작은 초가집에 불이 붙었다. 
우산 하나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오두막이 불에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 
그때 바람이 불지 않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타지 않았다. 

우리는 그 밤에 그곳을 떠날 계획이었다. 
이미 두 아이가 우리의 짐을 "출입구"의 집으로 가져갔고 
다시 돌아와서 오르내리면서 우리를 도울 것이다. 

그 집에 도착한 후에 우리 세 사람은, 싱글 침대보다 크지 않고 
일어나기에도 높지 않은 작은 방안에서 남은 밤을 보냈다. 

밤 사이에 용택과 안식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숨어 있던 곳에서 왔다. 
음식을 먹고 간단한 기도회를 한 후에 
그들은 이 여행에 남은 사람들을 광주로 데려가려고 출발했다. 

우리는 다음날 저녁에 따라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근방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도왔던 아이들을 찾아 죽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실제로는 다음날 오후에 계획보다 일찍 그곳을 떠났다. 

개울을 따라 좋은 길로 올라간 후 어두워질 때까지 그들과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안내자와 함께 우리는 철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30리 혹 약 9마일 거리를 이동하여 이곳으로 도착했다. 
그때가 새벽 1시 30분 경이었다. 
하루종일 잘 쉰 후, 나는 필요하다면 다시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10월 7일, 광주로 복귀 
KJ (능주면 금전리) 에서 주일 밤을 보낼 때 메신저가 와서 
용택이 그 밤이나 하루 전에 체포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 어느 때보다 그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이 신실한 종이 10월 1일 경에 사망했다는 뚜렷한 증거를 입수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광주로 직접 내려갈 수 없겠다고 결정했다. 
그 밤에 갑자기, 우리는 부유한 사람의 은밀한 지하 저장고로 가서 잠을 잤다. 

그때 갑자기 우리를 초청한 집주인에게도 알리지 말고 
마을을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우리는 새벽 4시경에 15리 밖에 있는 다른 마을로 떠났다. 
나는 작은 방에서 그날 밤낮과 화요일까지 보냈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를 맞이하기를 두려워하는 집안 어른의 집과 너무나 가까웠다. 
그래서 화요일 저녁에 우리는 은밀한 다락으로 이동했고 
그때까지 시간 중에 가장 편안하게 잠을 잤다. 
그곳은 칠흑같이 캄캄했다. 나는 그 밤부터 6일 금요일 오후까지 그곳에 있었다. 
갑자기 그 집사람이, 내가 있는 곳에 올라와서 
공산당 군인들이 집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1~2분간 호흡을 가다듬었고 
처음에는 그 사람이, 그리고 금남이, 그 다음에 내가 불려 내려갔다. 

내가 내려갔을 때, 아주 기쁘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즉시 체포되었다. 
우리를 체포한 사람들은, 광주 경찰 트럭을 타고 
다른 경찰들과 함께 나를 찾으러 온 친구들이었다. 

우리를 체포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이 와서 사람들을 잡아갔다고 
마을 사람들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떠났을 때, 가족들이 의심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마지막 날 저녁에, 신임 경찰서장이 
부산에 있는 미국의 경찰 고문관으로부터 
나를 찾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신의 신실하심이 위대함입니다. 
오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로써 유화례의 피난일지는 마무리된다. 
유화례는 7월 23일부터 10월 6일까지 총 76일 동안 
동광원 공동체의 정성 어린 보호 아래 
위험과 고난의 피난 생활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피난 생활이 아니었다. 
동광원 공동체의 진실한 신앙과 삶을 목격한 시간이었고 
순전한 그리스도인과 선교사의 삶이 무엇인지 배우는 시간이었다. 

고난 속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보호하심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다. 
산길을 헤매며 넘어지고, 쓰러지기도 하였고 
강인했던 선교사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두려움과 어려움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들녘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찬양을 듣는 감동의 시간이었다. 

동광원 사람들과 함께 말씀을 읽으며, 영적인 축복을 경험한 영성 수련회였다. 
절박한 상황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뜻이라면 바울처럼 기꺼이 고난과 수고를 감당하겠다고 결단한 시간이었다. 

또한 유화례를 앞장서서 보호하려고 노력했던 사랑하는 동역자 조용택 전도사의 
죽음을 경험했던 가슴 아픈 시간이기도 했다. 

이 시간을 통해 유화례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생명을 빚지고 있음을 깨달았고 
동광원 사람들과 한국인들에게 한없이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더 한국을 위한 그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짐했다. 
한국을 위한 십자가의 선교를, 다시 한번 굳게 결단한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유화례의 반공의식이 결정화된 시간이었다. 
그에게 공산주의는 단순한 이념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동료를 살해하고, 교인들과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과 가족들에게 고통과 슬픔을 가져다주는 해악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례의 깊은 불신과 강한 거부감이 뿌리내리게 된 경험이었다. 

위에서 길게 인용한 서신 이후에 
선교 후원자 하비 월터스에게 친필로 추가한 부분에서 
유화례는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인식과 강경한 태도를 여과없이 내비쳤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남한에 들어온다면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보내서 요청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면서 진지하게 이 편지를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지 고민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돌아온지 3주가 되었습니다. 
내가 없는 그 사이에, 아주 많은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수만 명의 게릴라들이 광대한 산악 지역에 숨어 있습니다. 
여름 내내 그들을 피해 은신했던 지역에서, 2만 명 가량이 있습니다. 

이곳은 진실로 공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내가 앞서 언급했던 마을에서는, 4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모든 기독교인을 교회로 모이라고 명령하고 
그들을 교회에 가두어 놓고 살해했습니다. 

광주 목사님과 사모님의 집이 그 지역에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과 외동아들은 모두 함께 순교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다른 지역의 훌륭한 젊은 전도사는, 새로운 신자들의 모임을 인도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온 후에도 모임을 계속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물론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전도하였습니다. 
그도 역시 그 마을의 모든 기독교인과 함께 살해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이미 이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고, 
친구에게 '자신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오고 있는데 
우리 모두는 얼굴과 얼굴에 맞대고 함께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은 우리 차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때문에 
낮 동안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저는 '시간이 정말로 짧다'는 사실을 점점 더 느끼고 있습니다.」 

유화례가 요청한 대로, 그의 편지는 남장로교 선교잡지에 실렸고 
공산주의자들의 교회 핍박과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의 고난이 크게 알려졌다. 

유화례의 글은 선교사들의 반공의 태도를 잘 보여주었으며 
또한 미국 교회의 반공의식을 더욱 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