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8

LNCK 2023. 12. 15. 16:23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 Part 8. 찢겨진 나라와 분열된 교회의 회복을 위해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8     롬12:15   지난 호 보기 

Part
8 : 찢겨진 나라와 분열된 교회의 회복을 위해, 
                증오와 대립을 딛고!

부산에 있던 미국 경찰 고문관이, 광주 경찰서장에게 유화례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던 것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돈과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부산에 머물며 
UN 민간기구 협력단체와 기독교 세계 봉사회 Church World Service 를 통해 
피난민 구호활동과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광주에 홀로 남은 유화례가 걱정되었고 
미국 관계자를 통해 도움을 요청했다. 

유화례의 회고에 따르면, 부산에 있는 경찰 관계자에게 
유화례를 찾아줄 것을 요청하며 백방으로 노력하였던 사람은 미철 선교사였다. 

부산에 피난에 있던 인돈과 선교사들이 전주로 복귀한 날은 10월 7일로, 
유화례가 구출된 다음 날이었다. 인돈과 선교사들은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유화례가 안전하게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광주로 복귀한 유화례는 여전히 전쟁 상황으로 정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2주간 경찰서장의 특별 보호 아래, 경찰서 건물에서 머물렀다. 

유화례는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경찰차를 타고 
양림동에 선교 스테이션을 둘러보았는데 
경찰은 안전상의 이유로 유화례가 홀로 선교지에 머무는 것은 당분간 어렵다고 판단했다. 

유화례가 광주로 돌아온 이틀 후인 10월 8일에 유엔군이 진입하였고 
광주에서 16마일 거리에 있는 담양에 머물며, 공격을 준비하던 공산군을 내몰았다. 

 

유화례는 유엔군 관계자를 통해서, 전주에서 미철 선교사가 보낸 서신을 전달받았다. 
미철은 유엔군 특별 비행기 편이 전주에서 광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유화례의 소식이 궁금하여, 그 편에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유화례는 미철이 보낸 소식을 통해, 인돈 선교사 내외가 전주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았고, 
모두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 즉시 답장을 써서, 다시 전주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으로 보냈다. 

유엔군 관계자는, 유엔군이 민심 안정을 위해 여러 곳을 순찰하고 있다고 말하며 
유화례에게 전주로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아무래도 광주에 홀로 있는 것보다는, 전주에 있는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합류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유화례도 전주로 향하는 유엔군을 따라나섰지만 
전주로 향하던 군대의 트럭은 다시 방향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끊어져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광주로 돌아온 유화례는, 경찰서에서 특별 보호를 받으며 지내다가 
10월 20일에 광주 스테이션으로 돌아왔고, 이일학교 건물에서 홀로 머물렀다. 

유화례가 광주 스테이션에 머무르고 있던 10월 21일 오전에 
미국 대사관 관계자가 갑자기 방문한 덕분에 
그를 통해 안부 편지를, 미국의 선교본부와 지인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생사 여부와 안전을 염려하면서 기도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남은 과정과, 정인세 선생을 비롯한 동광원 공동체로부터 받은 도움을 간략하게 알렸다. 

또한 유화례는, 김필례의 남편 최영욱이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지인들을 통해 이 비통한 소식을, 김필례에게 긴급하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공산군이 휩쓸고 간 광주 스테이션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선교사 사택에는 공산군들이 점유했던 흔적이 역력했고 
창고의 식료품들은 모조리 약탈당한 상태였다. 

방안에는 붉은 글씨의 선전 문구가 가득 쓰여 있었다. 
선교사들의 주택에 있던 가구는, 일부를 제외하고 모조리 없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택들은 예상외로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유화례는 광주 복귀 후, 우선 이일학교를 정상화하려고 노력했다. 

이일학교에 남아있는 4명의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그가 알게 된 충격적인 소식도 전했다. 

그는 수피아 여학교 교사 출신 중 세 사람이 공산당이 되고 
숭일학교에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자가 된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이것은 아래의 인용문에서 인사례가 언급한 것처럼 
자발적으로 공산주의가 된 사람도 있으나, 
당시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공산주의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날카로운 분위기에서, 이러한 구분은 사실상 의미가 없었고 
공산주의에 가담한 행위를 조사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부역자들을) 비난하고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거나, 심지어 폭력을 가하는 일들이 많았다. 

인돈의 아내 인사례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중 
당시 상황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을 잠시 살펴본다. 

「지역 공무원과 교사들은, 그들이 충성스러운 시민인지 여부를 판단받기 위해 
반드시 조사를 받아야 한단다. 
공산당이 득세했을 때, 많은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고 여겼단다. 

당연히 마음속으로부터 진짜 공산주의자인 사람들은, 공산당과 함께 떠났지. 
많은이가 그저 굴복하는 시늉만 했던 거야. 

자연스럽게도 후자(시늉만 했던 자들)는, 
공산당이 차지한 지역을 미리 떠난 사람들, 
혹은 공선정권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들과, 관계가 좋을 수가 없지. 

나는 정말로 이런 사람들을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싫구나. 
그 사람들의 처지였다면 나는 어땠을까 라는 것을 확실히 말하기는 어려워.」 

유화례는, 자기를 찾아와 공산주의 활동에 동조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가족을 풀어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 

한 할머니가 사위와 함께 찾아와, 20살 된 손자가 공산주의에 협조한 혐의로 
사형 언도를 받아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니, 구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유화례는 그 손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신원 보증을 해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교도소로 찾아가 그를 면회하고, 교정당국의 허락을 받아 경찰관들의 입회 아래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것이 유화례가 이후에 교도소를 찾아가, 전도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50년 12월 5일, 유화례는 다시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전쟁 중에 초토화가 된 학교의 정상화를 위해 
그가 다시 교장의 책임을 감당해야만 했다. 
수피아의 위기의 순간에는, 항상 유화례가 그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학교에 대한 책임만 감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갈라진 한국 교회를 하나로 회복시키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전까지 하나였던 장로교회는, 갈등과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 문제를 온 교회가 회개하며 바르게 정리하는 일을 하지 못했고, 
교권을 지키려는 자들과, 이들을 탄핵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점차 증폭되고 있었다. 

이 갈등은, 제일 먼저 예장과 고신의 분열로 이어졌다. 
그뿐 아니라 서울의 조선신학교를 둘러싸고 
성서 비평학을 받아들인 김재준의 신학을 '자유주의'라고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조선신학교의 총회 인준을 취소하고 
박형룡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조선신학교 측과 갈등이 일어나, 교단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갈등은 이후 예장과 기장의 분열로 이어졌다. 

한국 전쟁에 참화 속에,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온 나라가 폐허가 되는 상황에서 
교회의 갈등과 분열은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화례는 교회 지도자들을 권면하며 
화해를 모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1950년 12월 30일 서신에서 유화례는 
박동환, 정인세 선생과 시작한 기도 모임에서 
광주지역 목회자들이 다 함께 모여 회개하며 화해와 일치를 도모했던 이야기를 소개했다. 

원래 이 기도 모임은, 광주 지역의 교회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교회와 한국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그런데 이 기도 모임에서 이 위험한 시기에 분열과 
다툼을 멈추고 주님 안에서 협력하기 위해 
광주의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자는 의견이 결실을 맺었다. 

근본주의자, 자유주의자, 교회로부터 이탈한 그룹,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는 목회자들이 
모두 모여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서로간의 침묵의 장벽으로 인해 분위기는 냉랭했고 
함께 기도하거나 마음을 터놓을 수 없었다. 

그때 유화례가 마음의 감동을 받아 앞에 나서서 
'모두가 존귀한 주님을 똑같이 섬기고 있는 주의 종'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만약 목회자들이 서로 협력을 거부한다면 
사람들이 죽어가고, 온 나라가 파멸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러한 호소가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여 
1950.12.28~30일까지 목회자 수련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일학교에서 지내며, 채플에서 모임과 회의를 하고 
채플실과 강의실에서 잠을 자면서 
하루에 두 끼씩 먹으며 수련회를 했다. 

유화례의 기록에 따르면, 모인 목회자들은 
최응종, 백영흠, 계일승, 김성진, 박영로, 박찬목, 박상진, 김재석, 김지석, 정순모, 
정동민, 나심도 였다.

이 목회자 수련회는 목요일 오후에 시작하여 ~ 토요일 아침까지 진행되었고 
유화례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 모임을 인도했다. 

전날부터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여,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나 금요일 오후에 자유토론 시간에, 서로를 향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유화례는 믿음이 흔들리고, 거의 포기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 분위기가 반전되었고 
모임은 그날 밤과 다음날 새벽까지 은혜롭게 진행되었다.

이 급격한 반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유화례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모임을 통해 하나가 되었고, 
매 주일 오후마다 연합예배로 모여 기도하기로 했다. 

유화례는 이 수련회에 참석했던 목회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 
함께 정기적으로 기도하기로 한 것을 기뻐했다. 


◑전세는 또다시 기울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이 다시 함락되었고 
다시 한번 공산군을 피해서 남쪽으로 피난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선교지에 복귀하여 조심스럽게 선교활동을 재개하려고 노력하던 선교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전주의 인돈 선교사는, 미국 영사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도 
철수를 거부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 상황이 심상치 않게 진행되면서 
미국 국무성 한국군 연락 장교는, 인돈에게, 부산으로 철수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미국 대사관 관계자는 '선교지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인돈 가족을 간신히 설득하여 
인돈만 유엔군 지원팀이 전주에 머무르는 동안까지 남고 
인사례(인돈의 사모)와 다른 선교사들은 부산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유화례는 또다시 광주를 떠나지 않고 남았다. 
이러한 유화례를 가리켜 부명광은 이유 그녀의 장례 예배에서 조사를 할 때 
'끝까지 자리를 지킨 작은 여인'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는 선교지에서 사람들과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다. 
일신의 안전을 비롯한 모든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그의 결단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또한 다시 시작한 이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를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1951년 1월 중순 주일 오후에, 광주의 목회자 몇 사람이 유화례를 찾아와 
부산에 있는 미군에게 요청하여 
피난민들을 목포에서 실어서 대피할 수 있게 하고자 했다. 

그들은 "공산군이 다시 내려오면 믿는 사람은 하나도 못 살게 됩니다. 
유화례 선교사가 부산에 내려가 해군 수뇌들에게 얘기해 
목포까지 LST(상륙작전용 수송선)를 보내 피난 가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유화례는 목사 한 사람과 이현필 선생과 함께 
미군의 도움을 청하러 부산으로 향했다. 

마침 한국군 트럭이, 부산에서 종이를 가득 싣고 와서 쌀로 바꾸려 했고,
이 업무의 책임자인 한국군 장교가 지프를 타고 돌아가는데 
유화례 일행은, 그 차를 같이 타고 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놓았다. 

그러나 지프는 이미 여러 사람이 탑승하기로 되어 있어서, 탈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유화례는 군 트럭의 운전석 옆에 타고, 
지역교회 목사 대표와 이현필 선생은 트럭 짐칸에 가득 실린 물건 위에 올랐다. 

추운 겨울날 바람막이도 없는 트럭 뒤에 탔던 두 사람은 
매서운 추위로 인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들은 월요일 아침에 광주를 출발하여, 화요일 한밤중이 되어서야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 부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이부자리를 들고 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어디서 잠을 자야 할지 난감했다. 
셋째 날 밤은 길을 가다가 마을에 들어가 잤고 
목요일 저녁에는 서울 YMCA가 부산에서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 갔다. 

이미 복도와 사무실에는 피난민들로 가득했다. 
유화례는 이 건물의 한 사무실에서, 
다른 남자들이 벽쪽으로 붙인 의자 위에서 자고 있는 한복판에 
책상 위에 자리를 깔고 누워잤다. 

▲유화례가 목격한 부산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부산의 교회들은 문을 열어 수많은 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 교인들과 협력하여 피난민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구호활동을 펴고 있었다. 
유화례는 한 선교사로부터, 인사례 선교사가 부산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부산에서 머물고 있는 인사례를 만났다. 
인돈이 전주에 남아있는 동안, 인사례는 몇 달 전부터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였던 
치솜 선교사의 집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들 15명을 데리고 머무르고 있었다. 

인사례는 유화례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인사례는 유화례의 부산 방문 목적을 듣고는 
'부산에 보이열 Elmer Boyer 선교사가 와 있으니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인사례는 직접 지프를 운전하여 보이열 선교사에게 유화례 와 일행들을 데려갔고 
보이열 선교사의 도움으로 그들은 미군 사령관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령관은, 미군이 그런 일을 도울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한국 해군 부사령관에게 안내했다. 

부사령관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유화례는 책상 위에 놓인 성경책을 보고 
그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고 반가워하며 큰 기대를 했다. 

얼마 후 그가 사무실에 들어오자 유화례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상륙함 LST을 목포로 보내서 교인들의 피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그는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38선 밑으로 내려오던 공산군은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은 (해외로 가지 말고) 한국에 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화례는 굳은 결의와 신념의 가득 찬 태도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가슴이 찡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위태롭다고 모두 조국을 떠나면
이 나라는 누구의 것이 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조국을 지키겠다는, 한국인 부사령관의 결의를 확인하고서 
일행들은 고개를 떨구고 자리를 떠났다. 

공산군이 밀려온다고 두려워하며 피난하기에만 급급했던 생각에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또한 그의 확신에 찬 결의와 다짐에, 어느 정도 안심했던 것 같다. 

원래 의도했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유화례와 일행은 '이 시점에서 다시 피난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부산에서 다시 광주로 돌아오는데 꼬박 4일이 걸렸다. 
원래는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여수로 가서, 광주로 오려고 했지만 
배편을 얻지 못하여 기차로 이동했다. 

늦은 밤에 대전역에서 내려서 잘 곳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 환자 호송을 위한 미군 열차 중 
간호사들이 탑승했던 열차 차량이 밤 사이에 비어 있으니 
그곳에서 자고 가라는 미군의 안내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유화례는 충남도청으로 가서 미국 고문관에게 
광주로 가는 차편을 수소문했으나 얻지 못했고 
대신 전주로 향하는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저녁 늦게 전주에 도착해서, 인돈 선교사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마침 광주 수테이션 지프가 그곳에 와 있어, 그 차를 타고 광주로 돌아갔다. 

전쟁 중인 상황에 참으로 멀고 먼 길을, 어렵고 힘들게 돌아서 다녀온 여정이었다. 
교회와 한국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면, 
그 험한 여정에 선뜻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광주로 돌아온 유화례는, 또 다른 측면의 전쟁에 비극을 마주해야 했다. 
그것은 공산군에 의한 학살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뿌리뽑고 협력자를 처벌하겠다는 이유로 
한국군과 경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에 대한 폭력과 살해였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폭력과 증오가 넘쳐나던 시기였고 
수많은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부산에 다녀온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아 
수피아 여학교 소유의 논에서 일하는 농부의 아내가 찾아와서 
유화례가 부산으로 떠난 그날, 남편이 공산주의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그 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 

다음날 유화례는 경찰서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경찰서장은 알아보고 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바로 그날 저녁, 그녀의 남편은 체포된 다음날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유화례는, 그가 잔인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유화례는 즉시 전남 경찰청장에게 찾아가, 이러한 야만적인 행태에 항의했다. 

유화례는 자신이 사랑하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항의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 전쟁 중에 이러한 비극이 얼마나 많았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반공의 이름으로 끌려가서 
잔인한 고문을 받거나, 목숨을 잃었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불의와 폭력 앞에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고통과 절망을 느꼈을까? 

유화례는 반공을 빌미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롬12:15
하나님의 정의이며, 선교사로서 자기의 마땅한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인권유린과 야만적 행위는, 아무런 조사나 관련자 처벌도 없이 
광주 경찰서장이 다른 곳으로 전보 발령 받는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되고 말았다. 

전쟁의 한창이었던 1951년 3월에도, 유화례는 광주에서 활발하게 전도 활동을 했다. 

사람들이 전쟁 중에 겪었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은 
상처받은 영혼의 치유와, 내일의 소망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고 
역설적으로 전쟁의 고통은, 복음 전도를 위한 옥토가 되었다. 

유화례의 선교활동은, 전쟁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유하는 손길이었으며 
절망과 죽음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역경을 이겨낼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구명운동이었다. 

유화례는 1951년 3월 9일자 서신에서 
바로 전날 성황리에 마친 남녀 성경학원에 대하여 언급했다. 

광주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때가 성경반을 열기에는 좋은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이야말로 성경반이 꼭 필요한 때'라고 설득했던 지혜로운 사람들의 비전과 믿음이 적중했다. 

수많은 사람이 여러 교회에서 찾아와 200명이 등록하였고 
3개 노회의 32개 교회가 참여했다. 
참석자의 68%가 25마일 이상 되는 거리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성경학원 학생들은, 노방전도와 가정방문전도를 열심히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159명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학생들은 이들을 가까운 교회에 목회자들에게 인도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당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전도 활동에 얼마나 마음이 열려 있는지 알 수 있다. 

전쟁으로 삶이 무너진 상황에서, 현실에 대한 불안과,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복음이 주는 마음의 위로와 구원에 대한 확신에 
사람들이 얼마나 복음에 열정적으로 반응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같은 편지에서 유화례는, 지난 겨울 동안 특별전도대를 구성하여 
광주 지역의 중학교를 중심으로 4천명의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이러한 활동이 좋은 성과로 나타나서 
초등학교 교장들이 자기 학교 학생들에게 전도메시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고 언급했다. 

그는 여학교 한 곳에서 메시지를 전했으며 
곧 다른 학교에서도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고 말하면서 
모든 곳에서 복음에 대한 관심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고, 
복음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듣기를 갈망하고 있다..라며 기뻐했다. 

유화례는 당시 광주 스테이션에 남아있는 유일한 선교사로서 
이일 성경학교와 수피아 여학교에 대한 책임을 감당했을뿐 아니라 
부지런히 다니며 전도 활동을 했다. 

특히 공산군에 의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피해를 입었던 
영광군 지역에 전도 집회를 하면서, 교인들을 위로하고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 지역의 전도사는, 공산군에 의해 자기 가족과 친척 14명이 학살되었음에도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경찰은 산에 숨어있는 공산당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공산주의의 철저하게 물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정상 참작을 약속하며 자수를 권고했다. 

마을 인구의 3분의 1이 학살된 마을에서는 수백명의 자수자가 나왔다. 
유화례가 그 마을에 갔을 때, 그 전도사는 관할 경찰서장과 협의하여 
유화례에게,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는 자수자 120명에게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유화례는 공산주의의 가담했다가 자수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몇 사람의 젊은이들과는 따로 이야기를 나누며 상담했다. 

유화례가 만난 한 남학생은 '공산군이 자기 뒤에서 총을 겨누는 바람에 
총으로 친구 10명을 죽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참회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후 이 학생은 광주의 교정시설로 옮겨졌고 
유화례는 주일마다 그곳에 찾아가 복음을 전했으며 
그 학생은 착한 행실을 인정받아 이후에 가석방되었다는 이야기를 편지에 전했다. 

유화례가 만난 또 다른 사람은, 적극적인 공산당 협력자로 재판을 받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매우 병약했고 삶의 희망조차 잃어버린 상태였다. 

유화례는 그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우면서 복음을 전했고 
이후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가족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편지에) 전했다. 

특히 그의 아들은 세례를 받고 나서, 이후 의사가 되었으며 
두 딸은 선교부 병원에서 정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유화례는 경찰과 교정당국의 배려로, 교도소와 교정시설을 가리지 않고 다니며 
공산주의자들을 개종시키고,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용기를 주었으며,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까지도 신앙의 영향을 받아 살아가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주었다. 

유화례는 이 일이 지금까지 했던 어떤 일보다 보람된 일이라고 여겼다. 
지역 기독교와 경찰 및 교정당국 사이에 긴밀한 협력관계가 잘 구축되어 있었고, 
유화례는 미국 선교사라는 특수한 신분과 
지역사회의 기독교 네트워크를 충분히 활용하며 전도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전향과 교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공산당에 의해 가족과 친지를 잃어버렸으나 
그들(가해자였던 수감자)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도사의 위대한 신앙,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빠졌던 사람들을 꾸준히 찾아가 전도와 상담을 해주는 것은 물론 
많은 도움을 주었던 유화례의 사랑은 

기독교가 공산주의에 의한 상처와 폭력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내는가를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준 예였다.            

이들은 이념에 물들었던 사람들, 이념에 의해 삶이 파괴된 사람들을 
신앙으로 감화시켰다. 
이러한 모습은, 유화례가 추구한 '십자가의 선교사'의 삶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감동적인 편지를 하나 발견한다. 
1951년 6월 23일에 전남도지사 박철수, 전남 노회장 김재석, 
광주 YMCA 백영흠, 광주 YWCA 조아라, 
국가재건 전남지역협회장 김흥렬, 동광원 대표 정인세 등의 명의로 

남장로교 세계선교부에 유화례의 선교활동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들은 유화례의 존재가 한국사회와 교회의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소 부정확한 영문 표현이 많아서,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의역하여 아래에 소개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날마다 감사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는 행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나라(미국)의 선교사 루트(유화례) 씨의 이야기를 하게 되어 
영광으로 여깁니다. 그분은 1950년 6월 25일에 끔찍한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곳에 우리와 같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처음 올 때도 그랬지만, 그녀의 삶은 아주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보기에도 불편하고 음식이 부족했던 상황에서도, 
선교사업과 전라남도에 사는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고, 
그것은 복음 안에 있는 순교자의 거룩한 삶의 흔적이었습니다. 

루트 씨는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의 선교 구역이었던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동굴에서 피신해 있었고 가파른 산을 올랐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출된 후, 산에서 내려와 광주의 자신의 구역으로 돌아왔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을 구하며 인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분은 경찰과 군대와 가능한한 협력하였습니다. 
그분은 고아원을 돌보았고, 학교와 선교 기관을 재개하였습니다. 
그분은 성경 학원과 영적인 운동을 이끌었고, 피난민에게 피할 곳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이렇게 훌륭한 선교사를 보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전남도지사 박철수, 전남 노회장 김재석, 광주 YMCA 대표 백영흠, 
광주 YWCA 사무총장 조아라, 영광지역 전도위원장 김용갑, 
전남 국가재건 지역협회장 김흥열, 화순지역 교구감독 강삼보, 동광원 대표 정인세」 

광주와 전남지역을 대표하는 사회 및 교계 인사들이 서명하여 
남장로교 세계선교부에 보내는 감사의 서신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선교사를 보내주어서 감사하다'는 진심은 
고난 중에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유화례의 삶 속에서 순교자의 흔적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세상이 누군가의 헌신적 삶을 통해, 진실한 신앙의 증언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 전쟁 중에도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선교의 사명을 다했던 유화례에게 
안식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홀로 남아 여러 가지 일을 혼자 감당하고 있던 광주 스테이션에도 
이제 선교사들이 속속 복귀하여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선교부 병원도 다시 운영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코넬대 의대를 졸업하고 남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들어온 
고허번 Herbert Codington 선교사가 광주 선교부 병원을 담당하면서 
병원은 "결핵 전문 병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남장로교는 1951년 8월 22일 전주에서 열린 회의에서 
한국에서 결핵 사업이 가장 긴급한 일이라고 판단하면서 
고허번 박사에게 광주에 병원을 이런 목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계획하라고 요청할만큼 
결핵 구호 사업을 중요하게 여겼다. 

결핵 전문의 고허번에 합류로, 남장로교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결핵 전문 병원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김아열 Bruce Cumming 선교사의 부인 Laura Virginia Cumming 이 
수간호사로서, 병원의 간호사들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선교부 회계를 맡고 있던 유화례는 
이제 그 무거운 책임을 미철 선교사에게 넘기고 
전도 활동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유화례는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마침 수피아 여학교 동문들이, "유화례 선교 25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기념행사에는 정부 공무원과 학교 관계자들도 많이 참석하여 유화례를 놀라게 했다. 
내빈으로 전남도지사와, 유엔 민사 지원사령부 UN Civil Assitance 대표자들도 참석했다. 

유화례의 지난 25주년의 선교사역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와 축하의 자리였다. 
유화례는 선교 편지에서
"이 기념행사는 평생 잊지 못할 감동적인 시간이었다"고 말하면서 
"한국에 정의로운 평화가 임하고, 
이 불안한 세상 속에서 신속히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1952년 안식년을 떠나기 전까지, 유화례는 전도 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교정기관에서 젊은 남녀 재소자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했고 
함께 찬송을 부르고 성경 이야기를 나누면서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다. 

또한 12월 초에 해남 인근 섬에 2주간 전도 여행을 계획했다. 
재소자 선교와 도서지역 선교는, 한동안 유화례의 선교사역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1952년 4월 29일자 서신에서 유화례는 
예정되었던 도서지역 선교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언급했다. 

「계획했던 도서지역 선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대신 해남에서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사역하는 목사는 광주 출신으로 사람들을 빨리 교인이 되게 하기보다는 
3년간의 학습기간을 두고, 진정한 교인이 되도록 노력하며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추수감사절부터 시작해서 2주간 이 지역에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아침 점심 저녁에 매번 예배 때마다 250명 가량 모여 
예배당 공간이 부족할만큼 큰 상황을 이루었습니다.」 

전도활동과 더불어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서 학사업무에도 최선을 다했다. 
수피아 여학교는 재학생 450명 가운데 90%가 그리스도인이었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교사진을 갖춘 건실한 기독교 학교로 발전하고 있었다. 

또한 1952년 4월에, 5천명 규모의 전쟁포로 수용소가 광주에 건설되어 
유화례는 기회가 날 때마다 그곳을 다니며 전도와 상담을 했다. 

또한 정부가 운영하는 한센인촌인 소록도를 방문할 기회를 얻어 
그곳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했다. 

유화례는 "언젠가 그들이 주님을 만날 때 
주님과 같이 되는 날이 오기를 함께 소망하며, 기쁨의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요일3:2

이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유화례는 한국 전쟁 중에도 
여러 가지 사역을 도맡아 종횡무진 활동했다.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선교와 학교 행정의 책임을 담당하고, 
지역을 두루 다니며 교회를 중심으로 전도 활동과 부흥 집회를 인도하고 
교도소와 포로수용소를 다니며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개인적으로 상담하며 보살피고, 도서지역 선교와 소록도 전도활동에도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유화례에게 안식년은 꼭 필요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선교지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십분 완수할뿐 아니라 
홀로 모든 책임을 도맡아 감당하는 선교사였지만 
안식년에는 잠시 내려놓고 휴식을 취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