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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9

LNCK 2023. 12. 16. 09:35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 P9 광주와 목포에서 유화례의 전도 활동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9        지난 호 보기 

Part 9
: 전도의 열정으로 

광주와 목포에서 유화례의 전도 활동 

안식년임에도 불구하고 유화례는 맡고 있던 사역으로 인하여 
안식년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1952년 5월 28일 광주에서 열린 선교부 연례회의에 참석한 선교사들의 명단 속에 
유화례가 포함되어 있다. 

회의 참석자는 전주의 조요섭, 변마지, 린들러, 
광주의 유화례, 김아열 부부, 미철, 고허번, 
목포의 타요한, 조하파, 순천의 보이열 선교사였다.

이 회의에서는 조선신학교(김재준 목사)와 관련된 한국 장로교회 분열에 대한 
선교부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예장 총회와 공식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교회 일치를 추구하지만 예장 총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결의였다.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었다. 

1 우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한국의 공식적인 장로교회라고 인정하며
이 총회와 계속적인 협력을 이어나갈 것이다. 

2 교회 일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정책이며 
모든 교회가 총회에 충실하게 머무르기를 권면한다. 

3 노회 사업을 위한 선교부 지원금은, 이 총회로 인정된 노회들에게 사용될 것이다. 

 

4 구호의 배분 및 선교부 교육기관의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하여 
다른 모든 노회가 다른 모든 교단과 같은 지위를 갖는다.

이 회의에서 유화례는 보이열, 조요섭, 인돈과 함께 
재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5월 30일에는 광주의 전쟁포로 수용소를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1,200명과 2천명으로 각각 나뉘어 예배를 드렸는데 
선교사들은 한국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전쟁의 한창 중이던 1952년, 남장로교가 스테이션에 배정한 예산은 8만 달러였다. 
스테이션과 관계없이 선교부가 연합기관을 지원하거나 
새로 설립하는 대전 스테이션 프로젝트를 위해 배정한 별도 예산은 약 27,000달러였다. 

거기다가 각 스테이션별로 전쟁 피난민을 위한 구호사역 예산을 배정했고, 
그 예산이 총 1만 달러였다. 

특히 전주와 광주는, 선교부 병원을 중심으로 구호사역을 집중적으로 진행했다. 
주목할 만한 일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피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선교부가 보리를 구매하여 나누어 주는 사역을, 본국 선교본부에 긴급하게 요청한 것이다. 

이러한 중요하고 긴박한 안건들로 볼 때, 
전쟁 중에도 선교사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화례는 개인적으로도 많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고 
선교부의 내부 상황을 보아도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쉽지 않았기에 
안식년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회의에서 선교부는, 유화례가 1952년 6월 1일부터 안식년을 갖기로 결정했다. 
의료 선교위원회는 '유화례는 지금 안식년을 가져야 한다'고 긴급하게 요청했다. 
그의 건강 상태로 보아 안식년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남장로교는 유화례에게 안식년을 허가하면서 
안식년 후에 정해진 시간 안에 반드시 돌아가라고 
특별히 요청하는 선교사들의 명단에 유화례를 포함시켰다. 

많은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추방된 후로,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하여 철수한 후로는, 
선교지로 다시 복귀하지 않았고, 많은 선교사가 사임했다. 

선교부는 사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복귀하지 않은 선교사들을 
어쩔 수 없이 안식년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과 새로운 사업으로 인하여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은 급증했으나 
선교사의 수는 오히려 급감했기 때문에, 선교부는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유화례는 선교부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존재였다. 
유화례가 전쟁의 고난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광주 선교지에 홀로 남아 수많은 사역을 감당하면서 
탈진된 상태에서 어렵게 갖는 안식년이었지만 
그 기간이 짧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1952년 9월 2일에 보낸 서신에서, 
유화례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적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배편으로 시애틀에 도착하는 항로였다. 

안식년을 떠나는 상황에서도, 한국에 대한 염려가 컸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빨치산의 활동에 따른 불안정한 상황도 문제였지만 
3년 연속으로 가뭄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상황도 걱정거리였다. 

유화례는 굶주림에 시달리다 아이들을 데리고 강물의 투신한 어머니의 이야기,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는 어머니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했다. 

유화례는 절대적으로 불리하고 절망스러웠던 전쟁 상황에서 
유엔군의 도움이나 한국 군경의 힘만으로, 공산군을 물리치고 막아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셨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유화례의 전기 작가 디트릭은, 이 안식년이 유화례의 선교사역 25주년 직후였고, 
그 후 1978년까지 25년을 더 사역했기 때문에 
이번 안식년은 그의 선교사역에 중간 지점이었다고 평했다. 
그 당시에 유화례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기나긴 선교사역의 반환점을 지나고 있었다. 

유화례는 1952년 9월 7일에 부산에서 출발하여, 요코하마에서 이틀을 체류하면서 
일본에 머물고 있는 미철 선교사 가족을 만나 교제했다. 

이후 미국으로 출항하여 9월 24일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다. 
항로가 변경되어 원래 예정대로 시애틀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덴버에 살고 있는 큰오빠 찰스의 가정을 만나러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오빠 가정과 시간을 보낸 후, 유화례는 남장로교 세계선교본부가 있는 내쉬빌로 가서 
선교 보고를 하고 건강검진을 했다. 

이후 뉴욕주 고향으로 돌아와 가을 단풍의 절경을 맛보았고 
버팔로 인근에 락포트에 살고 있는 동생 아서 가족과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을 다녀왔다. 

나이아가라의 단풍은 완벽했다. 
하나님이 수고한 유화례에게 선사하는 꿈같은 휴식과 행복이었다. 

유화례는 빙햄턴과 쿠퍼스타운에 있는 친지들도 방문하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많은 힘과 위로를 얻었다. 

유화례는 선교부 의사들로부터, 1953년 1월까지는 
절대 강연을 하거나 공적인 활동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은 터였다. 
당시 그의 건강 상태는, 절대 안정과 휴식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화례는, 자신이 나고 자란 쿠퍼스타운에서는 
도저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사의 열정이 그를 침묵하게 두지 않았던 것이다. 

유화례는 1952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고국에서 보내면서 
그리스도가 주신 참된 평화와 사랑이, 한국과 세계 모든 곳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했다. 

이번 안식년에 유화례는 유명세를 단단히 치렀다. 
그의 <피난일지>가 미국 교계는 물론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안식년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오는 길에, 이미 덴버 포스트와 인터뷰를 했고 
그 기사가 "한국으로부터 돌아온 선교사가 공산군에 대항하여 
(미군의) 열전을 강력히 요청하다"라는 타이틀로 1952년 9월 2일자 신문에 실렸다. 

9월 24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던 유화례보다, 신문기사가 먼저 나갔다.
이 기사에서 유화례는 공산주의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에 양보해서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물러갈 때까지 한국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북한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피난민이 몰려와서, 극심한 식량 부족이 초래되었고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1952년 10월 7일의 또 다른 신문 인터뷰에서도 
유화례는 강력한 반공주의 입장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는 "미국이 러시아에 대하여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한국전쟁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미국이 한국 군대를 느슨하게 하여서 
공산군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고 비판하였다. 

이어 고향인 쿠퍼스타운 지역 신문의 1952년 10월 29일자 보도기사에서는 
"공산군이 한국의 침공하여,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많은 사역자를 가려내어 살해했으며, 
미국에도 이와 같은 침공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공산주의 첩자들이 미국을 집어삼키려고 한다"는 우려를 드러냈다. 

한국에서 연로한 목회자와 사모가 학살된 이야기, 
그들의 시신이 줄에 묶여 거리에 끌려다닌 이야기를 쏟아냈고, 
공산군이 예배당에 교인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학살한 만행도 빼놓지 않았다. 

공산당은 자신들의 지배 아래에서는 절대로 가난도, 고통도 없을 것이라 이야기했지만, 
가난은 백배나 심해졌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공산군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온 산을 뒤지며 추적하면서, 
자기 친구(도피 조력자)들을 살해했다고 비판했다. 

유화례는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과도한 정세 판단을 하였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이같은 강경한 태도와 우려는 
한국에서 몸소 겪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참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유화례는 안식년 기간 중 교회와 대학을 다니며 강연을 했다. 
그의 주된 화제는, 남장로교 선교잡지에 실렸던 그의 피난 경험담이었다. 

▲유화례의 안식년은 그렇게 6개월 만에 짧게 끝났다. 
한국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유화례는 1953년 3월 14일에 다시 한국을 향해 떠났다. 
시애틀을 출발하여 알류산 열도를 경유하여 일본의 홋카이도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오는 항로였다. 

유화례는 1953년 4월 2일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광주로 돌아올 때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는데, 이전에는 4일이나 걸리던 길을 
불과 1시간 만에 가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광주에 복귀한 직후 부활절 연합예배 때 
수천명의 한국 교인들이 모인 광경은 유화례를 감동시켰다. 

예배에 참석한 미군 관계자들을 위해서 김아열 선교사가 영어로 
인사와 함께 간략한 메시지를 전했다. 

유화례는 쉴 틈도 없이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서 학교 개교를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에 전쟁이 그치고,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엄청난 상흔과 피해, 
그리고 수많은 문제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기아와 굶주림의 문제 
전쟁 고아들의 문제 
무너진 나라와 도시의 재건 문제 
여전히 남아서 활동하는 공산당 게릴라들의 문제 
피난민들의 구호와 정착 문제 
이산가족의 문제 
사회의 안정과 일상 회복의 문제 

이러한 문제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선교부와 교회에게는 사역의 과제들이었고, 또한 전도의 기회를 열어주고 있었다.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 교육행정의 책임을 맡는 일과 
광주의 이일 성경학교 교장으로서 여성 전도자들의 성경 교육을 담당하는 일, 
그리고 시골 지역을 방문하며 교회를 중심으로 전도하는 일을 했다. 

또한 선교부 안에서도 재정위원회, 교육위원회, 어학위원회, 회계감사, 임시위원회 
위원으로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안식년에서 돌아온 후 유화례에게 많은 책임과 역할이 쏟아지고 있었다. 
광주 스테이션에는 부명광 Geroge Thompson Brown 선교사 부부 
인돈의 막내아들 인도아 Dwight Linton  선교사 부부가 새로 합류하여 
전도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부명광과 인도아는 한국전쟁 이후에 남장로교 선교부 합류한 선교사로 
이후 한국 선교부 안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지만 
당시만 해도 신임 선교사였다. 

유화례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전도 활동을 한 연륜이 깊은 선교사로서 
부명광과 인도아가 선교지에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들은 특히 유화례로부터 시골 전도 활동을 배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유화례는 광주 스테이션에서 부명광 인도아의 멘토 역할을 했던 것이다. 

▲유화례의 1953년 11월 서신을 보면, 
모든 사역이 전도로 집중되고 있으며,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일학교 교장을 맡으며 길러낸 여성 전도자들, 
수피아 여학교 교장을 맡으며 길러낸 여성 지도자들이 
유화례의 시골 전도 활동에 주요 사역자들이 되어 함께 협력하여 
전도에 큰 성과를 내고 있었다.

이 서신에서 남장로교의 선교부의 교육선교가 
전도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유화례가 자신의 농촌 전도활동의 동역자들을 소개하는 편지 내용을 잠시 살펴본다. 
「그들은 이러합니다. 김장로님은 숭일학교 졸업생으로서 
오랫동안 인근의 시골 지역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신 분이며
이 지역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주님이 이분의 훌륭한 실행 능력을 사용하셔서 새로운 사역을 하게 하시고 
자신들의 작은 교회를 세웠을뿐 아니라, 인근 마을들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일학교 졸업생 세 사람이, 자꾸 연약한 많은 교회들을 도우며 사역을 잘 하고 있습니다. 
선교부의 고등성경학교 졸업생 세 사람도, 서로 다른 세 곳의 개척지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몇 주 전에 이 중의 한 곳에 방문하였는데, 50명 정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150명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전도자는, 몇 년 전에 졸업한 수피아 여학교 출신입니다. 
낙심거리와 문제들도 많지만 
우리는이 명단을 부르면서 격려할 만한 이유를 찾습니다. 

우리 선교부는 브라운(부명광) 목사가 도착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 온지 두 달이 채 안되었지만 
어제 처음으로 보성 지역의 교회들을 심방하는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며칠 후면 드와이트 린튼 (인도아) 부부와 
간호사 엘레노 캐슬릭 Eleanor Caslick 도 올 것입니다.」 

▲1954년 6월 21일 서신에서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서 바쁜 일정을 쪼개어 시골지역을 방문하여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사경회를 인도한 내용을 소개했다. 

그들은 집회 장소가 따로 없어서, 낡은 천막을 치고 바닥에 멍석을 깔고 앉아 집회를 했다. 
50명 정도 모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매일 밤 250명이나 모여 복음의 메시지를 들었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공개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감동적인 일도 있었다. 
한편 일요일에 다른 지역 야외에서, 주일 예배와 주일학교를 인도하고 돌아오던 길에 
버스가 좁은 산길에서 바람에 흔들려 중심을 잃고 비탈길로 내달아 
모든 승객이 부상을 당하는 아찔한 사고를 목격했다. 

다친 사람들 중 중상자 세 사람을, 선교부 지프에 태워 
유화례가 직접 운전하여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고, 
선교부 운전사는 지프의 탄 사람이 밖에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었다. 

또한 이 서신에서 유화례는 
결핵에 걸려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전도사에게 
구호 물품으로 나온 쌀을 갖다 주러 갔다가 
그가 결핵 요양소의 모아 놓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게 된 사연도 목격하고, 편지에 소개했다. 

이들에게 전도하는 일은 아주 힘들었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교부 운전사는 
유화례가 마치 자신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 같다고 말하며 
유화례의 전도하는 모습과 그의 메시지에 큰 감동을 받았노라고 고백하였다. 

선교부 운전수 김정희의 아내는 정신질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유화례는 그의 아내가 회복될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돌보아 준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유화례 전도 활동은 쉼없이 항상 이어지는 일상이었다. 
그는 전도할 장소와 환경을 가리지 않았고, 사람과 조건을 따지지 않았다. 
유화례의 선교활동에서는, 전도와 구제와 돌봄이 구별되지 않았다. 

광주 스테이션에서 유화례 주된 임무는 
역시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서의 업무였다. 

사실 교장직을 맡으면서 전도 활동을 많이 하지 못하는 것이 
유화례 큰 아쉬움이었다. 그래서 틈틈이 짬이 주어질 때마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그는 열심히 전도 활동을 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수피아 여학교도 전도 활동의 연장이었다. 
학생들에게 신앙을 함양하고, 학교에 기독교 정신과 실천을 지도하는 것이 
그의 주된 관심과 임무였다. 

또한 학생들의 신앙훈련과 전도활동을 장려했고 
수피아 여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교회 지도자와 전도자가 되도록 영향을 끼쳤다. 
즉 학교는, 신실하고 실력있는 전도자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유화례는 소피아의 학생들이 지역 교회에서 봉사하며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을뿐 아니라 
학생들이 헌금하여 전도자를 파송하여 교회를 개척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1955년 유화례 서신에서 유화례는 
그가 아들과 같이 아끼던 제자인 안전도사에 대하여 언급했다.  *안종열 목사

그는 선교부 성경학교 출신으로서 군대에 입대하여 군종병으로 일하다가 
결핵을 앓게 되어 제대했다. 
이후 완쾌되면서 영광읍의 시골 모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교회는 공산군의 방화로 소실되었고 
교인들의 절반 이상이 순교했다. 

유화례는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은 
이 작은 교회에 적용되었을 때는 결코 진부한 표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안전도사는 새롭게 지어진 작은 교회에 부임하여 사역하기 시작했고 
주일학교는 열정적인 남녀교사들의 헌신으로 250여 명이 참석하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교회 출석 교인이 150명에서 200명 사이였는데 
주일학교 학생들이 그보다 많았던 것이다. 

특히 성경구락부 Bible Club 를 통해 성경을 가르칠뿐 아니라 
기초 교육을 가르침으로써 
학교에 다니지 못한이 지역의 아동 100명이 참석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화례는 이 지역 사람들이, 처음에는 성경 구락부를 반대했지만 
가정과 동네에서 아이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반대는 눈녹듯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성경 구락부를 위해서 
5개 교실을 갖춘 건물을 건립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면서 
바로 이러한 점이 '살아있는 교회가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에서 교장의 업무는 물론이거니와 
학생과 교사들의 신앙훈련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전도 활동과 선교부에서 맡은 많은 역할, 
교장으로서의 행정 업무 이외에 별도로 자원한 일이었다. 

기숙사에서 경건회를 인도했고, 학생들과 신앙상담 시간도 별도로 가졌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기숙사에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고 
비기독교인 가정에서 입학한 학생은 예수님을 영접했으며 
그 학생들은 자기 부모님을 전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유화례는 교사들의 요청에 따라 성경 공부를 인도하면서 
교사들에게 영적인 부흥의 분위기가 일어나는 것은 
희망사항이 아니며, 필연적인 것이라고 확신했다. 

수피아 여학교는 영적인 분위기만이 아니라, 교육 역량도 크게 발전했다. 
유화례는, 소피아 여학교가 정부의 가정교육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지역의 여자 중고등학교 교장들과 교육부 관리가 시범학습에 참관한 일을 소개했다. 

 

이러한 모습은, 유화례가 일제 강점기 지정학교인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가사 실습실의 수준이 형편없다'고 지적받았던 아픈 기억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 기쁨이었다. 

참관 대표단은, 교사와 학생 7명이 함께 2주간 생활하는 교육관을 둘러보았고 
이곳에서 배운 것을, 어떻게 생활 속에 실천하는지 보여주는 시범이 이루어졌다. 

참관단은 여러가지 채소를 기르는 텃밭이 잘 관리되고 있는 모습을 둘러보았고 
채플 강당과 기숙사 시설도 참관했다. 

당시에 기숙사를 갖춘 학교들이 많지 않았기에 
학생들의 신앙과 생활을 지도하는 기숙사 제도는 
참관단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매일 채플과 성경수업이 수피아 여학교 교육과정에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참관단이 인정했다고 유화례는 말했다. 

참관에 마친 후 교육 당국자는, 모든 교사뿐 아니라 학생들도 
이곳을 참관할 필요가 있다고 추천했다. 

유화례는 이러한 좋은 평가들로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면서도 참관단이 주목하진 않았지만, 가장 의미 있는 학교의 활동은, 
기독학생회가 인근 마을의 전도자를 후원하여 전도사업을 지원하고, 
일요일마다 학생들이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기독교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학교의 수준과 실력을 향상시키는 모범적인 학교가 
유화례 와 남장로교 선교부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학교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그러한 학교를 갖추기 위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이제 그러한 학교를 실현해 나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유화례는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유화례는 광주의 선교부 결핵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치료와 전도 활동에 힘입어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복음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게 되고 
결국 신앙을 갖게 되는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 결핵은, 한국 사회에 큰 문제였고 
그래서 선교부는, 의료선교차원에서 결핵전문병원을 시작했다. 

유화례는 당시 한국 인구 2천만명 가운데 50만 명의 결핵환자이고, 
이중 10%가 매년 사망하며, 이러한 사망률은 미국의 100배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광주의 기독병원이 그래함 결핵 요양원으로 개편되면서 Graham TB Sanitarium 
전북과 전남의 유일한 전문 병원이라고 소개했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기독교인이 된 환자 한 사람의 요청으로 
그가 사는 광주 유안동에 전도활동이 시작된 이야기도 전했다. 
의료선교가 전도 활동으로 유기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957년 유화례는 6월 25일자 선교 편지에서 
유화례는 남장로교가 오랫동안 지켜왔던 선교의 원리가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로 점차 느슨해져 
"복음 전파와 전도 활동"이라는 본연의 선교목적에 등한시하게 되고 
제도화되고, 비대해진 기관과 사무행정을 유지하는데 
예산과 에너지가 집중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오랫동안 한국선교 현장에서 일해온 선임 선교사만이 
예리하게 관찰하고 지적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그의 지적을 들어본다. 

"자립의 정신은 해방 이후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1950년대에 남한으로부터 물러난 이래로 
요즘 시기에 심각하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퇴보하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물량의 도움이 미국 정부와 민간 단체로부터 들어와 
교회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력을 느슨하게 하기 쉬워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시대의 경향은, 모든 삶의 부분을 중앙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선교의 대위임을 성공적으로 실행하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이, 본부 사무실을 설립하는데 들어가야 하고, 
정치와 관계된 큰 회의에 들어가는 식입니다.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교가 전도 활동의 역동성을 상실하고 
제도화된 기구 운영과 조직관리에 시간과 돈과 정신이 집중되면 
결국 선교의 열정과 노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예리한 통찰이었다. 

또한 한국 교회가 자립, 자전, 자치의 본연의 태도를 망각하고  *삼자 원칙
외국의 원조와 물질적 도움에 기대지 않는 
독립적이고 건강한 교회라는 소중한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밖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의 도움과 지원에 길들여지면 
결국 헌신을 잃어버리고, 특권과 이권의 길들여지고 만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1957년에 수피아 여학교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즈음 남장로교 선교부는, 선교부의 운영 원칙들을 재정비하면서 
전도, 교육, 의료와 관련한 선교부의 활동과 권한, 
그리고 한국 교회와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본다.

<선교부 운영원칙>
한국 교회가 이러한 발전된 단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은 
우리 선교부와 대한예수교 장로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원리들을 
수정해야 할 필요로 요구한다. 

1 우리는 한국에 있는 두 개의 구별되는 독립적인 기관으로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그리스도의 위임에 복종하기 위한 노력에 
협력하고 있다.

이 둘은 대한예수교 장로회와, 한국 선교부를 통해 활동하고 있는 미국 남장로회이다. 
선교부의 정책들은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2 장로교회의 교회적 기능은 
1) 말씀의 선포
2) 성례의 집례 
3) 목회자 훈련과 안수 
4) 치리의 실행 
5) 자선의 목적에 기여함 

3 선교부의 프로그램이 한국 교회에 직접적인 교회적 기능과 관련한 것이라면 
그러한 기능은 한국교회의 지도와 통제를 따라야 한다. 

4 일반 교육을 위한 기독교 학교, 의료 사역, 특별한 훈련 프로그램과 다른 활동들은 
교회적 기관의 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5 선교부는 특별히 교회적 기능이 아닌 이러한 기독교 활동에 참여하기를 소망하지만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주권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공동의 목적에 기여하고자 한다. 

선교부는 한국 교회가 모든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될 때까지만 
이러한 활동을 계속한다. 

6 아직까지 충분하게 발전하지 못한 영역에 대해서는 
충분한 협력이 5항에 표현된 원칙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한 협력은 한국교회와 선교부가 특별 프로그램을 위해 설립한 연합기관에서 
인력과 재정을 모으는 노력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발전의 시대라고 여긴다. 
결국 한국의 기독교 리더십이 완전한 책임을 감당할 것이며 
선교회는 현재 한국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차례대로 물러날 것이다. 
(*한국 교회의 자치, 자립, 자전을 도우고 있는 것임)

위의 원리들을 살펴보면, 한국교회가 발전함에 따라 주도권을 한국 교회에 이양하고 
한국 교회가 충분한 역량이 성숙되어 모든 책임을 감당할 때까지 
전도, 교육, 의료 등의 사업에서 협력한다는 원칙을 정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주권을 제안하거나 자율성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선교부가 설립하여 운영해온 미션스쿨도 
한국교회와 선교부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협의 기구를 만들어 
공동으로 의결하여 운영하고 
이후 점차 한국 교회와 한국의 리더십이 
학교의 운영에 모든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한국교회가 그만큼 성장했고, 역량이 커졌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수피아 여학교의 정관도 제정하였다. 

<수피아 학교 정관> 
1 수피아 학교 자문위원회는 선교부의 협의회가 임명하는 세례 교인으로 구성되며 
2명은 전남 노회, 한 명은 목포 노회, 한 명은 순천 노회, 
4명은 광주 스테이션이 임명한 위원으로 정한다. 

2 각 위원의 임기는 1년이며, 연이어 2년을 넘지 않는 조건으로 재임할 수 있다. 

3 자문위원회는 매년 3월에 정해진 시간에 모이며 
필요에 따라 위원장 또는 교장의 소집으로 모일 수 있다. 

4 회의 공지는 회의 날짜보다 최소 10일 전에 전달되어야 한다. 
5 정족수는 위원들의 3분의 2로 한다. 
6 자문위원회의 임무는 이러하다. 

-정책 관련 문제, 혹은 정책의 변경과 관련한 문제에 대하여 교장을 자문한다. 
-모든 교수 내용과 행정직원의 기독교적 성격을 판단한다. 
-선교부에 올리는 요청서와 내년도 예산을 검토한다. 

교육위원회에 보고에 따르면, 광주스테이션의 요청에 따라 
1957년 9월 1일부로 수피아 여학교의 교감이었던 정부 선생을 교장으로 선임하고, 
당분간 유화례 와 공동 교장으로 일하도록 했다. 

1958년에 안식년을 앞두고 있었던 유화례는 
이제 완전히 교장 직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미션 스쿨을 선교부가 직접 운영하던 단계에서, 
한국교회와 협력하여 운영하는 원칙들로 바뀌고, 
학교의 리더십이 선교사에서 한국 교회로 완전히 이양되는 시점이었다. 

▲1957년은 수피아의 창립 50주년을 바라보고 있는 해였고, 
유화례 한국 선교 30주년이기도 했다. 

학교에 설립 연도는 공식적으로 1908년이었지만 
1958년엔 유화례가 안식년을 떠나게 되고 
1957년엔 유화례가 오랫동안 교장으로 일하다가 퇴임하는 의미 깊은 해였으므로 
한해 앞당겨서 기념행사를 같이 진행했다.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 동안 행사가 이어졌다. 
유화례는 수피아 동문들의 감사의 말을 들으면서 
마치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느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자기도 모르게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일해왔던 십자가의 선교사였다.

이 행사에서 유화례는 동문들로부터 감사의 선물을 받았다. 
광주에서 만든 아름다운 찬장 안에, 12쌍의 디너 세트 식기가 들어있었다. 

자개로 수놓은 칠기 조각, 한복, 금으로 된 핀, 은으로 된 젓가락도 있었다. 
17일에는 학생들이 준비한 감동적인 공연도 있었다. 

그 안에는 오랜 기간 헌신한 유화례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었고 
유화례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정성스런 선물을 준비한 동문들과 제자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일제 강점기 때 폐교, 해방 후 학교의 재개교, 
한국전쟁의 상처와 폐허를 딛고 다시 시작하는 학교에 모든 과정에 유화례가 있었다. 

유화례는 수피아의 산 증인이었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동문들의 눈물 어린 헌신과 더불어, 유화례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유화례 개인을 위한 행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었고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메신저였다

▲유화례의 마지막 안식년의 여정은 이전과 달랐다.
이 안식년은 유화례의 선교사 공식 은퇴 전 마지막 안식년이었다. 

유화례는 1958년 6월 25일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서울을 출발하여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단 하루만에 미국 시애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유나이티드 항공 비행기를 타고 26일 오전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불과 하루만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곳에 있는 조카 가족과 하루를 보내고 
아메리칸 항공편으로 달라스 공항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도마리아 은퇴 선교사의 집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그동안 못 나누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958년 7월 24일부터 30일까지는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트에서 열린 
세계 선교대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여러 지역의 교회를 방문하며 선교 보고를 하고 
가족과 친지들과 함께 개인적인 시간도 보냈다.

이 기간 중 조지아 디케이터에 있는 선교사 숙소인 미션 헤이븐에 머물면서 
이웃에 있는 컬럼비아 신학교에서 청강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러나 안식년의 보내면서도, 그의 마음은 오로지 한국에 가 있었다. 
이미 한국은 유화례의 고향이 되었다. 

▲저번 안식년은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번에는 13개월의 다소 긴 안식년에 보내고 
비행기 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공항에는 수피아 동문들과 교사들, 그리고 미철 선교사가 마중 나와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유화례는 서울에서 하루를 보내고, 1959년 8월 16일 광주로 복귀했다. 
광주에서도 환영의 열기는 여러 날 동안 이어졌다. 

유화례가 한국을 고향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안식년에서 돌아온 후 유화례는 전도활동에만 전념했다.

이일 학교와 호남성경학교에서 성경을 강의했다. 
이일 학교는 여성 전도자를 양성하는 성경학교이고, 
호남성경학교는 남성 전도자와 목회자를 양성하는 성경학교였다. 

이후 두 학교는 신학교로 발전하여 
이일학교는, 전주에 한예정 성경학교와 합쳐져서 <한일여자신학교>가 되었고 
호남성경학교는 <호남신학교>로 발전했다. 

또한 네 곳의 시골 교회에서 34일간에 걸쳐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자신을 찾아오는 대학생들과 소그룹으로 성경공부를 했다. 

유화례 와 함께 지냈던 선교사들은 그의 삶에 대하여 
엄격함과 따뜻함이라는 두 가지 인상을 갖고 있었다. 

일례로 신임 여성 선교사가 광주 스테이션에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숙소였던 
화이트하우스에 자신이 가지고 온 더블 침대를 2층으로 올리는데 
공간이 비좁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유화례는 '왜 그런 물건을 가져올 생각을 했나요? 
그냥 바닥에서 자도 되지 않아요?'라고 한 소리를 했다. 

그리고 여름 가뭄으로 물이 부족하여, 
선교사들은 물통에 물을 배급 받아서 쓰는 상황이었다. 

유화례는 이 여성 선교사에게, 작은 주전자 하나에  
하루치 사용할 물이라고 가져다 주면서 
빨래하고, 양치하고, 하루 동안 아껴 쓰라고 했다고 한다. 

유화례는 검소함과 소박함이 몸에 배어 
샐러드와 과일 위주로 간단하게 식사를 했으며 
이러한 식습관 덕에 살이 찔 수 없었다. 

유화례의 다소 엄격한 삶의 자세와 금욕적인 태도는 
어려운 시절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형성된 삶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한 생각을 주저없이 이야기했지만 
한번 지적한 것을 두고두고 계속 이야기하는 집요한 성격은 아니었다. 

유화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독신 선교사였지만 해마다 가족이 늘어났다. 
직접 찾아가 보살피고,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주변에 무척 많았다. 

아들같이 여기는 안전도사 가정, 
딸같이 여기는 제자 정금순이 군산에서 운영하는 고아원과 그곳의 150여 명의 아이들, 
동광원 식구들, 
수피아와 이일학교와 호남신학원의 제자들, 
여러 시골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 
그에게 찾아와 함께 성경 공부를 하는 학생들... 
유화례에게 이들은 모두 가족이었다. 

선교부 안에서도 신임선교사들에게는 멘토가 되어주었고 
가족 선교사들에게는 어머니와 할머니로서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1960년에 유화례는 그동안 정들었던 광주를 떠나, 목포 스테이션으로 옮겼다. 
유화례는 당시 상황을 1960년 7월 9일 선교 편지에서 언급했다. 

그가 목포로 옮긴 이유는, 선교사들이 부족해지면서 
선교회 안에서 돌려막기를 하는 상황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광주에서만 활동했던 원로 선교사를, 
마지막 임기를 몇 해 앞두고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발령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선교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인력난으로 목포 스테이션의 선교활동이 위축되는 긴급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목포에서 선교사업을 이끌어 나가야 했다. 

특히 전도사업과 성경학교와 교육사업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이 지역의 선교활동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경험 많고 유능한 선임 선교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누가 보아도 유화례가 적임자였다. 

「이번 이동의 이유는 선교사가 계속 모자라는 문제 때문입니다. 
일종의 피터에게 빼앗아 폴에게 주는 식의 행정입니다. 

이제 이곳은 확실하게 선택된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케네스 보이어 (보계선, 보이열 선교사의 아들) 는, 
제가 한국에 입국하고 몇 년 후에 한국에서 태어난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밥 스미스 (심득민) 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독신입니다. 
이들이 한 집을 같이 쓰고, 제가 한 집을 쓰고 있습니다.
이 둘은 10주간 서울의 어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떠나 있을 것입니다.」 

유화례는 이 편지에서, 또 다시 분열된 한국 교회의 혼란과 아픔을 언급했다. 
1953년의 기장과 예장의 분열 이후 
1959년 장로교회는 또 다시 합동과 통합으로 나뉘었고 
교회는 그때보다 더욱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한국교회와 관계를 주로 담당하고 있었던 남장로교 선교부 전도위원회는 
1959년 1월 31일~2월 3일까지 전주에서 회의를 하면서 
남장로교 선교부 입장을 정리한 성명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 선교부가 강력하면서도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1959년 2월 3일에 열린 선교부 임시회의에서
이 성명서가 미국 남장로교 세계선교본부의 승인을 받은 공식적인 입장임을 표명했다. 
선교부의 성명서는 다음과 같았다.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선교부는 우리의 바람을 이렇게 밝힌다. 
1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순결과 평화를 간절히 바라며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일치가 유지되기를 바란다.

2 우리의 접근과 일의 방법이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와 연합하는 다른 선교부와 
때때로 다를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신앙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바이며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그들과 계속 협력할 것이다. 

3 우리의 모교회인 미국 남장로교는 미국 NCCC와 WCC에 속해 있으며 
우리 교회의 일부 회중과 개인들은 NAE에 속해 있으나 
우리는 이들 그룹의 정책과 주장에 종종 동의하지 않는다. 

4 우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어떤 그룹을 지지하기 위한 
분열적 선동을 선호하지도 않고, 이에 관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5 우리는 총회 신학교가 교회의 삶에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지지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남장로교 선교부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장로교회의 화해와 일치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갈등과 반목의 골이 너무 깊게 패여 있었고 
중재를 위한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노력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분열된 양측을 화해시키기 위한 중재안을 만들어 제시했지만 
반에큐메니칼(합동측) 진영의 강경한 반대로 화해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선교부는, 선교부의 중재안을 기초로 회집된 1960년 2월 7일에 
통합측 총회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를 비판하는 반대파의 폭력 행사, 재산권 불인정, 무차별적이고 불법적인 교회 출입권 행사, 
허위선전 다수의 열망에 대한 무시, 명예훼손에 대하여 유감을 표했다. 

1960년 6월 9일에서 19일까지 전주에서 열린 남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는 
성경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60~70여 명의 반대 시위대가 몰려와 격렬하게 항의했고 
통합(측) 총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일부 학생들은 선교부 회의 장소에 진입을 시도했다. 
이들은 선교부의 회의 진행을 밤낮으로 방해했다. 

이 회의에 참석했다가, 분노한 시위대의 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한 
남장로교 세계선교부 총무 브레들리 박사는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야 했다. 

일부 시위대는 변마지 선교사의 주거지에 난입하여 
몽둥이와 벽돌로 선교사들의 위협했고, 
선교사들은 이들과 대치하며 진입을 막았다. 

결국 이들의 과격한 시위는, 경찰이 출동하고 주동자가 체포되고 나서야 해산되었다. 
합동측에 속한 남장로교 선교지역 교회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고통은 컸다. 

유화례는 반대파(합동측)를 중심으로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이 심해졌고 
분열된 (합동측) 교회에서는, 
교회 설립에 관여하고 오랫동안 봉사하며 교제하던 선교사들의 
출입을 금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유화례는 1960년 유화례 전주에서 있었던 선교부 연례회의에 대하여 이렇게 전했다. 
「우리 선교부의 연례회의는 격렬했습니다. 
그런데 회의장 밖에 시위대로 인해서만 격렬했습니다. 
안에서 우리는 차분하고 질서있게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부상자가 많지 않았고, 다행히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목포에서 유화례는 반가운 동역자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인돈(윌리엄 린튼) 목사가 1960년 8월에 미국에서 사망한 이후 (70세 노환으로)
미망인이 된 사모 인사례가 한국의 선교지로 돌아와 
그의 친정아버지 유진벨이 개척한 목포 스테이션에서 
유화례와 함께 전도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유화례는 오랜 선교사로 활동한 경험과, 탁월한 한국어 언어 실력을 갖춘 인사례가 
목포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며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서도 여전한 인사례의 믿음과 용기와 활발함은 
목포 선교사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고 말했다. 

본래 유화례가 목포의 성경학교 교장으로 일했지만 
인사례가 목포로 부임한 후, 인사례가 목포 성경학교 교장을 맡았다. 

목포에서 유화례는 광주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 
항구와 바다와 섬이 많은 이 지역에서, 항구 지역으로 순회 전도를 하거나 
페리를 타고 섬 선교를 했다. 

배로 이동하는 섬선교는 짧으면 2시간에서, 길면 12시간을 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고, 
무엇보다 날씨와 기상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는 어려운 사역이었기에 
당시 68세의 연로한 여성 선교사가, 새롭게 도전하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61년경

그러나 뒤로 물러날 유화례가 아니었다. 
목포에서 첫 섬 선교를 하게 된 곳은, 배로 3시간이 걸리고 
다시 1시간 반을 걸어서 가야 하는 작은 교회였다. 

이곳의 교회는, 경험이 부족한 장로와 여러 집사들이 이끌고 있었고 
전도자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에는 목포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5명 있었고 
계속 학생들을 성경학교로 보낼 계획이었다. 
작지만 전도자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알찬 교회였다. 

또 다른 곳은 배로 7시간이 걸려서 도착했다. 
유화례의 일행은 정시에 출발했지만, 4시간 반이 걸리는 여정 중 
엔진 고장으로 배가 멈추는 바람에, 기관사가 배를 부두에 대었다. 

수리를 다 마치고 나니, 썰물 때가 되어서, 또 2시간 반을 기다려야 했다. 
어렵게 도착한 마을은, 북한 피난민을 위한 미국의 원조로 세워진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염전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소금 생산이 비축량을 초과하게 되면서 
정부가 1년간 염전 폐쇄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생계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 마을에서도 전도활동의 성과가 좋았고 
불신자들도 복음 전도 활동에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들 중 몇 사람은, 새벽 5시 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헌신적인 전도자와 성실한 집사 두 사람이 교회가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섬 선교 외에도 유화례는 목포의 남장로교 미션스쿨인 정명여학교에서 
600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5일간 부흥회를 인도했다. 

장소만 바뀌었을뿐, 그의 선교활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산과 바다, 시골과 섬, 학교와 교회... 복음 앞에 가릴 것이 없었다. 

▲1961년 10월 서신에서 유화례는, 목포에서 전도 활동의 일상을 소개했다. 
68세의 여성 선교사의 일상은 이러했다. 

「목포로 옮긴지 1년 만에 다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방 3개와 화장실을 갖춘 아래층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어 
이사가 비교적 쉬었습니다. 
작지만 편안하고, 체구가 작은 나 혼자 살기에는 꽤 넓은 집입니다. 

18일간의 섬 전도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리를 마친 후, 곧바로 23일간의 여정으로 전도여행을 다시 떠납니다. 

이번에 갔던 전도여행은 가가호호 방문하는 것으로 진행되었고 
우리 일행은 거의 모든 곳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매우 적은 사람들이 응답할 뿐이었지만 
이 마을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 전도사가 찾아와서 
'나중에 전도의 결실이 나온 것을 확인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조상 제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사의 무용성을 알고 있지만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관습에 맞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연달아 겹친 두 차례의 닷새 시골 지역 사경회와 
대전과 광주에서 두 차례 있었던 위원회 모인 후에 
집에서 자유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선교 여행의 두 번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후 2시가 지나서 도착했고, 가가호호를 돌며 2시간 반동안 전도지를 나눠주며 
저녁 집회에 초청했습니다. 

60명 이상이 참석하였고, 현관이나 마당 벤치 않거나 
혹은 일어서서 청량하고 시원한 10월 밤에 야외에서 진행된 예배시간 내내 
매우 조용하게 복음의 메시지를 경청했습니다. 
그 후에 3마일을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10시반이었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내일 교회에서 있을 3번의 주일 예배를 준비하고 
융판을 활용하여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숙소 마당에서 들려주려고 합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이웃에 있는 어른들에게 비슷한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번 2주간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금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어서, 
그리고 내 아파트에 안락함을 누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겨울철에 날씨의 제약으로 인하여, 섬 지역 전도활동이 어려울 때 
유화례는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면서 전도 활동을 이어갔다. 

봄이 되어 날이 다시 풀리자, 1962년 3월에는 제주도에서 
4개 장로교회가 연합으로 준비한 사경회를 인도했고 
또 다른 3개 교회의 연합사경회를 인도했다. 
목포에서 제주까지는 배로 9시간을 가야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4월에는 도초도와 우이도에서 사경회를 인도했다. 
그는 열악한 교통편과 위험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큰 섬과 작은 섬을 가리지 않고 오가며 부지런히 전도했다. 

왜 유화례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전도 활동을 했을까? 
과연 유화례에게 전도 활동은 무슨 의미였을까? 

단순히 사명의식과 책임감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전도를 향한 유화례의 열정과 정성은 너무나 지극했다. 

그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섬 선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의 모든 문제의 해답,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전하는 것이 전도였다. 
시대를 살리는 정신과 비전이 복음안에 있었다. 

교회는 이 시대의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무너지고 만다. 

교회는, 이 시대가 사람들에게 주는 위협과 도전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유화례의 전도에 대한 철학이었다. 

그의 말이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을 전할 문이 아직도 열려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이 시대의 수많은 질문에 유일한 해답입니다. 

우리 교회가 비전이 부족하여, 이 도전에 응답하는데 실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전이 없으면 백성은 망합니다.」 

69세의 선교사로서는, 그가 감당하고 있는 전도의 일정은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다. 
당연히 건강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1962년 8월에 유화례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예전부터 소화기관에 문제가 있었고, 상태가 좀 더 심해졌기 때문에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고, 엄격한 식이요법을 하고 
조속한 시일내로 수술할 것을 권고받았다. 

그리하여 1962년 10월 31일 유화례는 
전주예수병원에서 병원장 설대위 David John Seel 박사의 집도로 담낭제거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 유화례는 선교사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당시 선교부 규정에 따르면, 70세가 되면 그만두어야 하고, 
연장해야 할 경우 3년 동안은 해마다 허락을 받아야만 하며 
70세가 못되었더라도 선교사가 된지 40년이 지났다면 그만두어야 한다..
라고 유화례는 알고 있었다. *1893년생, 1927년 입국, *1962년이면 35년차 사역

선교사 정년의 연장할 의사가 있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유화례는 먼저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물론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다시 한국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임무와 책임을 맡은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전도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개인전도자의 자격으로 들어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