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3 - 그 한 사람 - 고성준 목사 2017.09.21. YouTube
19:30초부터 녹취
◈룻, 그 한 사람 (룻3강) 룻2:5~12 데스티니24강 ☞시리즈 보기
오늘은 이 디바인 커넥션(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면서 우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이, 정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만나게 되는 만남이고
우리는 아무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는 뭘 해야 되는 건가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보내시고,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모엘을 보내셔서
내 머리에도 기름 부어서 왕으로 세우시는 건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내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디바인 커넥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징들과 조건들이 있어요.
이 조건이 전혀 만족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디바인 커넥션이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디바인 커넥션이 일어나는 특징들과 조건들을 잘 알고,
그냥 거기에 충성되게 임하는 거예요.
거기에 충성되게 임하다 보면, 하나님의 타이밍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우리에게 이런 만남들이 생기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안 생길 수도 있어요. 하나님의 주권이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그냥 감사하게, 충성되게, 성실하게,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도 분명히 페이버 favor 를 주시고,
또 사무엘을 보내주시고, 보아스를 보내주셔서.. 오벳을 낳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분별하는 것도 좀 필요해요.
수많은 만남들이 있는데, 어떤 게 디바인 커넥션인지 어떻게 분별하는가요?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싹 흘려보내는 경우도 있지요.
또 보내주신 사람이 아닌데, 그를 딱 붙잡아 가지고 인생이 꼬이는 경우도 있고요.
이런 분별하는 눈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디바인 커넥션의 특징들, 또는 조건들 세 가지를
오늘 함께 살펴보고, 같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1. 디바인 커넥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조건은
보아스를 만나는 장소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디바인 커넥션이 일어나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꼭 장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어떤 영역, 또는 어떤 사역, 또는 어떤 분야, 또는 어떤 장소,
하여간 디바인 커넥션이 일어나는 영역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곳에 머물러야지 보아스를 만날 수 있지
그곳 밖에서는 보아스를 만날 수 없어요.
룻기에 보면 이 영역이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하나님 안에서 만나는 만남이어야 되고
둘째는 모압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만났고
셋째는 보리 줍기 위해 나갔다가 만났다는 거예요.
▲첫째는 보아스와의 만남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만남이지,
하나님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만남은 아닙니다.
디모데와의 만남도, 즉 영적인 제자와의 만남도
디바인 커넥션이 되는, 영적인 만남이었습니다.
그냥 사교적인 만남이라든지, 반상회에서 만나서, 직장에서 만나서...
이런 사이좋은 관계, 마음이 잘 통하는 동생... 이런 거 가지고 안 된다는 거예요.
반드시 복음안에서, 영적인 환경 안에서 만나는 만남 만이
디바인 커넥션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모든 디바인 커넥션은 하나님 안에서 만나는 만남입니다.
그냥 우연히 만나게 되는 기이한 인연.. 이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업 잘 되게 도와주는 사업 파트너,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니에요. 이런 건 아니에요.
이게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이 원리를 명확하게 해두지 않으면
오해들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나는 진짜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진짜 기가 막힌 만남을 가졌어요.
이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고...'
그런데 들어보면 예수는 안 믿는 사람이에요.
이런 건 없다는 거예요. 이건 디바인 커넥션이 아니에요.
인생 가운데 꼭 만나게 하시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만나는 만남 가운데 이루어지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 가운데 디바인 커넥션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여러분이 눈 돌리시면 안 되고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라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두번째, 룻이 보아스를 만난 것은, 모압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모합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보아스는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우리 인생의 보아스, 즉 디바인 커넥션이 이루어지는 곳은
하나님이 우리를 두시기로 약속하신 곳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두시기로 약속한 땅이라는 거예요.
나오미와 룻은 나중에 만났지만
나오미와 그 아들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약속의 땅을 떠납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분명히 모세에게 명령하셨던 것이 뭐냐면
'이스라엘에게 준 땅은 가나한 땅'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가나안 땅을 떠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었죠. 먹을 게 없어졌어요.
여러분, 기근 들어서 도망가는 이야기가 성경에 여러 번 반복되는 거 아세요?
아브라함 때 그랬잖아요. 이삭도 그랬고, 또 나오미도 그랬고...
계속 반복되는 얘기가 나오죠.
분명히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머물라고 얘기하셨거든요.
그런데 먹고 사는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여기 있으면 먹고 살 수가 없어 보이는 거에요.
그런데 저기 보니까 저기는 먹을 게 많은 거예요.
애굽 땅, 모압 땅.. 거기는 비가 많이 와서 먹을 게 많아요.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떠나요. 약속의 땅을 떠납니다.
그런데 영원히 살려고 떠나는 거는 아니었어요.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그냥 잠깐 가서 피하려고 떠난 거였어요.
그런데 이 잠깐 피하려고 떠난 것이, 이들의 인생 가운데 대가를 치르게 하죠.
거기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거기서는 보아스를 만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거기서 잉태한 것은 사망밖에 없었어요.
나오미는 자기 가족이 다 죽게 되는... 정말 문자 그대로 사망을 잉태하죠.
△여러분, 먹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두신 곳을 떠나는 것처럼 어리석은 건 없어요.
먹고사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 때 해결해 준다고 약속하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두신 곳을 떠나는 게 아니에요.
이 이야기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직장에 한번 취직했으면, 절대로 떠나지 마라'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기까지 인도해오신 계획들이 있는데,
그 계획을 내가 알면서도 (기근 등의 이유로) 벗어나는 거예요.
'여기를 떠나서 가면 안 되는데...' 하면서 떠나요.
△제가 상담하다 보면, 이런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래도 믿음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저한테 와서 물어봐요.
'목사님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맞습니까?'
그러면 제가 '글쎄 기도해 봐야겠지만,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면 아닌 것 같으면, 여기서는 멈춰야 되는데
두 달쯤 있다가 또 저를 찾아와요.
'목사님이 이거 주님의 뜻이 아닌가요?'
그래서 제가 '저번 때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런가요?'
그리고 두 달 있다가 또 저를 찾아와요.
그러면서 결국엔 그 길로, 자기 육신이 원하는 길로 갑니다.
그건 뭐냐 하면 '알면서 가는' 거에요.
거기가,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는 곳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온갖 합리화를 다해서.. 결국은 그 길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갔을 때,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보아스가 아니에요.
거기는 보아스가 안 나타난다는 거죠. 모합당으로 가는 거예요. 애국으로 가는 거고요.
이렇게 해서는 절대 보아스를 만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건 뭐냐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두신 곳이 있어요.
직장이 됐든, 가정이 됐든, 아니면 사역자로 불렀든, 선교사로 불렀든,
하여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곳이 있고,
그 부르신 곳에 가서 머물 때.. 보아스를 만납니다. 디바인 커넥션이 일어나요.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이렇게 정해 놓고서
'여기서 절대로 벗어나면 안 돼!' 이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들이 분명히 있죠.
그렇지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가나안 땅이 있다는 거예요.
'너는 이 안에 머물러야 돼!
이 범주 안에서 네가 선택하고, 여기서 네가 머물러야 해.
왜냐하면 너를 향한 내 계획이 있기 때문이야!'
이건 여러분이 옮기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아는 목사님 중 한 분이, 아주 좀 독특하신 목사님이 계셨어요.
이 분이 원래 직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은혜를 받아서 목회를 시작하신 분인데
아주 신실하신 분이세요.
그래서 선교사로 나가셨어요. 중국에 가셨는데
중국에서 정말 신실하게 목회를 하셨어요. 그런데 목회가 안 되는 거예요.
하는 일마다 꼬여요. 정말 이상하게 꼬여요.
열심히 열심히 해서 사람 좀 모으려고 하면, 사기 당해 가지고 교회가 풍비박산나고...
또 열심히 해서 뭐 좀 하려고 해서 건물 구해놓으면 불이 나고... 막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분이 목회를 하다가 너무 너무 힘들어 가지고..
일단 목회도 잘 안 되고, 선교비도 늘 부족하고 그래서
조그맣게 사업을 시작하셨어요.
그런데 이분이 사업을 다시 시작하시고, 대박 치신 거에요.
돈을 어마어마하게 버셔 가지고... 그 돈 번 스토리가 있어요.
이분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쪽 분야에서 일하시는 장로님 한 분을 만나게 돼요.
그런데 이 장로님이 이분을 도와주기 시작하세요.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이분이 숙박업을 시작하셨는데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큰 호텔을 몇 개씩 사고 이랬어요.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선교사들을 엄청나게 후원하고...
그런데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여러분 우리를 두신 곳이 있다는 거예요.
꼭 모든 사람이 목사 일을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약속의 땅이 있어요.
거기 머물러야지 자기 인생이 펴지는 거에요.
거길 머물러야 보아스도 만나게 되고
거길 머물러야 오벳도 낳게 되는 건데
이걸 잘못 분별하면, 이게 아주 그냥 인생에 열매가 없는 거예요. 황폐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보아스를 만나는 곳은 모압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에요.
여러분 결국 우리 인생은 은혜로 사는 거예요. 은혜로!
이 영어로 보면 favor라는 단어가 있는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예요.
우리말로는 은총, 또는 은혜.. 이렇게 번역되는데
이 favor의 정확한 뜻은 뭐냐 하면 '편애'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편애하는 것, 이런 걸 favor(페이버)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면 '결국 인생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페이버(호의, 은총)가 있어야 되더라고요.
아무리 자기가 노력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노력을 전혀 안 해도.. 잘 되는 사람도 있어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페이버가 있어야 돼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어떻게 해야 성공하고,
즉 성경적 의미에서 성공, 가장 충만하게 살 수 있는가요?
정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페이버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페이버가 없으면, 죽도록. 막 노력해도.. 별로 열매가 없어요.
밤새도록 고기 낚았지만 한 마리도 못 낚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기에다 던져라' 그랬더니 엄청나게 물고기를 잡았죠.
여러분, 하나님의 페이버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페이버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페이버가 있으려면,
하나님이 가라 그러신 곳에 가서 있어야 돼요.
모압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보리주우러 가서 보아스를 만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삶의 현장 가운데서 만났다는 거예요.
룻이 어느 날 베들렘으로 돌아왔죠. 모압에서부터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는데
'오케이, 이제 약속의 땅 가운데로 왔고, 어머님의 백성이 내 백성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고 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믿고 왔어요. 그럼 지금부터 저를 책임지십시오!'
그러고 가만히 앉아서 금식하고 기도하고 40일 철야하고 있을 때
보아스를 만난 게 아니었어요. 보아스를 어디서 만났어요? 보리주우러 가서 만났다는 거죠.
먹고 사는 삶의 현장에서 만났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데,
이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 삶의 현장 가운데 만나게 하십니다.
삶의 현장 가운데 만나게 하세요. 보리 줍다가 만나게 하신다는 거예요.
삶의 현장 가운데 충성되게 보리를 줍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만나게 하시는 거지,
다른 때 만나게 하신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리 줍는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에게는,
보아스를 만나는 기회도 없습니다.
열심히 보리를 줍는 충실함이, 룻이 보아스를 만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라는 거죠.
◑2. 룻이 보아스를 만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룻에게는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어떤 게 있었어요.
여러분, 보아스가 룻을 보는 순간, 룻에게 반했습니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뒤에 진행되는 스토리를 보니까, 분명히 룻에게 반했어요.
룻에게 확 끌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여러분, 보아스가 우연히 룻을 봤다고 해서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 다 디바인 커넥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하죠.
그냥 보아스가 '저기 가난한 여인이 우리 밭에서 이삭을 줍는구나'
그러고 넘어갔으면, 아무 일도 안 생겼을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룻만 있었던 게 아니고,
많은 가난한 여인들이 와서 이삭을 줍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가난한 자들과 과부를 위해서 추수할 때 밭을 다 추수하지 말고,
모퉁이를 조금 남겨두라'고 명하셨어요.
그리고 추수하다 보면, 땅바닥에 흘린 게 있는데, 그런 건 줍지 말라고 돼 있어요.
추수할 게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예요.
그래서 추수할 때 부자들의 밭에는,
고아들, 과부들, 빈자들이 거기에 따라다녔어요.
추수꾼들이 추수할 때, 땅에 떨어진 것들을 이렇게 줍는 거죠.
그래서 보아스도 부자였기 때문에, 추수 때 따라다니는 여인들이 많았다는 거예요.
룻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많은 여인들이 따라가면서 보리 이삭을 줍고 있었어요.
유대는, 보리 추수를 제일 먼저 하죠. 맥추절.
그 다음에 밀추수, 그 다음에 과일의 추수... 해서 추수가 마치죠.
룻도 그냥 수많은 여인 중에 한 명이지, 뭐 다른 게 없지요.
그런데 보아스의 눈에, 룻이 딱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에게 끌리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보아스가 왜 룻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여자가 그렇게 관심 가질 만한 여자가 아닙니다.
처녀도 아니고 과부고요. 또 부자는 더더군다는 아니고.. 거기에다 이방여인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이 보아스가 관심을 가지니까
룻이 '나 같은 이방여인에게 왜 관심을 갖습니까?' 그러고 묻잖아요. 룻2:10
그러니까 여러분, 유대인들을 조금만 이해하면 금방 아실 거예요.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도 인종차별이 좀 있잖아요.
우리나라도 외국인 근로자들이나 일하러 온 노동자들 볼 때
굉장히 차별이 심하죠.
그래서 부자 유대 남성이 '노무자로 일하러 온 외국 여성에게 관심을 보인다'
이건 굉장히 특별한 일이잖아요.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왜 보아스가 룻에게 반했을까요?
본문 말씀을 보면 두 가지 이유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룻2:5~7절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종들이 보아스에게 룻을 소개하는데
'아침부터 와서 잠깐 쉰 것 빼고는 지금까지 계속 일한다'는 거예요.
룻에게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있었어요.
그건 충성된과 성실함이 있었다는 거예요.
꼭 충성된 것과 성실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겠죠.
하여간 여러분의 보아스가, 여러분에게 눈을 딱 주게 되기 위해서는
디바인 커넥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뭔가 남다른 게 있어야 되죠.
여러분이 보아스를 찾아 헤맨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보아스가 여러분에게 매력을 느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그 디바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어요.
보아스가 보니까, 룻이라는 저 이방 여인이
자기 것도 아니고, 시어머니를 먹이려고 그런다는데
추수 밭에 와 가지고, 이 더운데 잠시 쉬지도 않고, 저렇게 열심히 일하다니...
'뭐가 좀 다른데?' 이렇게 마음을 감동시키는 뭐가 있었다는 거죠.
여러분, 여기에 사실은 디바인 커넥션, 만남의 비밀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만남은, 내가 유력한 사람을 쫓아다닌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유력한 사람을 쫓아다녀도,
아무리 유력한 사람이 여러분 주변에 왔다 갔다 해도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관심을 안 가지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디바인 커넥션은,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디다인 커넥션, 신적인 만남의 비밀은, 내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남다름'에 있어요.
'다른 사람은 저런 상황이면 다 화내고 분노가 폭발할 것 같은데,
왜 저 사람은 저런 상황 가운데서도 화를 안 낼까?'
'저 사람은 왜 저런 상황 가운데서도 기꺼이 손해를 볼까?'
'저 사람은 저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챙길 생각이 날까?' 이런...
하여간 그 사람을 바라볼 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하지?'
뭔가 매력이 느껴지고, 뭔가 향기가 나고,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거죠.
이것이 보아스가 룻을 만나게 되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Divine Connection이 일어나는 것은
뭔가 다른 게 있는 거예요.
-남들 다 속이는데, 그는 속이지 않는 정직함이 있든지
-남들 다 요령껏 하는데, 요령 부리지 않는 성실함이 있든지
-남들 다 자기 잇속을 먼저 챙기는데,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따뜻함이 있든지..
하여간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뭐지? 저 사람은 왜 다르게 살지?'
그럴 때, 여러분의 보아스가, 여러분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할 겁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왜 보아스와의 만남이 잘 안 일어나냐 하면,
하나님이 보아스를 내게 보내주셨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시은 수많은 보아스들이 그냥 내 곁을 지나가 버리는 거예요.
왜요? 별로 특별한 게 없는 거에요.
저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수많은 보아스를 하나님이 보내주셔도
보아스가 룻에게 집중할 만한 그게 없으면, 결국 지나쳐 가버린다는 거예요.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보아스를 만난다는 거에요.
빌4:8~9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게 바울의 권면 이거든요. 뭐예요?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정직하고,
무엇에든지 깨끗하고,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고, 무엇인지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하라'는 거죠.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즉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실 거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페이버가 있을 거고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주실 거라는 거예요. 성경의 약속이에요.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 페이버와,
보아스를 만나는 이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즉 빌4:9절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빌4:8절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그게 안 되고 있으면, 보아스가 룻을 봐도, 그냥 룻은 one of them 이에요.
추수꾼들을 따라가는 수많은 여자 중에 한 명이지,
룻에게 눈길을 줄 리가 없다는 거죠.
여러분, 이 성경 말씀대로 사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보아스를 만나는 거예요. 이게 만남의 비결이에요.
무엇에든지 참되게 하십시오. 속이지 마세요.
무엇에든지 경건하세요. 무엇에든지 옳게 하세요.
무엇에든지 정결하고, 무엇에든지 사랑받을만하고, 무엇이든지 칭찬받을만 하게
행동하세요. 이것이 성경의 권면이에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아가고 있을 때,
어느 날 사무엘을 내게 보내시고, 보아스를 보내셔서
여러분의 인생의 길을 여실 줄 믿습니다. 아멘.
◑3. 룻이 '사람의 축복, 만남의 축복'을 누린 세 번째 이유는
뭐냐 하면 관계를 소중히 여긴 거예요.
룻은 손익에 따라 관계를 맺고 끝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 관계를 맺으면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이었어요.
룻은 그런 의미에서 언약이 뭔지 아는 사람이에요.
나한테 도움이 되면 관계를 맺었다가, 아니면 끊고.. 이런 사람이 아니고,
한 번 관계를 맺었으면 그 관계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힘드나 어려우나
끝까지 유지할 줄 아는 '언약적인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룻이 '만남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세 번째 비결입니다.
루시 나오미를 쫓기로 결정하고 베들레힘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베들렘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화려하고 보장된 삶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두 여인은 알거지가 돼서 돌아온 거예요.
재산도 다 날리고, 가족도 없고...
그래서 보리주우러 간다고 하는 것은, 쉽게 얘기하면 빌어먹는 거거든요.
빌어먹는 것 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나오미의 고향으로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1:21~22절에 보면 나오미가 이렇게 얘기하죠.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가 정말 저주받았다고 생각되는 그런 상태에서 돌아온 거죠.
가족도 다 죽고 아무도 없어요.
제가 이 말씀을 읽는데, 나오미의 비통한 심정이 느껴지더라고요.
나오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비참하고, 외롭고, 어디 기댈 데도 없고...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자살할 상황이죠.
그런데 이때 여러분, 만약 나오미에게 롯까지 없었으면, 진짜 힘들었겠지요.
하나님은 은총을 다 거두지 않으신다고...
나오미에게 최후로 하나 남은.. 룻을 하나님은 예비해 주셨습니다.
맞아요. 여러분, 나오미에게 룻은 바로 그 한 사람이었어요.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목숨을 끊고 그렇죠.
우리나라가 전 세계 자살률 1위인 거는 아시죠?
특별히 청소년들 가운데 자살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통계가 '기준을 어디서 끊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많이 달라지는데,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한 해 코로나로 죽은 사람은 3만명 초반 대,
같은 해 자살로 죽은 사람은 3만명 후반 대였다고 합니다.
온 국민이 연일 뉴스에 방영되고, 모든 초미의 관심을 집중했던 코로나보다
자살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거죠. 그런데 코로나는 온 국민이 관심을 가졌는데,
자살에 관심가지는 사람들은 당사자 말고는 거의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이 자살할 때 보면 공통적인 게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주변에 자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은 자기 목숨을 끊는대요.
자기 얘기를 들어주고, 진심으로 자기 고통에 공감해 주고,
자기 사정을 함께 얘기해 줄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자살을 선택하진 않는대요.
어쨌거나 거기서 뭔가를 해결을 해요.
그런데 이 마지막 한 사람이 딱 없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소망이 그냥 끊기는 거예요.
그래서 자살할 때 보면,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그러니까 부모한테도 얘기 못하고, 형제한테도 얘기 못하고,
선생님한테도 못하고, 친구들 중에도 아무도 자기하고 얘기할 사람이 없을 때...
거기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죠. 그 한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거라는 거예요.
그 한 사람, 그러니까 나오미는 룻 한 사람만 있으면 생명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 한 사람이 돼 주는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잖아요.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
아무도 대화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찾아가서 그 한 사람이 돼 주세요.
세리에게 찾아가서 그 한 사람이 돼 주시고
창기에게 그 한 사람이 돼 주시고
이게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이 살아가셨던 방식이라면
제자인 우리들에게도 요구되는 거겠죠. 그 한 사람이 돼 주라는 거예요.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돼 주는 거예요.
의지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돼 주는 것이고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교회의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교인들 수백명 전부와 다 그런 관계를 맺지는 못하지만,
그런 의미 있는 관계들이 삼삼오오 맺어져 있는 것이
교회가 유기적인 관계라는 뜻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여러분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회중 가운데 몇명이라도 있고,
정말 여러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가운데 있고,
이게 교회의 순기능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 중에 혹시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나는 이 교회에 나오지만, 진짜 내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저기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이야!'
그건 뭔가 잘못된 거예요. 그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진짜로 의지하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 중에 있으면,
죄송하지만 여러분의 신앙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한테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걸 털어놓고
의지한다? ...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세계관 자체가 다른데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그거는 나도 하나님을 별로 안 믿고 있다는 얘기죠.
여러분들이 진짜로 의지하는 그 한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이다'
그러면 이건, 여러분이 빨리 회개하시고 예수 진실로 믿으셔야 돼요.
이건 예수 안 믿는다는 뜻이에요.
아니, 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걸 믿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살라고 하신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데,
어떻게 내 안에 있는 고민과 어려움과 힘든 일들을...
주님을 모르는 사람과 함께 공유될 수 있겠어요? 이게 가능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뭐하고 똑같냐 하면,
자녀 다섯 명을 키우면서 자녀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주부가,
11살짜리 초등학생 소녀를 의지하고, 자기 마음의 고민을 다 털어놓고 얘기하는..
이런 거하고 비슷한 거예요. 이게 여러분 가능하겠어요?
그 애는, 그런 주부의 삶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애니까요.
▲그러나 이걸 넘어서서, 여러분이 진짜로 의지하는 그 한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물론 상황에 따라서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없을 수도 있어요.
그 사람이 멀리 외국에 있거나 하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그 한 사람이 이 교회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교회에 잘못 와 계신 겁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예외는 있겠죠.
그렇다면 그 가까운 곳에 있는 그 사람과, 여러분이 한 공동체로 같이 있으셔야지,
그 한 사람과 같이 함께 가도록 지으신 게 하나님의 계획인데,
그걸 떠나서 왜 몸은 여기 와 있고, 마음은 거기 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교회의 본질은 뭐냐면
함께 의지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서로에게 그 한 사람이 돼 주는 관계가 존재하는 곳이 교회예요. 아멘!
우리 안에서 여러분들은 그 몇몇 사람을 찾으시고
또 여러분들이 그 나오미나 룻과 같은 사람이 되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룻과 나오미는 서로에게 그런 한 사람이 되어준 거죠.
▲보아스가 룻에게 반했던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룻이 나오미에게 어떻게 한지를 보고 들은 거예요.
2:10~11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보아스가 룻에게 반한 이유는, 룻이 나오미에게 한 것을 본 거예요.
룻이 나오미에게 '그 한 사람'이 되어준 것을 본 거예요. *설교제목
그리고 이것을 볼 때 보아스의 마음 가운데
감동 내지는 안심이 된 거예요.
'이 여자라면 괜찮겠다' 하는 감동이 있는 거죠.
'이 여자는,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바짝 다가왔다가
단물 다 빼먹고 나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구나.'
이런 확신이 온 거죠.
보아스하고 룻은 아마 나이 차이가 좀 컸을 거예요.
그런데 이 룻이 늙은 나오미,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는 이 노인한테 하는 걸 보니까,
'내가 늙어도 이 여자가 박대하지는 않겠구나' 이게 확신이 온 거죠.
그래서 보아스에게 감동이 있었던 겁니다.
하여간 여러분 기억하셔야 될 게 있는데 뭐냐면
'여러분이 나오미에게 하고 있는 걸, 사람들이 (보아스 포함) 보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보아스에게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보아스에게는 다 잘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에 중요한 사람이고, 내 인생에 유력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한테 잘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것으로는 디바인 커넥션이 안 일어나요.
보아스에게 잘 해서, 보아스를 만나는 게 아니에요.
룻이 나오미에게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걸 본다는 거예요.
그걸 본 사람들이, 결국 룻을 보아스에게 데려다 주는 거예요.
보아스가 뭐라 그래요? '네 소문을 내가 들었다'는 거예요.
'네가 시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는지 내가 들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내게 오벳을 낳아줄 보아스는 누구인가?'
아무리 찾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보아스를 만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나오미, 나의 섬김과 도움이 필요한 나오미를 돌봐야지,
보아스를 찾아 다닌다고 해서, 보아스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룻은 그저 나오미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나오미에게 '그 한 사람'이 돼주고 *설교제목
나오미가 먹을 게 필요하니까
자기가 더운 땡볕 아래 나가서 보리를 주워서 시모 먹을 것까지 다 마련했어요.
그랬을 때 거기서 보아스를 만나게 하신 것이지
스스로 보아스를 찾아 헤매지 않았어요.
이것이 여러분, 디바인 커넥션의 진짜 열쇠예요.
보아스는, 룻이 나오미와 함께할 때, 그냥 만나게 되는 겁니다.
소문 듣고 찾아오는 거예요.
여러분의 보아스가 오늘 여러분의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소문은 어떤 소문이에요?
보아스에게 감동을 주는 소문입니까? 아니면 불쾌감을 주는 소문입니까?
여러분 디바인 커넥션이 일어나는 열쇠가 있어요.
그건 뭐냐면 보아스가 그 소문을 듣는데, 자기 마음에 감동이 되는 거예요.
'아, 이 여자라면 괜찮겠다'
특별히 결혼 안 하신 분들, 어떻게 여러분의 보아스를 만나는지 아세요?
보아스에게 환장해서 그를 좇아다닌다고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여러분이 어떤 향기를 내고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여러분들이 보아스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하게, 나오미에게 섬기고 있는가요?
나오미가 누구입니까?
나오미는 '그 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나오미에게 '그 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뭐 크고 위대한 일만 자꾸 찾지 마시고,
주변에 여러분에게 눈에 띄는 사람,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그 사람을 충성되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룻이 나오미에게 하듯이 그렇게 대하면,
그랬을 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보아스가 이 소문을 듣게 하시고
여러분에게 보아스를 소개시켜 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재미있는 게 뭐냐면 2:1절을 보면,
룻이 나오미를 선택하잖아요? 나오미를 1장 끝부분에서 선택하고 나면
바로 보아스가 등장하는 거 아세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딱 기다리고 계신 거에요.
룻이 나오미를 선택하느냐/ 안 하느냐를 지켜보고 계시다가
딱 선택하는 순간 '오케이!' 그러고 바로 보아스를 보내셨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보아스를 만나게 되는 비밀인 줄 믿습니다.
▲룻기의 또 다른 주제는 뭐냐면, 룻이 관계를 언약적으로 맺었다는 거예요.
쉽게 맺고 쉽게 끊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한 번 맺은 관계에 충성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룻을 보면, 관계를 깨지 않는 얘기입니다. 관계를 깨지 않는 얘기예요.
룻은 나오미와 맺은 관계를 깨지 않았어요.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한 번 이삭 줍기 시작한 것을, 다른 데로 옮기지 말라고 해요.
옮기지 말고 계속 거기서 하라고 그러죠.
2: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결국 룻과 보아스가 결혼을 통해서 영원히 함께하는 관계가 되는..
이것이 룻기의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뭐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거예요.
쉽게 맺고 쉽게 끊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어떻게든지 지키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성경에서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