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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10

LNCK 2023. 12. 17. 13:16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 Part 10. 은퇴 후 새로운 헌신과 마지막 생애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10        지난 호 보기 

Part 10 : 은퇴 후 새로운 헌신과 마지막 생애 

미국으로 떠나면서 유화례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마음으로 
광주에서 살 집을 마련해 두고 싶었다. (은퇴 후에 자유롭게 섬기고 싶음)

그리하여 남장로교 재단법인에 문의하여, 광주의 선교부 땅을 구매할 수 있는지 
타진해 보았다. 당시 한국법에 따르면, 외국인은 토지를 구매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장로교 선교부는 법인으로 재산 관리를 하고 있었고, 
개인 자격으로는 토지 매매가 어려웠다. 

유화례는 가깝게 지내며 도움을 주고받던 조성순과 이순정 부부에게 
구매 자금을 주고, 이들 부부도 일부 자금을 보태어 
자신들의 이름으로 토지를 구매하고, 
이후에 유화례가 한국에 돌아오면 집을 짓고 함께 살기로 했다. 

이순정은 유화례가 전도여행을 다닐 때, 늘 동행하던 동역자였다. 
유화례는 1963년 7월에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서울에서 수피아 여학교 제자들과 만나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뉴욕으로 돌아가, 그곳에 아직 살고 있는 친지들과 시간을 보냈다.
 
유화례는 1963년 12월 31일에까지 선교사 임기를 연장하지 않고 
70세로 정년 은퇴를 함으로써 
37년의 선교사역을 끝으로, 남장로교 한국 선교부와는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그러나 미국은 더 이상 그의 고향이 아니었다. 
가족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었고, 그가 머물 곳조차 없었다. 
한국에서 37년간 살았던 유화례의 모든 관계들은 한국에 있었다. 
한국이 그의 진정한 고향이 된 셈이다. 

미국에서 유화례는 자신이 낯선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 장로교 은퇴자 숙소가 있었지만, 
유화례의 연금으로는, 그곳에서 생활할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렇게 조용히 갇혀서 지내고 싶지도 않았다. 

유화례는 로스앤젤레스의 기독교 잡지사에 잠시 취직하여 5개월간 일했지만 
보수를 받지는 않았다. 유화례는 한국에 거처만 마련된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던 중에 1964년 8월, 한국에서 그가 살 집이 마련되어 
마침내 8월 29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행 배를 탔고 
일본 교토와 대만을 거쳐 9월 24일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서울과 군산에서 찾아온 유화례의 영적 자녀들이 그를 맞아주었다. 
서울에서 하루 머문 후, 기차를 타고 도착한 광주 역에는 
여러 친구들과 선교사들이 나와서 유화례를 환영했다. 

광주에 돌아온 후에도, 손님들이 계속 집으로 찾아와 거의 2주 넘게 환영을 받았다. 
또한 여기저기에서 유화례를 초청하는 요청들이 들어왔다. 

선교사를 은퇴했음에도, 여전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유화례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은퇴 후에, 유화례는 다시 광주로 돌아왔지만, 
예전에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일하던 때와 달리,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예전에는 선교사 숙소에서 생활했기에, 선교부가 집의 유지보수를 책임져 주었다면, 
이제는 이런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생활비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유화례는 예전에 선교사로 일할 때 받았던 사례비보다 
훨씬 적은 금액의 연금으로 살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동안 모아둔 예금은, 이미 땅을 사고 집을 짓는데 다 사용했기 때문에 
적은 돈으로 근근히 살아야 했던 것이다. 

특히 연로한 유화례로서는 의료비 지출이 많았는데 
예전에는 선교부에서 모두 감당해 주었지만, 이제 그마저도 스스로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선교부 병원에서는, 유화례에게 의료비 청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남장로교 선교본부를 통해서 발송하던 선교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선교편지도 
이제는 스스로 일일이 발송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전도활동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도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건강 또한 문제가 되었다. 예전에는 연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산과 바다로 다니며 시골 전도여행을 하던 유화례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건강 상태가, 멀리 이동하고 시골에서 여러 날 머물며 전도활동을 하는 
여정을 충분히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선교부와 관련이 없는 연로한 독립 선교사로서 
한국에서 전도하며 생활하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화례는, 이 모든 일을 감당하며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전도의 기회에 최선을 다하여 부응하려고 했다. 

▲1965년 5월 28일자 서신에 보면, 
그의 전도활동의 범위를 가늠할 수 있다. 

6월 1일엔, 버스를 타고 시골지역 교회에 가서 5일간 사경회를 인도하고 
주일에 광주에 있는 동안에는 수피아 여학교 교사들과 성경 공부를 했다. 

앞서 3월 12일에는 전남 신안의 장사도로 섬 전도 여행을 떠났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2시간을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새로 설립된 교회에서 일주일간 전도 집회를 인도했다. 
예배당은 20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방이었기에 
집회는 야외에서 진행되었고, 저녁 집회에는 100명 이상이 참석했다. 

수요일 저녁에는 다른 두 교회가 연합하여 전도 집회를 열었고 
400명이 모여서 부흥회를 가졌다. 

이후 3월 19일에 광주로 복귀하여 광주 YWCA가 집창촌에서 구출된 여성들을 후원
하는 쉼터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칼라 슬라이드를 상영하며 그들을 전도했다. 

특히 박현옥 전도사가 1년 반 동안 44명의 집창촌 여성을 구출하였고 
대부분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일부는 이 쉼터에서 교육과 기술을 배우며 
건전한 직업을 구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왔다. 

유화례는 이 여성들에게 누가복음을 가르치면서 전도 활동을 했고
이를 계기로 윤락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3월 29일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힘든 산길을 넘어 
광주 북쪽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했다. 

수피아 여학교 졸업생의 아버지가 이 지역에서 사역하는 전도사였는데 
그가 섬기는 교회에서 일주일간 사경회를 열었던 것이다. 

은퇴한 고령의 선교사가, 바다와 산을 가리지 않고 자비량으로 온 힘을 다해 
선교하는 모습은, '복음의 신실한 일꾼'이라는 뚜렷한 자기 정체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유화례는 7월 26일부터 8월 9일까지 지리산 선교사 캠프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그곳에 들어와 있는 선교사 6가정을 위해, 6일간 성경 공부를 인도했다. 

그에게는 (지리산에서의) 휴식조차 또 다른 사역이었다. 
성경을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은 유화례의 일상이었다. 

1966년에도 유화례는 전도활동을 이어나갔다. 
1월 5일부터 10일까지 교회가 없는 시골 마을에서 
교인의 집을 중심으로 사경회를 열었고, 
겨울방학 중이라 학생들이 없는 인근 학교를 빌려 오전 성경 공부를 인도했다. 

그해 4월에 유화례는 특별한 소식을 (편지로) 전했다. 
수피아 여학교의 기독학생의 주최로, 학생들이 여름방학 기간에 시골 지역으로 
봉사활동을 가서 5일 동안 여름 성경학교를 여는 계획이었다. 

「수피아 학교 교목이 나에게 아주 흐뭇한 보고를 전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아래의 계획은 수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학교의 기독학생회가 여름방학 기간 동안에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골 교회에서 5일간의 여름성경학교를 열기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20개의 교회가 이번 여름에 전도팀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10명의 교사와, 부모의 허락을 받은 100명의 학생들이 봉사활동에 신청하였습니다. 

각 팀은 교사 1인에 학생 5명으로 구성될 것입니다. 
기독학생회는 이미 시골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곳의 영적 리더십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수피아 여학교를 향해 꿈꾸었던 일들이 실현되는 모습을 보며 
유화례는 기쁨과 감사를 느꼈다. 

1968년 이후로 유화례의 시골 전도 활동의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몸이 불편한 고령의 여성 선교사가 시골 지역을 다니며 전도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1893년생, 당시 75세

(참고로, 같은 시기에 사라 배리 여선교사는
1955 ~ 한국 사역 시작  남장로교 선교사 
1961 ~ 호남에서 UBF 시작)

특히 유화례에게는 대장질환이 있었기 때문에 
신체적 한계로 인하여 시골 전도활동에 큰 제약에 따랐다. 
따라서 집에 머물며, 지속할 수 있는 전도 활동으로 사역의 형태가 바뀌었다. 

▲그 가운데 유화례가 특별히 많은 애정과 노력을 기울인 전도 활동은 
광주의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재소자를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고 
이들을 영적으로 보살피는 일이었다. 

교도소 사역은 예전, 한국전쟁 시기에도 감옥과 수용소에 갇혀 있는 
북한군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면서, 유화례가 이미 했던 활동이었다. 

그러다가 1967년 이후로는, 유화례의 주된 전도사역은 
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한 전도 활동이 되었다. 

1967년 3월에 보낸 서신에서 유화례는, 
교도소 전도 활동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했다. 

유화례는 당시 20살이 된 한 젊은이를 맡게 되었다.
이 청년은 고아원에서 자랐고, 남장로교 배사라 선교사의 후원으로 
중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계속 문제를 일으키면서 
결국 배사라 선교사는 그를 포기하게 되었다. *Sarah Barry

그는 급기야 광주의 폭력 조직에 가담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갈취, 음주와 흡연, 폭력 행위는 물론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 젊은이와 함께 살인을 저지른 다른 폭력배들은 모두 경찰에 검거되었지만 
그는 달아나 잠적했고, 지역에 그의 사진이 실린 현상수배 전단지가 붙었다.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배사라 선교사에게 연락을 취했고 
배선교사는 편지를 써서 그 청년을 유화례에게 보냈다. 

배사라 선교사는 유화례의 영적 리더십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던 청년을 유화례에게 맡긴 것이다. 

유화례는 그를 설득하며 자수를 권고하였고 
그는 1966년 12월 17일 유화례와 함께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했다. 

유화례는 경찰서장에게 그를 인계하면서 
그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서 중형을 받아야 하지만, 자수하면서 회개하였으니 
참작하여 필요한 조처를 해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했다. 

그는 1월 10일에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었으나 
결국 경찰은, 그에 대한 조사를 마친 후, 재판에 넘기지도 않고 
그를 유화례에게 넘겨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 청년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고 
유화례는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말했다. 

유화례는 광주가 그에게는 안전한 지역이 아니었음으로 
그를 강원도 태백에 대천덕 신부에게 맡겼다. 
(*대천덕 신부는 1957년 입국 후 성공회 대학교 학장 재직
  1965년 태백에서 예수원 시작, 2002년 소천)

그는 그곳에서 노동을 하며 정규적으로 기도하고 성경 공부를 했고 
대천덕 신부는 그가 그곳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회신을 해왔다.

이 청년은 군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서 
광주에서 가까운 고향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동안 예전에 폭력 조직원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들도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화례는, (고허번 선교사와 함께 재소자 전도를 하고 있던) 김전도사와 함께 
폭력조직의 소굴로 찾아갔다. 

김전도사는 예전에 서울과 광주에서 폭력 조직의 일원으로 있었던 전과를 가지고 있는 이로 
몇 년 전 광주의 선교부 결핵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고허번 선교사를 만나 회심하고,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을 돕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가 재소자들에게 열심히 전도하고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유화례는 교도소를 다니며 젊은이들을 전도하게 되었다

▲1967년 9월 20일 편지에서 유화례는 
폭력 조직원 출신의 무명의 젊은이들을 만나기 위해 
정기적으로 교도소를 방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주일 전, 그 중 한 사람과 만났고 
어제는 두 사람을 만나 매우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유화례는 그들에게 요한복음을 한 권씩 주면서, 읽기로 약속했고, 
그들은 결국 회심하게 되었다. 

이들을 만나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교도소에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시작으로 많은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전도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예수원에서 생활하던 청년은, 바울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처음에는 신앙의 기복이 심했지만 점차 안정되었으며 
이후 전주 예수병원에 관리부에 취직하여 성실하게 생활했다. 

1968년 이후로 광주 동명동의 교도소 전도 활동은 유화례의 주된 전도사역이 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으로 시작한 교도소 성경공부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거의 매주 교도소에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이후에는 여성 재소자들에게도 성경 말씀에 가르치고 함께 예배하며 전도 활동을 했다. 
교도소 전도 외에도, 유화례는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과 성경 공부를 하고 
학생들과 영어성경 공부를 했다. 
또한 병원을 찾아다니며 환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전도했다. 

유화례는 1969년 9월 서신에서, 자신의 일상에 대해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날마다 나의 일과는 계속됩니다. 
병원에서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지만, 돈이 없는 아픈 환자를 제가 도울 수 있을까요? 
잘못된 행위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돌아보면서, 제가 그를 격려할 수 있을까요? 
뇌물을 주지 않고도 시청에서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까요? 때로는 부담감이 심합니다. 

그때 나는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유화례에게 전도라는 행위는, 누군가의 짐을 짊어지는 일이었다.  
그를 부지런히 찾아가고 열심히 만나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의 어려움과 고난을 함께 공감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면서, 함께 나누는 일이었다. 
왜 유화례라고 그 일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그도 때로는 버겁다고 느꼈다. 

바로 그때 유화례는 주님을 생각했다. 
자신의 짐을 대신 져주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자신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겼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격려가 없었다면, 
그는 사람들의 온갖 사정과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유화례는, 십자가의 선교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증언한다. 

▲1971년 4월 6월에, 유화례는 출혈성 십이지장 궤양으로 인해 
적혈구 수치가 위험수위 이하로 떨어지며 온몸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의사의 진찰을 받고 5일간 병원에 입원하여 엑스레이 촬영을 하며 
4번에 걸쳐 수혈을 받았고, 치료 덕분에 기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요양이 필요했던 유화례는, 1971년 9월에 미국으로 휴가를 다녀오기로 했다. 
미국에 다녀오는 경비는, 작은 오빠 도날드의 가족과 
수피아 졸업생 제자들이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으로 가서, 수술 후에 회복 중에 있었던 뉴욕의 작은 오빠 가정과 휴가를 보냈고 
겨울에는 남부로 가서 가족과 친구들과 휴가를 보냈다. 

유화례는 1972년 3월 6일자 서신에서 
미국에서 요양을 마치고, 1972년 3월 13일에 한국으로 돌아가 
서울에서 있는 행사에 참여하고 
광주에는 3월 15일에 돌아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화례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20명의 수피아 졸업생들이 공항에 나와 환영해 주었고, 
광주 공항에 도착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유화례는 한국의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교도소 전도 활동을 재개했다. 
신임 교도소 원목은, 성경 공부를 희망하는 20~25명의 재소자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구약성경을 공부하고 있었고, 
유화례는 그 다음 날 신약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여성 재소자 수용시설에 가서 12명~20명의 여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여성 재소자들과 처음 만나던 때, 16살이 채 되지 않은 어여쁜 여성이 눈에 띄었는데 
그녀는 집중도가 매우 높았다. 

유화례가 메시지를 마치기 전에 이미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주일학교에 다녔고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부모가 보낸 공장에서 억지로 일을 하고 있었다. 

크게 실망한 그녀는, 공장이 무너지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에 
공장에 불을 질렀고, 이로 인해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있었다.

이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하며, 유화례는, 이 여성은 
언제나 자신의 만나기를 좋아하고, 가장 열심히 모임에 참석했다고 전했다. 

또한 교도소에서 유화례가 성경을 가르쳤던 한 남성은 기독교인이 되었고, 
10년 복역 후에 출소하여, 결혼할 젊은 여성을 데리고 인사하러 찾아왔다. 

이들은 5월 16일에 광주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유화례는 그들의 결혼식에서 결혼 행진곡을 연주해 주었다. 

유화례는 교도소에서 전도 활동을 하며, 많은 이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들의 삶의 애환을 위로하며, 아름다운 삶을 격려해 주었다. 

▲유화례는 당시 신앙서적 번역 일도 하고 있었다. 
먼 거리를 다녀야 하는 시골 전도는 더 이상 하기 어려워 
집에서 할 수 있는 전도 활동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동적인 신앙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 이전에도 유화례는, 1966년에 조나단 고포스 Jonathan Goforth 가 쓴 
<나의 영으로> 라는 책의 번역을 감수한 적이 있었다. 

1972년 6월 서신에서 유화례는, 멀린 케로더스 의 <감옥 생활에서 찬송 생활로>를 
번역했고, 곧 출판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이 책의 초벌 번역은 당시 젊은 대학생이었던 정창석이 했고, 
유화례가 번역을 다듬어 1973년에 두 사람의 공역으로 출판되었다. 

유화례는 번역 작업 외에도, 매주 평균 12명~14명과 함께 성경 공부를 했다. 
일부는 개인적으로 공부했고, 2명에서 9명이 한 반으로 성경 공부를 하기도 했다. 

유화례는 이제 막 개교한 수피아 실업 전문학교 학생들 8~9명을 한 그룹으로 하여 
성경 공부를 할 예정이라고도 말했다.

이 무렵 유화례는, 1971년에 광주 기독병원에 부임하여 행정업무를 맡고 있었던 
남장로교 도날드 킨더 Donald Kinder 선교사 내외와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킨더는 미 육군 소령 출신으로, 은퇴 후 선교사로서 병원 건축을 감독하는 일을 했고 
그의 아내는 병원장의 비서로서 행정 일을 했다. 

킨더 부부는 유화례와 서로 편하게 왕래하여 교제했고 
아무리 유화례가 한국을 고향처럼 여겼을지라도 
한국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압박감과 부담감을 느낄 때마다 
킨더 부부와 교제하면서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킨더 부부는, 유화례가 '내가 오늘 한국인을 또 만나게 된다면, 죽을 것 같아서 
집 밖으로 나와 버렸다'고 말했을 때, 
언제나 편안하게 유화례를 반겨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이후 유화례가 1978년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갈 때 (1927~1978, 51년 사역)
그가 거쳐야 할 장로교 은퇴자 숙소를 알아봐주고, 
미국 정착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옆에서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바로 킨더 부부였다. 

▲1973년의 최대 뉴스는 빌리 그래함이 내한하여 전국적으로 인도한 전도 집회였다. 
유화례는 1973년 6월 선교 편지에서
이 집회의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언급했다. 

"5월 16일부터 6월 3일까지, 한국의 6개 도시에서 집회가 진행되었고 
마지막 피날레는 서울에서 마무리되었다. 

광주 집회는 5월 20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유화례는, '수많은 사람이 참석하면서도 질서를 유지한 것과 
사람들의 복음에 보인 관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전했다. 

유화례는, 서울 집회는 첫날에는 51만 명, 마지막 날에는 110만명이 참석하였고, 
37,000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단했으며 
광주에서도 3000명이 결단했다고 전했다. 

유화례는 '교회들이 어떻게 후속작업을 하느냐'가 남은 과제라고 지적하였고,
이 집회의 진정한 결과는 미래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밀어닥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같은 서신에서 유화례는, 5월에 있었던 교도소 연합예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현재 약 200명이 성경공부와 예배에 출석하고 있으며
이 연합예배에서, 7명이 세례를 받고 12명이 학습을 받았다고 전했다. 

1974년에는 유화례의 작은 오빠 도날드가 사망하여, 미국에 다녀왔다. 
이제 그의 형제 중에 남은 사람은, 덴버에 사는 큰오빠 찰스 뿐이었다. 

미국을 방문했던 약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따뜻한 환대와 사랑을 받았고 
특히 미국의 이곳저곳을 방문할 때마다 
어디에서나 찾아오는 한국의 자녀들로 인해서, 특별히 행복함과 감사를 느꼈다. 
미국 방문의 마지막 여정은 오빠 찰스가 사는 덴버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또다시 여러 사람들의 방문을 받느라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까지는 3일이 걸렸다. 

1974년 11월 서신에서 6월에는 수피아 여학교는 물론이거니와 
그 자신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되는 사건을 언급했다. 

수피아 여학교 동문회가 주관하여 몇 년 전부터 유화례의 기념하여 
그의 이름으로 도서관 건물을 짓기로 했던 계획이 
1974년 10월 26일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 것이었다. 

오전 10시에 운동장에서 개관식에 거행되었고 
교복을 입은 2,800여 명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상을 향해 도열했다. 
내빈들과 순서를 맡은 이들은 단상 위에 앉았다. 

이날 전남도지사와 교육부 장관도 참석하여 축사를 했고, 감사의 말이 이어졌으며 
학생 및 동문들의 특송 연주도 있었다. 

학생과 교직원 외에도 많은 축하객들이 참석했던 이 행사에 대해 
유화례는 놀라움과 감사함을 감추지 못했다. 

행사 후 도지사와 교육부 장관의 포함한 내빈들이 도서관 내부에 초대되었고 
유화례는 내빈들과 함께 가위로 도서관 출입구에 테이프를 끊었다. 

도서관은 2층 건물이었고 열람실과 서가가 구비되었다. 
유화례의 기념도서관의 현판에는 이렇게 각인되어 있다. 

「유화례 교장, 그는 1893년 12월 21일 뉴욕 주 태생으로 
1927년 1월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이 땅에 오시어 
희비만장의 이 나라 역사 속에 
반세기 이상 이 겨레와 함께 살면서 
교육 사업과 전도사업에 헌신하신 그 빛나는 생애를 여기 기념하노라 
1974년 10월 26일 광주 수피아 여학교 동창회」 

▲1974년 11월 서신회에서 유화례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세례식과 성찬 예식에 대해 언급했다. 

11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교도소에서 세례를 받았고 
18명 이상의 남성과 2명의 여성이 학습을 받았다고 전했다.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세례를 통해 죄인들을 주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성찬을 통해 이들을 거룩한 주님의 몸으로 살아가게 하는 복음의 놀라운 역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또한 이 서신에서 유화례는 러시아 그리스도인 샬로프 에스텍호프가 쓰고 
정창석과 함께 번역한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기도 Touching Heaven by Prayer」
가 출판되었다고 전했다. 

유화례는이 책의 판매대금의 절반 정도를 전도활동에 사용하여 
전도활동 예산이 두 배 많아졌으면... 하는 소망을 내비쳤다. 

1976년 이후로 유화례의 선교편지는 갈수록 횟수가 줄어들었고 
활동 영역도 점차 집으로 한정되어 갔다. 

1977년 3월 16일자 서신에서는 유화례의 일상과 전도활동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1월에는 모든 학교가 겨울방학을 하는 시기에 
방학 중 특별 성경공부를 인도했고, 
교도소의 매주 예배는 1월에는 겨울 추위로 인해 못했지만 
3~4번 방문하여 여성 재소자들을 상담했다고 전했다. 

교도소에서 만났던 20살 정도 된 여성 재소자는 얼마 전 출소하여 
유화례와 같은 집에 사는 조성순 이순정 부부의 딸이 하는 일을 돕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유화례가 전도활동을 통해 어떻게 사람들을 돌보고 배려하는지 잘 드러난 부분이다. 

그리고 서울 지역의 작은 교회들이 연합으로 진행하는 여성 집회에서 
3일 동안 사경회도 인도했다. 

또한 유화례는 3월 말부터 수피야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과외 활동으로 
일주일에 4일간 40분씩 영어 성경 공부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 외에도 UBF(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에서 
매주 한 차례 2시간씩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10대 선교회(YFC Youth For Christ) 에서도 매주 1시간씩 성경을 가르쳤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뜨개질을 하거나 옷이나 물건을 만들어서 
입을 옷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화례는 일요일에는 광주 북문교회에서 예배, 
월요일과 금요일은 UBF(Sarah Barry 선교사가 설립)에서 영어 성경 공부 인도, 
목요일은 교도소로, 
토요일은 자기 집을 찾는 6~7명의 고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그 외는 시간이 나는 대로 뜨개질을 하고 있다..라고 해고했다. 

당시의 유화례가 출석했던 광주 북문교회는 
유화례가 아들과 같이 여기는, 수피아 여학교 교목 출신인 안종열 목사가 
1974년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개척한 교회로 
유화례는 이 교회의 개척과 운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77년 6월 12일 서신에는 
6월 19일이 이 교회의 창립 3주년인데 
10명으로 시작된 교회가 현재 세례교인 248명, 출석 교인 275~300명 
그리고 유아부부터 고등부까지 주일학교 학생이 약 500명이 되는 교회로 성장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유화례는 담임목사 부부에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고 권면했다. 

교인들의 숫자나 교회의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적 성숙도가 중요한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1977년 이후로 유화례는 
한국에서의 모든 활동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1975년에 <전남 매일신문>에 연재기고문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다짐한 바가 있었다. 

"나는 어디에 뼈를 묻을 것인가? 
가끔 기도할 때마다 내가 한국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고 묻곤 한다. 
그러나 나는 분명 정든 고향 한국을 떠날 수 없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명이 아니겠느냐는 생각 속에 잠긴다. 

내 슬픔, 내 기쁨, 모두 있는 곳. 나는 내 고향 한국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가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 앞으로 가겠다." 

그러나 이같은 유화례의 생각은 상황의 변화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1977년 9월 10일 버스에서 내리다가 
구멍에 왼쪽 발이 끼이는 바람에 바닥으로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왼쪽 손목뼈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다녀야 했고 
회복하기까지 많은 불편을 겪었다. 

이미 84세라는 고령의 나이와, 부상으로 인한 거동의 불편함은 
유화례의 활동이 크게 제약 밖에 만들었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미안함과 마음의 부담이 컸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도, 한국에서 생활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유화례 선교 후원자들도 이미 고령이 되거나 사망한 이들이 많았고 
선교 후원도 줄어든 상황이었다. 

반면 한국에서 생활비는 점차 늘어났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았던 유화례에게, 미국은 어느덧 낯선 곳이 되었고 
부모와 형제들도 오래 전에 사망하고 없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에 계속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1977년 경 유화례는,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광주에서 가족같이 지내다가
1973년에 미국으로 돌아간 킨더 부부에게 알렸다. 

킨더 부부는 유화례를 대신하여 자신들의 집에서 가까운 버지니아주 해리슨버그의 
써니사이드 장로교 안식관 Sunnyside Presbyterian Home 에 입주 신청서를 냈다. 

써니사이드 안식관은 유화례의 입주를 환영하며, 생활비 일부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킨더 부부가 유화례가 미국으로 돌아오는 항공편을 지원함으로써 
유화례가 미국으로 돌아갈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유화례는 1978년 5월 30일에 서신에서, 몇 가지 소식과 더불어 자신의 귀국을 알렸다. 
「이제 나의 특별한 소식을 알립니다. 주님이 나를 인도하셔서 
이번 여름에 미국으로 돌아갈 결정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버지니아 주 해리슨버그의 써니사이드 장로교 안식관에 
들어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7월 14일에 버지니아에 도착하는 항공편을 예약하였고 
그곳 안식관에 입주하려고 합니다.

이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에 끊기 어려운 많은 인간관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떠나는 것에 대하여, 나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실 때 
주님의 뜻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선교부에서 은퇴한 이후로 14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간 동안 많은 어려움과 동시에, 내 생애에 가장 행복한 시간도 있었습니다. 

나에게 추가적인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이 부여하신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나 사랑하는 선하신 아버지가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미국에 도착한 유화례는 예정대로 써니사이드 장로교 안식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은퇴 목회자, 사모, 교회 사역자들이었다. 

유화례의 연금으로는 이곳에서의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당시 남장로교 세계 선교부 총무였던 부명광 G. T. Brown 이 
후원금을 마련해 주어서 부족한 경비를 충당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킨더 부부를 비롯한 한국 선교사들, 지인들, 
그리고 수피아의 제자들과, 한국의 목회자들, 
한국에서 우정을 나누었던 유화례의 많은 자녀들이 방문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1993년에는 백세 생일을 맞으며, 사랑하는 친지들과 친구들로부터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다. 이후 점차 건강에 악화되었고 
1995년 5월 26일 마침내 그가 평생 사모하였던 신실하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유화례의 장지는 써니사이드에서 멀지 않은 묘지에 마련되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써니사이드의 식구들, 수많은 선교사들, 한국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장례 예배는 써니사이드의 원목이 영어로 진행했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찾아왔기 때문에, 이후 한국어 장례예배가 이어졌다. 

인도아 (인돈 목사의 아들) 목사가 기도했고, 부명광 목사가 헌사를 했다. 
그는 헌사를 하며 유화례를 "끝까지 남은 작은 여인"이라고 칭했다. 
유화례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는 일제 위협 속에서 모든 선교사들이 철수할 때 
강제로 추방을 당하기까지, 끝까지 선교지에 남은 최후의 4인 중 한 사람이었다. 

해방 후 선교지로 복귀한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모든 선교사들이 피난을 간 상황에서도 
광주의 선교지에 끝까지 남은 선교사였다. 

선교사 은퇴 후에도,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정든 고향 한국을 떠나지 않고 
이곳에 뼈를 묻겠다고 14년 동안 자비량으로 생활하면서 선교했다. 

결국 쇠약해져서 더 이상 전도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아 미국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도 정든 고향 한국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남은 시간들을 보냈다. 

몸은 떠났지만, 마음과 기도는 항상 이곳 한국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산과 바다와 들판과 섬을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니며 
학교와, 병원, 포로수용소와, 교도소, 시골 교회와, 산속 움막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의 원동력은 

그가 언제나 즐겨 부르던 찬송 "오 신실하신 주"의 가사처럼 
한결같이 그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그가 꿈꾸는 십자가의 선교사의 모델이었고 
그것이야말로 교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고통과 문제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위로하고 
진정한 해답을 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소피아 여학교, 이일학교, 목포 성경학교, 시골 교회 사경회, UBF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길러낸 그의 자녀들은 
유화례가 심은 복음의 씨앗이었고, 
그의 헌신으로 치유되고 구원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 피어난 복음의 꽃이었다.   -끝-

*한국교회의 선교사 전기 시리즈 11 
<한국에 뿌리내린 선교와 삶, 미국 남장로교 여성 선교사 유화례의 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