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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

LNCK 2023. 12. 18. 11:14

[박상원 선교사]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 2019-11-02 - YouTube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    시119:61  2019.11.02.    ▣중동, 아프리카 선교 관련글

 

할렐루야! 참 반갑습니다.

저는 아프리카에서 34년 동안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 박상원입니다. (*남편은 김종양 선교사)

 

저는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 태어나고 자라고,

또 예수를 믿지않는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고, 세상에서는 재미있게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1976년에 저희 남편이 독일에 국비 장학생으로

연수를 받으러, 교육을 받으러 독일로 갔습니다.

 

그때는 1년만 지나면 만날 거라는 그런 기대를 안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1976년 3월에 저희 남편은 독일로 떠나고

저는 그해 9월에 저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독일에, 저는 한국에 이렇게 살면서

참 힘들고 어려운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남편이 독일에 가서 그 해에 주님을 영접하고

편지로 저를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다른 부인들 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대게 부인들이 먼저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고 남편을 전도하는 그런 관계가 많은데

 

저희는

남편이 먼저 주님을 영접하고,

저를 편지로 전도해서... 저도 예수를 믿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낳고 이렇게 살면서

우리 남편 선교사님이 편지를 매주 마다 보내주는 편지를 이렇게 받고

그걸 기다리면서 사는데

남편이 굉장히 오랫동안 한국에 오지를 않았어요.

 

그리고 이제 교육기간 연수기간이 끝나면

정말 금의환향해서 함께 행복하게 살 거라는...

가슴에 정말 뜨거운 그런 꿈을 안고 있었는데...

 

▲교육기간이 끝나기 저의 남편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기 때문에 내가 신학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편지가 왔어요.

 

저는 하늘이 좀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또 내가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내가 영어로 공부를 해야 되겠다’ 그러고서 영국에 가서 또 신학을 하셨어요.

 

저는, 저는 참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어요.

제가 저한테 점수를 많이 주고 ‘나는 참 착한 하나님의 딸이다’ 이렇게 하고 살았는데

 

그때는 제가 교회가서 철야를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하나님 우리를 좀 놔주세요.

일할 사람 많은데 왜 우리를 이렇게 피곤하게 하세요. 다른 사람 데려다가 쓰세요.

저는 못해요. 그러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철야기도의 제목이 그거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아버님 보고 제가 울면서

“아버님, 애비를 불러들이세요” 그러니깐

시아버님이 "네가 해라. 난 못한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렀어요.

그러다가 저도 참 신앙생활 잘 한다고 했어요.

철야기도, 금식기도, 십일조 하면서 참 잘한다고 했는데

이제 남편이 1984년에 한국에 한 번 왔어요. *8년 만에

 

그래서 하는 얘기가 "우리는 어쩌면 아프리카에 가서 살게 될 것 같아."

 

제가 얼마나 펄쩍 뛰었는지 몰라요. “무슨 또 아프리카냐고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혼자 놔두고 살다가, 이제 와서 무슨 아프리카냐고..”

 

‘한국에 와서 살던지, 아니면 나를 유럽으로 데려가라고’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아무 얘기도 안해요.

 

그래서 저는 속으로 ‘아, 남편이 아프리카 행을 포기했나보다’ 그렇게 하고 살았는데,

그러고 이제 때가 돼서 3개월 시간이 지나서, 다시 영국으로 가셨어요.

 

▲그리고는 편지가 이렇게 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제가 영국으로 편지를 보내면, 그 편지가 저에게 되돌아 오는 거에요.

 

제가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요.

저는 지금은 이렇게 나이가 많지만, 그때는 꽃다운 나이였어요.

 

얼마나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러고 몇 달이 지났는데

남편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좋은 곳에 보내주셔서, 내가 아프리카에 왔다.

말라위는 아프리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돼서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알프스라고 부른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편지에 대한 답장을 못 하겠는 거에요.

그런데 시간이 자꾸 흐르는데

남편 선교사님이 ‘아프리카 말라위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나는 여기 너무나 행복한데

단 한가지, 가족이 없어서 쓸쓸하다’는 거에요.

 

‘내가 당신과 내 아들을 이제 초청할 건데

모든 떠날 준비를 끝내고 있다가,

초청장과 비행기표도 사서 보내줄 테니까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있다가, 초청장과 비행기표를 받으면 즉시 여기로 오라’는거에요.

 

근데 그런 편지를 계속 몇 달 동안 계속 받으니까, 저의 마음이 녹아지는 거에요.

 

‘그렇지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설마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살게 하셨는데, 또 고생 시키시겠어?’

그러면서 저도 떠날 준비를 시작했어요.

 

그때 우리 선교사님이 떠날 때 그 해에 태어난 저희 아들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우리 아들 전학증명서를 떼러 학교에 갔더니

우리 아들 학교 선생님이 "스위스로 이민 가십니까?" 그래요.

 

그래서 아니라고 그러니까, 저희 아들이 학교에만 오면

“우리는 알프스 갈거다.” 날마다 학교만 오면 "우린 알프스 갈거다." 그랬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그게 아니고

“우리는 선교사 가족인데, 스위스는 아니고,

그렇게 알프스와 같은 아름다운 곳에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그리로 갑니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이제 준비를 다하고 시간이 지났는데,

비행기표와 초청장을 저희가 결국 받았어요. *당시는 ‘초청장’이 필요했음

 

그래서 제가 비행기표를 못 구해서 그러는 줄 알고

‘비행기표를 내가 사가지고 갈 테니까 그냥 초청장만 빨리 보내라’고 그러니깐

 

저희 남편이 ‘아니라고, 내가 당신과 내 아들에게 너무나 해준 것이 없는데

비행기표는 꼭 내 손으로 보내준다’는 거에요.

 

그래서 저희는 기다리다가 그 비행기 표를 받고

이제 한국을 떠나서 아프리카를 향해서 갔습니다.

 

▲저는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타는거에요. *1986년

제가 그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까지 가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지금은 그런 비행기가 있지도 않은데

제가 한국을 떠나서 아프리카 말라위까지 가는데.. 한 일주일 걸렸어요.

 

이제는 선교사가 된 남편이

가장 싸구려 비행기표를 사서 보냈기 때문이에요.

 

제가 비행기표를 사 가지고 간다고 하는데도, 막 말리고,

‘비행기표 살 돈이 혹시 있으면 그냥 현금으로 갖고 오라고’

 

제가 영국에서 며칠을 아프리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우리 선교사님하고 가장 친했던 전도사님 한 분이

저를 마중해주면서 저랑 같이 기도하면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있는데

 

그분이 저를 보고 하는 얘기가

어느 날 기도하다가

“선교사님은 마른 빵만 드시고 사신 대요.” 그래요.

 

그래서 제가 "아프리카에는 잼이 없나 보네요."

그러니까 전도사님이 “왜 잼이 없겠습니까, 선교사님이 돈이 없으시겠죠!”

 

그때 제가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거에요.

‘모든 것 다 준비됐다. 당신은 준비할 것 하나도 없다고,

몸만 건강하게 오라고’

 

비행기 표를 제가 자꾸 산다 하니까

‘그런 현금 있으면 그냥 그것만 가지고 오라고’

그러고 갔는데 영국에서 전도사님한테 들은 얘기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어찌됐든 시간이 되서 갔어요.

아프리카 말라위에. 가서 얼마나 힘들게 갔는지 몰라요.

 

영국인 선교사님들은, 자기가 아프리카 선교지를 먼저 보고 와서

자녀들과 아내를 데려와서 보이고, 그러고나서 결정을 하고 다시 가는데

 

저희 한국 분들은 좀 특이한 것 같아요.

‘내가 신학교에 간다’ 그리고 신학교로 갔고,

‘내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간다’ 그리고 선교지로 갔고,

그리고 저를 보고 ‘말라위로 오라’고 해서, 제가 아프리카 말라위로 갔습니다.

 

▲근데 말라위 공항에서

제가 수속을 마치고 공항 대합실로 나와보니,

앞에 사람들이 쭉 나와 서 있는데,

저희를 마중 나와야 될 선교사님이 거기 안 보이는 거에요. 그게 1886년이었죠.

 

1976년에 떠난 남편을 10년 후에 1986년에 말라위에서 같이 살게 된 거죠.

그 중에 잠시 한국에 석달 방문하신 적이 있고요. 1984년에.

 

공항에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남편이 앞에 안 보이는 거에요.

근데 어떤 사람이 자꾸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드는 거에요.

 

제가 우리 아들(10살)을 보고 "저기 손 흔드는 사람이 아빠니?"

저희 아들이 "아니!" 그러는 거에요.

 

2년 전에 1984년에 한국에 오셨을 때는

너무 체격도 좋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했던 남편이

이제 2년 후에 만난 남편 선교사님이,

그 2년 사이에 거기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던지

모습은 뼈만 남고, 피부는 새카맣게 타가지고

 

아들이 아버지를 몰라보고,

아내가 남편을 몰라보는 그 정도가 됐습니다.

그래도 가까이 가서 보니까, 그분이 남편이었고, 그분이 아빠였어요.

 

그날 저녁에 저는 한 잠도 못 잤어요.

남편이 ‘자자’고 이렇게 누웠는데

이렇게 보니 바지를 벗어 놓았는데

바지의 벨트가 구멍이 한참 뚫려 있는 거에요.

허리 사이즈가 많이 줄어든 거예요.

 

제가 그걸 보면서, 바짝마르고, 새카만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영국에서 전도사님이 "선교사님은 마른 빵만 드시고 계신대요."

이 말씀이 자꾸 귓가를 때리는 거에요.

 

한 잠도 못 자고 이튿날 날이 밝았습니다.

어제 밤은 이제 저희가 공항에서 내려서 호텔에서 잤어요.

 

그러고 그 다음날 남편 선교사님이 2년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는데,

저는 그만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제 내린 곳은 그 나라 수도였고,

다음 날 다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사역지로 갔는데

원주민 목사님들이 너무 기뻐 뛰면서 우리를 마중 나온 거에요.

 

우리 선교사님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가

그 영적인 아버지가 2년 동안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게 살았는데

이제 어머니가 오셨다고... 택시를 대절해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공항에 나와서

저희를 막 끌어안고 그러는 거에요.

 

저는 껴안는 문화에 익숙하질 않아가지고

정말 힘들고 그것도 어렵더라구요.

 

그리고 이제 선교사님 최근 1년 동안 머물던 곳으로 저희를 데려갔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살 된 저희 아들이 방에 들어갔다가 막 뛰어나와서 제 품에 안기는 거에요.

그래서 ‘왜 그런가?’ 했더니 도마뱀을 보고 놀래가지고.

 

방에 도마뱀과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그런 집에서 살면서

‘여기서 아프리카의 알프스’라고 하면서 저를 거기로 부른 거에요.

 

제가 너무너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가지고 그만 할말을 잃었어요.

현실을 보고 나서,

제가 얼마 동안 실어증에 걸려가지고 말을 못하게 되었어요.

 

남편은 혼자서 집도 못 얻어가지고

그 원주민 집사님 가정에 얹혀 살면서

아프리카의 알프스라고 그런 거에요.

그 ‘아프리카의 알프스(?)’에 저희까지 같이 얹혀 사는 거에요.

 

▲그런데 남편 선교사님이 저희를 데려다 놓고

저를 보고 제일 먼저 한 얘기가

‘내가 바빠서 좀 나가야 되니까, 혹시 돈 가지고 있으면 다 내놔 봐!’

 

그래서 제가 돈을 가져간 걸 드리고

저희 보고 ‘기다리라’고 하고는

날이 깜깜해져서 들어오는 거에요.

근데 그런 생활이 날마다 계속되는 거에요.

 

남편이 어디로 가는지 우린 모르고, 그냥 들어올 때만 기다리는데

그래서 남편에게 한 번은 제가 ‘나도 좀 데리고 나가라고,

내가 이 가정에 있는게 너무 힘들다’고 하니까,

 

‘여기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아서

여자들하고 아이들이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는 거에요.

 

그러고 이제 혼자 나갔어요.

그렇게 두 달을 지냈는데

그래도 주일날 예배드리러 갈 때는 우리 가족이 다같이 나가는 거에요.

그게 너무 너무 행복했어요. 주일날 교회나가는 게.

 

그리고 또 이렇게 두 달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하루는 우리 남편 선교사님이 집에 들어오더니

‘내일은 우리가 대궐 같은 우리 집으로 이사 갈거니깐 보따리 다 싸놓고 자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냥 피식 웃었어요.

‘알프스라고 부른 곳이 이런 곳인데, 대궐은 또 무슨 대궐이야?’

 

그래서 그 다음날 택시를 타고 이사를 했는데

대궐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끼리 이렇게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한 거예요.

 

제가 한국에서 가지고 간 돈을 드리니까

그 돈을 가지고 집을 얻었는데,

옷 공장에서 창고로 쓰던 헛간 같은 것을 빌려가지고

그 돈 가지고 그 집을 수리하기 시작해서.. 두 달이 걸린 거예요.

 

▲지난 두 달 동안 우리가 남의 집에 얹혀 살았던 곳은,

외국인들이 살지 못하게 되어있는 지역인데

 

이제는 조금 시내로 나와서

수많은 외국인들이 사는 지역에, 저희가 집을 얻어서 나왔습니다.

 

교회갈 때 버스를 타도, 저희가 종점에서 타니까 너무 편했어요.

그전에는 버스를 타도 중간에서 타니까

이미 만원이 된 버스에 저희가 타면

원주민 아기들이 저희 세 식구를 보고는, 버스 속에서 그렇게 울 수가 없어요.

 

제가 “쟤들 왜 이렇게 울어요?”

남편은 “애들이 우리보고 무서워서 그러니깐 쳐다보지 마” *낯설어서 우는 거죠.

 

거기는 외국인들은 다 차를 갖고 다니고, 그런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때 우리 열 살 먹은 우리 아들이

"기가막히네, 내가 지네들 무서워 해야지, 왜 지들이 날 무서워해?"

 

그렇게 버스를 타고 교회를 다니는데,

제가 아무리 마음이 강팍했다가도, 교회 가면 마음이 참 녹아지고 회개가 돼요.

 

아프리카 사람들은 버스 삯도 없어서, 한 시간 두 시간 걸어서 교회를 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는 구경도 못해요. *자연 속이니까

 

학교 교실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한 시간 두 시간을 걸어서 와요.

그리고 비가 오면 비를 다 맞고,

교회 앞에 와서 옷을 벗어서 빗물을 짜요. 그리고 툴툴 털어서 또 입어요.

 

그리고 앞에 딱 와서 모든 사람이 다 두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가 교회에 올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 찬양합니다.”

그러면요, 그들을 바라보는 제가 마음이 정말 녹아져요.

 

‘하나님 왜 저들은 저렇게 신앙심이 좋은데, 저는 왜 이런가요?’ 하면서 회개를 해요.

‘하나님, 저들도 정말 저렇게 가난한 데도 저렇게 기뻐하는데,

왜 나는 기쁨이 없나요?’ 울면서 기도를 하고, 그렇게 교회를 다니는 거예요.

 

근데 이사 가고 나니깐

그 다음 날부터 온 교인들이 날마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거에요.

 

그래서 아침부터 와서.. 아침하고 점심하고 다 먹어요.

우리 집에 먹을 것이 떨어지면... 돌아가요.

 

우리 남편 선교사님이 날마다 시장에 가서, 그날 먹을 것만 사다 줘요.

아침과 저녁에 먹을 빵과, 점심 먹을 쌀을 하루 끼만 사오는데,

그것이 다 떨어져야 돼요.

저희 저녁 먹을 것도 안 남겨놓고 먹을 게 다 떨어지면... 그제야 교인들이 돌아가요.

 

그래서 제가 하루는 “저분들이 언제까지 우리 집에 와야 되냐?”고 했더니

남편은 “저분들은 당신이 영적인 어머니라고 좋아서 저러는 건데

당신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느냐?”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정말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부끄러웠어요. '영적인 어머니?'

제가 볼 때는 그 사람들이 저의 영적인 부모에요.

저는 정말 기쁨도 없고 그렇게 사는데...

 

그러다가 어느 주일 날, 제가 그분들이 왜 그렇게 우리 집에 오는지 알게된 거에요.

우리 선교사님이 광고시간이 되면 앞에 나가서

"누구든지 배고프고 목 마른 사람은 다 우리 집으로 오라고"

 

제가 그걸 알아듣고 나서는, 예배 시간이 너무 힘들어지는 거에요.

목사님 말씀 전하실 때는 은혜받고, 광고시간 되면 시험에 걸리는 거에요.

 

버스 타고 오면서 버스 안에서 막 싸워요.

그들은 한국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남편 선교사님이 “당신이 아까 몇 시간 전에는 뭐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 나를 써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더니.. 지금 뭐하는 거냐고?”

 

제가 남편에게

“왜 그 사람들을 자꾸 초대하느냐고, 초대 안 해도 오는 건 할 수 없지만

뭐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을 찾냐고?

당신 옆자리를 보라고, 우리(아내, 자녀)가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그런 광고하지 말라고.. 그러고 싸우면서 와요.

 

남편이 날마다 먹을 것을 사다 주는데, 주일 날은 가게가 다 문을 닫았어요.

그때는 교회 갔다 오다 버스에서 내리면

길에 바나나를 이렇게 수북이 쌓아놓고 팔아요.

 

그러면 저희는 주일 아침은 금식하고 가서

점심하고 저녁은 바나나가 우리 주식이었습니다.

 

저는요. 그냥 그 바나나를 먹고 물을 마시고, 누워있으면

그냥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이렇게 나는 거에요.

 

우리 아들은 바나나를 막 열심히 먹는 거에요. 배고프니까.

 

그러고 사는데... 제 마음에 늘 불평이 있으니까,

선교사의 가정이 기도하는 가정이 아니라, 날마다 싸우는 가정이에요.

맨날 부부싸움만 하는 거에요.

 

그리고 또 ‘영적인 어머니’라고 그분들이 부른다니까

제가 좀 또 참고 있어요.

특히 목사님들 장로님들 저희 집에 찾아오시면, 제가 가만히 얌전하게 있다가,

그분들이 돌아가면 남편과 싸우고...

 

우리 아이는 "엄마 배고파"

아들은 꼭 그 소리 밖에 할줄 모르는 애같아요. "엄마 배고파"

 

제가 기도회 가서 은혜를 받고 한동안 잠잠이 있다가도

아들이 "엄마 배고파" 그러면

그만 마음이 마귀같이 변하는 거예요.

 

남편에게 “저 소리 안 들리냐고.. 저 소리 좀 들어보라고!”

그러다가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는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다가 사람들이 돌아가면, 또 남편에게 따지고 드는 거죠.

 

그러니까 나중에 우리 남편 선교사님이 무서워서

교인들보고 ‘가지 말라고.. 더 놀다 가라고..’

그 사람들을 붙잡고 늘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제가 (배웅하는 남편을) 뒤따라 가면서

‘그만 붙잡으라고.. 내가 저 사람들 가도 조용히 있을 테니까 그만 붙잡으라고..’

그렇게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저희 집에 누가 찾아왔어요.

우리 선교사님이 한끼 먹을 쌀과, 두끼 먹을 빵을 사러 나갔는데,

누가 우리집 문을 두드려요.

 

‘아직 남편이 돌아올 때가 안됐는데?’

“누구세요?”

 

밖에서 한국말로 "여기가 김종양 선교사님 댁입니까?" 그러는 거에요.

제가 얼마나 놀랬는지...

제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까 한국인 부부가 나란히 서 있는 거에요.

 

그분들과 이제 교제가 시작되어 가지고

그분들의 사는 집에 갔는데

그분들 가정에 초대받아서 가보니깐, 그분들은 정말 알프스에 살고 계셨어요.

 

아프리카는 다 우리처럼 사는 줄 알았는데, 그분들은 알프스에 살고 계셨어요.

그분들은 독일 선교회에서 파송 받아 온 물리치료사 부부인데

얼마나 얼마나 행복한 집인지 몰라요.

 

그래서 저희가 그 가정에 초대받아 갔어요.

그분이 지금은 목사님 되셔서 미국에 살고 계시는데

 

아내 Mrs. Lee가 부엌에서 가서 일하니까, 제가 도우러 갔어요.

그분이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데, 제가 이제 들여다보니까

냉장고 안에 계란하고 우유가 수북이 쌓여 있는거에요.

 

그걸 보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거예요.

‘우리 아들도 저것 좀 먹어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죠.

 

우리 아들도, 저도 날씬해져 가지고...

세 식구가 이제 먹지 못해서 날씬해져 가지고 있는데

제가 우리 아들한테 날마다 계란 한 개, 우유 한 컵씩 먹이고 싶은 욕망이 일기 시작했어요.

 

그 집의 밥을 잘 먹고 와 가지고

제가 남편 선교사님한테 ‘얘기 좀 하자’고 그랬어요.

 

‘뭔 얘기를 하냐고, 당신은 얘기하다가 꼭 싸우려고 하기 때문에

얘기 할 필요 없대요.’

 

‘아니 그냥 오늘은 내가 꼭 할 얘기 있다고,

그 집에 가보니 계란하고 우유가 있더라고...’ 그랬더니

 

남편은 들은 척도 안 하다가

제가 자꾸 그러니까 (바가지를 긁으니까)

 

“아니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길에 가다가 닭도 보고 소도 봤지?

근데 왜 우유가 없고, 계란이 없겠어?” 그래요.

 

“나는 없는 줄 알았다고...”

 

그날 밤에 우리는 밤을 새워서 싸웠어요.

제가 ‘날마다 계란 한 개, 우유 한컵 먹이자’고 하는데

남편이 대답을 안 해서, 그 대답을 들을 때까지 밤을 새워서 싸웠어요.

비싸지도 않은 거 그거 먹이자고...

 

우리 남편 선교사님이 나중에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다가

일어나 가지고 절 보더니 그래요.

 

“당신이 여기 뭐하러 왔냐? 무슨 신분으로 왔고, 누구의 아내로 왔냐고?”

그러면서 남편은 말하기를

“나는 선교사다. 그리고 당신도 나의 아내로 선교사로 왔다.

그까짓 계란 한 개, 우유 한 컵이 뭐가 소중해서

다른 사람 잠도 못 자게 이렇게 난리치냐고?”

 

우리 아이는 그래도 원주민 아이들보다는 더 잘 먹고 살지 않느냐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 다 우리가 일대일로 가는데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가기 부끄럽지 않아?”

 

그런데 제가 마음이 막 강팍해지는 거에요.

나는 안 부끄럽다고 했어요. 하나님 앞에 나는 안 부끄럽다고.

 

‘계란 한 개, 우유 한 컵도 먹이지 못하는 게 선교사 생활이라면

나를 (한국으로) 돌려보내라’고 그랬어요.

 

‘이러자고 비행기 표를, 그것도 편도 비행기표만 사서 보냈느냐고..

한국에서 내가 사도록 놔뒀으면, 내가 왕복비행기표 사서 왔을 거고,

그랬으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나는 부끄럽지 않다고, 자녀에게 그것도 못 먹인다면

나 선교사 포기하겠다’고 그랬어요. 밤을 새워서 싸웠어요.

 

남편 선교사님이 그 날부터는 저를 피해 다녀요. 저하고 눈도 안 마주쳐요.

그러면서 제가 옆에 있는데 기도를 이렇게 해요.

‘하나님 세상에는 착하고 예쁜 여자도 많은데, 왜 저런 여자를 제게 주셨습니까?

하나님 데려가시든지, 변화시키든지...’

 

남편이 그렇게 기도를 하면요.

저도 화가 나서 옆에 꿇어 앉아 가지고

‘하나님 무슨 목사가 저래요?’ 그러면서 기도를 하는 거에요.

그게 선교사의 가정이었어요.

 

▲그렇게 지냈는데 어느 날. '팔롬배'라고 하는 지역이 있는데

거기서 부흥회를 한다고 남편 선교사님을 모셔갔어요.

 

그래도 싸우던 선교사님이 없으니깐 너무 무섭고 허전한 거에요.

 

3일 동안 기다렸다가 남편 선교사님이 오셨는데, 뭘 잔뜩 들고 왔어요.

그래서 이게 뭐냐니깐, 자기도 모르니까 열어보래요.

그래서 열어보니까 계란이 80개가 들어있었어요.

 

제가 다 세었어요. 저는 그전에도 그 후에도 그런 선물을 받아 본 일이 없어요.

그 팔롬배 지역은 너무나 가난해서, 계란 한 개도 아끼는 원주민 목사님들이

집회를 하면서 부흥회 3일 동안

‘누구든지 집에 닭 키우는 사람, 계란이 있으면

선교사님이 돌아가실 때 다 선물로 드리자’고 했다는 거에요.

 

그분들이 저희가 계란이 필요한지 뭘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제가, 이 철없는 이 아내가 계란 타령을 하니까

하나님이 그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계란을 80개를 주신거에요.

 

정말 그거 먹는 동안에는 한 번도 안 싸웠어요.

 

여러분 웃으시지만 저는 너무 너무 슬펐어요.

그 당시에는 기뻤고, 계란이 떨어 지니깐 또 싸우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이 ‘너는 안 되겠다’ 하셨나 봐요. 저를 병으로 치셨어요.

제가 황달병에 걸리고, 말라리아도 걸리고

두 가지 병에 다 걸려서 정말 죽을수 밖에 없는 지경까지 갔어요.

 

제가 꼭 죽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의사도 살기 힘들거라고 그랬대요.

 

그러니까 우리 선교사님이 ‘괜히 데려왔구나’ 그리고 가슴 아파서 많이 우셨대요.

 

근데 저는 그 병중에서도 조금만 기운이 있으면 또,

‘나 혹시 나 여기서 죽으면 여기다 묻지마.

나 한국에 데려다가 묻어!

돈이 아무리 들어도 여기다 묻기만 하면 가만 안둘 거야!’

우리 선교사님이 "당신 안 죽어, 안 죽어!" 막 그러는 거에요.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저는 하나님을 체험한 일이 없었어요.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도 들은 적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체험담을 간증할 때

‘뭘 저렇게 요란스럽게 예수를 믿어?’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아픈 중에서 제가 기도하고 울면서

‘하나님 나를 살려주시던지 데려가시던지 하세요.’

 

저 너무 아파서 이 땅에 사는 것도 힘들고 너무 힘들어요.

그러면서 우는데 그 날 하나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어요.

 

제가 밤에 자고 있는 선교사님을 흔들어 깨웠어요.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그래서 선교사님이 너무 피곤하니까

잘 먹지도 못하고.. 또 저한테 시달리고 하니까..

 

남편이 손을 이렇게 저한테 내밀어 가지고 기도해주고는 ‘빨리 자라’는 거에요.

‘자고 일어나면 병 아픈거 낫는다’는 거에요.

 

근데 제가 밖으로 나와서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서 울면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하나님, 나 너무 아파요!”

 

그때 갑자기 "사랑하는 내 딸아" 이런 음성이 들리는데,

저는 그게 처음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밖에 누가 또 찾아온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 밤에 또 누가 왔나?’ 그러고 그쪽으로 걸어 나가려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상한 소리를 들어보니까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그런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근데 제가 그때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들었던 그런 것이

나한테 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앉았어요.

앉아 가지고 "아버지" 그러고 불러봤어요.

하나님이 "그래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제가 선교사님 보고 날마다 (바가지 긁은 것이)

“하나님은 나를 안 사랑한다. 하나님은 당신만 사랑한다.

하나님은 당신만 불렀다. 나는 재수없이 결혼 잘못해서 온 거다.”

 

제가 늘 그렇게 말하고, 하나님이 당신만 택했다고 그랬는데

그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저를 인식시켜 주시는 거에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아프리카로 불렀다, 내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근데 제가 얼마나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근데 하나님께서 "그러나 네가 거듭나야 되겠다" 하시는 거에요.

 

저는.. 제가 목사의 아내고, 제가 선교사로 왔는데

저는 제가 물론 거듭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너는 거듭나지 않았다. 네가 지금 이 모습으로 서 있으면

내 이름만 더럽힌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갑자기 앞에 빛을 비춰주시면서

저의 잘못된 부분들을 빛으로 보여주시는 거에요.

 

정말 제가 그런 짓을 했는지도 몰랐는데

밥을 떠서 감추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거에요.

아마 사람들이 집에 가고 나면, 우리 식구들만 먹으려고 감추었던 것이죠.

 

남편ㅇㅣ한끼 먹을 쌀만 사다주니까

그걸 조금이라도 감춰서

‘이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면 내 아들 먹여야지’ 그랬던가 봐요.

그런데 저는 사실 그런 줄도 몰랐어요.

 

빵을 아프리카 우리 아들이 놀겠다고 찾아오면

그 아이들은 빵을 얇게 썰어주고

제 아들은 두껍게 썰어서 먹이는 모습 보여주시고,

 

‘그 밥을 떠서 감추는 모습’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하나님 잘못했다고, 잘못했다’고 하는데,

정말 눈물, 콧물이 범벅이 돼서 울면서...

 

하나님이 자꾸 그런 걸 보여주시는 거에요.

‘마귀처럼 서서 남편을,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뽑으신 주의 종을 대적하고 서 있는 내 모습’

 

제가 막 울었어요.

하나님이

"너는 네 아들을 사랑해서 밥을 감추고, 빵을 두껍게 먹이고 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메달았다.”

 

제가 얼굴이 땅바닥에 닿도록 엎드려서 울었어요.

용서해달라고, 용서해달라고, 용서해달라고 울면서 울면서...

 

저는 제가 그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가 깨가지고 기도하고 울고 그랬어요.

시간이 얼만큼 지났는지도 모르는데도, 계속 그러고 있었는데

누가 제 어깨를 탁 치는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선교사님이 새벽기도를 드리려고 일어나신 거예요.

우리가 싸우면서도 새벽기도는 꼭 드렸어요.

 

근데 드리러 나왔는데, 제가 울면서 울면서 뭐라고 뭐라고 웅얼거리니까

“당신 왜 그래?” 그러면서 제 어깨를 건드렸는데

 

저는 처음에 하나님이 저를 데리러 오신 줄 알았어요.

그래 가지고 제가 남편을 이렇게 보는데, 쳐다볼 수가 없어요.

 

내가 너무 죄많은 여자 같아서, 남편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의자에 앉으시라 그러고, 그 발밑에서 제 얼굴을 대고 엉엉 울었어요.

 

“여보 나는 당신한테 너무 악한 아내야. 나를 용서 해달라고”

남편 선교사님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거에요.

 

“하나님이 지난 밤에 나를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아프리카로 불렀다. 내가 너를 쓸 것이다’

그렇게 말씀 하셨다고.

하나님이 나도 사랑한다고. 나도 불렀다고...”

 

그러셨다고 울면서 울면서 얘기를 하니까

남편 선교사님은 “할렐루야!” 울면서 저를 끌어안고... 아침이 된 거에요.

 

저는 정말 달라졌어요. 저는 부끄럽지만 선교사의 아내가 되었고,

목사의 아내가 되었고,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와서 거듭났습니다.

 

 

▲근데 정말 세상이 달라졌어요. 제가 거듭나니까.

예전과 똑같은 환경인데 제가 달라진 거에요.

 

너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고

하나님께 뭐든 드리고 싶은데

제가 드릴 것이 하나도 없는 거에요.

(여러분 드릴 수 있는 환경이 될 때 드리세요.)

 

저는 하나님께 드릴 게 없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제가 울면서

병원에서 말라리아, 황달병 고치겠다고 먹던 약을 다 버렸어요.

 

남편 선교사님이 쓰레기통에서 그걸 다시 꺼집어내는 거에요.

“이러지 말라고.. 당신 그러면 안돼. 약은 먹으면서 우리 기도하자.”

 

제 마음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데려가시면 천국 가고, 살려주시면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나 이런 거 필요 없다고’ 해서 약을 다시 버렸어요.

그리고도 너무 뜨거워요.

 

그래서 달력에다가 제가 동그라미 1백 개를 했어요.

1백 개를 하고는 그 백일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금식하고 한 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는 도중에 제가 몸이 좀 이상해지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선교사님 보고 나 병원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를 병원에 데려갔는데, 의사가 절 보더니 깜짝놀라는 거에요.

 

“당신 아직 살아있었냐고?”

제가 그 의사가 공짜로 약을 주고, 공짜로 저를 다 진료해 주었는데

거저 해주는데도 병원에 안 오니까... 제가 죽은 줄 알았다는 거에요.

 

근데 제가 살아서 찾아왔으니 깜짝 놀랐대요.

그분이 영국에서 공부한 인도인 의사인데, 저한테 돈을 안 받았어요.

 

그런데도 병원에 안 오니까 ‘죽어서 안 오는구나. 참 안됐다’ 그랬다는 거에요.

근데 갑자기 나타나니깐 깜짝 놀라서

저를 검사를 다 하더니 ‘무슨 약을 먹었냐?’는 거에요.

두 가지 병이 다 치료가 되었다는 거에요. *말라리아, 황달

 

저는 그 자리에서 울면서 무릎 꿇고 울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부터 기도제목이 달라졌어요.

 

“하나님 우리 돈 주세요.

돈 주셔서 불쌍한 사람들 나눠 먹게 하시고

학비 없다고 교통비 없다고 찾아오는 사람들, 빈손으로 안 보내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던 것이 달라졌어요)

 

그리고 날마다 기도했어요.

그래도 한꺼번에 달라지는 것 없이 저희는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하루는 저희 아들이 빵을 먹다가 갑자기 빵을 밀어내더니, 막 흐느껴 우는 거에요.

 

“왜 그래?” 그러니까

“아빠, 아빠는 왜 이렇게 가난하세요?

나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10살 먹은 아들 입에서 나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에요.

“아빠 왜 이렇게 가난하세요? 저를 한국에 보내주세요. 한국에 가고 싶어요.

친구들 보고 싶어요. 거기 학교 다니고 싶어요.” 하면서 펑펑 우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정말 달라진 게, 제가 마음은 아픈데

그때는 싸우려는 마음은 안 생겼어요.

우리 아들을 그냥 머리를 끌어안았어요.

 

우리 선교사님이 우리 둘을 끌어 안고 ‘하나님 우리를 데려가세요.’ 그러고

하다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목이 터져라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그 찬양을 막 부르는데, 제가 위로를 받는 거에요.

 

아들보고 말했죠.

“그래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는데 이까짓 배 고픈걸 못 참아?

참아.”

그러면서 우리 아들보고 그렇게 말은 하고는

“너는 이 다음에 커서 다른 건 다해도 좋은데 선교사는 하지 마라.”

 

저희 아들이 울다가

“엄마 걱정하지 마! 미쳤어? 내가 그런 거 하게..”

 

그 아들이 지금 어엿한 목사가 됐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우리 아들 잠깐 일어나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아들 목사 일어나서 회중에게 인사)

 

제가 너무 너무 힘들어서

“주님, 주님

제가 주의 여종이 된 걸 너무 감사하고 너무 감사해서, 생명을 드려서 일하겠습니다.” 해놓고

 

그렇지만 아들보고는

“너는 다른 걸 다해도 선교사는 하지 마라”

아들은 “미쳤어? 나는 안 할거야!” 그러던 아들이

 

자기는 돈을 많이 벌어서 아프리카 사람들 도와주고

엄마한테 차를 하나 사주겠대요.

 

그러던 아들이 대학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전화가 왔어요.

“엄마. 내가 신학을 좀 하고 싶은데..”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리고 미국에서 대학원에 가서,

신학대학원 나오고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얼마나 우리 가정에 도우미가 되었는지 몰라요.

 

저희는 너무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고

너무너무 정말 배가 고파서 그렇게 살면서

제가 정말 우리 남편 선교사님한테 배운 게 있어요.

 

‘아 알프스는 스위스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있구나!

내 마음이 천국이면 그곳이 알프스이구나!’ 그걸 제가 배웠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래도 오늘 보다는 내일이 낫게 하시고

그 다음 날이 더 낫게 하시면서

가장 가난했던 선교사를, 너무나 너무나 가난했던 선교사를 통해서

지금 스와질랜드의 의과대학이 있는 종합대학을 세우고 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것이 너무 너무 많아서,

정말 제가 밤을 새워서 말을 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너무 많아서 다 못해요.

 

그런데 제가 우리 기도하면서 지금까지 해온

대학의 영상을 잠깐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위 동영상 41:20초~

 

그리고 저는 내려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