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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예고 눅1:26-38 2001년경 설교 ☞ 성탄설교모음
슬픔 많은 세상에서 기다려지는 것은 ‘기쁨의 소식’입니다.
슬픔 많은 세상을 사는 가장 큰 보람이 있다면,
기쁨의 소식을 전달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일에 쓰임받은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사렛 땅에 살던 무명의 한 틴에이저 소녀가
이 위대한 일에 쓰임 받고 성모가 된 비밀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여러분과 저는 우리네 인생의 장에서
하나님께 붙들리어 쓰임받는 비밀의 단서를 제공받을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쓰임 받은 비밀은 무엇일까요?>
◑1.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선택을 말할때 가장 본질적 요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마리아를?’ 이란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당시 세계의 수도 로마엔 얼마나 훌륭한 요조숙녀들이 많았을까요?
또 이스라엘 땅에도 탈무드와 토라로 잘 교육된 랍비의 딸들이
수도인 예루살렘에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런데 이 모든 유명한 도시의 여인들을 택하는 대신
‘이방의 땅’처럼 여겨진 갈릴리 (마4:15) 지방에 속한 나사렛,
오죽하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말이 생겼을까요.
그 평범하고 소박한 마을에 살던 틴에이저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주권이 정답입니다만,
그말이 인간적 요인을 전적으로 배제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는 암시가 본문에 있습니다.
눅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은혜를 받은 자여’ "Greetings, you who are highly favored!
여기 수동태는 분명 그녀의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택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1: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은혜를 얻었느니라’
이 구절은 한국어로 수동태로 보입니다만,
사실은 능동태 직설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영어성경에는 "You have found favor (grace) with God“
‘마리아가 은혜를 찾아왔다’로 되어 있습니다.
수동태로 해석하면.. 마리아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게 되지만,
능동태로 해석하면.. 마리아가 은혜를 찾아왔다.. 가 되는 것입니다.
눅1:28절은 수동태이고, ‘은혜를 받은 자여’
눅1:30절은 능동태이니, ‘네가 은혜를 찾아왔다, 구해왔다’
우리는 (주권과 자유의지) 두 측면을 다 고려해야 된다는 거죠.
그것이 바로 마리아가, 당시의 수많은 여인들 가운데서
특별히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유라는 것입니다.
▲시인 John Magliola 의 시 가운데, 이런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한 소년이 별을 보았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네
별님은 말했다네, 아이야, 넌 왜 우니?
소년은 말했다네, 별님은 너무 멀리 있어요, 그래서 당신을 만질 수 없잖아요.
그때 별님은 대답했다네.
아이야, 내가 네 맘속에 이미 있기에, 넌 나를 볼 수가 있었던 거야.」
이 시가 마리아가 은혜받은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요?
이미 은혜를 사모함이 마리아 안에 있음을 보고,
하나님이 그녀를 선택하셨다는 것으로 적용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아이야, 내가 네 맘속에 이미 있기에, 넌 나를 볼 수가 있었던 거야’
◑2.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녀가 경험한 기적의 배후에 있었던 믿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1:34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회의적인 발언처럼 들리지요?
그러나 영어로 why가 아닌 how (how shall this be? 로 되어 있음을 보십시오.
이는 방법론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주1)
‘어떻게 how’로 물었다는 것은, 마리아의 믿음을 보여주는 말이요.
만약 ‘왜 why’ 라고 물었다면, 그의 불신앙을 보여주는 말이고요.
이어지는 35절에서, 천사의 대답은 설명이었습니다.
how에 대한 답변이었던 거죠.
곧 마리아의 잉태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45절에 보면 마리아가 이것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이렇게 이어지는 문맥을 쭈욱 살펴보면
"어찌 이 일이 내게 있으리이까?" 라고 한 마리아의 말은 :34
불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신앙과 믿음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은 여자에게“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님의 능력을 신뢰한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기적을 둘러싼 두 가지 상이한 입장이 있습니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은 늘 기적을 바라고 기적을 경험하며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극단적 이성주의자는 이성과 상식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나,
합리성의 틀에 갇힌 나머지, 모험과 감격을 상실한 사람이고, 기적을 불신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이성적 인간이나 그러나 이성에만 묶여 있지 않고,
이성을 넘어서서 (‘초월’이란 말을 쓰지요) 기적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성적이지만 이성을 넘어서서 (초월해서),
기적을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라아를 쓰신 이유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을 신뢰한 까닭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보십시오. 마리아는 말씀의 능력을 고백하면서, :37
동시에 말씀의 순종을 고백합니다. :38
그러나 이 순종은 대가를 요구하는, 곧 값지불을 요구하는 순종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처녀가 임신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롱거리가 되고, 아니 유대인의 엄격한 전통에 따르면 죽을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마리아는 이때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 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순종의 자질이, 그가 특별히 쓰임받을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순종의 덕을 평가절하하는 시대요,
오히려 반항이나 비판을 더 커다란 미덕으로 오해하는 시대입니다.
히5:8엔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하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고 기록합니다.
반항이나 비판은 저절로 되지만, 순종은 배워야한다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반항은 죄인의 체질이다. 그러나 순종은 고된 학습이다"고 말합니다.
희생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주인이요,
이런 사람들을 통해 복음의 역사는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쓰임 받는 인생의 보람을 누릴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순종의 생애가 될수 있는가를 물어야 할 시간입니다.
▲군대갔다가 첫 휴가 나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군대에서 배운 중요한 교훈이 무엇이냐고 물었답니다.
"순종이지요" 대답하는 아들에게
"그건 나도 가르치지 않았더냐?" 했더니
"물론이십니다.
그러나 아버지, 군대는 나에게 지금 당장 즉시 순종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하더래요.
한해의 결산, 혹은 인생의 결산을 앞두고
우리는 과연 오늘 당장 즉각적으로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할수 있을까요?
이 응답 여하가, 앞으로 여러분의 생애의 질을 결정할 것입니다.
▲하나님 음성듣고 <순종>해서, 스위스에서 예수전도단을 시작한 로렌 커닝햄 (펀글)
뉴질랜드에서 돌아온 지 몇 개월이 지난 후에 나는 심한 감기로 통증과 열을 달래면서
아파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생각이 나를 스쳐갔다.
“너는 학교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전도 전략 학교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이 생각은 없어지지 않고 점점 커져가다 또 다른 생각이 파고 들어왔다.
“그 학교는 스위스에 세워질 것이다.”
‘스위스라니! 하나님, 정말 당신의 음성입니까?’
스위스가 있는 유럽은 우리 YWAM의 활동이 전혀 없는 곳(불모지)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생각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확인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은 충격적인 방법으로 확인을 해주셨다.
어느 날 아버지가 친구 윌라드 씨와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그가 전화로 내가 아버지와 함께 나와 주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나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나는 그와 악수를 끝내자마자 왜 나를 만나자고 했는지 물었다.
“로렌, 당신에게 전해줄 말이 있소.
주님께서 누군가가 스위스에서 학교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제 마음 속에 심어주셨소.
그런데 어젯밤에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오.”
‘동방 박사의 원칙’이 놀랄 정도로 또다시 적용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스위스에 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확신했다.
우리 아기가 태어나고 스위스에 다녀온 지도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낡은 호텔 하나를 임대했고 5개국에서 올 36명의 젊은이들을 맞을 계획을 추진시켰다.
학교는 1969년 12월 27일에 시작되었다. 돈 스티븐스와 그의 아내도 우리와 합류했다.
나의 경우 내 자신이 정결케 되는 시간을 가진 후에야
하나님의 능력이 풀려 역사하시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회개와 고백을 중요시해왔지만
YWAMer(웨머)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고백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 주 후 ‘깨끗한 양심을 가진 후에 오는 능력’에 대한 강의가 끝난 다음
돈 Don 의 진실한 고백의 간증을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렸다.
사람들 앞에서의 고백은 겸손과 일치를 가져오고 가족처럼 더욱 가깝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1970년 여름이 끝날 무렵, 우리는 알프스 산이 보이는 호텔 앞의 무화과나무 정자 아래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각국에서 온 36명의 젊은이들은
독일과 스페인, 프랑스, 영국,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들이 겪었던 모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나자 앞으로의 계획을 듣는 시간이 되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YWAM과 함께
구체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분야에서 독립적이면서도 선교사역과 연결되어 일하라고 말씀하신다고 믿었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꿈꿔오던 기하급수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로렌 커닝햄 목사님이 포항을 방문했습니다. (*1935~2023년 소천)
이런 영적 거장이 포항을 방문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인데,
이 지역 목회자들을 위해 특별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
이분은 8대째 목사로, 젊어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철저하게 순종>하는 가운데
위대한 인생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그는 특히 하와이 코너에 있는 열방대학-세계선교 센터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상세하게 전해주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당황했습니다.
하와이 호놀룰루도 아니고, 코나 라는 척박한 곳에 선교센터를 짓고
거기서 선교사들을 훈련시키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전에도 그랬듯이 순종했을 때, 부지와 건물 등이 차례로 구비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곳 열방대학에서는 전세계에서 수많은 젊은이들과 목회자들이 자원하여
영성훈련과 선교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더욱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전문 인력들이 연구와 임상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의 모든 사역의 결과는 자기가 행한 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들입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인력, 자금, 환경 등 모두 하나님이 보내주시고 공급하셨습니다.
(더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벼랑 끝에 서는 용기]라는 책을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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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how는 헬라어로 ‘포스’ πῶς
why는 헬라어로 ‘티스’ τί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