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사도바울의 3차전도여행 P2

LNCK 2023. 12. 25. 22:25

성경대학: 바울의 일생 9강 (이근목사) - YouTube

 

사도바울의 3차전도여행 P2                 ☞이전 글 보기 

◑에베소를 떠나 빌립보로               

20: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소요가 그치매'
구리장색 데메드리오에 의한 에베소 연극장에서 벌어진 소요입니다.

그 소요가 그치자, 사도 바울은 이제 에베소를 떠납니다.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에 편지를 보내 놓고 (고린도전서와 후서 중간에 편지, 성경엔 없음)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서, 디도가 돌아오는 길의 여정을 따라서 
마중을 나가는 셈입니다. 

그래서 디도를 만나기 위해서, 디도의 여정을 따라서 드로아로 가게 됩니다. *드로아는 빌립보로 가는 경유지
그러면 디도가 돌아오는 길에, 혹시 디도를 중간에서 만날까 해서 였죠.

바울은 계속 좀 스트레스가 있었던 거 같아요.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에베소의 폭동으로 인해서 바울은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바울은 굉장히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래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드로아에서 멈추게 되지요. 

아마 '드로아에서 만나자'라고 디도와 약속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아래 구절 때문이죠,

고후2:12~13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이 말은 빌립보로 건너갔다는 얘기죠.
빌립보에 건너가서, 바울은 디도를 드디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의 소식도 듣게 되고, 그곳에서 좀 마음이 편해지게 됩니다. 

물론 마케도니아, 빌립보교회도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기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후7:5~6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
모든 가는 곳마다 바울이 겪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빌립보 도착해서 바울은 루디아의 집(빌립보 교회)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 누가가 빌립보 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 빌립보에서 전도하고 마게도냐로 떠나갈 때, 누가를 거기 남겼습니다. 주1)

빌립보 교회에 바울이 도착해서, 고린도에서 올라왔던 디도를 이곳에서 만나서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곳에서 마음 편한 소리를 듣습니다. 
'눈물의 편지'를 보내 놓고 그 고린도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디도를 통해서 들려오는 소식은 
'이제 고린도 교회가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이제 평안을 누리고 있다'라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오히려 디도를 위로하고, 바울에게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또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했던 것, 그를 모욕했던 것을 다 용서를 구했고,  
그리고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을 징계하였다.. 라는 소식을, 디도를 통해 전해 듣게 됩니다. 

바울이 지금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스트레스가 지금 계속 몰려오는 상황에서   
드로아도 패스하고 이곳 빌립보에 와서, 바울은 여기서 비로소 한숨을 돌리게 됩니다. 
오래 묵은 체증이 쫙 내려가게 됩니다. 여기서 마음이 정리가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서 빌립보에 다시 편지를 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빌립보를 떠나 고린도로

그리고 지금 3차전도여행 중인데, <고린도후서>를 써서 보낸 후에,
이어서 고린도로 가게 됩니다. 세 번째 방문이 되는 셈이죠.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내용이 좀 편합니다. 바울의 마음이 편해졌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굉장히 편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고린도 교회는 성도들에게도 굉장히 편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넉 장은 굉장히 엄격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문제가 일어나면 안 되고, 또 이런 문제가 또 일어날 때는 
그때는 엄격하게 다루겠다.. 라는 내용을, 마지막 넉 장에 쓰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신앙생활하는 것은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고후4:5
신앙의 본질적인 것을 다시 한번 고린도 교회에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의 편지의 내용을 보면 
-바울 자신의 사역에 대한 변호  *1~7장
-그리고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의 주 목적이었던게 
 예루살렘에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교회들이 헌금을 모아서 돕는 일 
 그것을 다시 한번 고린도후서에서 피력을 하게 되고요.  *8~9장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 *10~11장
-바울이 본 환상과 육체의 가시 간증, 고린도를 세번째 방문할 계획 나눔  *12~13장

정리하면,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썼고,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빌립보에서 썼던 거죠.

고린도에 도착해서 석 달을 머물면서, <로마서>를 씁니다.
빌립보에서 고린도로 편지를 보내고, 바울은 이제 고린도로 다시 가게 됩니다. 
고린도에서 이제 바울은 모든 자기 3차 전도 여행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준비를 하게 되지요. 
그래서 아마 이곳에서 바울은 많은 것을 정리하고 있었을 겁니다. 

또 그런데 시즌이 겨울로 넘어가고 있어요. 
겨울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은, 배를 타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곳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머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바울은 마음을 정리합니다. 자기의 사역을 정리하고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아주 중요한 <로마서> 편지를 쓰게 됩니다. 

행20: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즉 바울은 처음 전도의 옛 중심지인 빌립보(16:12), 데살로니가(17:1), 베뢰아(17:10)의 공동체를 재방문했을 것이며, 
이 기간 중에 바울이 로마서 15:19에서 말한 바와같이 
일루리곤(오늘날의 알바니아)까지도 갔을 것입니다

바울의 3차전도여행의 주 목적은, 그곳 교회들을 계속 격려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빈궁한 신자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를 거두는 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연보를 위해 갈라디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게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롬15:25-32, 고전16:1-4

이방인 교회들의 연보는 단순히 사랑을 나타내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헬라에 이르러 거기 석 달을 있다가'
여기서 헬라는, 즉 아가야 지방을 뜻하지만, 실제로 바울이 체류하였던 곳은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였죠. 체류 기간은 3개월이었습니다. 
A.D. 56-57년에 걸친 겨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가이오의 따뜻한 대접을 받으면서(롬 16:23) 
이 기간에 로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마르틴 루터나 어거스틴도 로마서를 읽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보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이지만 
바울의 목적은 서바나 즉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바나(스페인)로 복음을 전하러 가기 위해서 
거점을 삼고자 했던 게 바로 로마 교회였습니다. 

스페인인으로 가는 중간 거점이 로마 교회이기 때문에 
로마 교회에 그것을 부탁하기 위해 로마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에는 이미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다면, 
로마에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세워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자기가 나중에 그곳을 지나갈 때, 도움을 요청하는 그런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사도베드로가 세웠다는 설도 있고, 행2장에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16개 지역에서 모여서 같이 체험했는데, 로마의 경건한 자들이 그 때 와서 성령을 체험하고, 
로마에 돌아가서 자체적으로 로마교회를 세웠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 계획이 있었죠. 예배소에 있을 때에 선발대를 보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로마에 보냈고, 또 다른 제자들도 이미 로마로 다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 바울이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마중 나오는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바울이 많은 제자들을 로마에 보내놨고 
로마에 있던 그 형제자매들이 바울 일행을 마중 나오게 된 거죠. 

행28:14~15 '거기서(이탈리아 항구, 보디올)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위 구절은, 이미 로마에 많은 형제자매들이 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는 어떤 면에서 예루살렘 교회보다는 훨씬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로마교회는 믿음이 더 강한, 믿음이 더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교회의 소문이 각 곳으로 퍼져 있었고 
바울도 그 로마교회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바울은 그 로마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근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봐야 되는게 뭐냐면,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바울이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이게 지금 그냥 단순하게 편지를 써서 나를 도와달라는 내용이 아니라 
그 편지 내용을 쓰면서, 바울이 감지하고 있던 어떤 영적인 기류를 
바울이 깨닫고 있었다 라는 거죠. 

그게 아마 연대를 보면, 좀 우리가 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서의 AD 56년 경에 쓰여 졌습니다. 

네로 황제가 AD 54년에 즉위합니다. 
그리고 AD 64년에 기독교 박해가 시작이 됩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의 편지를 쓴 때가 AD 56년 정도 된다면, *박해 8년 전
우리가 대충 이 연도를 통해서, 로마의 분위기를 좀 감지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 악명 높은 네로가 54년에 왕이 되고 
바울은 지금 56년 경에 로마서를 쓰게 되고 
64년 정도에 네로의 본격적인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이 (박해로 몰아가지는) 기류를 
어느 정도 바울이 영적으로 감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런 기류 속에서 '나는 로마로 가야 돼' 자꾸 로마로 가야 돼라고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해를 대비하기 위해서이고, 
큰 박해의 시기가 오기 전에, 어서 빨리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다급한 마음이었겠죠.

그래서 바울은, 이미 동방 지역의 선교, 즉 갈라디아,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이쪽이 전도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을 해서 
더 서방 쪽으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와 서바나 땅끝까지 가기를 원했고, 로마 교회가 그것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롬15장에 보면, 바울은 이미 로마로 가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롬15:22~23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동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서바나)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시대적으로 지금과 그 당시는 많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바울이 여행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에는 그 지역마다 돕는 사람들이 있었고, 
데살로니가로 갈 때는 빌립보 교회가 도왔고, 
고린도로 갈 때에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도왔고... 

이런 식으로 돕는 많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전도여행을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편지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겐그레아(고린도의 위성 도시)의 뵈뵈 자매를 통해서 로마에 그 편지를 보냅니다.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바울은 이곳 고린도에 있는 동안, 겨울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기가 어려운 계절이었습니다. *3차전도여행이 막바지 라는 뜻
또 모금한 헌금을 전달해야 했고요.

그래서 이제 바울은 각 교회들에게 연악을 해서 
아마 고린도로 집합해라 라고 말을 했을 겁니다. 

각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각 교회에서 예루살렘을 도울 연보를 걷어서 
고린도에 집결을 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곳에서 기다리는 기간에, 로마에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각 지역에 있는 대표 형제들이 다 모였어요.  20:4

이제 어느 정도 날씨가 풀리고, 배가 이제 띄워질 때가 됐을 때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바울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배가 직항으로 단 번에 가는 게 아니라, 
중요 항구 도시들을 계속 거쳐가는 거죠. 경유해서 가는 거죠.

20: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그래서 이제 바울은, 헌금을 걷어서 예루살렘으로 떠나려고 하는데 
바울이 여기서 뜻밖의 소식을 하나 듣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고린도에서, 즉 겐그레아(실질적 고린도 항)에서 배를 타고 가면 되는데,
 
실제적으로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이미 모든 지역에서
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다'라고 표현했듯이  고후7:5 
이게 굉장히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다만 어느 누군가의 집에서 바울이 편지를 쓰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만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든지, 대놓고 무슨 일을 한다 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모든 형제들이 모여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할 때 
하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왜냐면 고린도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사도 바울을 쫓아내려고 했던 그때가 있었습니다. *행19장 2차전도여행 때

그 유대인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그 유대인들이 바울을 암살하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인 형제들이 알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기점으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다 가게 됩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 형제들이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간다.. 라는 첩보가 
그 유대인들에게 다 드러나게 된 것 같아요. 동선이 자기들과 겹치죠.

그리고 '만약에 바울이 배를 타고  가면, 
우리가 그때 공격을 해서 바울을 암살하자'라는 소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선상에서 바울을 죽여서 바다에 버리자는 식의 테러 소문)

근데 고린도에 모인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되돌아서 육로로 거꾸로 돌아가게 됩니다. 빌립보까지 걸어가서, 결국 거기서 배을 타죠.

▲육로를 택한 바울 일행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이 명단은 각 교회의 대표들입니다.        주2) 각 사람의 면면을 간단히 살펴봅니다.

바울 일행(각 교회 대표들 포함)은, 배를 타고 가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육로를 통해서 다시 거꾸로 돌아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은 깨닫고 있어요. 
'아 내가 지금 내 계획이 있지만, 내가 뭔가 다른 힘에 이끌려서 가고 있구나'를 
바울은 고린도에서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육로를 택해서 가게 되는데요. 
바울은 굉장히 나이가 먹은 때이고요. 
배를 타지 않고 육로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 길은 굉장히 힘들었을 겁니다. 

또 예루살렘에, 오순절 전에 도착해야 되는 
이들 나름대로의 시간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린도-베뢰아-데살로니가-빌립보-배타고 에게 해 건너서-드로아에서 예루살렘까지.

20:5~6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빌립보에 와서 누가와 합류하다
이들이 빌립보에 왔을 때, 누가가 있었습니다. 
연로한 바울은 육체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행들은 먼저 드로아로 갔고, 바울은 빌립보에서 좀 쉬었다가 갑니다.

20:6절에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대열에 합류했다는 뜻입니다.

이미 긴 육로의 여행으로 바울은 지쳐 있고 
누가가 바울을 극진하게 보살핍니다. 
'이렇게 떠나시면 안 됩니다. 좀 쉬셔야 됩니다'

거기서 몸을 좀 추스리고 누가가 '이제부터는 내가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다시 누가가 바울의 팀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빌립보 교회를 돌보던 누가가 
이때부터 사도행전이 끝날 때까지 
사도 바울과 끝까지 동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보낸 후에, 배를 타고 5일 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로아에 도착해서, 앞서 출발한 일행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앞서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로 올 때, 
드로아에서 전도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패스했는데  
 *고후2:12~13 '(드로아에서)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이제는 그 전도의 기회를 살려서, 바울이 이곳에서 전도 집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7일이나 머물면서 이곳에서 전도 집회를 했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때 유두고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죠.  20:9         주3)

◑드로아에서 앗소로 바울이 걸어가다

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이제 다시 합쳐진 일행은, 드로아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앗소로 가게 됩니다.
여기서는 배를 타고 가야 되는데, 
바울이 여기서 자기 일행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앗소까지 걸어서 갈테니까, 여러분은 다 배를 타고 (편하게) 가라. 
나 혼자 걸어가는 시간을 갖겠다.' 

바울이 굳이 '나는 걸어가겠다'고 말하는데요.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서 가면, 약 60Km 입니다.
걸으면 이틀은 걸리겠죠. 

그러니까 이틀 걸리는 길을 바울이 나 혼자 걷겠다 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는 뭐 별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바울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이 장면은 바울이 정말 하나님 앞에 독대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혼자 무리를 떠나서 한적한 곳에 기도하러 가셨듯이, 
바울도 혼자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기 원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이 시점에서 바울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셨을까요? 
기도하는 분 중에 걸으면서 기도하는 분이 있잖아요? 
바울은 걸으면서 뭐 했을까요? 하나님과 동행했죠. 하나님과 독대한 거죠. 

'하나님 저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렵니까, 제가 뭘 해야 됩니까? 
하나님 내가 뭘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에게 '환란과 고난이 있겠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너를 통해서 내 뜻을 이루겠다' 이런 대화가 하나님과 바울간에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일생을 공부하는 분들이라면, 최소한 이것은 기억을 해야 됩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간 길'
이것은 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자 여기서부터 바울은 뭔가 확실해졌어요. 메시지가 확 달라집니다. 
이제부터 바울은 어떤 표현을 하냐면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버려서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겠다" 라는 표현을 이때부터 막 쓰기 시작을 합니다. 

저는 분명히, 앗소로 걸어가는 길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앗소에서 밀레도로 

20: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앗소에서 일행과 합류한 바울은, 밀레도까지 배를 타고 갑니다. 
터키의 서쪽 해안길을 따라 해상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입니다.

3차전도여행에서, 바울이 3년 동안이나 지냈던 에베소를 떠난 이유가
구리장색 알렉산더로 인해 일어난 소요사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에베소 근처까지 않지만, 에베소 시로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보다 조금 밑에 있는 밀레도 라고 하는 곳에서  *직선거리로 50Km
바울은 그곳에 도착해서, 거기 밀레도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내게 됩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밀레도의 작별'이 일어나죠.

20: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그리고 바울이 밀레도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낸 (소요사태 말고도) 또 한 가지 이유는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급히 가려고' .. 즉 시간이 촉박했다는 것이죠.  :16

바울은 이미 여기에서 뭔가 직감을 하고 있었어요. 
'이미 결박과 환란이 예루살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건 맞았죠.

그리고 3차전도여행이, 이게 어쩌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전도여행이 될 것이라고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얼추 맞았죠.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작별의 메시지를 이렇게 전합니다.

20: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아 이제 뭔가 마지막이 오겠구나.. 내가 내 생명을 버릴 일이 오겠구나..'라는 것을 
바울이 감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고별 메시지를 전한 겁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바울은 '밀레도의 작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잡히기는 하지만, 당장 죽지는 않습니다.

그 후로, 가이사랴에서 2년 구금, 로마에서 2년 가택연금 후에 석방됩니다. 
원고측 고소인들이 아마 재판에 불참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울이 승소한 거죠.

그래서 로마에서 석방된 바울은 (사도행전에는 안 나오지만) '4차전도여행'을 떠나게 되고, 
그때 디도서, 디모데전후서를 쓰게 되죠. 어쨌든 밀레도의 작별 이후 7~8년 후에 순교하죠.
그러나 이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체포되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바울의 예감이 맞았던 거죠.
(*아마 꿈 등으로 어떤 계시가 있어서, 바울이 앗소까지 걸어가면서 '죽기로' 결심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바울의 결심은 단호합니다.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위 구절은, 각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어요.
그래서 정관사를 붙여서 해석하면
"내가 달려갈 그 길과, 그 주 예수께 받은 그 사명
곧 그 하나님의 그 은혜의 그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그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렇게 바울의 비장한 각오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명령 앞에 순종하는, 절대 순종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우리가 행20:24절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 되는 거지요. 

에베소 장로들과 바울의 일행들은, 바울의 고별 설교를 들으면서, 
뭔가 설교가 달라요. '아 우리 사도바울 선생님이 뭔가 죽을 각오를 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다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그를 전송했습니다' :37~38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죽기로 각오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여기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밀레도에서 가이사랴로 

자 이렇게 밀레도에서 작별인사를 하고요. 이제 배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게 됩니다. 

21: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배를 갈아탔음)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중간에 두로에서 배가 정박합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배에서 내리죠.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두로에 와서는 제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7일을 머물렀어요.
어느 곳에 가도 이제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두로에도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언제, 어떤 경로로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어떻게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죠. 그러나 학자들은 11:19에 의거하여 
스데반의 순교 후 각지로 흩어진 교인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찾아'라는 말은, 제자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는 뜻을 암시합니다. 수소문을 했다는 거죠.

그리고 또 배를 길게 타고 오면 좀 쉬어야 됐습니다. 
그러니까 두로 지역의 제자들을 찾아서, 두로에서 7일 동안 머물고 
그 제자들과 교제하고 휴식의 시간을 취하게 됐을 겁니다. 

근데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게 무슨 말이냐면 다 같이 느끼고 있는 거예요. 
그 내용의 방향은 (바울과) 다 같이 갖고 있는 거죠. 

'아 예루살렘에 가면 바울이 이제 힘들어지겠구나'라는 것을 모두가 느껴서 
두로의 제자들이 만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만류하는 것을 바울이 뿌리치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두로를 떠나게 됩니다. 

▲마침내 가이사랴로
가이사랴에 내리면, 육로로 거기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거죠.

가이사랴에는 빌립과 그의 네 딸, 아가보 선지자가 있었죠.
그 외에도, 고넬료라고 하는 백부장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전도했죠.

빌립은, 이디오피아 내시 간다게에게 복음을 전했던 인물인데,
빌립이 당시에 가이사랴에서 살고 있었죠.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선가 머물고 있었고, 
그 사람들이 각각 어디선가 하나님의 일들을 다 감당하고 있었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죠. 

이 부분은 다른 설교에서 많이 설명되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21: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바울이 각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자꾸 사람들이 합쳐집니다. 
가이사랴에서 몇 제자가 합쳐 졌습니다.

고린도에서 각 교회들의 대표들이 모여서, 바울과 함께 하고 있었죠. 빌립보에서 누가가 조인했죠.
또 구브로 출신의 나손이 함께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예루살렘에 가면 나손의 집에 머물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이사랴에 와 있었던 모양이죠.
나손은 많은 사람들의 숙식을 해결할 정도로 부자였고, 큰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여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합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혼자 하는게 아닙니다.
항상 함께 하는 것이고, 나손은 성경의 다른 곳에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스쳐지나가는 사람이죠.
그러나 어느 포인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나손은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뭐 바울은 되지 못해도, 디모데는 되지 못하더라도 (되면 좋지만요)
그렇지만 바울의 조력자는 얼마든지 될 수 있고, 마땅히 되어야만 합니다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이런 사람 말고도, 두로에서 바울 일행의 숙식을 해결해 준 무명의 제자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만난 나손,
성경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름 정도이지만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루살렘 도착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2가지 였죠.
-3차전도여행의 보고를 하기 위함이었고,
-마게도냐와 아시아에서 모금한 헌금을 전달해주기 위함이었죠.

21: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보고)'

바울은 1차전도여행 때는 13개 도시를 2400킬로 
2차전도행 때는 21개 도시를 5천킬로 
3차전도여행 때는 24개 도시를 6,000KM 여정으로 돌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3차전도여행이 마지막이 아니고요. 
앞으로 10강, 11강이 더 있는데,  *지금은 9강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과정과, 
사도행전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4차전도여행이 있고 
그 다음에 바울의 순교의 장면까지가 남아 있습니다.

 

..........................

 

주1) 2차선교여행 때 빌립보로 올 때는 누가와 같이 왔는데.

16: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우리가' 라는 말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포함되었다는 말이다. 
즉 누가는 드로아에서 바울 일행과 조인해서, 같이 배를 타고 빌립보에 이른 것이다. 

17: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누가가 사도행전을 썼는데, 위 구절에서 '그들이 갔다'고 쓰고 있는 것은, 
자기는 빌립보에 남았다는 뜻이다. 


주2) 행20:4 헌금을 갖고 모인 각 교회 대표들
소바더 -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로서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다. 롬 16:21에 나타난 바울의 친척 소시바더와 동일인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아리스다고 - 19:29의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로마까지 바울을 따라 갔으며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하는 데살로니가 출신이다(27:2;골 4:10;몬 24절).

세군도 -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단지 여기만 나오는 인물이다.

가이오 - 더베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한다(19:29).

디모데 - 루스드라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16:1-3).

두기고 - 아시아 사람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며 언제나 바울과 동행한 인물로서 골로새와 에베소 교회에 바울의 서신을 전달한다(엡 6:21;골 4:7;딤후 4:12;딛 3:12).

드로비모 - 에베소 출신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한다(딤후 4:20).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대표해서 예루살렘에 간 것같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디모데를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아가야 지방과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졌던 사람이기(고후 1:1) 때문이다. 

하지만 고후 8:6 이하로 미루어보건대 고린도 교회의 연보는 
바울이 그 교회에 보낸 디도와 다른 형제에게 맡겨져 보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디도가 언급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는 디도가 누가의 형제였다는 주장에서 신빙성 있는 답변을 찾는다. 

따라서 누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수령하기 위하여 디도와 함께 파견된 두 형제 중 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아무튼 바울 사도는 그의 활동의 절정기에서, 여러 수행인들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한다.


주3) 드로아에서 유두고 사건이 일어난 이유 
왜 지금 바울의 여정을 설명하다가, 왜 유두고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장면이 여기에 들어 있을까요?
제가 이 고민을 해봤어요. 
이것은 우리가 드라마에 보면, 복선을 깔아 놓잖아요. 

바울의 여정 가운데, 다른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이 사건을 여기에 집어넣었다 라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바울의 여정을 통해서 
이러한 역사를 이루시겠다.. 라는 복선을 깔아놓은 것이라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수많은 사건들 중에, 유독 이 사건을 골라서, 여기에 배치했을까요?

저는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거예요. 
우리는 '바울은 막 유능한 사람이니까,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 .. 이게 유두고 사건의 교훈이 아니라, 

바울도 평범한 사람이죠.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인데 
바울이 힘들고 피곤한 여정 가운데서 
'하나님이 죽은 생명을 살리시는 것'을 통해서, 바울이 깨달은게 있다는 거죠. 

바울이 '아, 이건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바울에게 보여주신 역사예요. 
바울이 여기에서 막 깨달아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 
'아 내 생명이 중요한게 아니구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구나. 
내가 나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해야 되겠구나'
라는 것을 바울이 여기서 깨달은 사건이에요. 이게 '유두고 사건'의 포인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