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소원 요17:20~26 펀 글 정리
◑도입 / 크리스천 22억 대부분이, 예수님과 소원이 엇박자
본문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만의 소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본문 요17장은, 예수님의 기도인데,
그 기도의 내용 가운데,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소원을 표현하십니다.
그 예수님만의 소원을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보면서
‘내가 나를 위해서 갖고 있는 소원’도
‘나를 위해 갖고 계신 예수님의 소원’에 맞추어질 수 있다면 좋겠고,
만약 그게 맞춰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얘기할 수 있겠느냐 하는 얘기죠.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갖고 계신, 나를 위한 그 소원>이 무엇인가를
한번 살펴봅니다.
요17장의 내용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다 마치시면서
그 공생애의 의미를 다 담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몇 천 년에 걸쳐서 예언되고 있던 공생애가 3년 동안 이루어지고
그 생애가 마쳐지면서 드리는 기도 속에서
주님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게 뭐냐?’ 라는 게
이 마지막 기도 속에 예수님의 소원이 표현되면서 다 드러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그 소원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고,
예수 믿으면서 우리가 받아야 될 복을, 받는 것이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소원을 살펴보면, 어떤 의아한 점과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2011년 말에 조사한 결과, 지구상에 기독교인이 약 22억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22억 명의 기독교인들이 각자 마음속에 있는 소원 중에서
본문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예수님의 소원’과 일치되는 소원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 명일까요?
22억 명의 소원이 다 다르겠지만, 그러나 크게 분류해보면 다 포함할 수 있습니다.
굵직굵직하게 표현해보면,
예를 들어서, 돈 문제, 건강문제,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
이거면 거의 다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굵직굵직하게, 22억의 모든 소원을 다 포함시킬 수 있는 항목이
단 하나도, 그 비슷한 것도, <예수님의 소원>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22억 명이 (가톨릭 포함)
즉 교인 22억 명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데,
어떻게 주님이신 <예수님의 소원>과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겁니까?
22억 명이.. 대부분 ‘주님의 소원’과 엇박자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의 신자들이.. 엄청나게 주님과 엇박자로, 소원을 빌고 있습니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22억 명이 다 잘못되었다고 얘기할 게 아니라,
예수님의 소원이.. 좀 잘못된 것은 아닐까? ..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심지어 많은 교회들이 교회가 커지는 것을 원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소원’ 속에는 그게 없습니다. 그것도 엇박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우선순위가 아니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본문을 한번 살펴봅니다.
◑예수님의 소원
요17장 예수님의 기도에서, 예수님의 소원은 두 가지로 표현이 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믿는 것,
더 구체적으로 나 자신이 예수님을 아는 것과,
-그렇게 믿는 내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다른 성도들과 하나가 되는 것, 그렇게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가 나에게 일어나기를 바라시면서
예수님은, 이 기도를 마치시고,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우리가 살펴봐야 돼요.
▲자, 먼저 그와 똑같은 말을 25절에 반복하십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요17:25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버지를 알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알고 살았다’고 그러지를 않고,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줄 알았다’고 얘기하십니다. :25
자,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 말씀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들이신데 이 땅에 보냈다는 걸 고백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현실감의 문제를 얘기하는 겁니다, 현실감의 문제. ☞ <현실>관련글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라는 건 나의 현실감을 주목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소원 1 - 하나님이 ‘현실’이 되는 것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현실감’ 이라는 게 뭡니까?
수없이 많은 사실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실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내 마음이 지금 현재 흘러들어가고 있는 사실만이.. 나의 현실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돈 걱정을 하고 있다면, 지금 경제적인 상황이 나의 현실인데,
그게 왜 현실이 될 수 있는가 하면,
돈이 없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현실이 되는 게 아니에요.
내 마음이 돈에 흘러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현실이 되는 겁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들이 컴퓨터를 켜놓고 있잖아요?
컴퓨터가 켜지려면
전기가 계속해서 중단 없이 흘러들어가고 있어야
컴퓨터가 켜진 상태가 유지됩니다.
TV가 켜져 있으려면, 전기가 흘러들어가야 되고,
냉장고가 켜져 있으려면, 전기가 흘러들어가고 있어야 됩니다.
마찬가지에요, 수없이 많은 사실들이 있습니다.
집안에 들어가면 TV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전등, 컴퓨터 등
여러 가지 전기기구가 많은 가운데
전기 스위치를 켜서, 전기가 흘러들어가는 것들만
켜져서 작동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실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내 마음이, 전기가 흘러가듯이 흘러들어가고 있는 것들만
내 의식 안에서 켜지는 거예요.
그 의식 안에서 켜지는 것이.. 바로 나의 현실이고, 현실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식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식이 문제에 처해 있다는 사실 속에,
내 마음이 전기가 흘러가듯 흘러들어가고 있어서
내 의식에서 그 문제가 켜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게 현실이라는 거예요.
▲뉴스에, 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문제 등, 날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문제가 날마다 언급됩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증시, 부동산이 오른다, 내린다... 라고 하는 문제가
톱 뉴스에 이야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시, 부동산의 상황 사실에 내 마음이 흘러들어가지 않고
내 의식 세계 안에서, 부동산 문제가 켜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아파트를 몇 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부동산 값이 내린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 하는 겁니다.
왜냐면 그 문제, 그 사실에 마음이 흘러들어가서
자기 의식 안에서 켜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면, 세상은 아버지를 몰랐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님 혼자서만 알고서 사셨다는 얘기는 요17:25
유대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가운데서도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살았다고 하는 얘깁니다.
이게 무슨 얘깁니까?
하늘에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께
지금 마음이 전기가 흘러 들어가듯이 흘러 들어가고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많은 사실들이,
예수님은 세상 속에 계시지만,
예수님 마음의 의식 안에
첫 번째로 켜진 현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었다는 뜻이라 이겁니다.
어떤 문제가 의식 안에서 내 마음이 흘러들어가면서 켜졌을 때
우린 다른 것을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예수님이 살았던 방식이 다른 것은,
세상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실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에 마음이 흘러들어가면서,
그것이 우선적인 현실이 되어서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지구 위의 많은 사실들이
TV처럼 냉장고처럼 널려 있지만,
그것들에 마음이 흘러들어가서 의식 안에서 켜지를 않으시고,
보이지 않으시고, 들리지 않으시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하나님께 마음을 흘려보내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이, 언제나 예수님의 마음속에, 제일 먼저 켜져 계셨다는 얘깁니다.
요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살았지만, ‘알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현실감이 전혀 없이, 그저 피상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도 예수님처럼,
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많은 사실들이 (정치, 경제, 문화, 가정사 등)
TV처럼, 냉장고처럼, 전등처럼 있지만,
그것이 불이 들어온 것은 아니에요.
그것들을 의식하면서 살지만, 내 마음에서 켜지지는 않고,
내 마음에 전기가 들어와서 켜져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예수님이
제1 우선순위가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항상 추구하며, 생각하며, 염두에 두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다 흘려 들여보내서
하나님이 내 마음과 의식속에 제일 먼저 켜져 있는 상태로,
이 세상을 사는 걸 말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가 사업 잘하는 것.. 예수님은 소원하시지 않아요,
교인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는 것을..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원하시지 않아요.
우리 교회 숫자 늘어나도 다른 교회 줄어든다면, 예수님 보시기에 기쁘실 게 없죠.
더욱이, 하나님을 진정 알고 믿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이 늘어나는 것은
예수님이 전혀 기쁘실 게 없죠.
▲이슬람 국가에 가 보면, 기독교 방송 나오듯이
TV에 코란을 틀어주기도 합니다.
그게 아랍어로 되어 있어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아래 영어자막이 동시에 나와서, 한 번 유심히 읽어보니까
거의 시편의 내용과 흡사하더라고요.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고,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고,
하나님만이 우리 피난처요, 내 모든 사정을 알아주시며...
시편이 얼마나 우리 삶에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그처럼 코란도 들으면... 우리 삶에 위로와, 평안과, 안정을 주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이슬람을 믿나봐요.
이슬람이 AD610 경에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구약성경에서 여호와 이름을 빼고, 알라를 대신 집어넣으면...
그래서 사실 학자들은, 이슬람이 유대교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라고 하죠.
실제로 아브라함 등의 이름도 나오고요.
요지는, 이슬람도 기복종교라는 것입니다.
세계 2대종교인 이슬람, 16억 정도로 추산합니다. *기독교는 23억
무서운 출산율로 인해, 앞으로 순위가 뒤바뀔 것으로 내다보는 사람도 있죠.
유럽의 일부 대도시들에서는, 이슬람 인구가 1위인 곳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기복신앙으로 믿으면, 이슬람과도 별 다를 게 없고,
다른 종교들하고도 아무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불교 설법과 교회 설교가 비슷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기복신앙이라는 면에서, 기독교, 불교, 이슬람이 다 공통적이라는 거죠.
하나님과 예수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주님을 내 의식 속에 늘 ‘켜놓고’ 있지 못하고
대신에 세상에 잡다한 일들을 늘 내 의식 속에 ‘켜 놓고’ 살면,
아무리 믿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도... 하나님 나라에 아무 도움이 안 돼죠.
▲그래서 십자가를 앞두시고,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 중대한 시간에, 가장 중요한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그 기도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의 기도 내용과 완전히 다르다는 거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먼저 나를 향한 예수님의 소원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사실들, 상황, 사람들을 다 제치고
첫 번째 현실로 내 마음에 켜지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내 마음의 전기가 흘러들어가지 않아서
다 꺼진 상태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천국만이 켜지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소원 2 -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소원에 이어서 두 번째 소원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 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하나님과 다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두 번째 소원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하나가 되는 걸까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 하늘에 계신 그분들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내 마음이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만
마음이 전기처럼 흘러들어가서 하나님이 딱 켜졌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가만히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흘러들어가고 계십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흘러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나를 안아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안아주십니다.
안긴 채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흘러나가고 계십니다.
▲그것을 요3: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마음의 흐름을 올라타는 겁니다.
신비주의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내가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하면서 하나 되는 그런 게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향해 흘러들어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의 흐름을 올라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내 마음으로 살지 않고,
왜냐하면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흘러가버렸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흘러갈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일체의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의 극치를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얘깁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
어떻게 할 때?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올라탈 때.
▲이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대상을, 종류별로 하면 크게 두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고, 하나는 상황입니다,
사건이든 하여간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입니다.
이 두 대상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흘려보내고 계십니다, 전기가 흐르듯이.
내가 만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일 수도 있고 모자라는 사람일 수도 있고,
잘 생길 수도 못 생길 수도 있고, 부자일 수도 가난할 수도,
배웠을 수도 못 배웠을 수도 있고,
또 나는 모르지만, 내가 안 보는 가운데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있으면서도
감춰져 있고 속이고 있는 그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생각하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딱 한 종류의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만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나면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보게 되고,
피가 끓는 청년이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게 되면
나와 결혼할 수 있는 여자인가 아닌가를 보게 되는데,
그 청년이 주님의 소원을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첫 번째 현실로 켜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그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면서 내 결혼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죄수를 향해서 사회에서는 사형수로 보고 있는데,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보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랑을 열매 맺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는 하나입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 마음을 따라서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또, 상황도 마찬가지에요.
내게 주어지는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는 상황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게 주어지는 상황들에 대해서 어떻게 내가 반응할 때
그 상황을 매개로 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까?
감사하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하나님의 뜻이 없고, 하나님이 모르는 상황이 없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그 상황을 먼저 맞이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몸이 아프다고 하면 ‘아유, 아파서 감사합니다.’
이래야 된다는 겁니다.
아프면 겸손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더 기도하게 되니까... 감사한 거죠.
돈이 안 벌립니까?
‘아이고, 이렇게 돈이 안 벌릴 수가 있나? 아, 정말 감사하네!’
위와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우리가 해야 될 유일한 반응이라는 거예요,
어떤 것이든, 어떤 상황이 오든 간에.
그렇게 감사할 때에 그 상황에서 다음 단계에 넘어가게 될
나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타고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 이게 바로 예수님의 소원이라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소원의 두 가지 내용,
이 세상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내 마음이 흘러들어가서 켜지는
첫 번째 현실이 되는 것과,
그렇게 나의 첫 번째 현실이 된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과 내게 주어진 상황을 향해 사랑과 뜻으로 흘러들어갈 때,
사람을 향하신 사랑과 상황을 향하신 뜻을 올라타서,
하나님의 사랑을 열매 맺기 위해서 사람을 대하고
감사함으로 상황을 수용하게 될 때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이 주님의 소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는 얘기고,
이 소원을 구체적으로 실현이 되게끔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실 것입니다.
...............................
△믿음의 판단과, 데이터에 의한 판단 가운데
믿음의 판단이 더 현명할 때도 있다.
믿음은 비현실에 근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믿음에는 아직 실체가 없으니까, 뜬구름 잡는 얘기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히려 믿음의 반대인 두려움은
내가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근거에서 두려움이 나왔기 때문에
두려움이 현실에 근거하고 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다.
왜냐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고,
두려움은 사탄의 거짓말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근데 이 두 가지가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약속은, 사랑하셔서 그 약속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분이 가진 능력 가운데 가장 큰 능력인 사랑의 능력으로
그 약속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런데 사탄의 거짓 ‘두려움’은
우리가 미워서 그냥 찔러보고 흔들어 보는 것이 뿐이다.
그러니까 거기엔 힘이 없다. 능력이 없다. 그것을 완성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사탄의 거짓말이 빠진 것처럼
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않는가?
그래서 너무나 억울하게 속아서 당하는 일들이 많은 것이다.
운동을 하는 선수에게 코치가
'네가 지금은 실력이 안 되지만, 나만 믿고 따라와라.
내가 너를 훌륭한 선수로 만들어 주겠다'
그러면 그 선수가 코치를 따라가야 된다.
부모가 아이를 보면서, 아직 한 번도 제대로 걸어 본 적이 없지만
'야 이제는 걸음마를 할 체력이 돼' 이렇게 보고 아이에게
'일어나 봐, 아빠에게 걸어 와 봐!' 라고 얘기하면
아이가 그 아빠를 신뢰하고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길을,
아이가 걸어야.. 걸음마를 배운다.
여러분 지금까지 인생을 30년 50년 60년 70년 살면서
굉장히 현실 판단에 근거해서 여러분이 살아온 거 같아 보이지만,
아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날마다 기적을 만들면서 살아온 것이다.
예를 들면,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했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걷기 시작한 것이고,
학교라는 데를 가 보지 않았던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고,
돈을 벌어 보지 않았던 인생이, 갑자기 돈을 벌기 시작하는 것이고,
결혼을 해 보지 않았던 사람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평생 인생을 사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 내가 지금 살아가는 삶이
현실에 근거한 데이터들이 그게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아니다, 한 번도 당해 보지 않았던 일들을, 믿음으로 산 적이 훨씬 더 많다.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음으로
우리는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끊임없이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야 나는 상당히 현실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상황을 분별 하고 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 나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을 거야.
나는 지금까지 내가 공부한 학력, 내가 지금까지 일한 경력,
내 바운더리 여기를 벗어날 수 없어, 난 여기서 더 올라갈 수 없어,
난 여기서 더 꿈을 펼칠 수 없어!'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누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했나요?
'현실적인 판단근거 - 이게 굉장히 명확한 거다'
그렇지 않다. 믿음이다.
왜 내 마음 가운데 두려움과 좌절과 근심과 걱정을 불어넣는 사탄의 거짓말에
여러분이 동조하셔야 되는가?
여러분을 무너뜨리고자, 여러분이 미워서 공격한 사탄의 거짓말을
명확하게 거부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에 대해서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