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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추구할수록 자포자기 하는 이유

LNCK 2023. 12. 30. 04:38

◈복을 추구할수록 자포자기 하는 이유      시1:1~3     인터넷설교2편 정리

                                                              ☞ <신년, 송구영신>

▲성경에 약속된 (행)복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 다르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이렇게 모든 인간들은 내심 복을 원하기 때문에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겉으로는 복을 추구한다고 하지 않으면서도

내심 복을 원합니다. 사람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복‘이 무엇을 뜻하는지

(매우 포괄적이라서) 규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리고 신약의 복과, 구약의 복이 또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헷갈려(아리송) 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복‘을,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가장 가까운 단어로 표현하면

한 마디로 행복 happiness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회복되는 (행)복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행)복

믿음 안에서 가정이 회복되고, 내 인간성이 회복되는 (행)복

날마다 하나님안에서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행)복!

성도의 권위, 권세, 위엄, 능력, 아우라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행)복!

 

인터넷에서 이렇게 들여다보면 ‘행복해지는 6가지 방법’ 이런게 있어요.

 

첫째 문화 생활을 해야 된다.

둘째 애완견을 키워야 된다.

셋째 감사 생활을 해야 된다.

넷째 이타적 생활을 해야 된다.

다섯째 행복한 시절을 기억하고 그리워해야 된다.

여섯째 행복에 집착하지 않아야 된다.

 

그런데 복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면 굉장히 특이한게 하나 있어요.

시편 1편이든 산상설교이든 간에

단 한 번도 성경은 복이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아니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라’고 하면서

 

먼저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묘사하고 있지,

행복을 정의하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정의하지 않고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나요?

 

보통 인간들은, 예를 들어 돈, 지위, 명예, 외모, 권력

뭐 이런 거를 행복의 조건으로 보고,

이런 조건들을 만족시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행복 자체를 쫓아 가지고는 행복할 수가 없는거다.

이게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놀라운 통찰이에요.

 

행복이란 절대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해서는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행복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 라고 하셨죠.

행복에 주린 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행복을 추구하는데,

예수님은 의를 추구해라, 의를 목말라해라... 고 말씀하시죠.

그 외에도 합쳐서 8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요리조리 빠져 달아나는 행복을 막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함을 추구하고,

애통하며, (늘 회개하며)

온유함을 추구하며

의를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행복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로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말아라

행복이란 언제나 다른 일을 하다가 생기는 간접적인 결과물로

언제나 행복보다 무한히 더 큰 것이 만들어내는 부산물이다

 

진짜 탁월한 통찰이에요.

행복이란

하나님 말씀을 추구하다가 생기는 부산물이라니까요!

행복 자체가 아니고, 행복보다 무한히 큰 것을 무한히 큰 가치를 추구하려고 할 때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부산물이라는 거죠.

 

성도는,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는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

즉 긍휼이 여길 마음이 없지만,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시기와 분노로 가득하기 쉽지만, 마음을 청결히 하며

평화보다는 전쟁을 선포하고 싶은 본성이 있지만, 평화를 추구하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삶을 추구하며 살면,

천국이 우리 것이 되는 선물을 얻게 되는 거고

그리고 이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새해에는 ’남편한테 잘해야지, 아내한테 잘해야지‘ 그게 아니라

‘더 열심히 벌어야지, 더 늘여야지.. 그러면 행복해지겠지..’

그렇게 세속적 행복 자체를 추구하려고 하지 말고

 

그보다 더 큰 가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애통하는 자가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일을 추구하면

천국을 부산물로 받게 되는 거고,

그런 자가 (행)복한 거라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1: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의하여 묵상하는도다.

 

행복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겉으로는 행복과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 뭐예요?

악인들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면...

그 결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는 거고,

그런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이런 복 있는 사람이

가정에 있으면, 그 가정이 복을 받고

직장에 있으면, 그 직장이 복을 받고

교회에 있으면, 그 교회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복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안정적이고, 의로우며, 자기 희생과 사랑을 추구하니까

요셉이 가는 곳마다, 형통하고, 그 곳이 잘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이런 시편1편을 추구하지 않고,

산상수훈의 팔복을 추구하지 않는 삶을 살았는데,

그저 요셉이기 때문에, 그저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마다 형통케 되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어디를 가든지 형통한 복을 받기를 바라는데,

우리는 시편1편을 추구하지 않고,

산상수훈의 팔복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인도하는 삶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본성이 인도하는 삶이죠.

자기 본성대로 살면.. 다 절단납니다. 롬8:13 참조

 

▲그러니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저하와 감소도,

이런 ‘복에 대한 오해’에 크게 기인합니다.

 

사람들은 복 받기 위해서, 종교에 관심가지고, 기웃거립니다.

그리고 일부 교회의 설교를 들으면 (불교는 몇 배나 더 심하죠)

정말 대단히 복을 받아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처럼 보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섬기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라는 뜻이죠.

계시의 점진성에 의하면!)

 

그런데 실제로 교회를 몇 년 다녀보니까,

자기가 기대한 복을 전혀 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교회를 떠나게 되죠. 투자 대비 결과가 안 나오니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행복을 얻으려고 애쓰기보다는,

행복보다 무한히 더 큰 가치,

즉 겸손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여호와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리고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거죠.

 

놀랍게도 손양원 목사님은 아직 평양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불과 34살의 젊은 나이에

1934년 1월 4일에 진리를 깊이 깨닫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행복하여 지기를 원하면서도 의를 위하여 고난 당하기를 꺼리는 자,

땀도 흘리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고, 피도 쏟지 않으면서도

많은 행복을 원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바로 내가 그 첫 번째가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 사람이 체험하지 못하는 진정한 부귀영화는

고난 역경 속에서 기쁜 찬송을 부르는 자가 아닌가?”

 

그런데 요즘도 그런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역예배 라고 모이면, 빨리 15분만에 찬송 한 장, 말씀 나눔, 주기도문으로 마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정보 교환에 들어가는데,

주식 시세, 부동산 정보, 아이들 학원 정보, 요즘에는 코인...

다들 복받기 위해서 교회생활 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서, 주식, 부동산, 학원 등에 투자를 잘 하기를 바라죠.

 

심지어 교회에서 이런 정보가 유통되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기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가야 알짜 정보,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거죠. 교회 인맥을 통해서’

 

 

◑시편 1편은 산상수훈과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산상설교는 유명한 팔복의 교훈으로 시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시작해서

8가지로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을 묘사합니다(마 5:3).

 

시편 1편도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함으로써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두 개’들의 여러 조합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문과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마 7:13~14).

좁은 문과 넓은 문과 좁은 길과 넓은 길입니다.

 

그리고 두 개의 나무와 두 종류의 열매를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 7:16~18).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와 나쁜 열매입니다.

 

또 두 개의 집과 두 개의 기초가 있습니다(마 7:24~27).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이것은 모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인데,

 

시편 1편도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의인’과, ‘악인/죄인/오만한 자’입니다.

형통한 자와 망하는 자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바람에 나는 겨입니다.

또 의인의 길와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비단 시1편, 산상수훈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두 개의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1편에는 두 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두 개의 길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바람에 나는 겨’로 비유합니다.

 

쉽게 말해서 막 주식투자, 무슨 투자로

떼돈을 벌어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우리 주위에서 종종 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참된 구원받은 성도와, 명목상 신자와의 차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무와 겨의 차이입니다.

본질이 다르고, 본성이 다른 것입니다.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묵상한다는 말은 단순히 읽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묵상은 읽는 것을 전제합니다.

묵상은 읽은 말씀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되게 하고

찬양이 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읽은 말씀을 가슴에서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일(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정녕 이 말씀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교훈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고쳐주시기를 원하시는가? 이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나는 경험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되, 출근하면서도 묵상하고,

 

오전에 티타임을 가질 때도,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있으면서도 머리로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저녁에 흔들리는 자동차 안에서도 또 말씀을 묵상합니다.

주간 단위로 끊어서 하면 더 효과적입니다.

주일, 월요일, 화요일 묵상한 말씀을.. 주말까지 계속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말씀은 반년~1년을 계속 묵상하며 붙잡고 기도하는 말씀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복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1

1년 내내 붙잡고 기도한 말씀을 통해서,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되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 <묵상>관련글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

 

 

♣「꽃들의 희망」에 나오는 우화 (펀 글)

 

땅에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늘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나는 이 먼지 속에 늘 코를 쳐 박고, 모든 더러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평생 살아야 하다니...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가?

 

걸어 다니는 짐승들을 보니 부러웠고,

뛰어다니는 짐승을 보면 흠모의 대상이었고,

더욱이 하늘을 훨훨 나는 짐승들을 보면.. 몹시 부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애벌레들이 어디를 향해 큰 행렬을 지어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당신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가는가?”

“매우 중요한 데로 가고 있다네!”

 

그 애벌레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애벌레 떼의 행렬을 앞질러 좇아가보았다.

그랬더니 애벌레들이 한 우람한 나무를 타고 줄지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주위의 애벌레들에게 물어보았다.

“저 위에 뭐가 있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이 있데!”

 

애벌레들은 한 발짝이라도 먼저 가기 위해, 서로 남을 밀치고 아귀다툼하였다.

그 애벌레는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 자기도 남을 밀치고 당기고 싸웠다.

 

그 노력의 결과인지, 이제 자기도 나무에 올라가는 대열에 겨우 서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애벌레들과 한참 올라가는데, 내려오는 행렬을 만나게 되었다.

 

“저 위에 뭐가 있더냐?”

“가 봐야 아무 것도 없다네!”

 

그러자 동료 애벌레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자기는 구경할 것 다 구경하고, 가질 것 다 가지고,

누릴 것 다 누리고 나서, 말로는 아무 것도 없다고 그래!”

 

그 애벌레는 동료들과 함께 계속 위로 꼭대기까지 애를 쓰고 올라갔다.

정말 꼭대기 정상까지 가 보니 거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 빈 하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허탈하게 내려오는 길에

용을 쓰며 올라오는 여러 애벌레들의 행렬과 자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저 위에 뭐가 있더냐?” 그들이 물었다.

“위에 올라가봐야 헛수고다. 아무 것도 없다던데, 사실이더라” 그가 대답해 주었다.

 

그래도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 둥치를 기어 올라오는 애벌레들은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 애벌레는 절망적인 자기 인생을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나뭇가지에 자기 몸을 누이고 고착시켰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기 내면을 깊숙이 살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자기 몸에 고치(캡슐, cocoon)가 덮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속에서 더 깊은 묵상을 하며, 그 모든 시간을 인내하며 견뎠다.

그랬더니 그 못생긴 애벌레가 변해서, 어느 날 찬란한 호랑나비가 되었다.

 

그 호랑나비는 이곳저곳 꽃들을 돌아다니면서

꽃들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애쓰고 수고해서 계속 위로 올라간다. 계속 소유를 쌓는다.

그런데 올라가 본 사람은, ‘위에 가면 아무 것도 없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밑에서 아귀다툼하며 올라오는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저는 가져 봤으니 하는 소리야!’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우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