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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된 소망과 실현될 소망

LNCK 2024. 1. 2. 17:31

'실현된 소망과 실현될 소망' (2023.12.31) - YouTube

 

◈실현된 소망과 실현될 소망        눅2:21~40         2023.12.31.

 

오늘 본문을 보면, 나이가 들어서 굿뉴스가 생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시므온과 안나인데요.

 

이 두 분은 평생 기도했던 소망을,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서

거의 죽기 직전에 응답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님을 통해, 오랜 이스라엘의 소망이 실현된 것을 보았고  already

또 앞으로 실현될 소망도 내다보고 있습니다.  not yet

 

여러분,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이가 드는 것도 (시므온과 안나처럼) 굿뉴스입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장차 실현될 소망이 더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 말씀 속에서 우리도

오랜 기도와 소망을 실현시켜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진정한 굿뉴스를 듣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 작은 아기의 모습에서 실현된 소망을 보는  * already

믿음의 성도가 됩시다

 

본문 22절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지 40일 만에

정결 예식을 치르고 첫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레12장에 나오는 율법(정결례)에 따른 것인데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에 충실했던 경건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4절을 보면, 비둘기 한 쌍을 예물로 드렸다는 것은

요셉과 마리아가 매우 가난한 계층에 속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양을 정결예물로 드립니다.              주1) 신생아의 정결규례

 

이렇게 어쨌든 이 예식은, 유대인 가정의 아기들이라면

누구나 치르는 평범한 일종의 의식 ritual 인데,

 

그런데 이 잠깐 동안의 정결례를 치르는 시간에, 참 우연치 않는 만남이 이어집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이 시므온과의 만남입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25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5

 

기록에 따르면, 시므온은 유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랍비로 꼽히는

랍비 힐렐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힐렐은 사도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경건한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부터 죽기 전에 메시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지시를 받게 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갈 때

(정결예식은 성전의 제사장에게로 가서 치렀으니까요. 제사장이 누구인지는 안 나옴)

 

그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참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인지요.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 중에서 시므온이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데리고 온 것을 보고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품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이 지금 아기 예수님을 딱 안아서 품고 난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소망이, 바로 이 아기를 통해 실현되었다' already

그래서 이 약속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자기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는 거죠.

 

이 시므온의 기도를 '눈크 디미티스 Nunc Dimittis'

의미상으로 '이제는 놓아 주소서'

 

이 기도는 완성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 이제는 완성되었습니다. 이제는 나를 놓아 주십시오'

이런 기도죠.

 

그런데 얼핏 보면 시므온이 좀 오버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완성이 됐는가요?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갓난 아기 하나를 품에 안았을 뿐입니다

 

시므온이 바랬던 그 소망이 뭡니까?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포로 생활을 끝내고, 이방의 압제에서 벗어나

그 나라의 영광을 회복하는게, 바로 시므온의 소망인데요.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의 압제 앞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나라의 주권이 회복된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결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났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지금 자기 품에 품고

바로 자기의 오랜 소망인 '이스라엘의 소망이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 already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바로 작은 아기의 모습 속에서, 이미 already  실현된 소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장차 실현될 소망도 바라봅니다. 아래에 나옴) not yet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가져오시는 소망, 그것은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본문의 아기 예수님처럼, 작은 씨앗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작은 씨앗을 결코 작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 작은 씨앗 속에, 앞으로 무수히 피어날 꽃과 열매들,

그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찬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이 어떻게 아기 예수님을 알았 차렸을까요?

많은 영화나 성화에서 보듯이, 그 아기 예수님 얼굴에 무슨 광채가 번쩍였기 때문에 알아봤을까요?

 

만약 그런 광채가 났다면, 왜 다른 사람들은

그러면 아기 예수님을 못 알아 봤겠습니까?

이 날 성전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시므온과 안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봤을까요?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감동 때문이죠.

하지만 덧붙여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게 있습니다.

 

시므온이 평소에 어린 아기들을 자주 품에 안고 축복하고,

그 아기들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어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많이 다루어본 교사들은, 그 아이 한 명, 한 명 속에 있는 그 비범함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냥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은

절대 그 작은 아이의 비범함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본게, 자기 품에 안았을 때였습니다.

아마 평소처럼 시므온이, 성전에 올라와서 그렇게 정결예식을 치르는 아기들을

안아서 축복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아기 예수님을 안았을 때인데,

그때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그 감동 속에서 예언을 한 겁니다.

 

2:30~32절을 보면, 바로 시므온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당시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메시아에 대해서 걸었던 기대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해서 그냥 해방시켜줄 그런 메시아였습니다.

 

근데 시므온은 이 고백을 고백 속에서, 그보다도 훨씬 더 큰 메시아를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영광' 뿐 아니라

'모든 이방을 비추는 빛, 온 세상의 빛이요. 영광이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을 보고 예언한 거죠.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은

어느 날 짠~ 하고 완성품의 형태로 그렇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처음에는 아기 예수님처럼 평범한 모습으로 작은 씨앗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과 사랑의 눈으로 집중해서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그것을 놓쳐버리기가 쉽습니다.

 

어느 장로님은 오랫동안 주일학교 부장을 맡으셨습니다.

맡은 아이들이 한 200명이 좀 넘었는데,

매주 교회 현관에서 그 아이들이 들어올 때마다,

그 아이들 하나하나 맞이하고, 악수하고, 축복해 줍니다.

 

'이 아이들 중에, 장차 우리나라와, 그리고 한국 교회를 이끌어갈 일꾼들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악수하십니다.

 

사실 겨우 코흘리게 장난꾸러기들일 뿐인데요.

그런데 참 그 아이들 속에서

한국의 미래를 본 겁니다.

 

어떻게 가능했는가요?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다' 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눈,

또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눈으로, 그 아이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믿음과 사랑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이 씨앗으로 주신 소망이

내 기대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어느 목사님은, 훌륭한 기도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근데 그 어머니가 다른 자녀들 다 제쳐두고 돌아가실 때까지

이 목사님 댁에 머무셨습니다. 장남이 아닌데요.

 

근데 어머니를 모실 당시에 그 목사님은, 교회 개척을 막 시작하실 때였습니다.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어머니가, 참 목사 아들 집에서

교회 개척하고 고생하는 것, 그것만 보다가... 사실은 돌아가신 셈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이 목사님의 사역에 큰 열매가 있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그것을 눈으로 못 봤습니다.

하지만 그 인생의 끝자락에 더 힘써 기도하셨던 것,

소망을 품으셨던 모든 것이.. 그 아들 목사님이 다 받고 누리게 된 겁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성도라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도하고 소망했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서

그래서 혹시 낙심하고 계신 분들이 계신가요?

 

오늘 작은 아기 예수님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실현된 소망을 보았던 시므온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소망의 씨앗이, 너무 작고 평범해서

우리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주의 깊게 관찰하면

우리 주변에도 이미 무수한 소망의 씨앗들이 보입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들 안에 보이고,

우리 교회 학교 아이들 안에 보이고,

우리 청년들의 모습 속에 보이고,

젊은 부부들 가운데 보입니다.

 

근데 맨눈으로 보면 안 보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보입니다

 

오늘, 한 해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는데요.

이제 곧 새해가 밝아오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삶이 힘들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소망이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오늘 작고 평범한 아기의 모습,

작은 씨앗의 형태로 주어진 미래의 소망을

시므온이 발견하고 감사하고 찬송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

내 소망과 내 기대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께서,

그 작은 아기, 그 작은 씨앗에서,

무수한 꽃들과 열매들을 자라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으로, 평안 가운데 한해를 마무리 하시고

복된 새해를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실현될 소망을 내다보며, 고난을 인내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not yet

 

아기 예수님 안에서 장차 실현된 소망을 노래한 시므온이

연이어서 마리아를 향해서 예언을 덧붙입니다.

 

2:34~35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여기에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

1) 이 아기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두 부류로 갈릴 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넘어지겠지만, 어떤 사람은 일어날 겁니다.

 

2) 이 아기가 비방의 표적이 되어서

마리아의 영혼을 칼로 찌르듯 아프게 할 것이다.. 예언합니다.

 

3) 이로 인해서 사람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기를 안고, 소망을 노래했던 시므온이

왜 이렇게 불길한 예언을 덧붙일까요?

 

하나님이 '씨앗의 형태'로 실현시켜 주실 그 소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이 이제 장차 완성되기 위해서는

고난과 어려움이라는 필수 코스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메시아로 오시기 전에, 고난받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박수 치고 환호하는 가운데, 실현되는 소망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져다 주시는 영광의 소망은,

고난(십자가)의 길을 통과하는 가운데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악기나 운동을 배우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그냥 익숙하지 않고 어려워서, 별 재미를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변에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 또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 사람을 보면서 '야 멋있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그러면서 이제 어느 정도의 동기부여가 되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재미를 붙여서, 조금 더 어려운 과정을 만나면

또 힘들어 가지고 흥미를 잃을 수 있는데요.

근데 그 고비를 잘 넘기고, 또 견디고 조금만 더 인내하면

작은 성취들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끈기가 생기고,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죠.

 

최근에 심리학과 교육학에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견디는 힘,

즉 '끈기'라는 능력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 아이들의 스포츠와 예술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아끼지 않는데요.

그 이유가 뭐냐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끈기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투자를 한다고 합니다.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이런 '끈기'가 있습니다.

만약에 취미로 아이들이 뭔가를 배운다고 하면,

그저 재미있게 할 정도의 끈기만 있으면 되겠죠.

 

그런데 만약 그 아이가 나중에 최고의 정상급 선수가 되려고 한다,

정상급 음악 연주자가 되려고 한다면,

그러면 재미가 아니라,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 클수록

우리가 견뎌야 할 그 고난의 강도도 더 세집니다.

 

▲시므온이 마리아를 향해서 뭐라고 했는가요?

'칼로 네 영혼을 찌르는듯한 고통'이라고 했는데요.  :35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실현시켜 나가실 그 소망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마리아는, 자기 아들이 비방의 표적이 되고, 버림받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모든 과정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을 암시해주는 인물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여선지자 안나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아주 어린 소녀지요. 그런데 안나는

이제는 곧 죽게 될, 인생의 마지막 자락을 보내는 여성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참 절묘하게 배치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앞서 눅1장에서도, 수태고지를 받은 십대 소녀 마리아와

세례요한의 모친 엘리사벳이 함께 배치되는데요.

 

그러니까 마리아의 인생은,

지금 안나의 예언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서

이렇게 가는 그 길이 다 예고되어 있는 것입니다.

 

안나는 결혼한지 7년 만에 과부가 됐고, 무려 84년을 과부로 지냅니다.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한데요.

-과부가 되어서 지금 84세라는 번역도 가능하고

-7년 만에 남편을 읽고 84년을 과부로 보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면 한 100살이 넘었다는 건데요.

 

100년 동안 안나 할머니가 어떻게 평생을 살아왔는가요? 37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37b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안나는 과부였기 때문에 정말 경제적으로도 가난했습니다만

동시에 영적으로도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평생 살았던 겁니다.

금식과 기도였습니다.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저희가

무슨 건강 때문에 다이어트를 해도

장차 도래할 주님의 소망을 기다리며 밤낮 금식한다... 이게 좀 상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근데 우리 경건한 믿음의 선배들에게, 이 기도와 금식이라는 것은, 필수 코스였습니다.

심지어 그 위선적이었다는 바리새인들도 한 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일출~일몰 금식일 것임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무려 40일을 금식했습니다.

 

안나의 금식은 이런 의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고난을 겪고 있다,

나라가 망해 가지고 이방인의 압제를 받고 있다.

지금 악한 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런 저항의 의미로 밤낮 금식하고 기도한 겁니다.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간구하는

가장 절박한 소망의 표현이, 바로이 금식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정리하면,

여러분, 성도는 먼저는 씨앗의 형태로 주어진 작은 소망도

믿음으로 받고,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면에서 긍정적인 사람, 낙관론자가 되는 거죠.

 

근데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잘못된 현실에 대해서는

거룩한 불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냥 먹고 사는 문제 다 해결된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면

그냥 간절히 뭔가를 소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내 삶이 편안하더라도, 내 주변을 보면, 내 이웃을 보면, 이 사회를 보면

'일이 이렇게 잘못되어 가는 거, 정상이 아니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의식과 기도로 잘못된 현실에 의롭게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완성되고 이루어지는가요?

칼이 영혼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도

주를 위해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됩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장로님께서 나의 70세가 되셨을 때, 이런 결심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제 내가 은퇴도 하고, 이제 사회에서는 더 이상 뭔가를 기여할 수 있는 자리에서도 이제 다 물러 났고

내가 도대체 뭘 해야지 하나님 나라를 이 민족 가운데 이룰 수 있을까?

그렇게 계속 생각하고 해보니까.. 기도밖에 없으시더랍니다.

 

그래서 이분이 하루에 7시간씩 기도하기로 작정하십니다.

나이가 70이라서!

 

근데 그뿐만 아니라 '하루 7시간 기도하는 70세 이상의 어른 7만 명을

이 나라에 일으켜 달라' 그렇게 동시에 같이 기도하신답니다.

 

왜 이렇게 통이 크신가요?

이분은 평생을 우리 대한민국이, 이 마지막 시대 속에

세계의 역사의 기여하는 민족이 되게 해달라는 소망을, 품어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런 분들이 아직도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혼란과 어려움이 많지만, 그래도 버티는 겁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70세가 되어서 은퇴하면

우리 후대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축복하고,

마지막까지 영적 버팀목이 되어주는 노년이 되고 싶습니다.

 

'이제 갓 부임해 가지고 목회하는 사람이 무슨 은퇴 이야기를 하나?'

여러분이 저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우리의 처음 출발은, 항상 마지막 그 지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혹시 이루어주신 소망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작은 씨앗'의 형태라도 감사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마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는 <실현될 소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의 형태로 주어졌기 때문에!

더 자라나야 되고, 꽃피어야 되고, 열매 맺어 가야 될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잘못된게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바로 잡아 주셔야 할 일이 넘쳐납니다.

 

나 자신을 봐도 그러하고, 가정적으로 봐도 그러하고,

교회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 어디를 보나 그러합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그냥 내가 그저 먹고 살아가는 문제 하나 해결했다...

그냥 그래서 안주해 버리면, '실현되어야 될 하나님의 소망'을 놓치게 됩니다.

 

혹시 내가 헤쳐 나가야 될 그 고생이 두려워 가지고

'이만하면 됐다'며 주저앉아 있지 말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고작 이 정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장차 우리가 누릴 그 영광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성도는 어떤 사람인가요?

보이는 소망, 이미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그 소망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는 소망을 얻기 위해서

고난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성도입니다.

 

▲링컨 이야기를 하고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1863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작은 마을 게티스버그에서

남북 전쟁에 큰 분수령이 될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유명한 전투죠.

 

남군과 북군 모두가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싸움을 치르고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북군이 승리합니다. 대가가 너무 처참했습니다.

3일 동안 전투하면서 43,000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전쟁으로 지친 국민들 사이에 반전 여론은 들끓고

다음 선거에서 링컨이 탄핵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때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는 ‘국립묘지 헌정식’에서

링컨이 역사적인 명연설을 합니다. 그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그 싸움터의 땅 일부를 헌납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이 땅을 헌납하며 신성하게 하는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여기 목숨 바쳐서 싸웠던 그 용감한 사람들, 전사자와 생존자들이

이미 이곳(묘지)을 신성한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그토록 고결하게 지킨 일,

그러나 미완으로 남긴 일을 지켜나가는 것은  not yet

이제 살아있는 우리입니다.

 

우리 앞에 남겨진 그 미완의 큰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지금 이곳에 바쳐져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가 그 잘하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냥 이 연설의 끝줄 하나만 보고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지만

링컨의 연설의 핵심은 조금 다른데 있습니다.

 

이미 ‘실현된 소망’ 과, 아직 미완으로 남은 ‘실현될 소망’ 사이에서  already + not yet

바로 우리가 싸워야 될 싸움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 - 이게 그 연설의 핵심입니다.

 

본문의 시므온이 평생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 싸움을 싸웠습니다.

안나는 주야로 금식하면서 그 싸움을 싸웠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영혼을 찌르는 고통을 감내함으로 그 싸움을 감당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그 고통을 견디며

실현될 소망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우리는, 어떤 싸움을 감당해야 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씨앗의 형태’로 실현된 소망을 완성하기까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새벽기도부터 함께 기도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이 나라와 우리 교회, 우리 가정, 나 자신 안에

아직 완성되지 않는 소망이

한 걸음 더 실현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그래서 2024년 새해는 ‘(이미)실현된 소망’ 과 ‘(장차)실현될 소망’이

더욱 풍성해지는 복된 새해를 맞이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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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신생아의 정결례

유대의 모든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해산한 산모는 부정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율법에서는 부정하게 된 산모와 아이들을 위해서 정결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율법이 명시한대로 정결케 되는 기간이(남자 아이 40일, 여자 아이80일)

찬 산모는 최종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다. (레12:1-5)

 

여기서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드렸고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뜻에서 드렸다.

 

이때 각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였으나

가난할 경우 번제로 양 대신 비둘기 둘로 대치할 수 있었다(레 12:1-8).

 

본문에서 누가는 어머니의 정결 예식과 아기를 바치는 행위를 함께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아기 예수를 위해 제사장을 찾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결국 이 예수는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시다(히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