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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단기봉사팀 피랍사건의 실상

LNCK 2024. 1. 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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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단기봉사팀 피랍사건의 실상     마28:19    ▣핍박 과 순교

 

2017년 6월 7일

유경식 선교사 작성 (2007년 아프간 단기 봉사팀의 일원)

 

◑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단기봉사팀 피랍사건의 실상

 

아프간 피랍 사건이 일어난 지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왜 굳이 가슴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또 그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때 별로 잘못한 게 없다고 변명을 하거나,

이러 이러하게 해서 위기를 극복했다는 말을 영웅담처럼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셨는가를 잊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아프간 피랍 사건은 한편으로는 두 분이 순교의 피를 흘려야만 했던 가슴 아픈 사건이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잊을 수도 없고, 결코 잊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피랍 기간 동안 겪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서,

그 사건을 통해서 보여준 성도들의 사랑과 국민들의 성원,

그리고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이 일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되새기면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다짐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분이 순교하고 스물 한 명의 봉사단원들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목숨을 건졌던

그 때 그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라는 찬양을 마음의 고백으로 올려드렸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이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해 주신다면,

앞으로 남은 삶을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수없이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십 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각오와 다짐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두 분의 순교자가 그 땅에 흘린 피를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기록으로 남겨서 이를 읽을 때마다,

이제 남은 삶을 주님 뜻대로 살기로 다짐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록을 읽는 모든 분들이 저희들과 동일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프간 단기봉사팀은 인솔자인 배형규 목사님을 포함해서 모두 20명이었습니다.

남자가 7명, 여자가 13명이었습니다.

팀은 나중에 현지에서 마쟈리샤리프에 있던 선교사 세 명이 합류해서 모두 23명이 되었습니다.

 

아프간 단기봉사팀도 다른 봉사팀처럼 매주일 저녁에 모여서 3개월 동안 아프간의 역사와 문화,

종교, 봉사 기간 중의 안전 수칙, 간단한 일상 회화 등에 대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공휴일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외부에서 합숙하며 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지 봉사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봉사자들을 위하여

기도로 동역하는 기도후원자들도 함께 훈련을 받았습니다.

 

2007년 아프간 단기봉사는 샘물교회에서 세 번째 가는 아프간 단기봉사였는데,

팀원 중에는 과거에 아프간으로 단기봉사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어서

처음 가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고,

마침 그 때 한국을 방문 중이던 L선교사로부터 생생한 현지 소식과 함께

단기봉사에 필요한 실제적인 사항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현지 도착

 

팀은 다른 단기봉사팀과 함께 파송예배를 드리고

2007년 7월 13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북경과 두바이를 거쳐 카불로 향했습니다.

북경을 거쳤던 이유는 China 항공이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두바이까지 갈 수 있는 항공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경공항에 도착해서 5시간 가량 기다린 후, China 항공 편으로 두바이로 향했습니다.

두바이에서 카불로 가는 아리아나 항공편이 다음날 아침에 있었기 때문에,

저녁에 두바이에 도착한 봉사팀은 공항 청사 의자에 앉아 졸거나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워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두바이에서 카불로 가는 아리아나 항공은

기내 분위기가 지금까지 다른 비행기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외국인으로 보이는 몇몇 승객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자들은

얼굴을 가리는 히잡을 두르고 있었고,

남자들도 아프가니스탄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드디어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에 가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습니다.

팀원들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곧 도착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세 시간 가량을 비행한 다음에 비로소 카불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단기봉사팀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드디어 카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카불 공항은 한국 시골 읍내의 버스 정류장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좁고 어두침침한 건물 내부는 이리저리 사람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

여행객들의 짐을 옮겨주고 돈을 벌려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고,

입국 스탬프를 찍어주는 관리는 일 처리를 잘해 주겠다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팀은 모든 짐들이 잘 도착하기를, 그리고 아무 말썽 없이 입국 수속이 원활하게 끝나기를 기도하며,

약간의 긴장 속에 묵묵히 맡은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감사하게도 모든 짐들이 무사히 도착했고, 입국 수속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끝났습니다.

그런 일은 단기봉사에 전례가 없던 일이었습니다.

 

팀으로 단기봉사를 다니다 보면 짐 한두 개를 분실하거나 늦게 찾기도 하고,

여권이나 비자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많은데,

그날따라 20명의 팀원들과 모든 짐들이 아무 문제 없이 통과가 된 것이었습니다.

 

팀원들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감사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나중에 더 큰 어려움을 주시려고

그러시는 것 아닌가 하고 농담도 하며 기쁨으로 공항 문을 나섰습니다.

 

공항 밖에는 L선교사님이 팀을 태우고 갈 버스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장 열 한 시간을 달려 북부의 마쟈리샤리프 라는 도시로 이동을 해야 했고

팀원중에는 멀미를 하는 자매들도 있었기 때문에 좋은 버스를 빌렸다고 자랑을 했지만,

타고 보니 에어컨도 안 나오는 오래 된 낡은 버스였습니다.

 

그래도 팀원들은 훈련을 받은 대로 선교사의 지시에 따라, 7월 하순의 무더운 날씨였지만

밖에서 버스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볼 수 없도록 모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다음 출발했습니다.

버스 천장의 환기구를 열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카불 시내는 마치 1950~60년대의 서울 달동네 모습 같았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잿빛의 작은 집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전기도 잘 안 들어오고, 수도 시설도 열악할 텐데 저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고 있는가

걱정을 하며 지나갔습니다.

 

버스는 가끔 시장 지역을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부르카로 전신을 가린 채 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얇은 천으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무더운 한여름에 눈도 내놓지 못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다녀야 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어렸을 적 시골 장터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모습도 보았습니다.

거리에서 팔고 있는 물건이나 사람들이나 주변의 집들이나,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탓인지 온통 잿빛이었습니다.

 

버스는 마침내 카불 시내를 벗어나서, 한여름에도 눈들이 쌓여 있는 높은

힌두쿠시산맥을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느릿느릿 올라가기도 하고,

80년대 소련군 점령 시절에 만들었다는 좁고 긴 터널을 정말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

통과하기도 하고, 중간중간 쉬기도 하면서 버스는 북쪽의 마쟈리샤리프를 향해 달렸습니다.

 

연약한 체질의 자매들 몇몇이 멀미를 하기 시작했고,

몇 시간을 힘겹게 달리던 버스도 결국 길가에 멈춰 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버스는 다행이 근처 읍내에 가서 한참 동안 수리를 한 다음 계속 운행을 할 수 있었고,

인천 공항을 출발한 다음날 밤 늦게, 첫 번째 단기봉사를 진행할 마쟈리샤리프에 도착했습니다.

 

◑북부에서의 봉사 활동

 

마쟈리샤리프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의 중심 도시입니다.

오랜여정 끝에 밤 늦게 도착한 봉사팀은 다음 날 하루를 휴식을 취하고

선교사들이 봉사하고 있는 기술학교를 둘러보기도 하면서

다음날부터 시작될 봉사활동을 준비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마쟈리샤리프 변두리 지역의 황량한 벌판 위에,

이란에서 귀환한 난민들이 7천 가구 가량 살고 있는 ‘A’라는 마을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마실 물도 없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그곳에서

몇몇 아이들이 맨발로 공을 차며 놀고 있다가 봉사팀의 차량을 보고 몰려 왔습니다.

 

선교사님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을 모아서 이 건물 안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재봉일과 컴퓨터도 가르치고, 구호활동도 하면서 기회가 되는 대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자가발전기를 돌려서 컴퓨터를 켜고 재봉틀도 돌리곤 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수고로 수도 파이프가 우물에 연결되어

하루에 한번씩 옥상에 있는 물탱크에 물을 퍼 올려 저장하는 시설이 되어 있어서

그나마 마을에서 가장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봉사팀은 학교 건물을 예쁘게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꽃도 그리고 나비도 그리면서 팀원들은 이 황량한 벌판에 샘이 흐르고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동산이 되어,

아이들이 걱정 근심 없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세상이 속히 오기를 기도했습니다.

 

한 팀은 페인트 칠을 예쁘게 하고, 또 다른 팀들은 한국에서 가져온 천을 잘라서

예쁜 커튼을 만들어 창문에 달기도 하고,

교실 여기저기를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들로 아름답게 꾸미기도 했습니다.

 

봉사팀은 가지고 있던 카메라와 노트북 등 모든 장비와 짐들을

나중에 피랍되었을 때, 탈레반에게 모두 빼앗겨서 사진 한 장 가지고 있지 못했는데,

그때 봉사활동 사진은, 그 지역에서 동역하던 다른 선교사가 찍어서 보내주었습니다.

 

다음 날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축구도 하고, 재미 있는 놀이도 하며,

교실에 들어가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도 하고, 예수님 이야기도 해 주고,

가지고 간 이발 기계로 이발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이발을 하고 나면 다른 사람이 머리를 감겨 주었습니다.

깨끗하게 이발을 하고 머리까지 감은 아이들은 마냥 기쁘고 행복해 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팀원들도 마음이 따스해 졌습니다.

 

물이 부족한 곳이라 목욕을 잘 못하고 머리도 자주 감을 수 없어서 그런지

머리에 종기나 부스럼이 나 있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간호사 출신의 봉사팀원들이 가지고 간 약으로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 자체가 무슨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 낙도 없는 아이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즐거운 시간이었고, 아이들과 선교사님들이 가까워지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쟈리샤리프에서의 마지막 날은, 네 사람씩 팀을 짜서 가정 방문을 하였습니다.

 

선교사님들이 평소에 섬기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쌓아 놓은 가정들을 방문하여

가지고 간 선물도 전달하고, 저녁 식사도 함께 하며

하룻밤을 함께 지내고 오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마음이 오가는 시간이었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조금 더 잘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여자들은 방 안에서 잠을 자고, 남자들은 마당에서 모기장을 치고

별빛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마시는 물은 식수원이 오염되어 있어,

현지인이 물을 권하면 정중하게 사양을 하고

반드시 가지고 간 생수를 마실 것을 현지 선교사님들로부터 단단히 주의를 받았고,

또 조심을 한다고 했지만, 함께 간 팀원 중 한 명은 전깃불도 없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마당 한 구석에 있는 화장실을 밤새 들락거려야 했습니다.

 

우리 남자 팀원들은 수염을 기르고 아프간식 복장을 하고 다녔고,

여자 팀원들은 반드시 아프간에서 준비한 긴 치마를 입고, 머리에 히잡을 두르고 다녔습니다.

 

◑피랍 경위와 피랍 생활

 

07.13 20명 인천공항 출발

07.14 3명의 선교사 현지에서 합류, 총23명이 움직임

07.19 23명 가즈니주 카라바그에서 피랍

07.23 3~4명씩 분산되기 시작

07.25 배형규 목사 순교

07.30 심성민 형제 순교

08.13 1차 2명의 자매가 풀려남

08.29 2차 12명 풀려남

08.30 3차 7명 풀려남(43일)

09.02 19명 인천공항 도착

 

팀이 납치된 경위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봉사팀은 수도 카불에서 남쪽 칸다하르로 가는 지역이 치안이 다소 불안한 지역이라고 판단해서,

이 지역을 가장 안전한 낮 시간에 통과 할 수 있도록,

북부 마쟈리샤리프에서 18일 밤 11시에 출발해서 19일 아침 카불에 도착했습니다.

 

카불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팀이 카불을 출발한 시각은 오전 10시 경이었습니다.

 

버스를 빌릴 때부터 약속된 대로 마쟈리샤리프에서 카불까지 타고 온 버스는 돌아가고,

카불에서 칸다하르까지 가는 경로에는 다른 버스와 운전사로 교체가 되었습니다.

 

버스는 칸다하르로 가던 도중 중간 지점에 있는 가즈니에서 잠시 정차하여

일부 팀원들이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운전사가 2명의 행인을 태웠습니다.

안내를 하던 L선교사가 왜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태우냐며 항의를 했지만,

운전사는 가는 도중 내려줄거라고 하면서

두 사람을 의자가 아닌 출입구 쪽 계단과 바닥에 앉게 했습니다.

 

이런 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흔하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L선교사도 더 이상은 항의를 하지 않았고, 버스는 칸다하르를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커튼 사이로 내다보이는 풍경을 구경하기도 하고, 옆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북부에서의 봉사활동과 전날 밤부터의 장거리 이동으로 피곤하고 지친 일부 팀원들은

잠을 자기도 하는 가운데, 버스는 목적지인 칸다하르를 향하여

왕복 2차선 포장도로 위를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교체된 버스 역시 낡고 에어컨디션이 안 되는 버스였습니다.

한낮의 무더운 시간대였기 때문에, 일부 팀원들은 마쟈리샤리프에서 가져온 얼음을

수건에 싸서 머리에 얹고 가면서 더위를 견디기도 했습니다.

 

가즈니와 칸다하르의 중간 지점이 피랍된 지점입니다.

버스가 가즈니 주의 카라박이라는 곳을 지날 때였습니다.

갑자기 ‘딱’하고 돌맹이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탈레반이 쏜 소총의 총탄이 버스 전면 유리창에 맞는 소리였습니다.

잠을 자던 팀원들이 깨어나고, 다른 팀원들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하는 가운데,

버스는 길 가에 정지했습니다.

 

이 때 앞 자리에서 안내를 하던 L선교사가 다급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버스가 납치 되는 것 같습니다.

다들 침착하시고, 속으로 조용히 기도해 주십시요!”

 

앞 자리에서 이 장면을 목격했던 L선교사와 다른 팀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한 남자가 갑자기 총을 들고 도로 위로 올라와, 버스에 정지하라는 신호를 했는데,

버스 운전사가 무시하고 지나가려 하자 총을 쏘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버스가 길 가에 정지하자, 두 사람의 무장한 탈레반이 올라와서 운전사를 위협하며

버스를 근처 도로변으로 이동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팀원들에게서 휴대하고있던 카메라와 핸드폰 등 소지품들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피를 말리는 것 같았던, 고통스러운 43일간의 피랍 기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소지품들을 몰수 당한 후에, 팀원들은 납치범들의 지시에 따라

버스에서 내려서 근처에 있는 마을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선두와 후미, 그리고 중간 중간에 무장한 납치범들이 팀원들을 감시하며 함께 걸어 갔습니다.

버스 운전사와 중간에 가즈니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왔던 두 사람도

팀원들과 함께 마을로 끌려 갔습니다.

 

걸어가는 도중에, 오토바이를 탄 탈레반 두 사람이 와서, 일행 중 가장 연장자였던

유경식 장로와 제창희 형제를 태우고 마을에 있는 탈레반 본부로 데리고 갔습니다.

 

마을 중앙 약간 높은 대 위에 탈레반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앉아 있었고,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RPG(로켓포)로 무장한 탈레반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손님을 대하듯 두 사람에게 홍차를 대접하면서

서투른 영어로 유경식 장로에게 물었습니다.

 

“중국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들입니다.”라고 하자

이번에는 “의사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팀을 의료 봉사를 하러 온 사람들로 생각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아니라고 하자 이번에는 “무슬림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로서 여러분들을 도우러 온 사람들입니다.”

 

여기까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팀원들이 도착했고,

두 사람도 마을의 회관으로 보이는 곳으로 다른 팀원들과 함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한번 소지품 검사가 있었고,

손수건, 화장품 등을 제외한 현금과 귀중품들을 모두 압수당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정부군이고, 알 카에다로부터 팀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고,

위험이 해소되면 곧 보내줄 텐데

그 때까지 자기들이 잘 보관하고 있다가 돌아갈 때, 모두 돌려줄 거라고 팀원들을 속였습니다.

이 때 몇몇 자매들은, 핸드백 속에 있던 작은 성경책을 재빨리 숨기기도 했습니다.

 

▲피랍 기간 중에 있었던 일들

피랍 기간은 팀원 전체가 함께 있었던 때와,

그 후 3~4명씩 소그룹으로 흩어져 지내던 때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7월19~23일까지는 모든 팀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팀은 처음 납치되었던 장소와 가까운 마을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승합차와 경운기를 번갈아 타고, 길이 없는 곳은 걸어가면서 밤새 이동했습니다.

 

피로와 추위, 그리고 오랜 이동에 허기가 지고 갈증도 났지만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만난 도랑물은 썩은 물이어서 목이 말랐지만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깊은 산중에 있는 탈레반들의 아지트였습니다.

흙으로 지은 작은 오두막 같은 곳이었는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방은 먼지투성이였습니다.

 

좁은 방에서 23명이 지내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누워 잘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남자 청년들은 벽장처럼 생긴 공간에 올라가 자기도 하고,

방 입구에 있는 부엌에서 자기도 하고, 그냥 앉아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방 바닥이 고르지 못하고 울퉁불퉁해서 오래 누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흘째 되던 날까지는 힘들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탈레반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손짓 발짓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등 팀원들과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성경 읽기와 기도회

 

탈레반 아지트에 도착한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방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한 팀원이 성경을 읽으면 나머지 팀원들은 듣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로 시편 말씀들을 읽었는데, 절박한 상황 속에서 팀원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목사님의 인도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도시간에 배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정부군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를 속이는 것 같다.

저 사람들은 정부군이 아니라 탈레반인 게 확실하고, 감옥에 갇혀있는 자기들 동료들과

인질 교환을 하기 위해 우리를 납치한 것 같으니 정신을 차리고 조심하자.”

 

그리고 나서 팀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모두가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의탁하는 헌신의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우리의 생명이 주님 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깊은 산중 탈레반들의 아지트에서또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구덩이 앞에서의 살해 위협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 지면서,

안내와 통역을 담당했던 L선교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두 복장을 갖추고 빨리 밖으로 나오세요!”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밖으로 나간 팀원들의 눈 앞에

무장을 하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몇몇 탈레반들이 보였습니다.

 

모두 집 뒤쪽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벽 앞에 참호인듯한 길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고,

팀원들을 집 벽과 구덩이 사이에 서게 했습니다.

 

눈 앞에 소총, 기관총, RPG 등으로 무장을 하고 탄띠를 람보처럼 길게 늘여뜨린 탈레반들이

복면을 한 채 팀원들에게 총구를 겨누며 서 있었습니다.

 

그 동안 TV뉴스에서나 보았던 무시무시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이름과 아버지 이름을 말하라고 하면서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을 했습니다.

 

팀원들은 “이제 우리를 총으로 쏴서 죽이고 이 구덩이에 묻은 다음

저 비디오를 방송에 내보내려 하나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야말로 성령께서 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던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런 공포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한 사람도 소리를 지르거나 울지를 않고,

평온한 가운데 모두들 침착하고 조용하게 각자 속으로 기도를 올리며 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탈레반들은 팀원들을 죽이지 않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고,

비디오도 제대로 찍히지 않아서 방송에 못 내보내겠다고 합니다.

 

사흘째 되던 날부터 그 동안 우호적이던 그들의 태도가 갑자기 적대적으로 돌변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그 동안 봉사팀을 좋은 일을 하러 온 사람들로만 알았다가,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하여 봉사팀이 샘물교회 성도들이고,

선교를 하러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전 세계의 크리스찬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도 인질교환을 하기 위해 우리를 납치했기 때문에 함부로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협상을 위해서 한 두 사람쯤 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제일 먼저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한국과 세계의 언론과 지도자들에게 여러분을 속히 구출해 달라고 부탁을 하겠습니다.’

 

그 때 55세의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다니고 있다가 단기봉사에 참여한 유경식 장로가

목사님 옆에서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아직 나이도 젊으시고, 앞으로 하실 일도 많고,

팀원들을 인솔해서 한국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저는 나이도 많고 이제 살만큼 살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나이를 먹은 다음에는 선교지에 가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선교지에서 죽으나 지금 선교지에서 죽으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유경식 장로도 끝까지 지지 않고 말을 했습니다. “그럼 제비를 뽑으시지요.”

 

그 때 목사님은 웃으면서 농담처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디 전도사가 목사 자리를 넘봅니까?”

 

함께 돌아가며 읽었던 시편의 말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온 마음으로 고백했던 헌신의 기도,

위기의 순간에 팀원들과 동행하며 붙들어 주셨던 성령님의 역사,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위험한 순간마다 앞장서서 솔선수범하셨던 배형규 목사님의 모습은,

이후 팀원들이 오랜 기간 동안의 피랍 생활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신비한 경험들

팀이 탈레반의 아지트에 머물던 기간에 신비스러운 경험들도 있었습니다.

 

팀원 중의 한 명이었던 차혜진 자매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가 밤에 잠을 자고 있었는데

소리가 나서 일어나 보니, 다른 사람들이 머리에 히잡을 쓴 채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매는 “기도를 하려면 좀 깨워서 같이 하자고 할 것이지 자기들끼리만 하니?”라고 하면서

그들과 함께 한참 동안 기도를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젯밤에 기도한 사람들이 누구야? 왜 나를 안 깨웠어?” 라고 물었으나

아무도 밤중에 일어나서 기도를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팀원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마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우리들을 위해

기도를 하게 하셨나 보다” 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그날 밤에 또 이상을 보았습니다.

자다가 인기척이 나서 깨었는데, 방 안에 무장을 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이 이야기를 들은 팀원들을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를 보내 우리들을 지켜주고 계신다며 좋아했습니다.

 

유경식 장로는 새벽에 잠에서 깨면서, 비몽사몽간에 한 쇼핑백 모습을 선명하게 보았습니다.

단기봉사팀이 짐을 꾸릴 때 한 번 보았던 쇼핑백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순교한 심성민 형제가 끝까지 들고 다니던 쇼핑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성민 형제가 순교할 것을 아시고 미리 보여주셨구나’ 하는 생각을

나중에 귀국하고 나서야 하게되었습니다.

 

 

◑피랍시 팀별 상황

 

구덩이 앞에서의 살해 위협이 있던 다음 날 밤, 팀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달빛도 없는 깜깜하고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경운기를 타고 털털거리며 한참을 가고 난 다음

도착한 곳은 어느 마을의 회관인 듯 보이는 큰 집이었습니다.

 

“탈레반들은 이제 당신들을 한국으로 돌려 보내준다.

가즈니로 가는데 승합차가 두 대 밖에 없고, 탈 자리가 부족하니 두 팀으로 나누어 가겠다”며

먼저 절반인 12명이 대기해 놓은 승합차에 타라고 했습니다.

 

배목사님은 나이가 어린 자매들부터 차례대로 8명의 자매들과

유경식 장로를 포함한 4명의 형제들을 먼저 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탈레반 한 명이 더 타는 바람에 한 자매가 다시 뒤에 남게 되고,

11명이 승합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먼저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가즈니로 가서 돌려보내준다는 것은 거짓말이었고, 팀을 분리하려는 술책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팀은 유경식 장로 쪽의 11명과

배형규 목사님 쪽의 12명으로 나뉘어 졌고,

다시 각각 3개의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져서

모두 6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23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을 먹이고 재우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겠지만,

그렇게 할 경우 금방 꼬리가 잡힐 것을 우려한 조치로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유경식 장로를 비롯한 11명은 피랍된 지점으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 국경 근처의 산악고원지대로 이동을 했고,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를 비롯한 12명은 가즈니 인근에 머물렀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왜 하필 한 쪽에서만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배목사님 그룹은 납치를 주도했던 강성 탈레반 세력에 의해서

주로 가즈니 인근에서 관리되고 있었고,

유경식 장로 그룹은 관리 차원에서 멀리 변경으로 보내졌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을 합니다.

 

납치와 협상을 주도한 강성 탈레반 세력이, 협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두 사람을 차례로 살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그룹별 상황은 6개 그룹 모두가 각각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맨 먼저 분리되어 가장 먼 산속에 감금되었던 그룹은

초기 이동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 곳에서 지내면서,

산 속에서 땔감을 주워다 취사를 하는 등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거의 노예 수준의 생활을 했습니다.

 

반면에 가즈니 인근에서 생활을 했던 소그룹은 거의 매일 탈레반들과 함께 이집 저집을

전전하면서 지냈는데, 전투가 벌어진 상황 속에서 탈레반들과 함께 뛰어 가기도 하는 등

위험한 일들이 많았지만, 먹는 것은 그래도 배고프지 않게 먹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팀이 3~4명의 소그룹으로 분산 된 후에 어떤 생활을 하며 지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팀이 6개나 되었고, 또 각자 처한 상황들이 각각 달랐기 때문에

모든 팀들이 겪었던 일들을 다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피랍 현장에 있었고,

이 내용을 작성한 필자의 경험을 위주로 간략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탈레반들에게 붙잡혀서 감금되어 있었던 장소들을 말씀 드리고,

거기서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힘들었던 일들은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개종 강요와

두 분의 순교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팀원들이 머물렀던 장소들은 깊은 산중의 동굴 속에서부터 외딴곳에 있는 농가,

마을의 가정 등 다양했습니다. 산중에서 지냈던 팀은 거의 이동이 없이 지냈던 반면

가즈니 가까이 머물렀던 팀은 거의 매일 장소를 이동해야 했습니다.

 

머물렀던 장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 중의 하나가, 우물가 움막이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강수량이 적고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하수를 퍼 올려서 농사를 짓고 생활 용수로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물 주위는 높은 담으로 둘려 있었고,

우물 곁에는 우물을 지키는 곳으로 보이는 작은 움막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사람이 살지 않은 이곳에 팀원들을 가두어 놓고

무장을 한 탈레반이 밤낮 지키고 있었습니다.

담 밖에는 마을로 물을 흘려보내는 도랑이 있었습니다.

 

이 물로 빨래도 하고, 마을 아이들이 목욕도 하고, 이 물로 설겆이도 합니다.

탈레반들은 바깥 문을 자물쇠로 단단히 잠그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에만 출입을 하고 먹을 것을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깊은 산중에 있는 집의 당나귀 우리에서 지내기도 하고,

목축을 하는 한적한 농가에 갇혀 지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마을 중심에 있는 제법 부유해 보이는 집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마을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용) 배터리를 충전했다가

밤에 전깃불을 켜고 핸드폰을 충전하기도 하는 집이었습니다.

 

고기와 과일도 먹을 수 있었고, 물을 달라하여 몸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밤에 카펫 위에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는데,

덮고 자라며 벽장에서 꺼내 준 담요는 “Made in Korea” 였습니다.

 

팀원들은 풀려날 때까지 이 집에서 머물기를 바랐지만

하룻밤 지나고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밤에는 호롱불을 켜기도 했는데,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검은 천으로 창문을 가렸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집 전체가 요새처럼 높은 담으로 둘려 있어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낮에는 방 문에 자물쇠를 채워 놓고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했고,

밤에는 집 주인이 소총을 들고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팀원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낙은 저녁을 먹은 후에 한 사람씩 밖으로 나가서

밤 하늘을 바라보며 바람을 쐬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의 지하에 마당을 빙 둘러 파 놓고 입구를 나뭇가지로 위장해 놓은 토굴이 있었는데

유사시 대피 장소로 사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탈레반의 지시로 팀원들은 토굴에 들어갔다 나오는 훈련을 했습니다.

 

하루의 일과

대부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고

깜깜해지면 잠을 자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탈레반들은 팀원을 집주인에게 맡겨서 지키게 했는데,

집주인들은 밤에는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지만

낮에는 문을 밖으로 잠가 놓고 농사 일을 하러 가거나 외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희 팀은 오전에는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남은 시간에는 주로 성경을 읽었는데, 다행히 한 자매가 몰래 숨겨온 작은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읽고 다른 사람들이 들었는데, 탈레반들의 감시가 심해져서 위험하다는

판단을 하고, 두 시간 정도씩 서로 돌아가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책을 책 별로 찢어서 나누어 읽었던 팀도 있었고,

성경책이 없어서 읽지 못한 팀,

있어도 탈레반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위험해서 읽지 못한 팀들도 있었습니다.

 

기도 시간에는 주로 팀원들의 안전과 속히 풀려나기를 기도했고,

가족들과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기를,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모든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했습니다.

 

피랍 기간 중 팀원들은 탈레반들 외에도 많은 아프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주로 머물렀던 집가족들이거나, 집주인의 호의로 팀원들을 보려고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집주인들은 탈레반들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팀원들을 감금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생하고 있는 팀원들을 보며 측은해 했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과일을 갖다 주기도 했습니다.

 

탈레반들 중에서도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윗사람들 몰래 팀원들 간에 편지를 전해 주던 탈레반도 있었습니다.

 

아프간 사람들은 대부분 영양섭취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자기 나이가 몇인지,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렵게 사는 이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는데, 특히 학교에 다니거나 마음껏 뛰어 놀아야 할

어린아이들이 힘들게 일을 하거나 학대 받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팀원들이 머물렀던 어떤 집에는 1살부터 11살까지 6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11살 짜리 큰 딸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고,

9살짜리 아들과 7살짜리 딸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포도 농장에 가서 일을 하고,

5살 짜리 여자 아이는 어린 남자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울린다며 엄마가 여자 아이 뺨을 때리고,

여자아이를 향하여 물건을 집어 던지기도 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주며,

한국으로 데려가서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난(납작하고 둥근 빵)이 먹기가 낯설었지만,

그래도 배가 고프니까 조금씩 뜯어 먹기 시작했고,

풀려날 즈음에는 현지 주민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잘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인질 기간 중의 경험들

팀이 피랍 생활을 하는 동안 구덩이 앞에서 살해 위협을 당하는 등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도망가는 것으로 오해를 받아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기도 하고,

폭탄조끼를 입고 있는 탈레반들과 어두운 광야를 눈을 가린 채 걸어가기도 하고,

머물던 집 근처에서 정부군과 탈레반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총격이 오가는 가운데

탈레반들과 함께 도망을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님 손에 맡기겠다는 헌신의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부터

생명을 잃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위협보다 팀원들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열악한 의식주와 위생문제, 그리고 해충과 질병이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문제 중의 하나는 화장실 문제였습니다.

낮에는 절대로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고, 대부분의 집들이 집 안에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대소변을 방 한 구석에 천으로 가려진 곳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물이 부족해서 빨래는 커녕 씻을 수도 없었습니다.

집주인들의 호의로 물을 길어다 주어서 가끔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기도 하고,

자기들 옷을 가져와 갈아 입게 하고 입고 있던 옷을 빨아주기도 했지만,

어떤 팀원들은 40여 일의 피랍기간 내내 머리도 못 감고,

샤워도 못하고, 옷을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한 팀도 있었습니다.

 

피랍을 당한 시점이 한 여름이긴 하였지만, 머물렀던 곳이 해발 2천 미터 이상의 고지대였고,

사막기후였기 때문에 밤에는 많이 추웠습니다. 그리고 주로 밤에 이동을 했기 때문에

얇은 여름 옷을 입고 있었던 대원들이 감기에 걸리기 쉬웠습니다.

 

납치 당시 가방과 함께 모든 짐들을 빼앗겼기 때문에 갈아입거나 껴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잠을 잘 때에도 더러운 담요 같은 것을 주었지만 덮을 수가 없었습니다. 벼룩 때문이었습니다.

 

연약한 피부를 가진 자매들은 벼룩에 물려온 몸이 멍게처럼 부어 오르고 진물이 났지만,

물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바를 약도 없었습니다.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상시 복용하던 약을 먹지 못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유경식 장로는 당시 갑상선 암 수술을 받은 후라 갑상선 호르몬제를 매일 두 알씩 먹어야 했는데,

교회와 정부 담당자들이 여러 가지 경로로 약을 전달하려 했으나 전달되지 않았고,

결국 한 달 이상 약을 먹지 못했는데, 큰 어려움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개종 강요

가장 민감하게 위험을 느꼈던 때가 바로 개종을 강요당할 때였습니다.

때로는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따라 하라 하기도 했고,

개종을 하면 바로 한국으로 돌려 보내 주겠다고 유혹을 하기도 했고,

개종을 거절하는 팀원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을 하기도 했지만,

감사하게도팀원 모두가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팀원들이 모두 잘나고 순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팀원 중에는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형제자매들도 있었지만

성령께서 강하게 붙들어 주시고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팀원들을 지켜 주셔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두 분의 피살 소식

탈레반들은 두 분의 순교 사실을 팀원들에게 끝까지 숨겼습니다.

팀원들은 기도할 때마다 다른 팀원들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팀원들이 다들 안전한지 탈레반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다들 안전하다며 거짓말을 했습니다.

 

함께 있었던 소그룹의 팀원들에게는 한국에 갔노라고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현지어를 할 줄 아는 L선교사는 그들의 대화 내용을 통해서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팀원들은 전혀 알지를 못했습니다.

 

유경식 장로는 우연한 기회에 탈레반이 듣던 라디오에서 나오는 영어 뉴스를 통하여,

누군지는 모르지만 팀원 중의 두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지만 내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함께 있던 자매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들 잠든 밤, 날이 밝기까지 숨을 죽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던,

전체 피랍 기간을 통하여 가장 고통스러웠던 날이었습니다.

 

 

◑배형규 목사, 심성민 형제

배형규 목사님은 청년회, 그리고 8개 팀에 150여명이나 되는 단기봉사단 전체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단기봉사 훈련 기간 동안에는 그리 자주 뵙지를 못했습니다.

 

훈련은 매 주일 모든 활동이 끝난 후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었는데, 가끔 오셔서

훈련들을 잘 받고 있는지 점검도 하시고, 수고한다고 격려를 해 주시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아프가니스탄이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고, 직접 인솔자로 책임을 맡으셨기 때문에

다른 팀보다는 더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이 있는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목사님의 인상적인

모습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비행기와 버스 안에서 주무시던 모습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하자마자 주무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북경공항에서 비행기를 바꾸어 타고 두바이로 향하던 내내 또 주무셨습니다.

 

그 때는, 전날까지 청년회 사역이며, 단기봉사 준비며,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서 피곤하셔서

그랬을 것이라 치더라도, 다음날 두바이에서 카불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또 주무시는 것을

보고서는 정말 잘 주무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쟈리샤리프로 가는 버스 속에서,

그리고 마쟈리샤리프에서 칸다하르로 가는 버스 속에서도 내내 주무셨습니다.

 

그 때는 “어떻게 저렇게 잘 주무실 수 있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그렇게 주무시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평소에 주무실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밤 늦게까지 청년들을 만나 상담을 해 주고,

집에 돌아와서는 새벽 한 두 시까지 다음날 설교 준비를 하시고,

다시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 가시고…도무지 주무실 시간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이동을 할 때면, 차를 타건 비행기를 타건 주무셨던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훌륭한 것 같아도 가까이 가면 냄새가 나고 추한 사람들이 많은데,

목사님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세히 알면 알수록 더욱 고개가 숙여지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배형규 목사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던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7발의 총탄을 맞으셨는데, 총탄을 맞으신 자리에서 피가 많이 흘러나온 것을

입고 계시던 옷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목사님의 인상적인 또다른 모습은 깜깜한 밤중에 팀이 이동을 할 때면

혹시라도 팀원 중 한 사람이라도 문제가 있을까 봐

맨 뒤에서 팀원들을 살피면서 오시던 모습이었습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의 안전보다 제자들의 안전을 더 염려했던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추운 밤, 광야에서 이동을 할 때, 청년 자매들이 목사님의 건강을 염려해서

가지고 있던 숄을 어깨에 두르시라고 드렸을 때,

“나는 괜찮아!” 하시면서 한사코 자매들에게 돌려주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제자들은 몇 번이나 목사님께 드리려 하고, 목사님은 한사코 사양하시며

제자들에 돌려주시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배 목사님의 마지막 말씀

배 목사님과 끝까지 함께 있었던 팀원들의 말에 따르면, 배 목사님께서 순교하시던 날

탈레반들은 아무 말 없이 배 목사님을 불러내서데리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마지막임을 직감하셨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이 말씀을 하시고 탈레반들을 따라 나가셨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세요!”

 

평소 배 목사님의 좌우명은

‘온전한 헌신은 마지막 것을 드리는 것이다’ 이었습니다.

 

그렇게 배 목사님은 자신의 좌우명대로 마지막 생명까지 주님께 드리고 가셨습니다.

목사님은 가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요, 신앙의 참 스승으로 사셨던 목사님의 모습을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심성민 형제

심성민 형제는 한마디로 순수하고, 사랑 많고 믿음직한 형제였습니다.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나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나 봉사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늘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했던, 그야말로 모범 청년이었습니다.

 

팀이 피랍되었을때는 심성민 형제가 ROTC장교 출신으로

군에서 예편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탈레반들이 장소를 이동하면 심성민 형제는 그의 군사 지식과 별자리의 위치 등을 이용해서

팀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팀원들에게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위험한 상황이었고, 자매 봉사팀원들이 많았던 상황 속에서 심성민 형제는

팀원 모두가 기댈 수있었던 바위처럼 든든하고 믿음직한 청년이었습니다.

 

심성민 형제는 팀원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청년이기도 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단기봉사팀이 훈련 장소로 배정받은 곳은, 교회 지하1층 안쪽 구석진 곳이었고,

휠체어를 탄 장애우들이 출입하기에는 매우 불편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심성민 형제는 훈련시간 때마다 몸이 불편한 기도후원자를 휠체어에서 안아,

훈련 모임이 있는 방으로 데려오곤 했습니다.

알고 보니, 단기봉사 훈련 때만 그런 것이아니라 평소에도 사랑부 교사로서

장애우들을 열심히 섬기는 사랑이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순교를 하던 날, 탈레반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심성민 형제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모든 소지품들을 그대로 둔 채, 잠깐 어디 다녀 오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두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배형규 목사님은 목사님이셨고,

팀의 리더였기 때문에, 그리고 목숨을 희생할 상황이 오면 본인이 제일 먼저 나가시겠다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맨 먼저 머리에 떠 오르는 사람이 배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심성민 형제는 그럴만한 이유도 없었고, 언제나 성실하고 신중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가 탈레반들에게 살해되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출발하기 전에 가족에게 아프간 단기봉사를 다녀와서 신학을 하고

농촌을 섬기겠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환상 중에 보였던 쇼핑 가방이 그가 끝까지 들고 다녔던 유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 하나님께서 믿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이 청년을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의 순교를 계기로 믿지 않으셨다가 믿음을 가지게 되어 집사님까지 되신 어머니께서는

‘나 같은 죄인을 통해서 순교자를 배출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 두 분이 이역만리 아프간 땅에서 흘리신 순교의 피는,

진정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땅에 떨어져 썩어진 한 알의 밀알처럼,

많은 생명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였습니다.

 

◑귀환

 

8월 13일, 피랍 된지 25일만에,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먼저 2명의 자매가 풀려났습니다.

 

이 자매들은 심성민 형제와 함께 있었던 팀이었는데,

심성민 형제가 살해되고 난 다음, 세 명의 자매들만 있었던 팀이었습니다.

 

그 중의 한 자매는 많이 아팠고, 다른 한자매도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풀려날 즈음에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는데,

협상과 대외 여론 등 여러 가지 면을 감안하여 풀어준 것으로 보입니다.

 

아파서 먼저 나오기로 되어 있던 자매는 뒤에 남고,

다른 팀원에게 먼저 나가라고 양보를 했는데,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른 팀원에게 먼저 나가라며 양보하는 모습을 보고

탈레반들이 감동을 받았고, 이 소식이 현지에서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혼자 남은 자매는 다음날 다른 팀에 합류되었습니다.

그리고 8월 29일, 피랍된지 42일만에 12명의 대원이 풀려났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파견한 구조팀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이 후 팀원들은 적십자 차량을 타고 가즈니로 이동하여 우리 군에게 인계되었고,

미군 부대 안에서 간단하게 건강 검진을 받은 후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카불의 한 호텔로 옮겨졌습니다.

 

첫날 인계된 팀원들은 주로 가즈니 인근에서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와 함께 있던 팀원들이었습니다.

 

8월 30일 저녁, 피랍 된지 43일만에 마지막으로 남은 7명의 팀원들이 풀려났습니다.

가장 먼 산 중에 억류되어 지내면서, 40일이 넘는 납치 기간 동안 한 번도 씻지 못하고

빨래도 하지 못한 팀입니다.

 

팀원들은 호텔에 도착해서,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의 순교 소식을 듣고는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형제자매들은 산 중에서 가장 힘들게 생활을 했던 팀이었습니다.

 

이후 팀원들은 정부의 배려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고국의 가족들과 통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머물고 있던 카불의 호텔에서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한국에 와서, 회견 내용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내용들이

보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열악한 통신 사정으로 기자회견 영상이 전송되지 못한 가운데,

방송사들이 미리 준비한 내용을 방송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기자회견을 할 때, 피랍 기간 중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보여 주었던 바지입니다.

이 바지는 한 팀원이 입고 있던 것인데,

피랍 기간 중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메모해 놓은 것입니다.

 

탈레반들은 자신들의 정보가 노출될 것을 우려해서 필기구들을 압수해 버렸기 때문에,

한 자매가 자기 바지를 걷어서, 그 안쪽에다 몰래 기록을 했던 것입니다.

 

팀은 다음 날 유엔이 운영하는 비행기 편으로 카불을 떠나 두바이로 왔고,

두바이에서 대한항공편으로 9월 2일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단기봉사를 떠난지 52일, 피랍된 날로부터 45일만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기자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인천공항의 입국장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자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힘내라며 격려를 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야유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계란을 투척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함께 돌아오지 못한 두 분을 대신해서, 가족들이 사진을 들고 마중을 나와 주셨습니다.

팀원들은 비행기 안에서 가졌던 정부 대표와의 협의에 따라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으나,

팀원들의 건강을 우려한 가족들의 반대로 간단히 감사의 메시지만 전하고,

건강검진과 치료를 받기 위하여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안양샘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두 분의 순교와 단기봉사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들로 인하여

팀원들은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육체의 자유와 편안함을 얻을 수 있었지만, 마음은 피랍되어 있었을 때보다 더 힘든날들이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쏟아진 비난들…

그 때는 인터넷 상으로 유포되는 허위 보도나 비방 또는 명예훼손에 대하여

처벌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악의적으로 허위 사실을 만들어 유포하는 사람들이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탈레반들의 발표나 외신 보도 또는 뜬 소문을 부풀려서 퍼뜨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일부 관련 단체들이나 정부 관계자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책임을 교회와 단기봉사팀에 전가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도나 인터넷 기사들을 보고 사실을 모르는 국민들로부터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왜 현지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고 개종을 강요하느냐?”,

“우리나라에도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거기까지 갔느냐?”,

“정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왜 위험한 데를 가서 화를 자초했느냐?”는 비난이었습니다.

 

“호화버스를 타고 다녔다”, “민소매 차림으로 시장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다녔다”,

“면세점에서 호화 쇼핑을 했다”는 등의 하는 근거 없는 헛 소문들이 인터넷 상에

무제한으로 유포되고 있었고, 어떤사람은 “그 사람들 선교하러 갔으니 죽여라"는 메시지를

탈레반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더욱 마음이 아팠던 것은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일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도 이에 동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들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한국의 온 교회 성도들이 일치 단결해서

날마다 교회에 모여 뜨겁게 기도하며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성도님들이 분당 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 각처에서,

그리고 멀리 외국에서까지 찾아와서 격려하며 기도해 주신 것도 감사하고,

정부관계자들과 현지에 파견된 구조 요원들이 피랍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신 것도 감사했습니다.

 

외국의 지도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많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도님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로, 팀원들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일주일간의 입원 치료와 일주일간의 수련회를 가진 후에 일상생활로 복귀하였습니다.

 

안양샘병원의 박상은 장로님,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 세브란스 병원의 전우택 교수님이

팀원들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40일간 뜨거웠던 기도

 

아프간 피랍사실이 교회에 알려진 것은 2007년 7월 20일.

바로 그 날 저녁부터 청년회가 모여 긴급 중보기도를 시작하였으며,

곧 이어 성도들이 교회에 몰려 들어 철야기도에 돌입했습니다.

 

피랍자 석방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릴레이 기도, 철야기도, 매일 저녁집회 등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해결해주시도록 요청하는 활동과 온 성도들이

이 일에 마음을 모을 수 있게 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아프간 피랍사건은 거의 매일 국내 언론 매체의 주요기사로 보도되면서

국내외의 초미의 관심사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주요 국가의 교회들로부터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교회는 피랍 5일째인 7월 23일부터 저녁집회를 갖기 시작했으며

피랍자 전원이 석방되었던 8월 31일까지 장장 40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매일 밤 1천여 명의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 주님 앞에 회개하면서

아프간 피랍사건과 배형규 목사 심성민 형제 두 명의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철야기도회는 매일 저녁집회가 끝나는 10시 이후 1백여 명의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온밤을 꼬박 새면서 진행되었습니다.

샘물교회 말고도 국내외 여러 교회에서, 석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2007년 Again 평양대부흥을 기도해 왔는데,

하나님은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신앙의 부흥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피랍 사건의 의미

 

2007년 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단기봉사팀의 피랍 사건은,

봉사팀이 납치되어 풀려나는 날까지 하루도 신문의 1면을 장식하지 않은 날이 없었을 만큼,

봉사팀원들이나 그들의 가정 그리고 샘물교회는 물론,

온 한국의 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건이었습니다.

 

개인

믿음의 성장과 새로운 삶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

선교에 대한 관심과 하나님의 부르심

 

봉사팀원 개개인에게 피랍 사건은 크나큰 역경이었고 고난이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의지할 것이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배울 수 있는 축복의 기회였습니다.

 

죽을 목숨을 성도들의 기도와 정부의 노력,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게 된 만큼,

그 은혜에 감사하며,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두 분의 순교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이전처럼 살아서는 안되겠다는다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피랍 기간 동안, 아무도 가보지 못한 지구상의 가장 가난하고 영적으로 어두운 지역들을

다니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축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지,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며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랍 사건은 아프가니스탄과 무슬림 난민 선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이슬람 선교나 아프가니스탄 선교는

그저 후원하는 선교사가 가서 수고하고 있는 일 정도로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단지 가서 수고하고 있는 선교사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교회

교회의 각성을 촉구한 하나님의 메시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계기

선교계에 일어난 변화들

 

아프가니스탄 봉사단의 피랍 사건은 교회의 각성을 촉구한 하나님의 메시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랍사건은 샘물교회뿐만 아니라 온 한국교회, 그리고 해외의 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교회를 깨우시려고 뒤흔든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단기봉사팀의 피랍 사건은 교회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판단을 직면하면서,

어느새 교회가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편이 아닌 가진 자들의 편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존재,

맛을 잃은 소금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교계에도 각성과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선교의 방향이 올바른지,

교회가 선교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단기선교가 꼭 필요한지,

위험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고

사전에 어떤 훈련들이 필요한지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토론들이 있었고,

위기관리재단 등을 창설하여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 하려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회

인터넷 상의 허위 보도 처벌에 관한 법률 제정

재외 국민 보호를 위한 제도와 조직 보강

 

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단기봉사팀의 피랍 사건은 사회적으로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인터넷 상으로 전파되는 허위 보도와 악성 루머, 인신 공격성 발언들을 제한할 수 있는

법률적인 근거가 마련되었고, 국민들이 해외에서 위급한 상황을 만났을 때

정부가 신속하게 대응하고, 또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제도의 보완과 조직의 보강이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24시간 운영되는 영사콜센터, 위험지역에 대한 단계별 경보 발령과 여행 제한 등은

피랍 사건 이후 생겨난 제도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피랍 사건이 있은 지 겨우 10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의 의미와 영향을 온전히 판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하신 말씀처럼, 두 분이 뿌린 순교의 피는 지금도 우리 주변과 세계 곳곳에서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단기봉사팀의 피랍 사건은 두 분의 희생과 수 많은 눈물,

뼈를 깎는 고통이 뒤따랐던 힘든 사건이었지만,

우리의 희생을 통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많은 사람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요, 축복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순교의 열매

 

더욱 감사한 것은, 샘물교회가 두 분이 피를 흘리고 순교하신 이 사건을

아프가니스탄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전보다 더욱 열심을 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쉴만한물가

샘물교회는 ‘사랑의 5% 운동’의 일환으로, 아프간 순교자 심성민 형제가 헌신하고

봉사했던 발달장애인 지원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개척 초기부터 사회에서 소외되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발달장애인들과

가족을 돕기 위한 사역을 개시하였는데, 심성민 형제는 말없이 이 사역에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교회에서 세운 말아톤복지재단 주관으로 심성민형제의 선한 삶을 기억하면서

분당 지역 내에 그룹홈 ‘쉴만한 물가’를 세워 장애인들이 편하게 거주하면서

자립심을 기르도록 돕고 있습니다.

 

사랑마루

샘물교회는 아프간 사태로 한국사회와 국민에 대해 진 사랑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2009년 5월 사랑의 5% 운동을 개시했습니다.

 

성도들이 십일조 외에 생활비의 5%를 따로 떼내어

그 기금으로 사랑의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입니다.

 

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사랑마루 무료급식소.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소재 사랑마루는 매일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노동자들 중

일거리를 만나지 못한 분들과 인근 지역에 사는 저소득계층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처음 100여명으로 시작해현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300여명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침식사 제공에이어 인근 지역에 사는 학생들을 위한 공부방 사역, 반찬 나눔

그리고 노숙자들을 위한 자활그룹홈으로 사역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세계 속의 사역활동

샘물교회는 아프간 순교를 계기로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아프간인들을 포함해

무슬림 난민들을 돌보는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Y선교사는 G국에서 수년 전 아프간 난민들을 위한 A교회를 설립,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프간 순교 1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의 뜻을 기리고 제자로서의 삶을 따르고자,

분당샘물교회 은혜샘물교회, 좋은나무교회가 연합하여

그리스 아프간 난민 쉼터 3개소와 교회당 1개소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C선교사는 현지인 남편 K선교사와 함께 인도 뉴델리에 S교회를 설립해

무슬림 난민들에게 예수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C선교사는 또한 한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바이올린 등 악기를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3천~5천 명 정도의 아프가니스탄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프간에는 기독교 인구가 몇 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3달 전 쯤 아프간에서 이웃나라로 떠났습니다.

정부에서 모든 아프간 기독교인들을 리스트에 등록하고 그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공표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아프간에 있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주변 나라로) 떠났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교인들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아프간을 떠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이나 복음 때문에 죽거나, 고문이나 핍박을 받는다면

천국에서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만약 오늘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제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육신은 비록 죽을지언정 제 영혼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제가 제 목숨에 대해서 염려해야 합니까?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

그리고 샘물 교회와

특별히 한국의 교회들을 향해

말하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특별히 아프가니스탄에서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순교한 두 형제의 가족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봉사활동과 담대함,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모든 활동에 감사하고 있고 그것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피 흘림은

아프가니스탄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것이 모든 아프간에서 성경과 하나님의 통치를 굳건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순교는 칸다하르나 카불의 일부가 되어서 지금도 존재합니다.

 

한국교회에 요청합니다. 여러분은 계속 선교를 감당해야 합니다.

아프간과 또 다른 무슬림 국가와 세계 곳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가서 복음을 전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떠한 고난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