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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

LNCK 2024. 1. 10. 01:43

https://blog.naver.com/karamos/220358654591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       합3장 1-19        ☞ ▣ 부흥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합3:2

 

“패배자는 과거를 말하고, 평범한 사람은 현실을 말하고, 위대한 사람은 미래를 말한다.”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 ‘장 콕토’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당신의 집에 불이 났다면 당신은 먼저 무엇을 갖고 나오겠는가?”

 

사람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그야 말할 것도 없이 귀중품부터 챙겨야지”

그러면서 어떤 사람은 현금이 우선이다. 어떤 사람은 보석이 먼저다.

또 어떤 사람은 땅문서를 가지고 와야지.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각기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장 콕토 자신의 대답은 아주 특이했습니다. “나는 불을 갖고 나오겠소.”

그 말의 의미는 불을 갖고 나와야 불을 끌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도전적인 ‘불의 열정’을 갖고 나오겠다(빼앗기지 않겠다)는 고백이었죠.

그는 비록 불 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불의 열정만 건진다면, 잃은 것의 전부보다 더 큰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서 1장을 보면 하박국 선지자의 가슴에는 불이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냉랭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슴 속에는 원망과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1장을 보면 ‘어찌하여’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1:2,3, 12-17).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2:20).”

 

그런데 3장의 하박국 선지자의 모습은 1장과 전혀 다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자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의 가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불이 붙으니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불평이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의와 반항이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가슴에 불이 얼마나 크게 붙었든지

하박국 자신도 놀라 충격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기오놋에 맞추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의 마음에 불길이 타오르자 꿈을 잃고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2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성령의 불길이 타올라

우리 세대에 부흥이 있도록 기도합시다.

 

◑첫째,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3:1~2

 

하박국서는 매우 짧습니다. 창세기, 이사야서 같은 성경들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어느 성경에 못지않게 깊고 심오한 교훈과 영적 생동감을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서를 일명 구약의 로마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많이 부르는 가스펠 송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2:14)”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박국서는 전체 3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독특한 칼라가 있습니다.

 

1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탄식과 절규, 그리고 불평과 의심의 회색칼라입니다.

반면에 3장에는 탄식과 절규의 모습이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찬양과 감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3:1절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시기오놋’라는 단어는 악기 중에 하나인 ‘수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악기가 아니라 ‘심오하고 격렬한 느낌을 나타내는 곡조’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찬양과 관계된 그 무엇이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면 19절에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3장은 찬양이되 빠른 곡조의 찬양입니다.

들으면 절로 어깨춤이 덩실덩실 나오는 빠른 곡조의 음률입니다.

 

1장에서 의기소침해 있던 그가 3장에 와서는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흥겨움에 겨워 춤을 추며 찬양했습니다.

불만과 불평을 쏟아내던 그 입에서 찬송과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박국 그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일까요?

3장 전체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주께서’입니다.

 

주께서 말을 타시며(8).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발하셨고.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고(9).

주께서 노를 발하시고(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13).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고(14).

주께서 말을 타시고(15).

 

이와 같이 3장은 ‘주께서’ 하신다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주무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외면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잠잠하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동서남북, 원근, 고저, 산하 곳곳에서 일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이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산들도 주님을 보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다가 손을 높이 들고 항복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10절).

하늘의 해와 달들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11절).

이러한 하나님을 뵙는 순간 하박국 자신 또한 창자가 흔들렸고,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16절).

 

그가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환경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하나님의 인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을 때에 자신과 세상 또한 달리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주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Let us fix ourr eyes on Jesus.)”

 

우리가 나 자신을 바라보고 주위를 바라보면 비교의식 가운데

열등감으로 주눅 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무기력라고 죄의 낙을 즐기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죄 사함의 은총으로 인해 삶이 달라집니다.

감사와 찬양과 기쁨과 박진감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3: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주의 소문을 듣고 놀랐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장차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주의 일’은 구원의 역사입니다.

‘수년 내’는 몇 년 후가 아니라 영어로 in our day, 우리 세대입니다.

 

부흥이란 히브리어로 ‘하야’로, 보존하다. 살아나다. 살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renew(NIV)로, 새롭게 하다, 일신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또 revive(KJV)로 소생하게 하다. 되살리다. 상기하다. 부흥시킨다는 뜻입니다.

즉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다시 살린다’는 뜻입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살아있는 것 같았지만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그의 내면은 마치 연탄재와 같이 시커멓게 타 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의 내면에 기쁨이 있을 리 없고 찬양과 감사가 있을 리 없습니다.

 

이제 그가 자신이 새롭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기를 원했습니다.

 

내적으로 부흥이 시작되자, 외적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박국이 살았던 시대는 강포와 간악과 패역과 겁탈과 변론과 분쟁 등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은 상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성전이 언제 파괴될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조국이 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는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그는 하루 속히 부흥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부흥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 그는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3:2

 

하박국은 깨어진 민족, 죄악으로 가득 찬 민족,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밖에 없는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했습니다. 죄 값으로 유다 민족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지만

징계하시는 중에서도 불쌍히 여겨 다시 부흥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2

 

▲부흥이란 하나님의 교회가 생명의 능력이 약화되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침체되어 있을 때, 회생시키는 운동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며 촉진시키는 하나님의 운동입니다.

 

죄인들에게는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에게는 변화와 풍성한 삶을 의미합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회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의와 진리와 거룩과 사랑입니다(레11:45,46,엡4:24,요일4:16,계4:8).

그리고 인간은 사명을 가진 존재입니다(창1:28).

 

이처럼 부흥은 하나님이 본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사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 가정에 두신 사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교회에 두신 본래 사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청입니다. 교회 부흥은 하나님의 절실한 뜻입니다.

교회 부흥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부흥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는, 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느 시대보다 교회 부흥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20세기를 향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던 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는 있으나 성령은 없고,

교회는 있으나 그리스도가 없고,

용서는 받으나 회개가 없고,

구원은 받으나 거듭남이 없고,

천국은 말하나 지옥은 말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 같은 위험 요소들은 오늘날 현실에 정확하게 적중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부흥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해방 이후 분단된 민족의 사회적 여러 요인들이 교회를 성장시키고

복음 전도에 큰 결실을 거두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실용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안일주의가 교회에 들어오면서부터

교회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통계청이 2008년 5월에 발표한 2005년 인구 주택 조사 분석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2006년 경 설교

 

이 자료에 의하면 기독교 인구는 전체 861만 6000명(18.3%)으로,

불교(1072만 6000명, 22.8%)에 뒤를 이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한국 기독교 인구가 1,000만 명대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한편 가톨릭은 514만 6000명(10.9%)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번 통계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바로 가톨릭 신자 수입니다.

기독교가 하향세인 반면, 가톨릭은 지난 10년 동안 놀라울 정도의 성장을 이루어

10년 전인 1995년보다 219만여 명이 늘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위기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자체적으로도 위기입니다.

세계 지도를 놓고 중, 남미를 보세요. 중, 남미는 모두가 가톨릭 국가입니다.

중, 남미가 정치 경제 사회가 안정되어 있습니까? 부존자원이 풍부하지만 항상 불안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문제는 종교와 궤를 같이합니다.

 

지금은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의 기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2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부흥되게 되면 사회의 개혁과 변화도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웨슬리의 영적 부흥운동은 영국을 피의 혁명에서 건졌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때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찰스 피니 등이 주도한 부흥운동이, 미국을 오늘의 강국으로 만들어간 것은

한 사람의 회개와 부흥운동 때문입니다. 찰스 피니의 부흥 운동이 일어날 때

그 지역 사회의 술집이 손님이 없어 문 닫고 교도소에 죄수가 들어오지 않으니

간수가 앉아서 졸고 있었습니다.

존 칼뱅이 스위스에서 목회할 때에 그 도시에 범죄가 없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3-19).

 

3절 “하나님이 데만에서 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오신다는 단어가 2번 나옵니다.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데만에서 나오시고 바란 산에서 나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데만’과 ‘바란 산’은 시내 산 가까운 지역들로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상기시키는 지명들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신다’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이 뜨거워지니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신실하게 함께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의 오심을 4절에서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실 때에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린다고 했습니다(7).

구산의 장막이 환나을 당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첫 번째 사사 웃니엘에 의해서

8년을 섬기던 메소포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물리친 전쟁을 말합니다.

 

그리고 ‘미디암 땅의 휘장이 흔들린다’는 것은 기드온의 300용사가

미디안 135,000명을 물리친 전쟁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목적은 바로 열국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이 오시는 목적은 13절을 보면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십니다.” 이처럼 부흥이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원수들을 멸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부흥을 원하십니까? 기도제목을 가슴에 품고 불이 붙을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개개인을 부흥시켜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부흥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부흥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오늘도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회복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부조리가 난무한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의 부흥의 때가 나타난 시기는 암흑과 좌절과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때일수록 부흥의 불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자에게 부흥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주님, 내 죄가 큽니다. 그렇지만 긍휼을 잊지 마소서.

저를 새롭게 하소서.” “주님, 내 죄가 큽니다. 우리 가정을 새롭게 하소서.”

“주님, 내 죄가 큽니다. 저의 자녀를 새롭게 하소서.”

“주님, 내 죄가 큽니다. 우리 교회를 부흥시켜 주옵소서.”

“주님, 내 죄가 큽니다. 우리 캠퍼스를 새롭게 하소서.”

“주님, 내 죄가 큽니다. 우리 직장을 새롭게 하소서.”

“주님, 내 죄가 큽니다. 우리 민족을 새롭게 하소서.”

...................................

 

♣대구의 어느 목사님 한 분의 간증입니다.

자기가 어릴 때, 동네 개구쟁이 일곱 명이 함께 교회를 다녔는데

그때 당시 추운 겨울날에는, 교회에서 톱밥 난로를 때던 시절이었습니다.

 

지하 기도실에 톱밥난로가 있었는데

개구쟁이 7명이 그 지하 기도실에 있는 그 톱밥에 불을 지른 겁니다.

 

불이 붙으니까 아이들이 당황스러워서, 물을 떠다가 불을 꺼야 되는데

물 가지러 갈 시간도 없었고.. 그래서 7명의 개구쟁이들이 다 거기다가 오줌을 쌌습니다.

 

다행히 불은 꺼졌는데, 온 기도실에 지린내가 진동을 했습니다.

 

사찰 집사님한테 끌려서 담임 목사님한테 왔는데

담임 목사님이 그 일곱 명의 개구쟁이 아이들을 보고는 웃으시는 겁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그 교회 톱밥 난로에 불을 지르고 오줌으로 불을 끈 애들이냐?

그러면서 하하하 웃으시면서, 머리를 이렇게 하나하나 쓰다듬어 주시면서

'한국교회에 이 성령의 불을 붙이는 자들이 되거라!' 그러면서 축복을 해주셨다는 겁니다.

 

그 일곱 명 아이 중에 여섯 명이 목사가 되었고, 다섯 명이 부흥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 목사님도 그 분들 중의 한 분이시죠.

 

♣서구교회 급감에도 불구하고 떼제 등은 부흥, 아베 피에르 존경

 

한때 호황기를 누렸던 서구교회의 몰락이 끔찍할 정도입니다.

신자수의 격감으로 교회들은 무용지물이 되어 텅 빈 교회 건물의 매매가 활발합니다.

매각된 교회는 휘트니스 센터나 스케이트보드 연습장, 상가나 술집 등의 용도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515곳의 본당이 문을 닫은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스위스 내 전체 본당 수는 1700개인데, 그중 650곳에는 담당 사제가 없습니다.

네덜란드 가톨릭교회는 향후 최근 10년 간 전체 1600개 가톨릭 본당 가운데

3분의 2가 문을 닫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한 수도원에는 한때 380명의 수도자가 몸담고 있었지만

지금은 39명으로 줄어들었으며, 현재 이 수도원에서 가장 젊은 수도자의 나이는 70세이랍니다.

이 수도원의 사용되지 않는 공간은 호텔로 바꾸기 위해 리모델링하고 있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현 실태를 바라보면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본당에서 중고생들이나 청년들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교회 공동체와는 너무나 비교·대조되어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발길 닿는 곳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큰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를 계속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 머물고 계실 무렵, 너무나 많은 군중들이 몰려와

인명피해가 우려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비상 대책 안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밀려드는 군중들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기 위해 거룻배 한척을 구해 그 위에 오르신 것입니다.

배 위에서 안전하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의 ‘평생소원’을 이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오랜 갈증을 원 없이 채웠습니다.

그 누구도 차별대우 받지 않았고 그 어떤 사람에게도 특별대우란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치유면 치유, 구마면 구마, 설교면 설교...

그토록 고대하던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생명력 넘치는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와 너무나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를 바라봅니다.

점점 활력과 회복탄력성을 잃어가는 우리 교회를 바라봅니다.

더 이상 수직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한 묘안이 무엇인가 고민해봅니다.

 

프랑스 교회의 충격적인 몰락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떼제 공동체 언덕은

전 세계로부터 몰려온 수많은 청년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루르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세속화된 세상 한 가운데 가장 거룩한 성모님 성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모님의 현존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가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종교라면 고개를 가로 짓는 프랑스인들이지만 엠마우스 공동체 창설자이자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의 아버지요 벗으로 살았던 아베 피에르 신부님을 가장 존경하는

첫 번째 인물로 손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