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IF1LYjmPFH8
◈절망의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라 고전15:17-22 2021.10.08.
※설교 후반부에, 주님의 능력을 구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구하세요.
또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주님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시기 보다는,
주님의 사랑의 성품을 나에게 주십니다... 그게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거죠.
한국 교회의 부흥과 갱신을 위한 목회자 기도 모임이 예전에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서울에서 부산에, 내려가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역자들과 함께 이렇게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그 모임에 참석하려면 책 한 권을 좀 미리 다 읽고 와서,
함께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기도도 하자.. 그래서 꼭 읽어야 할 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일정상 그 책을 다 읽지를 못 했어요.
그런데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그 여정 가운데 제 마음에 좀 여유가 있었습니다.
부산까지 가려면 4시간 이상을 차를 타고 가니까,
'버스에서 책을 읽다가, 못다 읽은 남은 부분을 다 소화해 내야겠다...'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내려가면서 제가 고속도로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조금 읽다가 터널이 나오는 거예요.
제가 우리나라에 이렇게 산이 많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습니다.
책을 조금 읽을만 하면, 바로 또 터널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책을 읽는데, 또 터널로 들어가는 거예요.
4시간 이상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계속 그렇게 조급한 마음으로 터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책을 읽다가,
제가 마음을 바꿨어요. 터널에 들어가면 제가 눈을 감고 기도했어요.
그리고 읽었던 책의 내용을 묵상하고
다시 버스가 밖으로 나오면 책을 읽다가,
다시 터널로 들어가게 되면 눈을 감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그 책의 내용을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아 그러니까 터널이 나오는 게요. 마음의 조급함이 아니라
책을 읽어가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흐름이 되더라고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둠의 터널'과 같은 인생을, 누구나가 만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터널 속에서 조급해지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둠의 터널에 들어가면 '이 사람, 저 사람의 도움을 좀 얻어 볼까?'
안달이 나기도 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다 보니까
무엇이라도 좀 해보려고 애쓰다가, 엉뚱한 길로 빠져버리는 우리의 모습...
▲저는 오늘 먼저 질문을 하면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둠의 터널과 같은 삶의 순간을 통과하실 때,
여러분은 누구를 믿고,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오셨습니까?"
그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다가, 그래도 도움을 못 받고
불안한 그대로 세상에 매달려 살아오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그저 안타까움에 낙심만 하여
정말 세상 속에 그저 그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분명한 것은, 바로 그때가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할 때라는 사실입니다.
조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신뢰하고,
정확히 하나님의 성품을 붙잡는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라는 겁니다.
아마 오늘 이 집회 가운데도, 이런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을 제대로 사용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그 신실하심을 신뢰하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어둠의 터널 가운데 여러분 믿음을 제대로 사용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섹이라는 철학자가 있는데요. 이 철학자가 믿음이 얼마나 이상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그의 책에 한 일화를 통해서 소개한 글이 있어요.
미신 따위는 전혀 믿지 않는 한 과학자가 있었다는 거예요.
근데 이 과학자가, 하루는 친구 과학자를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초대받은 친구 과학자가, 그의 집 현관으로 들어가는데,
보니까 현관 벽에 어떤 부적 같은 것이 붙여져 있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주인 과학자에게 물었다는 거예요.
'자네 같은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도 이런 미신을 믿나?'
그랬더니 과학자가 이런 말을 했대요.
'응, 나는 이거 절대 믿지 않아. 나는 이런 거 절대 안 믿어!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이 이 부적이 효과가 좋다고 해, 그래서 나도 하나 붙여 놨어!'
여러분 이게 무슨 얘기죠? 자기는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효과가 좋다고 해서, 자기도 붙여놨다는 거죠.
이게 우리의 믿음 생활의 모습일런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 생활에 있어서도
누군가가 믿고 있는 것을, 그저 내 신앙의 고백처럼 여기며
살고 있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만약 그렇다면, 그런 믿음은
절망의 순간, 인생의 어둠의 터널을 통과할 때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믿음이죠. 자기 믿음이 아니었던 거잖아요.
진짜 믿음이 아니었던 거잖아요.
여러분 우리 믿음 생활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시고 주님이시다' 입술로는 고백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믿음의 고백을 하니까,
나도 그저 그렇게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방식, 세상의 법칙을 따르는 삶에 관해서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아 이렇게 살면 효과가 있어, 이렇게 살면 잘 될 거야'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믿고 따르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조차 뒤로 숨겨 버리고,
조용히 그 사람들 따라서 좇아가는...
그렇게 살지는 않았는지, 우리가 살펴봐야 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은, 결과만을 좇는 믿음이에요.
주님과의 관계는 다 빠져버린... 그런 믿음의 겉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사실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우리 믿음의 민낯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기독교의 믿음의 역사를 보면, 절망 가운데 늘 믿음이 점검되어져 왔어요.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 죽음이란 절망 가운데서
주님을 따르던 이들이, 그들의 믿음을 점검 받았어요.
그 믿음 지키면서, 부활의 약속 바라보며, 그들이 믿음을 끝까지 지킨 제자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믿음의 길을 걷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믿음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나서... 다른 길 찾아 나섰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전후하여
우리의 믿음이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에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이유가
부활의 사건을 전후하여, 믿음이 갈리기 때문에 그래요.
고전15:17~18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의 믿음의 성격을 좌우해요. 우리의 삶의 성패를 좌우하는 거예요.
▲그러면 부활의 믿음을 진정으로 붙잡고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절망 가운데서도, 그 절망을 묵묵히 통과해내는 자들입니다.
정말로 묵묵히 절망을 통과해내는 자들은,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부활에 대한 믿음의 관하여
정말 부활주일날 한번만 기억하고,
평소에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절망이 찾아올 때, 자기 믿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부활의 믿음은요, 죽음과 같은 절망 앞에서 철저히 점검되어질 수 있는 거예요.
도저히 환경이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우리의 부활의 믿음이 점검되어지는 겁니다.
여기 오랜 인생을 살아오신 우리 성도님들,
정말 삶의 의미가 깡그리 다 사라져 버린
그런 것과 같은 하루를 보내셨던 적이 다들 아마 있으셨을 거예요.
너무나도 슬퍼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날,
그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야 할 때가 여러분 있지 않았습니까.
무엇인가 환경이 변하기를 원하고 갈망하면서 열심히 달려왔는데,
근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아무 일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하루를 보내야 했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무기력한 하루, 내 감정도 내 육체도 무기력할대로 무기력해져 있는데,
그런데 오늘 하루를 버텨내야 했던 그런 순간이 있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그런 날, 우리의 진짜 믿음이 점검되어지는 거예요.
도저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우리 믿음이 점검되어지는 겁니다.
아마 성도님들 중에는 '그럼 도대체 그런 날들이 우리 인생에 있는데,
우리 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이렇게 질문하실 것 같아요.
▲제가 젊은이 교회를 담당하면서 청년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목사님,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근데 그 질문이 일리가 있어요. 삶의 현실이 녹록치 않아요.
절망 그 자체가 이렇게 힘든데..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예전에 젊은이교회 청년들과 함께 읽으면서 은혜를 누렸던 책이 있었어요.
존 오트버그 목사님이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쓰셨는데
그 책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 또 그 책을 읽어 가며 설교로 함께 나눴던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인간의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
부활의 주일을 기적의 날로 기억한다.
그 날은, 인간으로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을 참 놀랍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정작 위대한 날은 토요일이 아닐까?
무덤 속에 계신 하나님,
일요일의 기적, 부활 주일의 기적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 일이다.
하지만 절망 같은 토요일의 기적은,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 죽어 누워 계시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죠? 토요일에 주님은, 죽음과 같은 고통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예수님이 돌아가셨던 금요일, 엄청난 슬픔이 몰려오고, 사람들은 너무나 당황했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토요일 아침을 맞았을까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토요일 하루가 시작되는 겁니다.
날이 화창했을는지도 몰라요. 햇볕은 아름답고 바람도 선선히 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 바로 그 다음 날인 거예요.
이 토요일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 기대도 할 수 없는 그 토요일!
그런데 그 절망과 같은 토요일에,
성자 하나님께서 죽음의 무덤에 그대로 누워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절망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냐고, 저자는 묻는 거예요. 곧 부활이 있죠. 그때까지 기다려야죠!
여러분 예수님이 대적을 무찌르신 것 아닙니다.
오히려 친히 죽음을 받아들이셨어요. 완전한 죽음에 나아가셨어요.
여러분 무덤과 사망에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디에선들 예수님을 우리가 못 발견하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려운 순간이 있을지라도,
그곳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절망과 같은 토요일의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절망 한복판에, 예수님이 찾아와 계신 거예요.
그 절망을 함께 통과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절망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실까요?
'그래 너, 계속 절망 가운데 있어, 내가 함께 할게!' 그 얘기를 하실까요?
함께하고 계신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실 거예요.
'이제 일어나 세상 가운데로 나가 봐, 네가 세상에 (부활의) 소망으로 서야 돼!'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거예요.
그 예수님은, 전지전능함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이 아니세요.
그분은 우리의 절망을 아세요. 우리의 절망을 함께 경험하셨어요.
그리고 그 절망 속에 우리와 함께 계세요. 그리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마 이렇게 아주 강하게 말씀하실 거예요.
'이제 내가 너희를 떠날 거야. 너희가 절망의 세상 한복판으로,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들어가 봐!
두려워 말하라. 세상 한복판에서 너희가 나를 만날 거야.
고통과 절망이 있는 그곳에서 나를 만나게 될 거야!'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세요.
절망만 남은 것 같은 일상이 있잖아요.
그런 일상을 맞이해서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셨어요. 성육신의 사건이 그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구원의 언약을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어요.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하고 믿어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무덤은 비어 있었어요.
예수님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절망의 자리로 찾아오셨어요.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를 일으키는 은혜의 능력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은요,
절망 가운데 완전히 무너졌던 사람들을 만나는 일로, 공생애 기간을 거의 다 보내셨어요.
예수님이 만났던 사람들은, 거의 다 절망 가운데 빠져있던 사람들이에요.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이 죽어간다고, 간절히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기를 원하잖아요.
그러나 그때 딸이 이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상황이 이미 끝나버립니다.
여러분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만큼, 부모에게 절망적인 이야기가 어디 있어요?
주변 사람들은요 참 냉혹합니다.
이제 죽음이란 그 결과 앞에서 야이로에게 '이제 그만해라, 예수님 가실 필요 없다.'
진짜 주변 사람들은 냉혹한 것이죠.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상황이라고 여겨지니까요.
그때 사람들이 한 일이 뭡니까?
예수님 바라보는 거, 예수님께 구하는 거.. 멈춰 버렸어요.
여러분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예수님께 기대하고 예수님 바라보는 거를 그냥 멈춰 버립니다.
그런데 믿음의 상상력을 펼쳐보면, 아마 아버지 야이로는 달랐을 거예요.
아버지 야이로의 마음은 달랐을 거예요...
▲'이제 다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말씀을 주세요.
야로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직접적인 해결책을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에 관한 말씀을 주세요.
막5:36절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여러분 예수님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셨다니까요.
여러분 이걸 놓치면 안 됩니다.
죽음의 현장, 그 아픔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다 끝났다, 절망이다' 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거기를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어떻게 직접적으로 행동하신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말씀을 주세요.
다른 정의를 주시고 선포하세요.
막5:39절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다른 말씀 아닙니까? 사람들이 비웃었어요.
이 슬픔의 현장 가운데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거칠 것 없이 말씀하시는데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저는 이게 참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되더라고요.
죽은 자가 뉘어져 있는 그곳, 사람의 슬픔도 있었지만
비웃음과 조롱이 있는 그곳에 예수님이 꾸역꾸역 찾아가셨어요.
사건의 근원의 자리로 나아가신 거예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그 주검에 손도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그 아이의 손을 잡으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딸에게 말을 거셨어요.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만나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만남이 사실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방식으로 그 딸을 만나 주셨어요.
▲여러분, 믿음 생활 할 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나 주셨잖아요.
세상에서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예수님이 내 자녀라고 받아 주셨잖아요.
실패하고 루저들이라고 평가받는 사람들..
가난한 것 뿐인데, 마치 저주받은 인생으로 따돌림 받았던 사람들..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을 대하셨어요.
'너희가 하나님의 귀한 자녀야!' 그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실 로마서에서 그가 고백을 하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다. 그리스도와 함께된 상속자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우리는 고난도 같이 받는 존재다.
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은, 장차올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귀하게 만나 주셨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세상에서는 죽었다고 규정했는데, 철저히 포기해 버렸는데
'다 끝났으니까 이제는 그만두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말씀을 걸어 주신다는 거예요. 말을 걸어 주시는 거예요.
'너는 일어나라!' 그때 소녀가 일어나잖아요.
삶의 역전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말씀으로 선포해 주셨어요.
죽음의 권세도, 예수의 말씀 앞에 힘을 쓸 수가 없었어요.
세상에 철저한 규정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여러분, 주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셔야 돼요. 붙잡으셔야 돼요.
▲그런데 저는 예수님께서 소녀에게 '일어나라' 이렇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전지전능한 힘이 있는 말씀이어서,
죽음의 권세를이긴 것이라고... 그렇게 묵상이 안 되더라고요.
그렇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위해 전부를 내어 주신
그 사랑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저는 믿어졌어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증언을 합니다.
고전15:21~22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생명)을 얻어 누릴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의 전지전능함 때문이 아니에요.
죽음의 절망을 통과하셔서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그분의 사랑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어떤 때에, 주님의 전지전능한 힘만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가 있어요.
그게 틀린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전지전능함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전부를내어 주신..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시면서 우리를 품어주신
그 사랑 때문인 거예요.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요19장을 묵상하면서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며 마음에 강하게 받은 은혜받은 내용이 있어요.
요19장에는 빌라도 법정에서 셨던 예수님이 십자가 고통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요.
근데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예수님께서는 사실 조롱과 수모를 당하신게 아니라
조롱과 수모에 자신을 내어주신 거구나... 사랑 때문에!' 그렇게 깨달아지더라고요.
'힘없이 매 맞고 옷을 빼앗기고 십자가에 달려서 창에 찔리신게 아니라
무서운 폭력과 십자가 죽음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뜻에 스스로 순종하시면서
자신을 스스로내어 주신 것이구나, 정말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그 길을 걸어가신 것이구나...
나를 구원하시려는 그 <사랑> 때문에!' 이게 너무나 분명히 믿어졌어요.
죽으실 때도 성경은 예수님의 그 죽음을 뭐라고 표현했냐면
'예수님께서 영혼을 내어 놓으셨다'라고 표현을 해요.
성경의 여러 번역본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내어 놓으셨어요.
그래서 말씀을 보니까, 성경은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기록하냐 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십자가 사건에 있어서 능동적이었어요.
죽음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셨어요.
성경을 보면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요. 수동태로 기록을 안 하고 있어요.
수동태로 기록하고 있지 않아요.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고
예수님이 당신의 영혼을 내어 주셨고
폭력과 조롱과 그러한 수모 가운데 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신 거예요.
저는 이게 너무 은혜가 되더라고요.
여러분 전지전능한 힘이 아니라, 조롱과 수난의 십자가에
전부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 <사랑>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여러분을 위하여 전부를내어 주신 분이 계시다..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나를 위해서 당신의 전부를내어 주신 분이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시잖아요. 이게 복음이에요.
중략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계속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절망 가운데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절망 가운데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이,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이
어떤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방식은요.
우리를 최대한 생각해 준다고 할 때에, 한두 번 해결책을 제시해 줄지 몰라요.
한번 잘 해보라고, 한두 번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잘 안 되면, 세상의 방식은 우리를 포기하겠죠.
그러나 주님의 방식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방식이에요.
포기란게 없어요. 우리를 교체하실 생각이 없어요.
여러분 운동 경기에서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감독이 볼 때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면, 오늘 뭔가 잘 뛰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주전 선수도, 감독은 교체해 버립니다. 다른 선수로 바꿔 버려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바꿀 생각이 없으세요.
우리를 사용하려고 마음에 작정 하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붙잡고 계세요.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죽음의 슬픔과 절망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부활의 소망 가운데 전부를내어 주신 주님이시고,
내 삶은, 그 주님을 신뢰하는 삶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뭘까 늘 묵상하고 있어요.
그리고 깨닫게 되는 것이, 절망에 놓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신데
'그 주님이 여기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
'이것을 믿는게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구나,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깨달아졌어요.
그래서 제가 청년들에게 늘 설교할 때마다.
주님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을 신뢰해라 주님의 성품을 의지해라라고
늘 설교하고 청년들과 나눕니다.
능력을 구하다 보면 결과에 따라 낙심하고 넘어져요.
그런데 주님의 성품은 변함이 없어요.
그 주님의 성품을 의지하는 자가 살아납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