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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우리는 넘어지나,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LNCK 2024. 1. 15. 04:58

https://blog.naver.com/kaikk/70080786481

 

◈민수기, 우리는 넘어지나,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23:19~23b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이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민23:19, 23b

 

▲씁쓸한 여행

 

첫눈에 보기에 민수기는 단지 광야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일로 보일 것입니다.

6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각 지파의 인구통계에 대한 내용이나,

고라 자손의 거역으로 땅이 갈라져 순식간에 죽임을 당한 사건,

그리고 모세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반석을 쳤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약간은 섭섭한’ 부분, 나귀와 대화한 이방인 발람까지,

이러한 중요한 내용들이 우선적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는 민수기에서 어떠한 신학적 메시지를 들어야 할까요?

저는 다음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보다 본격적으로 민수기의 중요한 부분들을 집어서 설명코자 합니다.

 

한 가정이 아주 멋진 여행을 계획합니다.

부모님이 어려운 가정 살림을 겨우 이겨내며 만든 귀한 여행입니다.

모두가 어려운 환경을 잘 이겨냈기에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멀리 떠나는 여행입니다.

자녀들에게 이번 여행의 의미를 말해주고, 단단히 준비할 것을 일러둡니다.

 

일찍 자라, 탈나지 않게 많이 먹지 마라, 집에서 할 일은 끝내놓아라 등등 중요한 사항들입니다.

차곡차곡 배낭을 싸고 드디어 출발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한 아이가 잠을 못 잤다고 벌써부터 잠투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가까스로 아이를 재웠더니,

다른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났다고 화장실을 찾다가

그만 일을 보고 맙니다. 고속도로 화장실에서 냄새 나는 아이를 가까스로 씻겨 내고 돌아왔더니,

마지막으로 큰 아이가 그만 마음이 변해서 나는 여행을 가지 않고 친구와 놀겠다고

억지 주장을 합니다.

 

결국 부모님은 휴게소에서 중요한 선언을 내립니다. “이번 여행은 취소다.

우리 가족의 사랑을 축하하려고 했지만, 먼저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우리는 너희들을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여행보다 너희가 더 중요하다. 여행은 다음에 가자.”

 

바로 민수기가 이러한 맥락입니다. 민수기를 읽으면 참 씁쓸합니다.

이 씁쓸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이, 그것도 ‘내가 문제를 일으키려고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라고 할

정도로 연속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시작: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여호와의 군대다!

 

사실 민수기의 시작은 화려합니다. 1장부터 10장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군대화 작업은 그 위용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참조. 출 12:51).

 

군대라는 말에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군대’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되” 민1:2

이스라엘 60만이 단지 일반 백성이 아니라, 싸움을 위한 전사라는 것은 놀랍습니다.

 

특별히 2장에서 회막을 중심으로 사면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 여행을 위한 캠프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군대의 진이라는 것에서 그 차별성은 뛰어나다고 하겠습니다. 2:2-3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군대를 조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60만 대군이

하나님의 회막을 중심으로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장부터 10장까지는 군대를 위한 철저한 작업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고후 5:17)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 즉 하나님의 군사로서 다시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군대의 법칙은 상명하복입니다. 위에서 명령하면 밑에서는 복종하는 것이 군대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이동은 그들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를 뿐입니다.

 

그분이 가면 이스라엘은 가고, 그분이 멈추면 이스라엘은 멈추는 것입니다.

9:18, 9:15-23에서 “여호와의 명을 좇아”라는 표현이 얼마나 많으며 또한 중요한 지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군사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차적인 임무이며,

또한 자신들의 노예로서의 과거를 단절하는 새출발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새로운 세대를 말하고 있는 3:1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서에서는 알 수 없지만, 원어는 “족보가 이러하다(엘레흐 톨레돗)”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창세기부터 시작된 각 세대를 정리하는 특별한 방식입니다.

 

창세기부터 모세까지 11단계의 족보가 나오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모세 이후의 시대는 의미 있는 12번째가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세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군대이다!’

 

▲군대의 와해

 

어찌되었건 예상하는 바와 같이, 민수기에서 의도된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이스라엘은(10:36)

그 시작부터 삐걱댑니다. 그러한 내용이 민수기의 중반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11-21장).

 

11장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군대의 붕궤는 20장에서 절정을 맞게 됩니다.

처음엔 이스라엘에 “섞여 사는 무리”에서 시작된 원망이 점차 앞뒤 가리지 않고 불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세의 오른팔과 왼팔이라고 할 수 있는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공격하며 일어섰으며(12장),

각 지파의 지도자들 역시 새로운 왕을 뽑자고 반발합니다(13-14장).

 

또한 최고 지도자들을 가장 잘 이해해야만 하는 레위인들이 거역하기에 이릅니다(16-17장).

결국 설상가상으로 모세까지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만 범죄하고 맙니다(20:12).

 

그러고 보면, 이스라엘 군대의 일상은 11:1-2에서 완전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백성의 원망-여호와의 진노-백성의 부르짖음-모세의 중보기도”

결국 모세 자신이 범죄하게 될 때, 비로소 이 모든 악순환은 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민수기를 계속적으로 묵상하면서 민수기를 요약하는 한 문장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우리는 왜 넘어지며, 하나님은 왜 용서하시는가?’입니다.

 

우리는 왜 넘어지는 것일까요? 넘어지면 옷이 더러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릎이 깨져서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넘어지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민수기는 우리가 어디에서 넘어지는가를 그리고 왜 넘어지는가를 말해줍니다.

바로 욕심의 장소에서 우리는 넘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만족하지 못할 때 우리는 넘어집니다.

11:4에서 우리는 ‘탐욕’을 발견합니다.

이 단어는 인류가 넘어졌던 에덴동산에서 처음 발견됩니다.

 

그렇습니다. 창 3:6의 ‘탐스럽기도’라는 말, 즉 첫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서

우리는 넘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이 이스라엘의 오욕의 역사였던 것입니다(106:14).

 

시106:14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욕심은 만족을 거부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분수에 지나치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특별히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쉽게 나타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중요한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만족하지 않고 분수에 지나친 행동들을 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군대에서 ‘계급장을 떼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모세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12:2)

“고라가 당을 짓고 ...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16:1-2)

 

그들이 보기에 모세는 허물이 많았습니다.

또한 모세가 하는 일을 자신들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대는 상명하복의 조직입니다. 이등병이 아무리 아이큐가 180이며,

백발백중의 명사수라고 해도, 그는 병장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백성의 도전은 사실 하나님께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하극상인 거죠.

 

백성들이 원망하고 거역할 때마다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십니다.

민수기만큼 '진노'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성서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의 상처로 남게 됩니다. 엄한 회초리자국인 셈이지요.

 

그러한 자국들이 민수기에서는 '기념'이라는 단어로 발견됩니다.

다시 말해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념(자카르)하게 합니다.

그들의 지나간 장소가 기념이 되었습니다:

 

기브롯 핫다아와”는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11:34).

그들의 옷에 안식일 준수의 기념을 삼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옷 끝에 붙어있는 청색 끈이 불순종의 기념입니다(15:38).

제단을 감싸고 있는 반짝거리는 놋이 기념입니다:

고라의 무리들이 불로 태워졌던 250개의 놋 향로를 펴서 만든 것이 바로 이 기념물입니다(16:40).

 

아론의 싹난 지팡이 역시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기념이며(17:10),

레위인들에게 영영한 음식으로 제공했던 “소금 언약”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들의 만족하지 못한 태도에 대한 응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8:19; ‘못난 놈 떡 하나 더 준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은 어찌할 수 없는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됩니다.

마지막 보루인 모세까지도 약속의 땅을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20:12),

우리는 전적으로 민수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정체에 100% 동감하게 됩니다(14:34; 32:14):

 

“하나님의 대적자” 이스라엘 사람의 정체는 이것입니다.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행7:51-52, 시78:40-41).

그렇다면, 이 말이 무엇일까요? 원어를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

오! 이보다 충격적인 선언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거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예배하는 백성임을 천명했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수 없이 넘어진 결과 이 말을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는 하나님을 대전하는, 죄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다!”

계속된 실패 끝에, 계속된 넘어짐 끝에, 심판이 열 번 반복되어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 절망의 자리에서 민수기는 대반전의 시작을 알립니다.

 

▲하나님의 승리

 

민수기의 결말은 장엄합니다(22-36장). 옛 시대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람들이

바턴을 이어받습니다. 여호와의 질투를 소유했던 비느하스에게 대제사장의 역할이 맡겨지며(25:13),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맡겨집니다(27:18).

 

대적 미디안을 정복해서 그 전리품을 회막에 바치는 '기념'을 삼음으로써

이제는 순종하는 군사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앞서 말했던 12번째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를 했더니, 그렇게 말 많고 탈 많았던 40년의 광야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33장에서 그려지는 광야 여정의 요약을 접하게 되면, 지난 걸음걸음에 함께 했던

하나님의 동행하심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어쩔 수 없이 요단 동편에 남기로 한 지파들은 끝까지 정복의 사역에 함께 하겠다고 서약을 하며,

여자들뿐이어서 가문의 재산을 지켜낼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는 법제도까지

새로이 만들어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졌던 과거가 말끔히 잊혀진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과천선했기 때문일까요?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민32:14의 “죄인의 종류, 죄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쉽게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저는 그 대답으로 오늘의 본문을 선택했습니다(민 23:19-23):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언약에 신실하심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는 말씀이 어떠한 배경에서 탄생했는지를 살펴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대한 선언은 이방인 “발람”의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발람은 주술사입니다. 신비적인 힘을 빌려서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키고 길흉을 점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이 히브리어로 네하쉼인데, 이는 나하쉬 즉, 뱀에서 파생된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술수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레 19:26).

 

그러므로 앞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넘어져 일어날 힘조차 없는 이스라엘에게

발람의 저주는 KO 펀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민 22:6).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민수기의 결말이 결정되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발람의 사건은 민수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그렇기에 분량도 다른 사건보다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발람의 사건은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명명백백하게 보여줍니다. 우선 하나님은 이방인의 히든카드인 발람을 철저하게 낮추십니다.

발람은 우리가 간단하게 볼 무당이 아닙니다.

나귀를 탔다는 말은, 발람이 매우 높은 자리에 있음을 뜻합니다(삿5:10, 슥 9:9).

높은 귀족들이 두 번이나 간청해야 겨우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그가 충성된 나귀를 세 번이나 때립니다.

그가 미물에게서 ‘충성’을 배웠던 것입니다(22:33).

 

이스라엘이 누구에게 충성해야 하는지를 뼈저리게 배웠던 것처럼,

발람 역시 여호와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시 뼈저리게(22:25)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한 발람이 입을 여니, 그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발동합니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심에 만족하지 않으며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저주를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사람(이쉬, 벤-아담)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본래 자신의 계획을, 어떠한 장애물이 닥쳐진다고 할지라도,

결국 이루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이방인 사술자의 입을 통해서 말하시기를,

거짓말하지 않으며 또한 후회(나함)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분의 말이 무엇입니까? 그분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레 20:24)

그분의 약속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은 다시금 후회(나함)라는 단어를 지우십니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사실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창 6:6에 나옵니다.

그래서 대홍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사람들의 허물과 패역함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서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민 23:21에 “보지 아니하신다”라는 말은 ‘꼼꼼하게 조사하지 않으시며(로-히비트),

눈에 보이는 것도 보지 않겠다(로-라아)’라는 완전한 용서를 말합니다.  ★주제 구절

 

즉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언약하신 바를 신실하게 지키시기 위해서, 용서하시고 계속 돌보신다는 거죠.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실패와 넘어짐에도 불구하고요!

 

그러므로 아무도 이스라엘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발람은 이렇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놀랍도다! 하나님의 행하심이여!

대단하도다! 하나님의 결정이여!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작품이로다!

 

▲말씀이 내 안에서

오늘 저는 민수기의 제목을 “우리는 왜 넘어지며, 하나님은 왜 용서하시는가?”로 잡았습니다.

우리는 왜 넘어지며, 하나님은 왜 용서하시는가? 민수기는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해주며,

이 모든 것을 통과한 이후에, 즉 인생의 광야길을 통과한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용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욕심과 아집이 우리의 인생길을 스스로 얼마나 망쳐왔는가를 돌아보게 되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자비하심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주일 선포되는 축복의 선언이 어떠한 것인지를

다시금 기억하며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민 6:24-26).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