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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삼상2:18~21
한나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훌륭하다. 서원의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귀한 자식을 얻었을 때 젖뗄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바치게 된다.
서원대로 바쳤다. 좌우지간 바칠 때 얼마나 그 마음이 아팠겠는가?
이 네 살 짜리 (젖 뗄 나이 추정) 어린아이를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라도록 제사장에게 바친다.
그리고 자기는 집으로 돌아온다.
여러분, 이미 이 가정의 분위기를 우리가 잘 안다.
브닌나라고 하는 그런 첩이 있는데 그에게 아들딸들이 있어요. 자녀가 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없다. 그런데 없어서 너무 괴로웠던 터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주셔서 4년 동안 잘 키웠는데, 한참 예쁘고 잘 자라는 이때
그 귀여운 아이를 제사장에게 맡기고 온다. 성전에 바쳐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대로 빈손으로 데리고 와서 그는 혼자 지내게 된다.
(*오늘날 교육학적 측면에서는 올바르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큰 감동을 주신 모양이다)
자,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가 있다.
매년 성전에 제사 드리러 올라갈 때마다 겉옷을 지어 입혔다.
그러니까 그가 자라는 대로 좀더 크면 좀더 크게, 조금 더 크면 조금 더 크게,
해마다 조금씩 조금씩 더 큰 옷을 지어다 입혔다는 것이다.
한나가 그 옷을 만들 때 어떤 마음이었겠는가? 계속 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그래서 해마다 옷을 지어다가 입혔다. 이 얼마나 그 마음이 절절한가?
그런데 성전에 가서 자기 아들을 보고도 자기 아들이라 부르지 못해요.
내 아들이라고 끌어 앉고 뭐, 하루라도 같이 지내고 그런 게 없다.
멀리서 바라보고 그저 ‘저 아이가 내 아들이다, 그만큼 더 컸구나’ 하고는 쓸쓸하게 돌아오는 것이다.
2:19절에서 ‘매년 ... 올라갈 때마다’ 하는 걸로 봐서 이런 일을 해마다 한 것이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니까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그 정을 다 극복하는 것이다.
왜요? 서원했기 때문이다. 서원했기에
그 인간의 감정을 다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훌륭함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감정을 중요시 할 때가 있다. 감정이 곧 사랑으로 동할 때가 있다.
사랑해서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 옳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아무리 격동하는 사랑이 있더라도 이것을 다스릴 줄 알아야 된다.
기도로 다스리고 약속으로 다스리고 신앙의지로 극복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내 아들 사무엘아!' 하고 끌어 앉고 싶지 만은 안 된다.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바쳤거든요.
특히 어머니가 먼저 감정적으로 약해 아들 앞에서 울고불고 해보세요.
어린 사무엘 역시 어떠하겠어요?
아무리 어리지만 그 아들 사무엘의 마음속에도 어머니를 향한 애절한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강하겠는가? 때문에 한나가 사랑의 감정을 터뜨리면 아들도 터뜨리게 된다.
그러면 아들이 나도 집으로 가서 어머니와 함께 있겠다고 야단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냉정하게 끊는다. 전혀 남의 아들 보듯이 본다. 가슴에는 끌어 오르는 사랑이 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것이 한나다. 약속을 지켰다.
끝까지 지켰다. 성실하게 지켰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볼 것 같으면 이렇게 서원을 성실히 지키는 모습을 보고
제사장 엘리가 감동이 된다. 아, 저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어린 외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그 불타는 가슴이 얼마나 아플까? 이런 것을 엘리가 생각했다.
그래서 엘리가 한나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다시 복을 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대신할 아들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삼상2:20
귀한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 이제 허전하잖아요.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자녀를 또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엘리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감동이 되어졌다. 이게 벌써 두 번째 아닌가?
처음 한나가 하나님 앞에 입술만 동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처음엔 오해했다가
한나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에 감동되어 한나를 축복했었지요.
그 다음엔 그 자식을 바치고 해마다 옷을 지어다가 입히면서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이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또 제사장의 마음이 감동되었다.
‘야, 저렇게 아름다운 여성도가 있나?’ 그래서 또 복을 빈다. 이건 덤으로 기도해준 것이다.
이것은 예외로 복을 빌어준 것이다. 한나가 이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사무엘의 성장 환경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여기에는 지금 감추어진 이야기가 있다.
그건 뭐냐 하면 사무엘이 지금 성전에서 자란다.
만일에 성전에서 자라지 않고, 이거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계획)인데,
만일 성전에서 자라지 않고 한나와 함께 자기 집에서 자랐다고 생각하자.
이 집은 가정적으로 복잡하다. 브닌나라고 하는 첩이 있고 그에게 아들딸들이 있다.
얘들은 벌써 컸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리다. 여기엔 분명 시기 질투가 있다.
첩의 자녀와 본처의 자녀, 이 사이에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자란다면 사무엘이 곱게 자랄 수가 없다.
성품도 그 인격도 바르게 자라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는 지금 떨어져서 성전에서 자라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창세기로 돌아가서 보면 알기 쉽다.
아는 바와 같이 이삭이 아브라함이 100세 때 태어난다.
그러나 그 보다 14년 전에 이스마엘이 태어났다. 이스마엘은 첩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는 진정한 후사가 아니다. 서자인 것이다. 그러나 나이는 14년 위다.
그러니까 열 네 살 아래 동생을 데리고 놀게 된다.
가령 이삭이 네 살 되었을 때 벌써 이스마엘은 18살이다.
틀림없이 그 형에게 짓눌리며 자라게 된다. 그 형과 함께 자라면서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구박했다는 것이다.
그 어린 동생을 구박하게 되니까 견디다 못해 사라가 하갈을 내어쫓잖아요.
그래서 이스마엘과 하갈이 쫓겨나지 않는가? 그리고 이삭을 키우게 된다.
이스마엘을 쫓아낸 것, 그것은 편법으로 나은 자식이기에 쫓아낼 수밖에 없다.
사무엘도 마찬가지다.
이 귀하디 귀한 사무엘이 잘 자라야 되겠는데, 그 형, 누님은 전부 서자다.
거칠고 질투 많은 이 브닌나의 자녀들이다. 그 속에서 함께 자라야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그래서 젖떼는 순간 그를 떼서
성전에서 자라도록,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자라도록 했다는 것이다. 주님의 섭리였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오늘날도 아이들을 성전에 그냥 살게 할 수는 없지만
일주일에 몇 번은 성전에서 자라도록 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어렸을 때부터 주일날이 되면 으레 교회에 나가고, 교회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벌써 영아부로부터 시작해서 청년회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출석한 아이들은
거의 20년간을 교회에 와서 배우고 함께 생활해 왔다.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2:21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가?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 믿는 친구들 사이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 받으며 자란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사무엘은 특별히 자기 처소에 누웠다 그랬는데, 삼상3:2
그는 엘리의 아들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성소에는 모름지기 엘리 제사장이 누운 곳이 있고, 그 다음에는 아들들이 있는 곳이 있다.
일종의 관사요, 사택인 셈이다.
엘리는 제사장인고로 성전 안에 가장 중요한 성막 가까운 곳에 처소가 있을 것이고,
그 다음 그 아들들은 그보다 아직 후임자기 때문에, 계승해야 될 사람들이니까
그들은 그 다음으로 처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무엘도 당연히 거기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분명히 엘리의 아들들과 처소를 함께 하고 누워야 할 그런 형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나쁜 습관을 본받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는 것이다.
악인의 길에 함께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함께 앉고, 불의한 자와 함께 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불의한 자로부터 떠나서 그는 지금 보다 더 거룩한 마음으로
법궤가 있는 하나님의 전 안에 처소를 마련하여 생활하고 있어요.
그런 곳에 누워 자고 있다.
그런 거룩한 그의 행동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엘리의 아들들과 함께 누우며 함께 먹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는 오히려 나이 많은 할아버지, 눈도 어두운 엘리와 함께 하고,
그리고 그 처소도 그들과 함께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이상적인 것이 뭐냐 하면
제사장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고, 아들들은 방탕해서 제사 드리는데 관심이 없고,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했다’는 사실이다. 삼상3:3
어떻게 등불이 꺼지지 않았을까? 사무엘 때문이다.
사무엘이 시중을 잘했다.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여 정성을 다함으로써
이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등불이 곧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를 상징한다.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참으로 귀한 말씀이다.
▲이런 재미있는 말이 시골에는 있다. '삼대 밭 사이에 자라는 쑥은 곧다.'
삼대가 곧게 자란다. 그 사이에 가보면 정말 쑥이 있다. 그런데 이 쑥은 삼대처럼 곧게 자란다.
그와 같이 이런 은혜로운 분위기에서 자라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키워졌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한나는 정을 떼야 된다.
물론 하나님 앞에 서원하기도 했지만, 정을 떼서 키워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자, 이제 그 여인이 감정을 누르고 하나님 앞에 서원대로 자식을 드리고
해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아들이라고 불러 보지도 못한다.
바로 이런 상황을 보고 엘리의 마음이 감동이 된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복을 빈다.
다시 말하지만 제사장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야 된다. 또 오늘 구체적인 상황을 말한다면
여러분 주위에 있는 장로님, 권사님, 그리고 교역자들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 복을 빌 마음이 생겨야 되요. 그를 위하여 기도할 마음이 생겨야 되요.
이렇게 엘리 제사장의 마음이 감동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복을 빈다. 한나가 구하지도 않는 복을 빈다.
'하나님 앞에 드린 자식을 대신할 자식을 주시옵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인가?
그랬더니 한나가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고 하신다. 2:21
이거 대단한 이야기 아닌가? 이거 덤으로 주신 선물들이 더 많아요.
한나는 아들 하나만 달라고 했는데 아들 셋, 딸 둘을 덤으로 주셨어요.
이건 한나가 기도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기도생활의 신비랄까? 축복이요 오묘함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달라는 것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달라고 하면 주실 때는
그것에 따라서 두 손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이게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오묘함이다.
우리가 뭘 알아서 다 구하겠는가?
마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구하기 전에 아시느니라.
여인의 그 아픈 마음, 왜 모르실까? 엘리 제사장도 아는데 하나님이 모르시겠는가?
다 아신다. 그런고로 구한 것은 하나 뿐인데 하나님은 덤으로 다섯을 더 보태어 주셨다.
이제 우리는 생각해야 할 말씀이 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그 나라와 그 의 하나만 구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도 주시고 입을 옷도 함께 주신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서원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필요한 건강도, 필요한 지혜도, 필요한 친구도 하나님이 주신다. 그거 일일이 이겁니다,
저겁니다, 이거 있어야 됩니다, 저거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만 하고 우리 모든 인간적인 정을 누르고 성실하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보시고 필요한 것 다 주신다.
사무엘을 성전에서 키우도록 한 것, 그 복잡한 가정 분위기가 아니라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키우도록 하신 이 모든 일도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섭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한 것보다도 더 크게, 더 온전하게, 더 넘치게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고로 지금 당장 답답하고 어렵고 좀 뜻대로 안 된다고 그래도 낙심하지 말라.
조금만 더 기다리라. 하나님께서 더 큰 것으로 예비하신 것을 우리가 보고 깨닫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