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교회 2022-07-17 주일예배 //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라 - YouTube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라 골3:1~4 2022.07.17. ☞이전 글 보기
◑도입
골로새서 3장을 살피게 되는데, <본론의 세 번째 부분>이 시작됩니다.
1:1~1:14절까지는 '인사 및 기도'였고요,
본론의 첫 번째 부분은 1:15~2:5절까지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탁월하신 분이신가'
그리고 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바울이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각 사람에게 전파하고 가르치기를 원한다.
이유는,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워지기를 소망한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했습니다.
본론의 두 번째 부분은 2:6~2:23(2장끝)절까지는 '거짓 교훈에 대해서 경고, 책망'을 했습니다.
골3장부터는 1~2장의 적용이라 할 수 있는데,
3:1~4:6절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인데,
그 중 오늘 본문 3:1~4절까지는 '핵심적인 원리'입니다. 3~4장의 핵심적 원리.
이 명령 (위의 것을 찾으라) 에 근거해서 3:1~4
'이런 거는 하지 마라' 3:5~11
'새 사람을 입어야 된다.' 3:12~17 (3장끝절)
이렇게 골로새서가 전개됩니다.
◑본문 3:1~4절의 개요
오늘 말씀은 '성도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할 때
가장 기억해야 될 핵심적인 교훈이, 오늘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이 표현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접속사죠. 적용 단락입니다.
또 1절은 조건문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거는 '살리심을 받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게 아니라,
긴가 민가가 아니라,
'살리심을 받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라' 표현입니다. 확실히 살리심을 받았다는 거죠.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되나?' 하고
도전합니다.
그 첫 번째 명령은, '위의 것을 찾아라' 3:1
'위'는 어떤 곳이냐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3:1b
3:2절은 두 번째 명령인데 내용은 비슷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2
'위의 것을 생각해라'
1절의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 행동이죠.
2절은 '위의 것을 생각해라'
1절, '위의 것을 찾으라'에서 '찾으라'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에서 '구하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seek
2절에서는 도전을 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해라'
이것은 내적인 거죠.
내적인 성향과 생각을 어디에다 고정해야 되느냐?
위에 것에 우리들의 내적인 성향, 생각을 고정해야 된다...
그리고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라' :2
바울이 주는 도전과 명령은 명확합니다.
'성도들은 위의 것을 열정적으로 찾고, 위의 것들을 생각해야 된다.
그렇지만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라' 이게 본문의 핵심적인 뼈대죠.
그런데 3절과 4절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왜 우리가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하면 안 되는가?'
3절에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시간적으로 이해를 하면 쉽습니다.
과거.. '너희는 죽었기 때문에, 땅의 것은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찾아야 된다.
현재.. '현재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래..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 (재림 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나타나실 그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의 상태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이런 미래가 너희들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위의 것들을 찾고, 위의 것들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된다.
이 말씀을 가지고 3가지 교훈을 나누려고 합니다.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바울은 '위의 것을 찾으라'고 교훈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기억하게 합니다.
그게 뭔가 하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성도들 한 분, 한 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다'는 거죠.
'이는 너희가 죽었고' 3:3
여러분은 아마 이 말씀 들으면 좀 당혹하실 것 같아요.
'아니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언제 죽었는데요?'
내가 지금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다' 3:3, 3:1
이것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이라는 겁니다.
앞서 2:6~23절까지 '거짓 교훈'에 대해서 바울이 책망하고 경고했을 때,
그 경고의 중심에도 무엇이 있느냐?
우리가 왜 신비주의, 유대 율법주의, 금욕주의의 가르침을 따라서는 안 되는가요?
결국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사람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금욕주의, 율법주의, 신비주의의 가르침은.. 사람의 교훈, 사람의 가르침에 불과한 거다.
그것은 세상의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초등학문에 대해서 죽은 너희들은, 그걸 따르면 안 된다는 거죠.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를 따라야 되느냐?
그리스도를 따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2:6~23절까지 바울이, 성도들에게 거짓 교훈에 대해서 경고하고 책망할 때
그 중심에 무엇이 있었느냐?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져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다시 살리심을 받고, 하늘의 앉은 자다... 이 가르침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2장
그런데 오늘 본문 3장에서, 적극적으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것을 설명할 때도 똑같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과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다.. 라는 것을 먼저 정체성을 밝힌 다음에,
바로 너희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3:1~2
▲제가 나중에 설교 마무리할 때쯤 한번 말씀드릴 텐데
제가 골로새서를 공부하면서
저는 가끔 성도님들이 제게 '골로새서 강해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계신다' 그러면
제가 깜짝 놀랍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골로새서는 저한테 '골이 새나가는 성경'이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도 제가 매주 설교를 준비하는데, 제가 보통 고생을 하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골로새서를 공부하면서
이제야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는게 참 많습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광대함'을 하나씩, 차근 차근 배워나가게 되는 거죠.
저는 '복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게 쉽고도 어려운 주제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말로 설명하려고 하면...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를 공부하면서, 이제 복음의 광대함을, 한 절 한 절 공부해 나갈 수 있어서 좋죠.
제가 부끄러운 말씀인데, 제가 목사가 되고, 이제껏 오랫동안 사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제가 셀 수도 없이 설교를 했고, 셀 수도 없이 밖에 나가서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지금에야 조금씩 알게 된게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내용이죠.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 꼭 기억하셔야 돼요.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놀라운 일은 무엇인가?
이게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놀라운 일은 뭔가 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
'예수님과 연합되었다.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하셨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게 되면 하나죠.
예수님과 는 연합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죽었느냐?
죄에 대해서 죽었고, 율법에 대해서 죽었고, 또 세상에 초등학문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또한 사단의 권세에 대해서도 성도는 죽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자로 여기라는 것이죠. 롬6:11)
근데 그것이 끝이 아니죠. 성도는 누구입니까?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부활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났습니다.
또 성도는 어떻게 되었느냐?
살아났을뿐만 아니라, 하늘에 앉히심을 받았다는 거죠.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2:5절에는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다'
2:6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된 성도들을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다.
부활을 뜻하죠.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2:6
이거는 정말 무섭고도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엡2:6
성도님들은 지금 예배당 안에 앉아 있지만,
우리가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겁니다.
쉽게 표현하면 성도들은 '이 땅을 살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과거에 '아바타'란 영화가 있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개념입니다)
▲빌립보서의 표현대로 하면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빌3:20
그리스도인은 누군가요?
-내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예수님과 하나가 된, 연합된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사람이.. 바로 나, 성도인 나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정체성을 밝힌 다음에
'그러므로 너희는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해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라.' 3:1~2
▲오늘 설교 제목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라'가 3:1~2절에서 따온 것이죠.
그런데 '위의 것을 찾으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뭔가 좀 고상하게 보이지 않나요?
물론 사람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부자도 되고 싶고, 권력과 명예도 가지고 싶고, 즐겁게 살고 싶기도 하는..
이렇게 땅의 것들을 좀 더 많이 소유하고 가지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 살기에는
인생에는 뭔가 너무 공허하고, 영적이지 못한 것 같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무소유를 선언하고,
이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이 세상을 등지고 조용한 곳에 가서
'위의 것들을 생각하고, 또 위의 것들을 추구해 가는'
그런 사람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굉장히 멋있고 고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목사님들은 뭐 직장인이나 공무원처럼 양복 입고 넥타이 매지만,
신부님이나 스님의 옷을 보면, 벌써 옷부터 '땅의 것을 다 버리잖아요.'
그런 분들을 딱 보면, 뭔가 고상해 보이지 않나요?
또 어떤 스님은, 그 회색 승복을, 막 바느질해서 기워가지고 계속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벌써 복장에서부터 고생이 딱 묻어나오고, 뭔가 양복보다는 덜 세속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지금 바울이 '위의 것을 생각하고 찾으라'
이것은 바울만이 이런 가르침을 준게 아니라,
유대 신비주의자들도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는 거예요. 그 차이가 뭐냐는 거죠.
이 땅에 매여 살지 말고, 천상에서 일어나는 그 장면을 환상으로 보고,
그런 영적인 것을 구하고 찾으면서 살아가라.. 그게 유대 신비주의자들의 가르침이었어요.
또 바울이 골로새서를 쓸 당시, 그리스-로마 시대의 가장 지배적 철학사조가 플라톤주의였죠.
지금까지도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서로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경쟁하고 있어요.
플라톤주의의 가장 핵심은 무엇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화려한 세상은, 실체가 아니고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게 플라톤의 가르침이죠.
그럼 무엇이 실체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그 이데아의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의 그림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상이라는 거죠.
*이데아 : 현상 세계 밖의 세상이며, 모든 사물의 원인이자 본질
소위 철학자 현인들을 누구냐?
이 세상을 살면서도, 땅을 바라보지 않고, 이데아의 세상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
그 속에서 지혜를 찾고 살아가는 사람이 현인이고 철학자다.. 라는 겁니다.
(지금 플라톤주의 '이데아론'과, 기독교의 '위의 것을 찾는' 신앙의 차이를 비교하는 거죠.
둘 다 '위의 것'을 찾는데, 기독교는 플라톤주의와는 어떻게 다른가? 살펴보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주의, 그 헬라의 철학자들은 무엇을 이야기했느냐?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이데아)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5~6세가 앞서 가르쳐졌던 이 헬라철학도, 비슷하게 위의 것을 찾으라고 가르쳤다는 거죠.
그것은 유대신비주의자들도 가르쳤고, 또 헬라 철학자들도 비슷하게 가르쳤다는 겁니다.
하지만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위의 것' 소위 '하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설명이
지금 바울과 유대의 신비주의자들과 너무나 달랐다는 거죠.
지난주에 유대 신비주의를 가르침을 받잖아요.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금욕을 합니다.
하늘의 환상에 참여합니다.
'그 본 것을 의지하고, 그것에 대해서 헛되이 과장까지 했어요.' 2:18
그 말은 무엇이죠? 그들이 보았던 그 하늘의 장면을
아주 세부적으로 상세하게 때로는 과장해서 표현하고, 그 신비체험에 집착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하늘, 위의 것' 설명은 어떻습니까?
거기는 어떤 곳이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3:1
신학자들이 놀라는 것은, 바울의 '하늘 (위의)' 에 대한 묘사가 너무 간략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세부적인 것도 그것에 담겨져 있지 않고, 딱 한 마디로 이야기하죠.
그 '하늘 위'는 무엇이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이다.'
△저는 이 말씀 공부하면서, 제가 목사로서 제일 헷갈릴 때가 언제냐 하면,
'하늘을 봤다'는 분들입니다.
유튜브에 보면, 천국에 가서, 천국을 보고 왔다는 분이, 수 백 분 이상 있습니다.
외국 분들까지 합하면, 수 천 명 있습니다.
저는 천국을 보지 못 했는데, 자기가 하늘과 천국을 봤다고 상세하게 묘사할 때는,
'내가 이런 가르침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나?' 하고 숙고하게 됩니다.
근데 제가 이 말씀(3:1) 공부하면서 판단했어요.
바울을 보십시오.
나중에 삼층천, 가장 놀라운 신비 속에 들어갔던 바울이지만, 고후12:2
본문에서 '하늘'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그곳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이다.' 3:1
길고 장황하게 자랑하듯 서술하지 않습니다. 짧게 단 한 줄로 묘사합니다.
그 하늘에 누가 중심이시죠? 그리스도가 왕이시고, 그리스도가 주인공이시고,
나머지는 그리스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그러면 '위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가 '찾아야 되고, 생각해야 될 위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두 가지인데,
1) 바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골1장과 2장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죠?
그분은 바로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교회에 머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영적인 존재(정사, 권세 등)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십자가를 통해, 만물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지금 교회와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님이십니다.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가 얼마나 놀랍고 귀한 분인지를 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겁니다.
2) 또 하나, 그리스도를 알아가다 보면, 결국 성도는 어떤 사람이 됩니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터득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것이죠.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3:2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고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위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분의 뜻, 그분을 닮아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배워서 실행해 옮기는 것,
예수님을 더 가까이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면 '땅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3:2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바울이 앞에서 설명했듯이,
'신비주의, 유대율법주의, 금욕주의, 사람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가르침과, 사람의 전통과 명령.. 이것이 '땅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땅의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음 주에 살피게 될 3:5절부터 나오는 '땅의 지체'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성도는 위의 것,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배우는 것,
이것을 생각하고 이것을 찾아야 seek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르침,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땅의 것들은 생각하지 마라,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1. 첫 번째로,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죠. 3:3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너희가 죽었고'
이 말씀을 보면, 제가 꼭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제 고등학교 2년 선배시고, 또 대학도 같은 서울대 물리학과 2년 선배가 있었어요.
근데 제가 나왔던 고등학교는, 그 당시 3년 동안
서울대 물리학과에 4명이 들어갔습니다. 한 해 1.3명꼴로 들어간 거죠.
-그 중에 한 분만 멀쩡하게 공부하셨고,
-한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졸업하고 신학교로 가서 목사가 되었고,
-지금 제가 소개를 드리려 하는 분은, 출가하셔서 스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모교 고교에서는, 그 다음부터는 서울대 물리학과로는 진학을 안 했죠.
거기간 선배들이, 세상적으로 다 잘 나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선배하고 저는, 보통 인연이 아닌 거죠.
전교생 중에서 학연으로는 제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도, 참 저를 많이 도와주셨던 분이셨어요.
그런데 충격적인 일이, 이분이 대학을 졸업하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스님이 되셨어요.
그런데 제가 학교에서 겨울방학 때, 신학교 진학을 앞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 선배님이 도서관에 나타나셨습니다.
아 제가 그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눈이 막 내리는 날이었는데
정말 승복을 입은 선배가 찾아오셨기에, 제가 너무 반가워 가지고
"아이고 형님!" 그러면서 제가 인사를 드렸어요.
근데 그때 그 선배 입에서 흘러 나왔던 말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선배가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형님,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러니까, 그분의 대답이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리고 저를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가셨어요.
아, 저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가장 제가 이분은 정말 깨끗한 분이셨거든요.
불교를 포함해서, 이 세상을 진지하게,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가장 공통적인 고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 인간의 유한함, 육신의 한계... 그런 거죠.
플라톤의 가르침으로 하면 '몸은 영혼의 감옥이고, 이거는 죄악 덩어리'입니다.
어떻게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을 쳐도,
아담의 후손으로서 원죄의 굴레를 쓰고 있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내 속에 있는 거대한 악의 세계가
그때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이거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진지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공통된 고민이죠.
'어떻게 하면 나를 죽일 수 있나?
어떻게 하면 이 죄악 덩어리, 이 욕망의 덩어리인 나를 죽일 수 있는가?'
이것은 모든 시대를 살았던 종교인들의 고민이었죠.
근데 이것은 결단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선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죄악된 몸이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이냐?
바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연합되는 것,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연합되었을 때,
성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성도는 정과 욕심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매일, 주일마다 교회에 오셔서 끊임없이 기억해야 되는게 무엇이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느냐?
'죽지 않고 충만하게 사는 방법'
'죽지 않고 (죽음을 무시하고, 건너 뛰고)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을 자꾸만 가르쳐줍니다.
죽지 않은 사람이, 부활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죄와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은 자가,
어떻게 일으키심을 받고, 하늘에 올라갈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죠.
누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수 있느냐?
누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을 수가 있느냐?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죽은 자로 믿고, 여기며 사는 것이죠)
▲2. 두 번째로, 성도의 생명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땅의 것을 추구하지 말라)
3:3b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감추어졌음이라'
이 말은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와 병행됩니다.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1:2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지금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죠?
그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감추어진 것을 누구한테 먼저 나타내셨느냐?
선지자들에게 먼저 나타내셨고,
마침내 모든 성도들 앞에서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 성도님들, '내가 예수님 믿어서 새 생명을 가졌다. 나는 정말 거듭났다.'
그렇다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차이점이 뭡니까?
내가 정말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을 가졌다라는 것을, 확실히 눈으로 볼 수 있나요?
왜 볼 수가 없습니까? 그것은 새 생명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리스도의 비밀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타나게 되고,
성도들이 가진 새 생명도 마침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자 그런데 이것보다 제 가슴을 더 뛰게 했던 것은
구약 성경에서 '감추어졌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하나 가십니다.
시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다윗의 정말 놀라운 찬송, '나의 최고의 갈망은 하나님 자신입니다'라는 고백이
시27편 속에 담겨져 있어요.
그런데 5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숨기시고 감추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셨다(감추셨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 바울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라는 것은 3:3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아무도 성도의 새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는 선언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누구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찾아서 해야 할 자가 없다는 거죠.
자 이제 바울은 설명하기를, 성도는
1)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3:3
2) 성도의 새 생명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에 감추어져 있고, 3:3b
3)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 성도도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3:4
▲3.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 성도도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성도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거죠.
지금은 감추어져 있지만, 장차 그가 나타나시면
'성도도 그 Christ 와 같을 줄 안다' .. 죽을 몸이 죽지 않는 부활체를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이 될 수 있는데 빌3:18절부터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들의 신은 배요' stomach
배는 무엇이냐? 가장 근본적인 식욕을 포함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나타내는 말이죠.
그들의 신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욕망인 배가, 그들의 신이다.
'그 영광은 그 부끄러움에 있고'
그 욕망대로 삶을 추구해서 영광을 얻었다 한들.. 부끄러운 영광이라는 거죠. *졸부같은...
오늘 본문 말씀처럼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다' 골3:2, 빌3:19
아무리 포장하더라도,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고 있고,
그들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욕망'대로 대표되는 신이, 그들이 숭배대상인 거죠.
그러면서 빌3: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0b
빌3:21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여기서 '변하게 하신다'는 트랜스폼 transform 입니다.
질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모양 정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질 자체를 하나님이 바꿔 놓으셔서
우리의 낮은 몸을,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즉 '썩어질 우리 육체가, 부활체, 영생체를 입게 된다'는 뜻이죠.
바울은 교훈하죠.
이런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와 세상에 대해서 죽었는데,
어떻게 우리가 '땅의 일'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은 바로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위의 것들을 찾는 삶을 살아야 된다' 라고
바울은 도전하죠.
▲제가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토론토에서 유학할 때, 처음에 한 3일 정도를 수도원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수도원에 가서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냈는데,
거기서 제가 계시록 4장, 5장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해서
제가 묵상을 하고, 또 상상도 해 보았죠.
계5장에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하나님 보좌의 오른편에 계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제가 묵상을 하면서, 상상도 하면서
정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그 곁에 계시는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제가 마지막 뭘 했느냐?
바로 그분 앞에 이 천한 몸이 (제가) 예배자로 서 있는 겁니다.
그 천상의 예배에, 제 비천한 몸이 참여하고 있는 거죠.
바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제가 이 낮은 몸이, 예배자로 서서,
그분 앞에 고백하는데, 사도신경의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그분 앞에 입을 벌려서 고백을 했을 때,
저는 제 생애 정말.. 제 생애에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 앞에
제 천한 몸이 서서 정말 천사도 흠모할 만한 그 예배를 드렸을 때,
주님께서 저를 찾아오셔서, 저를 어루만져 주시고,
정말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앞에
제 삶의 모든 아픔과 고통들을 다 표현했을 때,
정말 제 마음에 간절히,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무엇이었느냐면,
'하나님 잘 견디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영광에 참여할 때까지,
이 세상에 어떤 고통과 유혹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잘 참을 수 있도록, 잘 인내할 수 있도록... 잘 견디게 해 주십시오!'
골1:22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렇게 주님 앞에 세워질 때까지, 제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잘 견디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복음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골1:23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장 비참해졌을 때는 언제냐?
땅의 것에 매여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을 때,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공동체가 되는 거죠.
저는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정말 다시 한번 위의 것을 생각하며,
천상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 앞에 믿음의 고백과 사랑을 올려 드리고,
자기의 모든 마음의 고통들을 쏟아부으면서
'하나님,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끝까지
이 신앙의 경주를 잘 인내할 수 있도록,
타협하지 않고, 실족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주님 저를 지켜 주십시오!'
이렇게 예수로 충만해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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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것을, 땅의 것으로 해결하지 말라'
땅의 문제를, 땅의 원리로 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땅의 문제를, 하늘의 원리로 풀어라는 거에요.
하늘의 지혜로, 하늘의 능력으로, 하늘의 뜻으로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거에요. 이게 산상수훈의 핵심이에요.
그게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에 5:39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산상수훈)에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뭐냐하면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회개를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될 수 없는 것들만 있는 거에요.
하나님 은혜 없이는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 가능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무튼 '땅의 문제를, 땅에 원리로는 풀 수 없다.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의나, 세상적인 수련이나, 종교적인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정말 진리를 갖지 못한 사람이 열심을 내면,
신비주의자가 되거나, 외식하는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땅의 문제는, 하늘의 것으로 풀어야 된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산상수훈을 비롯한 모든 신약의 계명들이, 다 그런 거죠.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돌려대라'도 같은 원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