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P1, P2 ☞시리즈 보기
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
◑P1 출생과 선교사의 소명
어릴 때부터 품었던 선교사의 꿈을, 하나님의 확실한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며
마침내 선교사의 삶을 결단하다.
인돈은 1891년 5월 8일 미국 조지아주 토머스빌에서 태어났다.
토머스빌 카운티는 거대 농장주 토머스 존슨이 제안한 법안에 따라
1825년에 형성된 지역이며, 토머스빌은 1826년부터 이 지역의 중심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토머스빌은 조지아 주에 속해 있지만, 플로리다의 텔러해 시와는
자동차로 약 40분 거리에 위치할만큼, 조지아와 플로리다 사이의 접경도시다.
토머스빌은 인돈의 증조부 때부터 대대로 인돈 가문의 터전이었다.
이주민들은, 땅값이 저렴해 웅장한 빅토리아 풍의 맨션과 플랜테이션 저택을 지었다.
인돈의 증조부 모지스 린튼은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서,
사우스 캐롤라이나 에서, 조지아의 토머스빌 카운티로 이주했다.
그는 많은 노예와 말을 거느리고, 남부의 이 빽빽한 삼림지역으로 와서
땅을 개간하며 정착했다.
부유한 가문이, 남부의 미개척지에 내려와 땅을 개간하고 정착하는 것은
재산 증식을 위한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모지스 린튼의 아들(인돈의 조부) 존 린튼은
그보다 더 부유한 농장주의 딸 앨리스 와이키와 결혼했다.
인돈의 아버지 와이키 와델 린튼은, 이들 부부의 7자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인돈의 어머니 어멘다 폰더 엘더먼은 토머스빌 카운티의 첫 정착자들이었던
엘더만 가문과 폰더 가문의 후손이었고, 이들 가문은 토머스빌의 유지였다.
▲인돈이 자라난 토머스빌은, 남부의 정서가 깊이 남아있는 지역이었고,
이 지역의 정서는 인돈의 유년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인돈이 태어날 때, 누나 모드 엘라와, 형 와이키 주니어가 있었는데
누나는 1892년 7월 1일에 죽었고, 2년 후에 형도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모두 전염병에 희생되었다.
그 사이 1892년 10월에, 인돈의 여동생 켈리가 태어났다.
자녀를 잃은 인돈의 어머니 어맨다의 상심과 불안감이 컸기 때문에,
전염병의 공포가 있었던 시골집을 떠나, 시내로 이사했다.
그러나 인돈의 여동생 캘리 마저도, 7살 되던 해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인돈은 여동생을 아주 예뻐했기 때문에, 여동생의 죽음에 큰 슬픔을 겪었다.
그는 갑자기 외톨이가 되었고, 원치 않았으나 외동아들이 되어버렸다.
인돈의 아버지 와이키 린튼은, 시내로 이사한 이후로 거의 집에 있지 않았다.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집에 머무는 날이 점점 더 드물었다.
인돈이 10살 되던 해에, 인돈의 부모 사이에 그간의 갈등이 터졌다.
그리하여 인돈의 부모는,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합의해 헤어졌다.
와이키 린튼은, 농부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 존 린튼의 뜻과 달리
교사 일을 계속하기를 원했고,
인돈의 어머니 어맨다(농장주의 딸 출신)도, 남편이 집안의 땅을 관리하며
가문의 유업을 잘 돌보기를 바랬다.
이것이 이들 부부의 불화의 원인이었고
결국 그들은 함께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집을 떠났기 때문에, 인돈은 아버지를 자주 볼 수 없었다.
인돈은 어머니와 이모 캘리 맥킨타이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인돈의 어머니는 감리교인이었으므로, 인돈은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인돈은 가족과 함께 감리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집을 이사하여 교회와 멀어지게 되자, 인근의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그곳에서 주일학교 교사 신시아 맥린을 만났고
신시아 선생님은 인돈의 진실한 친구가 되어주며
그의 마음에 선교사의 꿈을 처음으로 심어주었다.
당시 인돈이 출석하는 장로교회의 주일학교는
교사가 학생을 맡으면, 교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지도했고,
유년기의 인돈에게 신시아 선생님은, 그의 신앙과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어린 시절 인돈은, 신시아 선생님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며
그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청소년기에도 인돈은 신앙에 진지했고, 자신의 삶에 성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생 시절 같은 반 친구였던 제임스 리드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인돈은 다른 친구들이 놀 때에도 항상 공부하는 모범생이었다.
15세의 인돈은 학문에 정진하며,
삶의 방향을 벌써 정한 사람처럼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17세이던 1907년, 인돈은 고향인 토머스빌을 떠나
지역의 명문 공과대학이었던 애틀랜타에 조지아텍에 입학하여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대학에서도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그의 열정과 성실함의 결과로, 1912년에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지아텍 재학 시절인 1908년 5월 18일 *18세
인돈은 평소에 병약했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큰 아픔을 겪었다.
어려서 형제자매를 잃고, 아버지마저 집을 떠난 이후
그의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마저 주님의 품으로 가심으로써
인돈은 그야말로 혈혈단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로 어머니와 함께 살던 캘리 이모가, 인돈의 유일한 가족이었고
그녀를 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시며 살았다.
어머니를 여윈 외로운 인돈을 정성껏 보살피고, 신앙적인 감화를 끼친 사람은
그가 출석하고 있던 조지아텍 인근의 노스애비뉴 장로교회의 장로인
외과의사 헐 박사였다. M. M. Hull
인돈은 학교 기숙사에 살다가, 그의 자질을 귀하게 여긴 헐 박사의 호의로
대학 3학년 때부터 헐 박사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헐박사에게 신앙적 감화를 받으면서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하고자 하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인돈은 대학에서 교우들과 어울려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재미나게 놀리기를 좋아했다.
당연히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인기가 많았다.
탁월한 언변으로 이목과 관심을 집중시키는 능력이 뛰어났고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크리스천 리더였다.
한마디로 영성과 지성과 덕성을 두루 갖춘 될성부른 젊은이었다.
▲인돈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미국 남장로의 한국 선교사로서, 광주 스테이션에서 전도 활동을 하고 있었던
변요한 John Preston 선교사의 영향이 컸다.
1912년 당시 변요한 선교사는, 1911년에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체류하며 *인돈 21세
한국 신임선교사를 모집하는 활동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광주 스테이션의 선교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순천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는데
1909년에 남장로교 선교부는, 순천에 새로운 선교거점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변요한 선교사는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오웬 선교사가 Clement Owen
순회전도 여행 중 1909년 4월 3일에 순직하면서
남장로교 선교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변요한 선교사가 오웬의 뒤를 이어 선교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1909년 5월 19일에 광주 스테이션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오웬 선교사는 광주에서 순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여러 그룹을 인도하며 전도 활동을 했고
그의 열정적인 선교 활동으로 이미 건강을 크게 상했던 상태에서
과로가 겹쳐 급성 폐렴으로 소천했다.
목포에서 성공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변요한 선교사가 광주로 옮겨오면서
오웬의 선교지역을 맡게 되었고,
남장로교는 기독교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순천 지역에
새로운 선교 스테이션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변요한 선교사가 순천 스테이션의 설립에 책임을 맡았을 때
그는 순천 스테이션에서 필요로 하는 신임선교사뿐만 아니라,
한국선교를 위해 대규모의 선교사 인력보강이 절실함을 느꼈다.
그래서 1911~1912년의 안식년 기간을 활용하여
'코리아 캠페인'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전역의 대학과 교회를 방문하면서
대대적인 선교사 모집과, 선교헌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변요한 선교사는 남장로교 선교부로부터, 33명의 신임선교사 모집의 사명을 받았고,
실제로 그는 안식년 기간에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그 사명을 훌륭히 완수했다.
이 시기에 변요한 선교사의 활동에 힘입어,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면면을 보면,
이후 남장로교의 한국선교를 이끌어 나간 지도자급 인사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인돈을 포함하여, (William Linton)
스와인하트 부부 (Martin Swinehart 서로득)
윈 남매 (Samuel Winn 위인사)
뉴랜드 부부 (LeRoy Newland 남대리)
쉐핑 (Elizabeth Shepping 서서평)
도슨 (Mary Dodson 도마리아)
더피 (Lavalette Dupuy 두애란) 를 꼽을 수 있다.
변요한 선교사의 열정적이고 성공적인 노력에 힘입어
순천 스테이션은 1912년에 힘차게 시작될 수 있었다.
▲인돈은 변요한 선교사의 '코리아 캠페인' 과정에서, 그와 만나 한국 선교사로 자원했다.
변요한 선교사의 아버지 새뮤얼 프레스톤은, 애틀란타에서 목회를 하면서
헐 박사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변요한 선교사는 헐박사를 통해, 선교의 비전이 남달랐던 인돈을 소개받고,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인돈을 한국 선교사로 인도했다.
인돈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 1912년 3월 12일에 선교사 지원서를 냈고,
4월 9일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22세
그가 대학을 졸업한 것이 6월 12일이었으니,
졸업 전에 이미 선교사로 자기 진로를 결정했던 것이다.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한 우등생이었기 때문에
미국 굴지의 전기회사인 GE에 입사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인돈은 한국 선교사의 길을 택했다.
인돈의 이모는, 미지의 땅 한국이라는 나라에
선교사로 떠나려는 인돈을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의 조카를 친아들처럼 아끼던 이모로서는
21세의 젊은 청년이 세상물정을 모르고, 신앙의 열정에 사로잡혀
성급한 결정을 했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또한 사랑하는 조카를 멀리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사래(인돈의 사모)의 기록에 따르면,
"캘리 이모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가 한국에 가는 것을 막으려 했고
심지어 떠나지 않고 남는다면, 그를 위해 사업자금을 대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선교사로 떠나기로 결정한 인돈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젊은이가 갖는 한때의 열정으로 선교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품었던 선교사의 꿈을, 하나님의 확실한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며
마침내 선교사의 삶을 결단했던 것이다.
그가 어머니처럼 사랑하는 이모마저도, 그의 확고한 비전과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이모와 함께, 가까운 노스캐롤라이나의 산악에서
함께 여름을 보내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인돈은 마침내 1912년 8월 1일, 애틀랜타를 떠나 덴버를 경유하여
그곳에서 변요한 선교사와 다른 신임선교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8월 23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출항하여
9월 20일에 한국 선교지 목포에 도착했다. *1912년, 22세
그의 여생 48년 동안 이어질 인돈의 한국선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돈을 한국으로 인도한 변요한 선교사에 따르면
'그는 이제까지 남장로회 선교회가 임명한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고 했다.
◑P2 / 군산 영명학교 시절 청년 교사 인돈 William Linton
인돈은 자신이 맡은 책임에 대하여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지만
일과 쉼의 균형을 잘 맞추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지고 가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인돈이 도착해서 남장로교 한국선교부의에 따뜻한 환영을 받았던 당시 목포에는
맹현리 선교사 내외 Henry McCallie
유서백 선교사 내외 John Nisbet
의료 선교사 하딩 내외 Maynard Harding
독신 여선교사 줄리아 마틴 Julia Martin
맹애다 선교사가 있었다. Ada McMurphy
포사이드 선교사 내외와 해리슨 선교사 내외는 안식년으로 미국에 있었다.
변요한 선교사와 함께 목포에 도착한 인돈을 포함한 남장로의 신임선교사들의 이야기가
1913년 1월에 발간된 남장로교의 선교잡지 Missionary Survey 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목포는, 남장로교 선교부의 스테이션 중에서 규모가 제일 작았지만
전주, 군산, 광주 스테이션에 가려면, 목포를 (배를 타고)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신임선교사들이 목포로 함께 들어왔던 것이다.
변요한 선교사 일행은 9월 20일 금요일 오후 5시경에 증기선을 타고 목포에 도착했는데,
아이들을 포함하여 총 18명의 인원이었다.
그들은 모두 유서백 선교사의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날 밤 여부솔 선교사 내외와 자녀들은 전주로, Finley Eversole
인돈은 그가 선교지로 배정받은 군산으로 떠났고,
광주로 배정받은 인원들만 화요일까지 목포에 머물렀다.
▲인돈이 그의 사역지로 배정된 군산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부의렴 선교사 부부, William Bull
의료 선교사 패터슨 부부, Jacob Patterson
교육선교사 위위렴 부부, William Venable
파커 선교사 부부, J. Kenton Parker
독신 여성 선교사 다이사트가 있었다. Julia Dysart
인돈은 처음에는 패터슨 부부와, 위위렴 부부와 함께 살다가
남장로교 선교부의 미션스쿨인 영명학교에서
기술과목 교사들을 위해 따로 마련한 사택에서 혼자 사는 특권을 늘었다.
인돈은 한국에 나올 때 처음 계획으로는, 그의 전공인 전기공학이나 기술 과목을 가르칠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 그는 군산에 배정된 또 다른 독신 선교사 매요한과 집을 함께 쓰게 되었다. John McEachern
군산에서 선교를 시작하면서 그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한국어를 빨리 배우는 것이었다.
인돈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찾은 어학선생은
선교부에서 다른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었던 고성모였다.
(주. 이후 고성모는 목사가 되어 전북노회장을 역임했으며, 인돈과 깊은 친구가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어학 공부를 했지만,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갑갑함을 느낀 인돈은, 이렇게 벌을 받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말을 비울 수 없다며,
밖에 나가 영명학교 학생들과 야구를 했는데, 고성모도 함께 나가 놀았다.
해변을 걸으며 머리를 식힐 때도, 고성모와 함께 했다.
어학선생이자 친구관계를 맺었을 때, 인돈의 우리말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이러한 '놀이 학습법' 혹은 '생활 학습법'을 통해, 몸으로 한국어를 익혀
인돈은 불과 1년 만에 우리말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 구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여러 선교사들은 인돈의 언어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났다고 입을 모아 말했지만,
우리말을 배우려는 인돈의 노력과 의지가 남달랐다는 점이
그의 탁월한 어학 실력의 비결이었다.
인애자(인돈의 며느리) 역시 인돈이 우리말을 잘하게 된 까닭은
삶 속에서 언어를 늘 사용하며 배우려했던 노력과
어학교사 고성모 와의 각별한 우정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인돈은,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어를 잘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선교사들이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잘 가르치는 교수 능력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특히 인돈은, 1918년 경에 미국 남장로교 일본 선교부를 통하여
나가노 현의 가루이자와에 있던 언어학자 커밍스 박사와 교제하며
한국어 발음을 쉽게 하는 법과,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잘 가르치는 교수법을 배우며
이후 한국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의 언어 학습능력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심지어 인돈에게 영어를 배운 학생들은, 영어를 아주 잘하게 되어
사람들이 종종 학생들에게, 미국 어디에서 영어를 배웠는지 묻곤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어와 영어뿐 아니라, 일제가 미션스쿨에 요구하는 일본어 실력을 갖추기 위해
군산에 있는 선교회 여학교 교사들을 위한 일본어 과정을 개설하고
앞장서서 일본어 공부를 했다.
그의 어학에 대한 재능과 부단한 노력으로
인돈은 선교부 안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어학의 귀재가 되었다.
우리 말이 익숙해지면서 인돈은, 군산의 미션스쿨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다.
처음 내한할 때는, 전기공학이나 기술 과목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당시 학교 실정에 맞지 않아, 영어와 다른 과목들을 가르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말로 성경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1917년에 영명학교 교장이었던 위위렴 선교사가 사임한 이후,
인돈이 교장을 맡게 되었고, 동시에 선교회 업무 분담에 따라
군산지역 주일학교 관리를 맡았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그리고 한국에 온지 5년 만에 신임선교사가,
남장로교 미션스쿨로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영명학교의 교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인돈은 남장로교 선교부 안에서 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인돈은 자신이 맡은 책임에 대하여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지만,
일과 쉼의 균형을 잘 맞추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장난스러운 유머로 주변 사람에게 기쁨을 주면서도
진지한 신앙, 경건한 삶, 유창한 연설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모습도
그의 건강한 인격의 면모를 들여다보게 하는 점이다.
인돈은 척박한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짊어져야 하는 스트레스와 일상의 고된 업무를,
주위의 동료 친구들과 함께 쉼과 놀이로 풀어가면서
그야말로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법을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한국 선교를, 일과 사역을 넘어서,
삶과 기쁨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삶의 선교를 실천하였다.
이러한 점이, 그가 22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모진 풍파와 도전에 맞서며
선교부가 그에게 맡기는 불가능해 보이는 막중한 소임을 열정적으로 수행하면서
무려 48년간이나 흔들림 없이 선교사의 길을 한결같이 걸어간 비결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영성과 지혜는, 기도하고 연구하는 일뿐만 아니라
가족과 동료와 친구들과 놀고 쉬면서도 길러진다는 점을
인돈의 삶을 통해 배워야 한다.
자신들은 쉬고 노는데 여념이 없으면서도
유독 선교사에게 고난의 십자가만을 기대하고 강요하는 이중잣대는
위선과 외식이 아닐까 싶다.
주님이 메워주신 멍에를 쉽고 가볍게 지고 가는 영성과 지혜를 배워서
사람들 가운데 오래 머물며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선교하는 경건의 능력을 가지라고
인돈은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인애자(인돈의 며느리)는, 인돈의 삶을 돌아보면서
'놀지 않는 선교사는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인돈이 매요한과 함께 살던 독신자 숙소에
이보린이 1918년에 새롭게 합류하게 되었다. John Bolling Reynolds
그는 이눌서 선교사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나 William Reynolds
남장로회의 명문 Hampden-Sydney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교육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보린이 정식으로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로 지원한 날짜는
1920년 4월 27일이었고, 5월 26일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교육 선교사로서 순천과 광주와 전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 선교사로 정식 발령 받기 이전에
군산의 영명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고, 이때 인돈과 함께 생활했던 것이다.
연배도 서로 비슷했던 인돈과 이보린은 우정이 돈독했다.
인애자가 전한 이보린의 말에 따르면
"인돈이 영명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 나는 수학을 가르치는 형편없는 선생이었다.
인돈과 나는 화요일마다 사냥을 나갔는데, 그는 16구경 엽총을 쓰는 명사수였고,
나는 옆에서 따라다니는 수준이었다. 우리는 여러 주제에 대하여 많은 이견이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도 우리는 즐거운 추억을 많이 나누었다"고 한다.
참고로 인돈은 매우 보수적인 신앙인이었지만
이보린은 아버지 이눌서의 보수적인 신앙 아래서도
합리적인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추구하던 인물이었다. *그때 당시 미국의 유행 학풍
그는 이후 1930년 6월 10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시립대학교 수학 교수로 일했고,
근본주의적인 장로교회를 떠나, 유니테리언 교회에서 자유주의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선교사직은 사임했지만, 여전히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고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1970년 3월 20일 노스캐롤라이나 애쉬빌에서 사망한 후
평소에 품었던 뜻대로 그가 태어난 고향 서울로 유해가 보내져서
현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이보린은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에도, 인돈과의 우정은 지속되었다.
이보린은, 인돈이 설립위원장으로 대전에 설립한
남장로교 대학인 대전 대학에 장학금을 기탁하여
신학교에 입학하는 우수한 학생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보린이 옛날을 추억하며, 다소 엉뚱하다고 생각했던 기억 속에는
인돈이 개와 염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한번은 염소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젖을 짜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보린이 추켜세웠듯이, 인돈의 사냥 솜씨는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돈의 어학선생이자 친한 동료였던 고성모 목사는
인돈은 앞에 나는 꿩과, 연이어 나는 꿩을 둘 다 맞출 줄 아는 명사수였다고 한다.
사냥 외에도 그는 구기종목도 좋아했다.
군산의 선임 선교사였던 부위렴 목사가 인돈에게 테니스를 가르쳤는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못된 라켓을 집어던지는 법도 함께 배웠다고 한다.
이러한 투지로 머지않아 그를 가르쳤던 부위렴 선교사를 꺾는
뛰어난 테니스 실력을 발휘했다.
인돈은 전주의 위인사 Samuel Winn, 위애미 Emily Winn 남매 선교사와 각별하게 지냈다.
때때로 (군산에서) 전주로 그들을 찾아가, 전주 인근의 오래된 사찰 부근으로 함께
캠핑을 하면서 여가를 즐기며, 우정을 나누었다.
군산에서 인돈은, 부위렴, 위인사, 패터슨 선교사 가정과도 친하게 지냈을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과도 친했는데
특히 패터슨 선교사의 어린 딸은 인돈을 아주 좋아했다.
인돈과 함께 한국에서 오래 같이 일했던 선교사들의 기억에 따르면
인돈은 친절하고 상냥하게 동료들을 배려하는
따뜻하고 온화한 인성의 소유자였고
동료와 이웃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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