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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을 위한 새 이스라엘

LNCK 2024. 1. 18. 10:46

https://www.youtube.com/watch?v=jYAQgsAI

위 설교 후반부 녹취

 

온 세상을 위한 새 이스라엘     행1:12~26       2024.01.14.  ☞ <청년, 젊은이>

 

▲왜 120문도일까요?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행1:15

 

영어성경은 일제히 '약 120명쯤 되었더라'로 번역합니다. 왜 하필 120명일까요?

모인 무리의 수가 얼마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120명으로 끊어 맞추었습니다.

 

120은 12X10이죠.

12는 열 두 지파를 뜻하고,

10은 '만수, 충만한 수'를 뜻합니다.

 

이로 유추하건데, 마가의 다락방에 보인 120명은 "새로운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10은 만수로, '충분히 많다'는 뜻입니다. '충분히 많은 이스라엘 새 12지파가 모였다'는 뜻이죠.

그런 맥락에서, 맛디아를 12사도에 보궐로 채워넣은 것입니다. *계시록의 14만4천도 같은 맥이죠.

 

▲가룟 유다 대신에 새로운 사도를 세웁니다.

그 사람이 바로 맛디아입니다.

왜 하필 맛디아를 뽑아야 했을까요?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설교자는 ‘이 12번째 사도로 맛디아를 뽑은 것은

제자들이 별 의미 없는 일을 했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왜냐면 맛디아가 이때 (보궐 선거 때) 한번 나오고

그다음부터는 성경에 존재감이 없습니다.

그 후로 더이상 이름도 안 나오고요.

그럼 ‘괜히 뽑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차라리, 맛디아가 아니라

‘12번째 사도에는 사도바울이 들어가야 되는 게 맞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근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때 맛디아를 사도 번째 사도로 뽑은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주님의 말씀에 비춰서 새롭게 해석하고 각성한 결과입니다.

 

왜 제자 공동체가 12번째 사도를 뽑았을까요?

그냥 안 뽑아도 되잖아요.

 

그렇지만 특별히 뽑은 이유는, 자기들이 구약의 이스라엘을 대신할

새 이스라엘이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에 12지파가 있었듯이

마찬가지로 새 이스라엘, 신약교회는 12 기둥이 필요하다는 각성입니다.

바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각성입니다.

 

그래서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로 세운다’ 행1:25

이렇게 말했던 거고요.

 

사실 세상의 꼬리표로 따지면, 지금 제자 공동체는 별 볼일 없는 존재들입니다.

찻잔 속의 태풍이랄까요? 그들이 뭔 일을 벌여도, 세상은 눈도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사람들입니다.

 

근데 말씀으로 자신들을 해석하니 아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새 이스라엘이다

하는 확고한 정체성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말씀으로 현실을 봐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되는가요?

 

오늘 본문의 이 사도들처럼,

말씀 속에서 우리 성도의 정체성을 발견, 정립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을 해석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꼬리표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제자들에게 이런 인식이 있었을 겁니다.

‘야, 너희들이 무슨 일을 하겠다고 난리냐?

너희들은 패배자야!

갈릴리 촌놈들이 무슨 세상을 바꾼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근데 베드로와 제자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말씀으로 보니까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할, 새 이스라엘의 대표들이다’

그 믿음으로 행했던 겁니다.

(*직접적 근거 구절은 없지만, 전체 흐름과 행간을 읽으면 그렇습니다)

 

행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맛디아를 뽑아서‘ 26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여러분, 그들은 말씀을, 그냥 이렇게 추상적으로 알았던 말씀이 아니라

말씀으로 현실을 해석했고,

말씀이 그들에게 살아있는 지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맛디아가 사도로 세워짐으로써

새 이스라엘의 열 두 기둥이 딱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자리를 대신할

보혜사 성령님을 기다리게 됩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를 주인공으로 그린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영화가 있었죠.

거기에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를 정치에 입문하게 만든

윌리엄 피트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나중에 영국 수상이 됩니다.

윌버포스가 기독교로 회심한 다음에, ‘내가 목회자가 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친구 피트가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의 대사인데요.

 

‘윌버, 하나님은 너에게 탁월한 목소리를 주셨어.

그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할래, 아니면 세상을 바꿀래?’

Praise the Lord, or Change the world? 이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근데 윌버포스는 이거 두 가지를 다 합니다.

주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세상도 바꿉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시작할 무렵에

그가 기록한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예제도 폐지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신 커다란 목표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세상이 뭐라고 해도

하나님이 이거 하라고 나에게 사명을 주셨다.’고 하는

명확한 사명과 자기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걸 주셨기 때문에,

평생 극심한 반대와 좌절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 일을 해냈던 것입니다.

 

(노예제도 폐지가 10~20년 오랜 세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폐지됩니다.

완전 폐지까지는 약 20년이 걸립니다. 그러니 평생 싸운 셈이죠.

영국은 1807년에는 노예무역을, 1833년에는 노예제를 폐지하였죠.

이것은 미국보다 약 30년 앞선 일이고, 미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주요 의대를 컨설팅하는 전문가 한 분이

한국의 두뇌 집단들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을 하십니다.

‘공익성과 혁신성에 대한 개념이 참 부족하다.’

 

한국에는 사실 훌륭하신 의사분들이 굉장히 많으십니다.

근데 일반적으로 의사분들이 과학자들보다 정부 지원금을 더 많이 받고,

의학 연구를 더 많이 해야 되는데...

자기가 이제 컨설팅을 하는데, 보니까 ‘공익성과 혁신성’에 대해서는

좀 취약하더라는 것입니다. (‘나 하나 잘 되면 그만이지..’ 한다는 거죠)

 

일반적으로 의사들이 배타적인 경쟁심은 강한데

‘세계를 선도해야겠다는 혁신성이 부족하고

의학 연구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된다는 공익성, 혁신성

생각조차도 못 하고 있더라...’ 이렇게 그가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이파에는 테크니온 공대가 있습니다. Technion - Israel Institute of Technology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낯선 대학 이름인데요,

사실 이 대학은 공학 쪽에서 이 노벨상 수상자들을 많이 배출한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 교육기관입니다.

 

얼마 전에 이제 테크니온 공대에 슐로모 교수가 책을 하나 냈는데

‘어떻게 테크니온 대학 출신들이 과학기술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꾸었는가’ 하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Aspiration, Inspiration, Perspiration

부제 : How Technion Faculty & Graduates Fuse Creativity with Technology

to Change the World by Shlomo Maital, Rafi Nave

 

이 테크니온 공대 출신들의 과학자들, 기술 혁신가들 100명을 추려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밝힌 책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세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이타적인 야망 Aspiration

-두 번째는 공동체적인 영감 Inspiration

-세 번째는 포기 없는 끈기 Perspiration

 

이게 뭐냐면

「우리가 하는 일은, 온 세상을 위해 하는 일이다.

우리가 하면 세상을 바꾼다.

하나님이 망가진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 민족을 선택하셨다」

하는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감이 뚜렷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타적인 야망과 Aspiration

공동체적인 영감과 Inspiration

포기 없는 끈기있는 도전 정신이 Perspiration

그들의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최고의 혁신가들이 배출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우리가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실 구약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언이 성취된 모든 것의 완성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그 완성을 보여줍니다.

사실 구약만 믿는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그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테크니온 공대 졸업자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현실에서 살아 역사하는, 구체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과 사회를 새롭게 해석해 줍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는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명이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살아있는 구체적인 지식이 되는 그 속에서

우리는 현실을 돌파하고, 세상을 바꿀 능력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제자 공동체가, 어떻게 말씀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말씀이, 그들에게 살아있는 지식이 진짜 될 수가 있었습니까?

 

1)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우리도 주님의 부활의 목격자, 그리고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2) 두 번째,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간 제자들을 특훈(특별훈련)시키신 결과입니다.

 

3) 세 번째, 부활하신 주님께서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전부 주님을 배신하고 도망간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특히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맡기십니다.

주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끈기가, 이 제자들을 일치월장 시키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훈련하시고

그러다 넘어지고 실패하면 또다시 찾아가셔서 일으키시고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시고,

다시 말씀을 주신 결과

오늘 본문의 베드로와 제자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가요? 말씀이 살아있는 지식이 되어 현실을 돌파하려면

주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끈기가 먼저 있었고,

이 끈기에 우리가 응답할 때, 그 말씀이 살아있는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5: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이 단단한 음식이 뭐냐 초보적 성경 지식을 넘어 우리 삶에 파고

들어가서 역사하는 말씀을 말합니다.

 

오늘 베드로가 있는 그 보여준 그대로 살아 있는 지식의 말씀입니다.

근데 이런 지식의 말씀은 초보자가 아니라 성숙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소보신자가 이런 성숙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야 되는데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반복된 경험과 연단을 거쳐서 선과 악을 구분하기 감각을 길러야 된다... 이 말입니다.

 

뭐냐면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검입니다.

검을 받았는데 이 검을 오랫동안 갈고 날카롭게 해야 된다는 말이죠

그래야지 말씀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돌파할 수 있습니다.

 

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카로운 검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무슨 상처났을 발는 반창고 수준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지식이 되려면이 말씀의 금을 사용하는 수준에

맹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성수동에서 ‘사회적 기업’을 하는 청년들을 돕는 사업가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적 기업을 하는 청년들 중에는 기독교 청년들이 꽤 있다는데,

대부분이 다 교회에서 무슨 청년부 회장도 하고 또 찬양 인도도 하던 그런 청년들입니다.

 

말하자면 이제 교회 오빠들이 근데

‘말씀으로 어떻게 회사를 창업하고 운영해야 되나?’

이걸 잘 모르기 때문에, 그걸 배우러 이제 성수동을 찾아오는 겁니다.

 

그가 청년들을 코칭해 주고 창업지원도 막 해 주는데요.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실패해도 괜찮다. 아휴 하나님이 진짜 책임지신다!’

그렇게 말을 해도 ‘대표님은 이미 성공하신 분이니까 그렇죠’ 그런답니다.

 

아니 왜 청년들이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을 그 말씀에 맡기지 못할까요?

 

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교회에서 의례 하는 말씀으로만 여기고,

그렇지만 내 현실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 줄 거라는

구체적인 믿음과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청년들만의 문제라기보다, 우리 어른들의 문제이고

저와 같은 목회자들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실질적인 지식이 될 수 있도록

이 말씀의 검을 잡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데,

맨날 말씀으로 반창고나 이렇게 발라주고 있으니까

도대체 이 말씀의 검을 어떻게 쓰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사람들이 그래서 맨날 위로만 받기를 바랍니다.

‘반창고 발라 달라’는 거죠.

그리고 말씀의 검을 쓰는 훈련은 안 받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에게 주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실패한 자, 넘어진 자를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위로가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면 안 됩니다.

믿음이 진짜 삶의 실력이 될 때까지, 검을 가지고 싸우는 법을 함께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맨날 초보 수준만 배우다 끝내지 마시고

이제 초보 수준 떼시고, 그다음 중급, 고급 지도자 과정으로 계속 성장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베드로와 제자공동체가

말씀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말씀으로 자기의 정체를 각성하고

공동체의 지혜를 모아 문제를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그 말씀의 날카로운 검으로

‘이제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서 어떻게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되나’

그 출발 지점에 이제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끈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제자 공동체처럼 우리를 향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끈기가 있음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끈기 있게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면

그 주님의 끈기에, 성도된 우리가 끈기로 반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이 현실을 돌파하는 살아있는 지식이 될 때까지

우리는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말씀으로 연단 받고,

삶이 힘들어도 말씀을 끝까지 붙잡고 그래서 말씀과 함께 뒹굴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교훈하고 훈련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니까

우리도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말씀의 검을 가지고 연마하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이 싸움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끈기 속에

말씀의 검과 기도의 방패로 무장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 이스라엘이 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