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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늙은이, 늙은 젊은이

LNCK 2024. 1. 18. 16:41

 

젊은 늙은이, 늙은 젊은이    시92:12-14     2009.07.06. 스크랩  <청년, 젊은이>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시92:12~14

 

◑대기만성형 자녀

 

요즘 초등학생 애들에게 한번 말을 걸어보면

어떻게 애들이 그렇게 똑똑한지 몰라요. 저보다 말을 더 잘해요.

딱 부러지게 말을 잘 합니다.

 

이 상황이 한편으로 신기하고 놀랍고도 하면서

한편으로 염려도 되요.

 

왜 그러느냐 하면.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지요.

 

대기만성이라고 하는 말을 제가 나름대로

교육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그런 단편적인 지식들을 종합해서

요즘말로 다시 이해를 하면 이런 거예요.

 

교육학적이고 심리학적차원에서 아이들이 정보를 수용하는 양은

아무리 머리가 안 좋은 애도 똑같다는 겁니다. 똑같아요.

정보를 수용하는 그 양이 똑같아요.

 

그런데 소위 <그릇이 작다> 라고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하루에 5개씩 정보를 수용을 한다고 할 때

그릇이 큰애와 작은애의 차이는

 

예를 들어 그릇이 <간장종지> 같이 작은 애가 있고

중간으로 <대접> 같은 애가 있고 그리고

큰 <찬합> 같은 애가 있다 합시다.

 

<간장종지> 같은 애는 5개의 정보가 들어오면 꽉 차요.

꽉 찬다는 것은 자체 안에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function (기능) 하게 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용량이 중간크기 <대접> 같은 애는 10개정도 차야 꽉 찬다는 것이에요.

그래야 움직일 수가 있어요. 생각이 돌아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용량이 큰 <찬합> 같은 애는

5개의 정보가 들어오고

10개의 정보가 들어와 가지고 너무 엉성하게 퍼져있어서

이게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아요. 생각이 돌아가지를 않아요.

 

<간장종지> 같은 아이는

정보가 5개만 들어와도 오밀조밀하게 딱딱 쬐어져있기 때문에

컴팩트하게 이미 이루어져서 그게 기능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다 인식해요, 벌써. 애들이.

 

제가 얘기했잖아요.

10년 된 오래된 차를 놓고 아이들이 빙빙 돌아가면서

‘어, 이거 어디 차야?’ 하면서 판단하고/무시하고 있더라는 거예요.

 

어린 초등학생들이 벌써 그 가치관이 딱 우뚝 섰어요.

가치관이 섰다는 건 뭘 말하는지 아십니까?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돌아간다는 거예요. 판단력이 기능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기만성형>은

수용되는 정보의 양은 똑같은데

그게 전체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려면

<간장종지> 같은 아이가 5개면 뱅뱅뱅 돌아가도

<찬합> 같은 애는 1백 개가 들어와야 그때부터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릴 때 보면.. 다른 아이와 비교해 보면, 바보 같아요.

뭘 깨우치는 것이 늦어요.

 

에디슨이 그랬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낙제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중학생 때까지는, 낙제를 했다고 그러잖아요.

 

<찬합>이라서, 약간의 지식으로는.. 자기 머리가 활동을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찬합에 지식이 가득 찰 때.. 놀라운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아이가 몇 살 되지 않은 아이가 똑똑하게 얘기하고 이러면

막 신기해하고, 대단해하고.. 이럽니다.

 

◑정신이 너무 빨리 늙어버리는 요즘 아이들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도 안 된 아이들이,

벌써 돈, 돈, 하면서 벌써 외제차가 눈에 들어올 정도가 됐어요.

 

그 정도로 이 세속의 가치가 완벽하게 들어가 버리고

초등학생이 벌써 그런 가치기준을 따라서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이미 다 만들어졌고

더 이상 새로운 가치가 형성되거나 이게 불가능해진 거예요.

다 만들어졌어요.

애가 벌써 정신적으로 프로제리아 병(조로증 早老증)에 걸린 것이에요.

 

이런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하지만

벌써 우리나라 애들이 80%, 90% 이상은 다 4~5살만 되면 똑똑해요.

너무 똑똑해요. 애들이.

 

여러분, 빨리 늙어버릴 정도로 애들이 빨리 똑똑해지잖아요?

나름대로 가치관을 빨리 갖잖아요?

그거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 애한테는 빨리 자기의 지식/가치관의 한계를 비워버릴 수 있는

십자가복음을 가르치세요.

그러면 되요.

 

그러므로 ‘대기’가 ‘만성’인 것은 맞다 하더라도

‘소기’(작은 그릇)는 소기대로 다 자기 목적성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소기가 빨리 차가지고

빨리 똑똑해져서 빨리 복음을 깨닫기만 한다면

작게 작게 생각하며, 순간순간을 쪼개서 하나님의 지시만을 따라가려고

마음을 갖게 되기만 한다면

그 아이의 생애가 큰 생애가 되지 않겠어요?

소기는 소기대로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얘기는 제 얘기가 아니라 어떤 캐나다 심리학자가 말하기를

<요즘 아이들이 7살이 되면 완벽한 늙은이가 된다>는 거예요. 왜요?

 

TV를 보면서, 매스컴을 통해서

이 세상의 어른들의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해버리기 때문에

가치관이 수용됐다는 것은 자기세계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완전히 늙어버린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대안이 있잖아요.

어릴 적부터 주님의 십자가복음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어린늙은이들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어린아이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몸은 늙어도, 정신은 젊은이로!

 

물론 지금 늙어가는 우리 장년들도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굳어버린 내 세상 가치관 체계를 깨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어린늙은이로/생각이 어린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내 경험세계, 지식세계, 이 세상에서 배운 가치관,

지금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

다 십자가에 걸어 제로 zero로 만들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80세 후반에 천지창조를 그렸고,

처칠이 82세에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모세가 80세에 40년 동안 출애굽의 대역사를 이뤄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몸이 늙는 게 뭐가 중요해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진액이 하나님의 깊은 생각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면

하나님의 크신 일들이 나타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영원한 불로초에요.

 

...............................

 

▲가이오를 멘토링 해주었던 사도요한

본문의 세 주인공, 가이오, 데메드리오, 디오드레베는 다 남성입니다.

(물론 요한2서에서는, 무명의 부녀도 나오지만요. 요이1:5)

 

남성들은 우리 사회의 위기 지점에 있으며,

교회의 남성 사역은 그런 시대적 흐름을 같이 탈 수 있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2020-2021 학년도에

"미국 대학은 5년 전에 비해 150만 명의 학생이 감소했으며

남성이 감소의 71% 를 차지했습니다."    *여성은 29%, 여성 감소의 2.5배

 

이것은 Covid-19로 인한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40 년 동안 남성은 2년 또는 4년제 학부 프로그램에 입학한 학생의

비율이 점점 더 적었습니다.

또한 남성은 학위 프로그램을 마칠 가능성도 적습니다.

 

대학 통계가 성공이나 사회 척도를 정의하는 특성은 아니지만,

이러한 변화는 사회 경제적 계급, 인종 및 지리적 지역에 걸친

남성이 점점 더 덜 참여하고, 동기 부여가 적으며

 

이것은 결국, 건강한 아버지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적다는 신호를 보내는

요인들 중 하나입니다.

 

또한 「타임」지에 의하면, 남성은 여성보다 독신일 가능성이 더 높고,

부모와 함께 살 가능성이 더 높으며,

독신 여성보다 성공적인 경력을 쌓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젊은 남자들은 교회에서 나이 든 남자들에 의해 멘토링 (또는 제자 훈련)

되지 않습니다. 멘토링을 요청하지 않는 청년도 많고

멘토링을 해 줄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노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자도에 대한 성경적 모델은 (부인할 수 없이) 삶의 멘토링입니다.

더욱이 멘토링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나이가 많고 성숙한 신자에게 의무가 있습니다. *본문의 사도요한처럼

 

영적 멘토가 되기 위해 성경 학자, 목사 또는 실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교회는 상처, 실패의 경험이 있었던 멘토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세대 간 관계가 절실히 필요하며,

젊은 남성들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러한 우정에 더 개방적입니다.

 

밀레니엄 세대는 20 대 후반에서 30 대 후반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경력의 전성기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방향타가 없고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멘토링의 가치와 그것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가족과 교회에 미칠 수 있는

다운스트림 효과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북미 남성의 대다수는 현재 또는 음란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성적인 문화에 살고 있으며,

 

많은 크리스천 남성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이는 더 깊은 투쟁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남자들에게는 약물 남용, 분노 문제 또는 다른 죄문제로 힘겨워합니다.

이는 멘토와의 관계로, 상당 부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영역들입니다.

적어도 멘토의 기도는, 젊은 남성에게 큰 격려와 힘이 될 것입니다.

 

북미의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가정에서 아버지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소년들이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모른 채

자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텔레비전, 인터넷, 대중 문화를 통해

남성다움이 어떻게 생겼는지 배웁니다.

 

당신의 교회는 아버지 없는 소년들을 위해, 그 틈에 설 기회가 있습니다.

남성 여러분, 어린이 사역에, 남학생 사역에 자원 봉사하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아이에게 긍정적인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십시오.

 

혼자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소년이 여러 명의 긍정적인 남성 롤모델을

가지고 있다면 엄청난 승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그 청년과 그의 미래의 자녀, 손주, 증손주들에게

미칠 수 있는 장기적인 영향을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기본적인 일들을 잘 하는 것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도에 집중하십시오.

그들에게 경건한 남자, 남편, 아버지가 되도록 가르치십시오.

 

모든 교회가 제자도의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 보십시오...

 

▲울타리를 허물지 말라

어떤 한 젊은이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부모가 평생을 땀흘려 일구어 놓은 포도밭이었지요.

 

이 포도밭으로 인해 젊은이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가족이 먹고 사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대상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물려받은 포도밭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발전을 시킬 것을 다짐했지요.

 

사방이 튼튼한 울타리로 둘러쳐진 포도밭,

이 울타리 안에는 울창한 포도나무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울타리에는 포도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울타리를 없애버리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더 많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도밭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울타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얼마 뒤, 이 포도밭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포도밭의 포도나무들은 점점 망가져갔습니다. 울타리를 베어버리자

사람과 짐승들이 마음대로 포도밭에 들어와, 나무를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포도가 열리진 않지만

포도밭을 보호해 주는 울타리도

포도나무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위의 어리석은 젊은이처럼

울타리보다는 포도밭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포도나무가 없다면 포도열매가 맺히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울타리 없이는.. 포도밭도 제대로 존재하기 힘듦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습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름대로 성공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과연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를 도와준 가족, 친구,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고생하면서 어엿한 성인으로 길러주셨으며,

선생님들은 정성껏 지도하여 훌륭한 인재로 길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응원과 격려를 통해 인정과 우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능력과 재주만으로 모든 것을 일구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얼마나 자주 행하고 있었던지요?

 

그들을 통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는

그를 밟고 올라가야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고마운 분(울타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존재함, 그 자체로 감사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