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 Part 3. 첫 안식년과 결혼 - YouTube
◈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P3 ☞시리즈 보기
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
◑3. 첫 안식년과 결혼, 교육선교의 비전을 품으며
"한국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한민족으로 살기 원합니다.
완전한 수동성과, 평화로움과, 무저항이야말로 *비폭력, 무저항 운동 정신
이 나라의 혁명을 말해주는 것이며
한국은 오직 이러한 수단만을 손에 지닌 채
자신의 곤궁을 세계에 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위 연설문은, 인돈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있는 동안,
'미국 남장로교 평신도 대회'에서, 조선의 3.1운동을 증언한 내용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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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돈은 선교사로서 전도열정이 강했고, 군산 영명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이미 복음 전도 삶을 살고 있었지만,
선교부 안에서 점차 교육선교사로서의 역할이 커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맡은 교육선교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교육 관련 전문성을 갖출 필요를 느꼈다.
1919년에 첫 번째 안식년을 맞았을 때, *1912년 최초 입국
그는 선교회로부터 2년의 연구년을 허락받았고,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와 병행하여 그는 뉴욕의 화이트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화이트 성경학교는, 인돈과 함께 1912년 한국에 들어왔던 서서평도
예전에 다니던 학교였다.
이후 광주에서 오랫동안 교육선교사와 복음전도자로 일하던 유화례도 Florence Root
선교사가 되기 전에 이 학교를 다녔다.
화이트 성경학교는 유명한 부흥운동가 무디의 동역자였던 화이트 박사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뉴욕에 설립한 성경교사대학으로 출발했다.
그러다가 '성경교사 양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뉴욕 신학교'가 되었다.
인돈은 1919년부터 2년 동안 컬럼비아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화이트 성경학교에서도 공부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평신도 전도자로서,
성경연구와 신학훈련을 받았고,
그가 두 번째 안식년 기간이었던 1930년에,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남장로교 신학교에 다녔을 때,
신학교 과정을 2년만에 졸업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다.
▲인돈의 안식년 기간이었던 1919년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무단 통치와 불의한 폭정의 항거한 3.1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인돈이 안식년을 떠나기 전까지 교장을 맡았던 군산 영명학교는
군산지역 3.1운동의 중심지었고,
군산 인근과 호남지역에 3.1운동을 확산시킨 진원지가 되었다.
선교부 학교인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
그리고 선교부 병원이었던 군산예수병원의 직원들이 전면에 나서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선교부 학교와 병원은, 일제의 핍박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교회와 교인들도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인돈은 격변의 시기였던 1919년 봄에, 미국으로 첫 번째 안식년을 떠났는데
그는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남장로교 평신도 선교운동 연차 대회'에 참석하여
그가 보고 겪은 3.1운동에 참상과 의미,
그리고 조선교회가 당한 수난과 어려움을 전하면서, 한국을 위한 기도를 호소했다.
그의 연설 내용이 애틀랜타 지역 신문에 자세히 소개됨으로써
3.1운동이 미국 교계와 사회에 널리 알려지고
한국에 대한 지지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공헌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제91회 삼일절 기념식에서
인돈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국가 건립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유가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그가 안식년 기간 중에 참석한 미국 남장로교 평신도 대회에 관하여
인애자(인돈의 며느리)는, 인사례(인돈의 사모)가 스크랩한 신문기사 내용을 정리했다.
신문기사 내용은 이러했다.
「12명의 한국 선교사들이, 애틀랜타에서 화요일부터 열리고 있는
남장로교 평신도 선교운동 격년대회에 참석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한국에서의 드라마틱한 삶을 소개할 것이다.
그들은 주일 오후 애틀랜타에 도착하여
월요일에 리허설과 다른 준비들로 바쁘게 보냈다.
참석한 선교사들 중에는 서로득 대위부부, 이놀서부부, 남대리 부부,
위인사와 그의 여동생 위애미, 인돈, 구례인, 매요한, 릴리언 오스틴 양이 있었다.
인돈은 조지아 토머스빌 태생이며, 6년 전에 조지아텍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한국의 선교사업과 연관해서 기술학교를 설립하려고 그 나라에 갔다.
이 대회는 남장로교 평신도 선교운동과, 여성 조력회가 함께 주관하는 행사였고,
버지니아에서 텍사스에 이르는 남부지역의 남장로교 교회 대부분이 참여하는 큰 행사였다.
이곳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한복을 착용하고 한국의 삶을 소개하는 순서를 진행했고,
한국의 집, 결혼 풍습, 장례문화, 한국의 미션스쿨, 한국 교회에 대한 내용을 소개했다.」
인돈이 이 대회에서 알린 3.1운동에 관한 기사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장로교 평신도대회에 참석한 한국 선교사요, 조지아 출신 청년인 인돈은
애틀랜타에서 세계의 역사 속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혁명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했다.
토머스빌 출신이면서 조지아텍 졸업생인 인돈은, 최근에 미국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그는 한국에서 장로교인들을 위한 기술학교를 설립하려고 한국에서 7년을 보냈다.
인돈은 "한국의 운명은 동맹국에 달려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평화회의가 전해지자, 1500만 한국인들은
3000년 동안 지속된 민족성과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려는 일본의 10년간의 집요한 노력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일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평화회의에 참석하려는 한국대표단은
중국을 경유하여 파리로 비밀리에 출발했습니다."」
인돈은 지난 3월에 일어난 대규모 민중봉기(삼일운동)를 생생하게 전했다.
그것은 한국민족이 일본의 억압 아래 있는 이 나라의 무력함에 대하여
온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일으킨 시위였다.
인돈이 말하기를
"그것은 폭력 없는 혁명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어떤 한국인도 허가받지 않고는 무기를 소지할 수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언어로 말할 자유와
자신들의 언어로 신문을 펴낼 자유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지배하는 무단 정치에 대하여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의 법정에서 어려움을 호소할 수도 없습니다.
나라의 크기는 일본의 3분의 1이지만, 역사는 500년이나 더 길고,
근본적으로 일본과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 일본에 의해 말 그대로 병합되어 있었습니다. *1910 한일합방
한국인들은 온나라의 독립을 청원할 시위를 이끌어 나갈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3월 1일, 30만 명이 살고 있는이 나라의 수도 서울에서, 그리고 시골의 여러 지역에서
남녀노소 대규모 군중이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아무런 무질서나 폭력도 없었고
심지어 당국이 개입하여 군중을 해산하고자 했을 때에도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일제정부가 봉기를 잠재울 유일한 방법은, 시위 참여자를 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들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나이와 계층을 불문하고, 투옥되는 한국인들로 감옥이 가득 찼습니다.
평화로운 봉기는 온나라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군당국이, 행진하는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해 기병대를 출동시켰고,
수백명의 사람들을 발로 짓밟았습니다. 그래도 시위는 계속되었습니다.
수천명의 혁명가들은 그 누구도 저항하지 않았고, 그저 총에 맞고 칼에 찔렸습니다.
한국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한민족으로 살기 원합니다.
오랫동안 이 나라는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에 통치권을 차지했습니다.
이 일(통치권)이 1910년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이후로 한국의 언어를 없애고, 한국민족을 지우려는 시도가
일본이 병합한 이후 내내 있었습니다.
완전한 수동성과, 평화로움과, 무저항(비폭력)이야말로
이 나라의 혁명을 말해주는 것이며,
한국은 오직 이러한 수단만을 손에 지닌 채, 자신의 곤궁을 세계에 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돈의 생생한 증언은,
3.1운동이 일제 무단통치에 대한 비폭력적, 평화적 저항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탄압하는 일제의 폭력성과 잔혹함을 고발하는 것이 주된 논조였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관심과, 기도와 도움을 바라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국과 한국인들의 진실한 친구로서,
한국의 고통과 곤궁에 공감을 표하고,
우리 민족의 정의와 자유를 향한 평화로운 독립운동을 응원하고,
미국 교회와 사회의 지지를 호소한 간절함이 묻어 있는 인돈의 연설이었다.
'선교사들이 보고서 쓰고, 편지 쓰고, 증언하는 일 외에 3.1운동의 관여한 바가 없다'고
그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일부 역사학자들에게
과연 인돈 같은 선교사들의 공감과 지지가 3.1운동의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지
도리어 묻고 싶다.
그들 선교사들의 공감과 지지는,
삼일운동이 우리의 편협한 국수주의와 종족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세계 평화와 인류공용의 보편적 가치에 부합한,
그리고 기독교의 사랑과 평화의 정신에 상응하는
정의로운 민족 운동이었다는 역사적 정당성을 증명했다는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안식년 기간 중 인돈은,
남장로교 한국선교사인 유진벨의 딸 샬롯 위더스푼 벨(인사례)과 결혼을 약속했다.
유진 벨 (Eugene Bell, 배유지)은 1895년 4월 4일에 한국에 내한하여
1925년 9월 28일 전남 광주에서 숨질 때까지 복음전도에 주력하며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목포와 광주 스테이션을 설립하고
교회 개척, 학교 설립, 순회전도에 앞장서며
전남지역 기독교 선교의 기틀을 마련한 선교사였다.
유진벨이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901년 4월 그의 아내 로티 위더스푼 벨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자
그는 당시 5살이었던 아들 헨리와,
목포에서 태어나 아직 두 돌이 지나지 않은 딸 샬롯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190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그의 두 자녀는 켄터키의 아이들의 고모 집에서 살게 했다.
유진 벨의 어린 자녀들은, 어머니를 여윈 채,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아버지와 떨어져 미국에서 자랐던 것이다.
유진 벨은 1904년 5월, 군산 스테이션의 부위렴 선교사의 여동생인 마거릿 휘토커 불과 재혼했고,
광주에서 새로운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유진 벨과 오웬 선교사가 개척한 광주 스테이션은
전도와 교육과 의료 선교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고
특히 유진 벨은 선교부의 남학교와 여학교의 설립자로서 큰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평양에 있었던 장로회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성서학을 강의하면서
신학교육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1914년에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외국인 선교사로서는,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유진 벨의 딸 샬롯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아버지 유진 벨과 새 어머니 마거릿과 1년간 함께 살기 위해
1916년 8월에 한국에 왔고, 광주로 가는 기차역에서 인돈을 처음 만났다.
그들은 1917년 광주에서 열린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고,
인돈은 유진 벨에게 마차를 빌려, 샬롯과 다른 여성을 태워주었다고 한다.
샬롯과 유진 벨의 가족은, 몇 주 후 함께 미국으로 떠나면서
그녀는 조지아 디케이터에 위치한 남장로교 여자대학인 아그네스 스콧 대학에 입학했고
인돈과 살롯의 만남은 짧게 끝났다.
그러다가 샬롯이 대학 4학년 때인 1920년에
인돈이 안식년기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샬롯에게 관심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샬롯은, 인돈이 다른 여성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샬롯이 말한 다른 여성이란,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던 변요한 선교사의 막내 여동생으로 추정된다.
변요한 선교사는, 인돈과 샬롯이 교제하여 결혼하는데, 직접적인 역할을 한 숨은 공로자였다.
변요한 선교사는, 당시 인돈과 함께 미국에서 안식년 기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의 여동생을 통해, 인돈과 샬롯이 교제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다.
변요한 선교사를 한국으로 인도한 인물이 유진 벨이었였고,
인돈은 한국으로 인도한 사람이 변요한이었다.
그리고 변요한 선교사는, 유진 벨의 딸 샬롯과 인돈을 연결하여
인돈 가문이 유진벨로부터 시작하는 선교사 가문이 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했다.
인돈은 안식년 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인 1921년 여름에
샬롯에게 편지를 보내어, 당신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고
마침내 이들은 결혼을 약속했다.
당시 샬롯은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다음 해 여름에 그와 결혼하기로 했다.
인돈과 샬롯은 1922년 6월 10일, 미국 남장로교 일본 선교부의 본부가 있었던 고베에서
샬롯의 사촌인 찰스 로건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유진 벨과 샬롯의 오빠 헨리도 결혼식에 참석했다.
인돈과 인사례(샬롯)는 신혼여행으로
일본 나라 시의 아름다운 공원 안에 있는 호텔에서 꿈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로건 목사가 선교하는 도쿠시마에서 며칠 함께 보낸 후 한국으로 들어와
1922년 광주에서 열린 남장로교 선교사 연례회의에 참석하면서
인사례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인사례는, 인돈의 한국선교의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인사례는 그의 아버지 유진 벨에 이어,
그의 어머니 로티 벨이 묻혀 있는 한국 땅에서, 선교사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인돈과 인사례는 군산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인사례는 인돈과 함께 군산의 신혼집으로 가는 여정을 소상히 회고했다.
그들은 기차로 이동했는데, 군산 영명학교 교사들과 선교사들이
기차역에서 신혼부부를 기다리고 있다가 뜨겁게 환영해주었다.
하위렴 선교사 내외는 마차를 가지고 나와, 역에서 선교사촌까지 신혼부부를 태워주었다.
마차가 좁은 다리에 다다랐을 때, 하위렴 선교사의 부인은
남편이 언제나 조심스럽게 운전하지만, 자신은 마차에서 내려
걸어서 다리를 건넌다고 말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침내 군산 선교사촌에 도착한 인돈과 인사례는
며칠간 패터슨 선교사 가정에서 묵었다.
군산 스테이션의 하위렴 선교사 내외가, 곧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비어있는 다른 집은 외풍이 심했기 때문에
젊은 신혼부부는, 하위렴 선교사의 집이 더 편안할 것이라고 여겼다.
당시 유씨 라는 남성이 군산에 독신 선교사들을 도와 음식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선교사 부인들은 그 사람이 인사례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인사례는 그를 믿고 맡겨보기로 했다.
또한 인돈과 인사례는, 유씨가 추천한 그의 친척 여성도 고용하여 가정 일을 돕게 했다.
신혼살림을 장만하는 것은, 인돈이 모아놓은 가구가 많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고,
금방 정리가 되었다.
유씨는 인돈과 인사례와 함께 일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인돈 선교사 내외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고, 너무 편안하게 대하면서
오히려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기탄없이 말했다.
일손을 돕는 사람이 아니라, 상전 같이 젊은 인돈부부에게 가르치려 드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돈 내외가 손님을 초대하여 식사하는 일을 좋아했고
신혼부부가 따라가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손님을 자주 초대하라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반면 유씨가 천거한 여성 도우미는,
나중에 인돈의 자녀들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카이마미' 라고 불렀는데
처음부터 인돈가정에 큰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인돈의 네 아들은 그녀가 보모로서 돌봐주었는데
그들은 보모와의 추억을 사랑스럽게 기억했다.
재미있는 일화로, 그들이 어릴 때 보모가 목욕을 시켜 주었는데
얼마나 세게 문질렀는지, 때수건을 쓰지 않고 손으로만 닦았지만
솔로 문지르는 것보다 아파서, 목욕을 하고 나면 피부가 따끔거렸다고 말하곤 했다.
유씨는 인돈 가정에서 4년 정도 일하다가, 다른 일을 하기로 결정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사람들은 인사례가 유씨를 싫어해서 언젠가 해고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녀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고 힘주어 말한 바 있다.
대신 '경이' 라는 여성이 부엌 일을 하게 되었다.
인돈의 자녀들은 성장하면서 점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들이 식사 예절을 지키지 않아 부엌으로 쫓겨나 밥을 먹어야 하는 벌을 받을 때
경이가 놀려서 상처받았던 추억을 재미있게 떠올리곤 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인돈과 인사례의 가정에서 일하던 한국인 도우미들이
인돈 선교사 가정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한 가족처럼 지냈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생활방식이나 일하는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씨를
끝까지 품어주었던 인사를 포용심과 인내심이, 그녀의 말 속에서 드러난다.
이렇게 인돈과 인사례는 군산에서 신혼생활을 하며 1926년까지 4년간 살았다.
▲인돈은 군산 영명학교 교장 일을 맡아보면서, 학교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1922년에 남장로교 선교부 업무 배정 현황을 보면,
인돈은 선교 연합 공의회 남장로교 대표로서 교육위원회에서 활동했고,
평양 숭실전문 Union Christian College 의 남장로교 파송이사를 맡았다. *숭실대 전신
그는 학교 일로 점점 더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점심시간에 잠시 집에 들렀고, 저녁 늦게 퇴근했다.
점차 학교일로 인돈의 퇴근 시간이 늦어지자
인사례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매요한 선교사 가정에 가서 교제하다가
인돈과 만나서 함께 집에 돌아오곤 했다.
인돈과 인사례 부부가 선교사로서의 바쁜 일상과 신혼생활
어떻게 조화시켜 나갔는지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향한 굳건한 신뢰와 끈끈한 사랑은
이들의 선교와 가정을 지탱해준 힘이었다.
▲인사례가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보낸 첫 번째 편지는
1924년 10월 25일자 서신이었다.
이 편지에는, 군산 영명학교의 현황과, 인돈의 교육선교 활동,
선교사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면서 선교사인 인사례의 일상이 잘 소개되어 있다.
편지의 일부를 인용한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인돈은 이곳의 남자 미션스쿨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초등 과정에서부터 고등과정 3학년까지 약 300명의 학생이 있으며
학생들은, 인근마을과 약 1마일 떨어진 군산항은 물론이고, 주변 여러 지역에서 옵니다.
한국인 교사는 8명이 있고, 인돈은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과 과정은, 일본어, 한자, 성경을 제외하고는
미국 학생들이 공부하는 대부분의 과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은 야구, 축구, 테니스 경기를 하며, 한해 큰 행사로 운동회를 엽니다.
미국 학생들과 거의 같지만, 평균 나이는 많고, 일부는 결혼한 학생도 있습니다.
학교 시설은 열악하여 물질적인 측면에서 개선하지 않으면
많은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졸업장보다,
취업하는데 더 유리한 공립학교로 가서 졸업장을 얻으려 할 것입니다.
나의 업무는, 언어 공부와 지역 전도사역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저는, 유능한 한국인 보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8개월 난 빌리와 약 6개월이 지난 유진을 돌보느라 바빴기 때문에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나이 어린 여학생들에게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지난 봄에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10일 사경회에서
하루에 1시간씩 가르쳐 보았습니다만
그들이 얼마나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 30명으로 구성된 성경반을 가르쳤는데,
할머니들은 대부분 졸았고, 어머니들은 아이를 데려와서 거의 집중을 못했고,
일부 총명한 여성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았습니다.」
위의 편지에서 보듯이 인돈과 인사례는 1924년 당시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빌리는 1923년 4월 1일에 태어났고
둘째 아들 유진은 1924년 4월 21일에 태어났다.
보모의 도움을 받아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인사례는 어학 공부와, 여성을 위한 성경반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다.
▲군산에서 지내면서 인돈과 인사례는 여름에 지리산을 찾아 캠핑을 하며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이 지리산에서 휴식을 보내게 된 것은,
남장로교 선교부가 과중한 선교 업무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선교사들과
선교사 가정을 위한 여름 휴양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지리산에 캠프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지리산 선교사 캠프의 설립에, 인돈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1년 봄, 선교부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지리산을 찾기로 하고,
위인사 선교사에게
지리산을 여름 휴양지로 활용할 계획을 보고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일을 돕기 위해,
각 스테이션에서 위원을 임명하여 조사하는 역할을 맡겼다.
이에 따라 1922년, 인돈은 군산 스테이션을 대표하여 위원으로 참여했고,
그 외에 위인사, 조하파, 노라보, 구례인, 서로득이 여름휴양지 위원회에 참석했다.
위원회는 제국대학 Imperial Univ. 과 협상하여
필요한 땅을 구매하거나 임대하는 협상을 하도록 위임을 받았고
1922년 여름에 시험적으로 지리산에서 최소 2주간 휴가를 시행하도록 했다.
지리산 위원회는 일제 당국 및 땅 소유자와 협상하여
마침내 1923년 여름, 지리산에 캠프를 설립하는 허가를 받았다.
그 과정은 이러했다.
선교회의 요청에 대하여, 조선 총독부는
선교회가 바라는 땅은, 산림조성 시험을 목적으로
총독부에 양도된 부지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땅에 사용 허가권은 제국대학에 있음을 알려왔다.
전남지사는 1923년 여름에, 지리산에 캠프를 설치하는 허가를 받는데 행정적 지원을 했다.
위원장 서로득과 인돈은, 도쿄로 건너가서
제국대학 관계자와 만났고
이 땅에 대한 영구적인 대여를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리산 캠프를 위한 토지 사용을 허락받았다.
이로 보건대, 지리산 선교사 캠프 설립에 인돈이 중요한 기여를 했고,
그는 이 일의 성사를 위해, 외교적 협상능력을 발휘했다.
인애자의 기록에 따르면, 인돈은 지리산 캠프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결혼 전에도 미국에 있는 인사례에게 편지를 보내,
지리산 캠프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했고,
신혼 첫 해인 1922년 여름에 인사례와 함께 그곳에 가서 텐트를 치고
한 달가량 머물며 지내기도 했다.
여름에 무더위와 전염병을 피하고, 밀려드는 일과 사람으로부터 잠시 몸을 피하여
방해받지 않고 공부에 집중하고 사역계획을 세우는데, 그만한 곳이 없었다.
둘째 아들 유진을 낳았을 때도,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지리산에 가서
인돈이 직접 지은 집에서 지낼만큼, 가족 모두 지리산 캠프를 좋아했다.
지리산 캠프는 선교사들의 재충전과 휴식의 공간이었을뿐만 아니라
가끔씩 남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를 여는 회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고
선교사들이 성경을 연구하며, 사경회와 기도 모임을 갖는 수양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인돈가정은 때때로 여름에, 일본의 가루이자와에서 *나가노 현에 위치한 산림휴양지
로건 목사가족과 여름을 보내기도 했다.
가루이자와까지 가는 여정은, 꼬박 이틀이나 걸리는 매우 험한 길이었고
첫째 아들이 아직 어릴 때라, 산에서 캠프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돈 가정은, 이곳에서 일본에 있는 선교사들과 교제하며 휴식을 가졌고,
인돈은, 당시 일본 선교사로서 나중에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 총무가 된
나비 풀턴 박사와 테니스를 치며 교제했다.
인돈은 풀턴 박사와, '일본의 알프스' 라고 불리는 나가노 현 일대의 산으로
하이킹 여행을 가기도 했다.
인돈과 풀턴은 깊은 교제를 나누었고
이후 일제말기 남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신사참배 문제로)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이들의 우정과 신뢰관계는,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와 한국교회가
아무런 갈등과 의견의 차이 없이 일사불란하고 공고하게 협력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