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엡4:14-16 설교스크랩, 정리 ☞ ▣영적성장
지난주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최근 예수님을 영접하고 열심히 신나게 믿고 계시는 이승택 성도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교우께서는 한국에 계실 때 서울에 있는 어느 유명한 사찰에 다니시면서
부처님을 섬기던 불자이셨습니다. 이곳 미국에 와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불교와 기독교, 절과 교회, 스님과 목사, 불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가지 점에서 비교가 되는가 봅니다.
그 분 얘기에 의하면,
절에서 예불을 드리는 것이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비슷해 보이는데,
한 가지 다른 점을 말하자면,
절에는 눈물이 없고, 교회에는 눈물이 있다는 점이랍니다.
오랫동안 절을 다녔는데, 예불을 드리며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니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고,
(더 심각한 것은) 당신 자신도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겁니다.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얼마나 큰 것을 배웠는지 모릅니다.
뭐, 이것을 가지고 불교가 못하다, 기독교가 더 좋다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핵심적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이 말을 듣고는 ‘나는 그래서 불교가 좋다. 징징 짜는 꼴은 정말 보기 싫다.’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저는 그것 때문에 기독교를 좋아합니다.
이승택 성도께서 ‘이게 뭔지 모르겠다.’고 한 그것,
기도하는 중에 혹은 말씀 듣는 중에 우리를 찡하게 만드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는, 터치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영적 성숙, 영적 성장’에 대해서 말씀을 나눕니다.
한국 교인들을 비유하는 말이 종종 ‘머리만 큰 가분수’라고 하죠.
아이가 태어나서 10년, 20년이 지났는데, 그 동안 머리만 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만 성인의 머리이고, 몸은 여전히 어린아이 몸이라면
그것만큼 보기 흉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A와 B가 나란히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A는 5년이 지나자, 신앙이 부쩍 성장했습니다.
10년이 지나자, 그의 신앙이 영적으로, 전인적으로 크게 성숙해서
이제는 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B는, 5년이 지나도 제자리, 10년이 지나도 제자리 걸음입니다.
교회는 안 빠지고 다니는 데도, 자기가 보기에도, 남들이 보기에도
신앙과 믿음에 성장이 없습니다.
그나마 교회를 등지지 않고, 저버리지 않고, 계속 다닌다는 것이 다행일 정도입니다.
이것을 ‘레슨’에 비유해 볼까요?
A와 B가 나란히 테니스 레슨이나,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고 칩시다.
A는 꾸준히 테니스나 레슨을 스스로 연마했습니다.
선생님께 코치도 받았지만, 평소에 자기 스스로 연습 practice 한 것입니다.
그런데 B는, 그냥 레슨 시간에 참석만 헀지,
평소에 자기 스스로 연습 practice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에는 별로 실력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
현저한 실력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죠.
기독교 신앙은, 한 번 입문해서 세례 받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하지만, 태어난 그날부터 계속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성장을 위해서는
-내주 연습
-분별 연습
-순종 연습이 꼭 필요합니다.
여기서 ‘연습 practice’이란, 다른 말로 ‘실천’입니다.
귀로 듣는 이론이 아니라, 한 번 내 몸으로 부딪혀서 실천해 보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신앙과 믿음은 비로소 step by step, little by little 성장하는 것입니다.
▲1. 첫째는, ‘내주 연습’(abiding practice)입니다.
‘내주’(內住)란 ‘안에 살다’는 뜻인데,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살아있는.. 그 연습을 매일 하는 것입니다.
‘동행 연습’이라고 해도 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듯, 내 존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주일 한 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안 됩니다.
매일,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며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냥 교회를 오락가락하다 보면, 자연히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송하지만 불자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냥 마음 편하게 사찰에 다니기만 합니다.
그저 ‘치성’을 잘 드리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致誠 : 정성을 다함)
우리는 자유 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입니다.
우리 안에는 죄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내주 훈련’을 소홀히 하면 어느 새 포도나무 줄기에서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앞에 잠잠히 머무는 시간을 가져야 영적으로 삽니다.
그래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그랬고,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라(엡6:18)’고 했죠.
사무엘도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마26:41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마치 테니스 왕초보, 수영 왕초보, 피아노 왕초보와 같습니다.
그러나 1년, 2년, 3년... 꾸준히 연습하는 가운데,
점점 프로페셔널(전문가) 수준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 내외가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제 비행기는 솟아올라서 안정고도에 들어갔습니다.
좌석 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싸인이 떴습니다.
그런데 옆좌석에 보니까, 젊은이가 성경책을 꺼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내외는 순간 긴장감이 맴돌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내외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몇 5~6시간 동안이나
꼬박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계속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기도하신 것이죠.
성경책을 읽던 젊은이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되기도 쉽지 않는구나... 내가 괜히 성경을 읽어서, 쉬시는 목사님을 괴롭혔구나...’ (그냥 우스개 얘기)
그런데 사실 이렇게 ‘쉬지 말고 기도하려면’
성경구절을 수십~수백 구절 암송하고 있어야 됩니다.
아니면 기도제목을 수십~수백 개 암송하고 있어야 됩니다.
혹은 기도수첩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녀야 됩니다.
혹은 찬송가, 복음성가를 수십 개 외우고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어쨌거나 ‘내주 연습, 동행 연습’은 말 그대로 프랙티스가 필요하다는 거죠.
우리는 능수능란하게 활약하는 운동선수, 음악연주자에게 갈채를 보냅니다만,
그들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술들은
피나는 연습 후에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2. 둘째는 ‘분별 연습’(discerning practice)입니다.
크고 작은 모든 선택과 결정 앞에서 주님의 뜻을 묻는 연습입니다.
‘이때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이로울까?’라고 질문하던 버릇을 버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일까?’라고 질문하는 버릇을 키우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과 사색과 후에는,
실제 삶에서 이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주님께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영적으로만 감지되는 주님의 신호를 분별하려면, 자꾸만 시도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혼동합니다. 잘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하다 보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훈련을 통해 그리고 연습을 통해 습득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수많은 연습을 통해 운동감각이 발달하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분별 연습을 통해 영적 감각을 발달시켜야 합니다.
△‘1년에 한 개씩만 고치면 성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나 교인이, 자기 잘못을 1년에 1개도 고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고칠 게 특별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신앙인격은, ‘영혼의 지문’과도 같습니다.
지문은 바뀌지 않는, 자기 혼자만의 고유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인격도, 나 혼자만 가진 고유한 것입니다.
이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습니다. 영적 성숙, 영적 성장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은 요일3:2절에 의거, 천국에 가면, 자기가 예수님처럼 변화될 것으로 낙관합니다.
요일3:2절에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화된다’는 말은,
죽을 육체 mortal body가, 죽지 않는 부활체 immortal body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인격이, 그 영혼의 지문은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신앙 인격(영혼의 지문)이, 죽고 나서 예수님처럼 확 변해버린다면,
그건 ‘천사가 된다’는 뜻입니다. 천사들은 영혼의 지문이 없습니다. 그저 순종만 합니다.
당신은 죽고 나서 천사처럼 되기 원하시나요?
하나님은 우리를 ‘쳔사로’ 창조하신 게 아닙니다.
요지는, 우리는 오늘도 ‘영혼의 지문 (신앙인격)’을 가지고 살다가,
죽어도도 그걸 고스란히 가지고 천국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게 만약 어떻게 죽어서 변화되어버린다면,
그건 내가 졸지에 천사가 되어버리는 격이 됩니다.(여기서는 안 좋은 뜻)
그래서 우리는 신앙인격을, 다시 말해서 성화를,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에, 끊임 없이 이루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1년에 하나씩이라도 고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지금 내가 가진 신앙인격으로는,
어쩌면 천국에서 ‘입장 금지’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가서도 계속 다투고, 싸우고, 시기하고, 험담하고, 유혹하고 그러면,
거기가 천국이 되지 않지요. 그러니까 천국에 입장을 못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는 ‘흰 옷, 예복’으로 비유합니다.
‘흰 옷, 예복’을 입지 못하면, 잔치 자리에 가서도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남을 당하는 것입니다. 마22:13
-성도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흰 옷을 입혀 주십니다.(칭의)
-그 후로는, 계속 흰옷을 빨며 살아야 합니다.(성화)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칭의와 성화가 같이 가는 것이.. 온전한 구원론입니다.
칭의 한 쪽만 강조하는 것은, 성경의 일부분만 이해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 쪽은 5만원 권이 맞는데, 뒤쪽은 백지인.. 그런 위폐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위조지폐를 사용하면 안 됩니다!
구원론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칭의와 성화를 같이 강조해야지, 한쪽만 강조하는 것은
온전하지 못한 구원론인 것입니다.
▲3. 셋째는, ‘순종 연습’(obedience practice)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이 되면, 그것에 우직하게 순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순종 훈련을 하다보면, ‘이건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고의적으로,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그 주님의 뜻에 의도적으로 불순종 할 때가 간혹 있습니다.
주님은 그 길을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가 우겨서 갈 때도 있고,
주님은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가 미쳐서 할 때도 있고,
주님은 그 일을 시키셨는데.. 내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불순종할 때가 있죠.
그런데 지나고 보면... 거기에 대한 대가(징계)가 반드시 따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몇 대 얻어맞기도 하고, 여러 가지 손해를 볼 때도 있죠.
그러면서 스스로 학습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것이, 결국은 나에게 손해가 막심하구나!
순종하는 것이, 결국은 나에게 평안이구나!’
주님과 동행하는 연습을 해 나가다 보면,
순종과 불순종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될 기로에 놓입니다.
처음에는 거의 ‘불순종’ 즉, 내 육신대로 살다가도
차츰차츰 ‘순종’의 생활이 연습되어, 내 몸에 익숙하게 되면,
나중에는 그 ‘순종의 기쁨과 혜택’을 즐기는 수준까지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눈 질끈 감고 순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순종 연습을 하다 보면, 내 뜻대로 사는 것보다 더 큰 자유와 기쁨을 경험합니다.
손해 보는 것이 있지만, 그 손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점점 순종하는 데 민첩해지고 신속해지며 용감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책에, O/X 라든지 무슨 표시를 해 놓는다고 합니다.
자기가 순종한 말씀, 자기가 아직 순종하지 못한 말씀.. 그렇게 표시를 해 놓고서는
아직 순종하지 못한 말씀에는, 다시 도전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내주 연습’과 ‘분별 연습’과 ‘순종 연습’을 매일 지속하다 보면,
우리는 점점 능숙한 연주자처럼
혹은 잘 훈련된 운동선수처럼,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민첩하고 능숙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엡4:14-15
여기에 사용된 두 단어를 잠시 주목해 보십시다.
“흔들리다”라는 단어와 “이리저리 밀려다니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요!
여기에서 사용된 헬라어는 파도에 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물체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이 시대의 사상과 풍조에 밀려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물리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에 휘둘려 이리 저리 밀려다닙니다.
마치 홍수에 밀려온 널판지가 바다에 떠다니듯,
그렇게 정처 없이 흔들리고 밀려다니는 것입니다.
▲성숙된 성도의 삶에는 ‘안정’과 ‘여유’가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내주 연습 – 분별 연습 – 순종 연습을 거치고 나면, 무슨 혜택이 있나요?
네, 사면, 팔면으로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시간에는 ‘안정’과 ‘여유’하는 한 가지 측면만 살펴봅니다.
내주 연습 – 분별 연습 – 순종 연습을 거치고 난, 그래서 성숙하게 된 성도는
그의 나이에 관련 없이,
그의 지위에 관련 없이,
그의 경제 수준에 관련 없이,
그의 건강 유무에 관련 없이,
그의 국적이니 피부색에 관련 없이,
자기 삶이 안정되고, 여유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지상에 살지만, 천국을 날마다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안정’이 생기니,
이제는 주위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친지들을 돌아보고,
교우들을 돌아보고,
나아가서는 세상을 돌아보고, 염려하며 중보기도합니다.
오늘날 개인주의 사조가 팽배한 가운데,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밖에 모르며,
심지어는 부모도, 형제도 저버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여유’가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살지/누리지 못하기 때문인 거죠.
우리는 천국을, 죽고 나서 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천국은, 먼저 살아있을 때부터 누리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미 왔다’라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그 천국을 누리는 삶을 살려면, 즉 평안하고, 안정되고, 여유로운 삶을 살고,
나아가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려면,
내주 연습 – 분별 연습 – 순종 연습을 거쳐야 합니다.
무조건 예수님 믿고 영접하는 그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연습 practice 이란 말은, 오랜 시간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두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지만,
두 세 달 배운 아니와, 5~10년 연습한 아이를 비교해 보십시오.
이렇게 우리가 내주 연습 – 분별 연습 – 순종 연습을 거쳐서,
모두 ‘성숙한 영혼의 지문’ (내 ID)을 갖고서
지상에서도 천국 생활을 누리다가
죽어서 천국에 안전히, 넉넉히 들어가게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