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미끄러질 뻔할 때 | 시 73:1-3_25-26 / 23.12.15 - YouTube
◈거의 미끄러질 뻔할 때 시편 73:1~3, 25~26 2023.12.15.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모든 일이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살다 보면 생각하는 대로, 계획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분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올라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올 때도 있습니다.
살면서 시련을 경험하면, 끝없이 추락하는 듯합니다.
자신의 꿈과 현실이 전혀 맞지 않는 듯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두 번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사람들은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내가 누구인가’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성찰합니다. 이런 것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성공하기만 하면, 자기 착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실패를 통해 고통을 경험해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 고통을 경험할 때,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게 됩니다.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화려해 보입니다. 그 속에서 모두 승승장구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성공하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성공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실패를 경험합니다. 아픔을 경험합니다.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춘 대가 大家는 훌륭한 실력을 갖추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뛰어난 실력자가 됩니다.
실패하면 아픕니다. 실패는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실패한 사람은 자신이 실패한 것으로 인해 고통을 경험합니다.
▲본문 시73:3절에 보면,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보기에 악인은 악을 행하는데도 고통을 겪지 않고 오히려 형통하는 듯했습니다.
그에 비해 자신의 형편은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실패한 것으로 인해 고통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며 고통을 느꼈습니다.
시인은 악인의 삶이 형통한 것에 반해,
자신의 삶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를 생각하며 고통했습니다. 신음하고 탄식했습니다.
본문 시73:2절에 보면,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시인은 자신이 위기를 경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경험한 후, 시인은 당황했습니다.
시험을 겪을 때, 모든 것이 흔들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시험을 겪으며 중심을 잃고 모든 것이 흔들리는 듯할 때,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이런 일을 종종 경험합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 삶이 멈추어 버린 듯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합니다. 자신이 실패자가 된 듯합니다. 자신이 무가치한 듯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혐오하기도 합니다.
▲시73:22절에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본문 시편 73편을 기록한 시인은,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이 짐승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짐승 같다는 말은 어리석다는 의미입니다.
실패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봅니다. 대부분은 자신이 실패한 것으로 인해
‘나는 부족하다.’. ‘나는 못났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패했을 때,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성찰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러한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실패할 수 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마귀는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마귀는 우리를 더욱 절망하게 합니다.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시73: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인은 자신은 고통을 겪는 데 반해,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며 고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시인은 악인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시인이 보기에는 악인이 형통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성소에 들어가는 순간, 시인의 마음이 정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모든 결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시73:23절에 보면,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23절의 말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시작합니다.
(영어성경에는 Nevertheless, Yet 등으로 번역함)
이것은 반전이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에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없었다면, 시편 73편은 절망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시편 73:23절에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인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인과 항상 함께하셨습니다.
상황이 어려운 것보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신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십니다. 긍휼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눅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집을 떠난 아들을 아버지가 받아들여 준 것이 중요합니다.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왔지만,
아버지가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면, 아들이 돌아온 것은 의미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만약 아무도 우리를 일으켜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무한히 베푸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3
삶을 돌이켜보세요. 우리가 넘어졌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오른손을 잡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소망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셔서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신다는 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실패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살면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삶에 마치 폭풍우가 불어오는 듯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시37:24절에 보면.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거의 넘어질 뻔하고 미끄러질뻔 하지만,
완전히 넘어지지 않습니다. 완전히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본문 시73:2절에 보면,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살다 보면, 실수하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바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일어납니다.
실패했을 때, 신자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결론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마무리하십니다.
△누가 마무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졸작이라도 대가가 붓질하면 작품이 달라집니다.
마무리하는 것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초등학생 아이가 그림을 그립니다. 초등학생 수준에서 약간 잘 그린 그림입니다.
그러나 대가가 몇 번 붓으로 터치해 줍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은, 대번에 아주 멋진 수준급의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삶이 망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내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마무리해 주십니다. 대가가 붓으로 덧칠해 주십니다.
누가 마무리하는 것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롬8: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는 아주 넘어지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번 넘어지면 아주 넘어집니다. 다시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회복되기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넘어지더라도 아주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시23:3절에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시고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일으키시고 회복시키셔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윗은 엘라 골짜기에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행 13:22)”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영적 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죄를 범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이제 다윗은 끝났습니다.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넘어졌지만 아주 넘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다윗을 붙드셨습니다. 다윗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갈멜 산 정상에서 겨루어 이겼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엘리야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자신의 사명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습니다.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이런 일을 경험했으니, 우리도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때에도 사고를 많이 쳤습니다.
일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문제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그가 예수님께 충성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타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전처럼 물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갔습니다.
단순히 패배감을 느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실망했습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비관하는 것, 자신을 경멸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넘어졌으나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죠. 미끄러졌으나 완전히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 시73:2
다윗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렇듯 다윗, 엘리야, 베드로가 넘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아주 넘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73: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붙드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넘어지거나, 완전히 미끄러지지는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새롭게 회복시키셨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73:25
▲우리는 물질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물질주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비교하고 경쟁하며 삽니다.
그런데 살면서 늘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실패합니다.
실패하면 마음이 무너지는 듯합니다. 자신을 실패자라고 단정합니다. 자신을 무가치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기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적,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기준에 따라 실패를 경험한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사 42:3).
우리가 흔들릴 때, 넘어졌을 때, 미끄러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굳게 붙드십니다.
연약하여 계속 넘어지고 넘어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마침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어두운 것은 세상에는 회복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한 번 넘어지면 아주 넘어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회복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졌을 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뿐 아니라,
우리를 아름답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새롭게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놀라운 권세입니다. 영광스러운 권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권세도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권세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시편 73편 25~26절에 보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는 육체와 마음이 쇠약합니다. 우리는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반석, 영원한 분깃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73:28절에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최고의 재산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보다 복된 것은 없습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마세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멀리하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고통을 겪을 때에는 힘듭니다. 그러나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어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의 넘어질 뻔하고 우리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은 최고의 복입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주 넘어지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우리가 거의 넘어질 뻔하고 우리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오른손을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결론 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결론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늘 경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