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09] 모세의 하나님 (신4:29-40절)│2024.1.14 주일예배 (youtube.com)
◈모세의 하나님 신4:29~40 ☞지난 글 보기
신명기 4장은, 신명기에 나오는 세 편의 설교 중
첫번째 설교의 마지막 결말 부분입니다.
여러분, 만약 그 설교가 마지막 설교라면, 여러분이라면 무슨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얘기하지 않겠어요?
'내가 평생 신앙생활 해왔는데, 가장 중요한 건 이거야'
그래서 모세가 그 자녀 세대에게 남겨주는 마지막 설교거든요.
인생의 막바지에서, 마지막 3부작 시리즈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에서 정말로 내 신앙의 정수, 진수를 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특별히 결말부분에는, 그 말씀을 더 강조하겠지요.
그래서 신명기 4장의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가 전하고자 했던 모든 메시지 중에서도
가장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 자녀 세대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모세가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경험했던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에 대한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세가 전하고 있는 '모세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함께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1. 첫번째로, 모세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모세가 전하는 '모세의 하나님'의 첫 번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4: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그렇죠. 모세의 하나님은 첫째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속성이 '말씀'이지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은 말씀이시라'는 것은, 모세만 그렇게 느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성경이 얘기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이죠.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모세의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도 아니었고,
모세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불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모세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00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는 얘기는, 전에 전해서 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오래전에 우리 민족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이고,
애굽으로 내려온 다음에 요셉 이후로, 모세의 때가 될 때까지 400년 동안
이때는 아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 없었어요.
400년 전이면 오늘날로 얘기하면, 임진왜란 때입니다.
임진왜란 때 하나님이 이순신 장군에게 말씀하셨어요.
그 다음에 지금까지는 아무도 하나님의 음성을들은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분명히 이렇게 인식하셨을 거예요.
물론 '옛날에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그 전설 같은 얘기를 듣고 있지만
그거는 정말 설화 비슷한 것처럼 인식됐겠지요. 뭐 지난 4백년 동안 아무도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저 섬겨야 될 민족의 수호신, 뭐 그런 하나님이었지,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침묵' 속에 이들의 하나님은 점점 종교화되어 갑니다.
이게 오늘날로 얘기하면, 뭐와 비슷하냐면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은 없어도
종교란에다 뭐 쓰라 그러면 '기독교' 이렇게 쓰잖아요. 그것 하고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종교로서의 하나님' 그런 정도의 하나님으로 알고 살았었습니다.
자 그런데 어느 날, 그냥 종교로서 알고 있던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거죠.
모세에게 말씀하신 거예요. 모세가 처음으로 깨닫습니다.
'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은 그냥 종교란에다 적는 그런 '기독교, 여호와' 뭐 그런게 아니고
오늘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구나!
이 순간이, 모세 안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안에
이제껏 400년이나 타성에 젖어 있던 '종교적인 하나님'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게 모세의 신앙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여러분, 모세는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또 영적인 열정도 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자기 백성을 위해서, 나이 40세가 됐을 때,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잖아요.
그러니까 열정이 있는 사람이죠. 또 신앙도 있어 보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종교적 신념'에 가까웠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나온 신앙은 아니었어요.
자 그런 모세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모세의 신앙이, 종교적인 신념에서 영적인 여정이 됩니다.
맞아요.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음성)을 들을 때,
종교적 신념에서 비로소 영적인 여정이 시작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하고 술 담배 하지 말라, 딱 세 마디만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까?
이게 참 슬픈 일인데요.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냐면,
'세 마디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즉 '주일 성수해라, 십일조 생활해라, 그리고 술 담배 하지 마라'
혹시 여러분에게도, 그 세 마디만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까?
그리고 나머지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세요?
아니요.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우리 인생 가운데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세요. 불 가운데 말씀하시는 분이세요.
이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그저 종교란에 기록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타성에 젖은 모태신앙이 아니라,
그런 습관적, 문화적 기독교에서, 나를 살아있는 신앙이 되게 하는 것은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은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이 하나님을 경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는 신앙인이 됩니다.
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할 때
비로소 우리가 진짜 영적인,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아멘!
▲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어떤 계시를 듣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듣는다'는 걸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세요.
어느 날 기도하고 있으면 정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OO야, 너는 오늘부터 뭐를 해라' 뭐 이렇게 말씀하시는 줄로 알아요.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정말 급할 때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어요. 근데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죠)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성경말씀을 내적 음성으로 감동해서 생각나게 하시거나, 떠오르게 하시죠.
또 자기가 모르는 생소한 말씀이라 하더라도,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게 성경에 나오는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반적인 방법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요.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과 전혀 다른 별개의 어떤 계시를 받는다거나
또는 성경을 새로 기록하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이 말씀은 완전 무결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완전한 계시예요.
자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건 뭐냐 하면,
이 말씀이 불로 내 마음과 영혼에 각인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마치 불로 인치듯이,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인쳐지는 거예요.
▲제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영적인 위기가 왔습니다.
큰 죄를 짓거나, 실수하거나, 넘어지거나 하는 건 아니었는데
그냥 서서히 서서히 이제 영이 죽어가기 시작했어요.
어느 순간인가부터 신앙이 서서히 화석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뭐라 그래야 될까요, 신앙이 점점 학문화 되었어요.
전에는 제가 굉장히 뜨겁고, 정말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고 이랬었는데
어느날 부터인가 종교관련 서적, 종교철학서적을 막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재밌으니까 막 종교철학 서적 읽고, 진보신학 서적 읽고 그러면서
막 너무너무 거기에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갔어요.
그러다보니까 제게 신앙생활이, 기독교적 철학과 기독교 사상 추구 방향으로 진행되었어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의 뜨거운 만남도 점점 희미해져 갔고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인가부터 완전히 멈췄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감격도, 내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감격도 서서히 식어갔고
그러다가 완전히 멈췄습니다.
그저 열심히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그저 착하게 살아가는 그런 기독교적 가치를 가진
그런 청년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 마음속에 있던 불은 서서히.. 그러다가 거의 꺼져 버렸고,
뭐 그러다 보니까 기도도, 성경말씀도 제 인생에서 다 꺼져 가더라고요.
그리고 철학과 신앙과, 신념과, 사상.. 뭐 이런 것만 남는 거죠.
자 애굽에서 이스라엘도 깊은 어둠 속에서 정말 4백년의 침묵기를 보냈는데,
저도 비슷한 영적인 침묵기를 경험했다는 거죠.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요.
자 그러다가 제가 이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미국 유학을 가서 새로운 교회를 만나게 됐는데,
그곳에서 먼저 유학 오셨던 어떤 선배님 한 분이, 저를 만나서는 도전을 했어요.
그런데 그 도전을 받고는 제가 집에 돌아왔는데, 하여간 뭔가 제 안해서
'성경을 다시 읽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이렇게 딱 빼서 들었는데, 이게 너무 오랜만에 성경을 펼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어디서부터 읽어야 될지를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아무데나 툭 펼쳤습니다. (이 얘기는 매우 조심스럽죠. 특별한 예외적 경우입니다.
성경은 아무데나 툭 펼쳐서 읽으면 안 됩니다.)
너무 오랜만에 성경을 펼치니까, 어디 봐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 툭 성경을 펼쳤어요.
이사야서 55장 말씀이 나왔습니다. 거기가 펼쳐졌는데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사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 말씀을 읽는데요. 정말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불덩어리 하나가 올라오는 거예요.
확 하고 올라오면서, 그냥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밝은 빛이 실제로 임한 건 아니에요.
근데 밝은 빛이 제 안에 확 비취는 것 같았어요.
눈을 뜰 수 없는 것 같은 밝은 빛이 저한테 확 비치는.. 그런 기억이 제게 남아있어요.
실제로는 빛이 비친 건 아닌데, 밝은 빛이 하늘로부터 확 쏟아지는 거 같았어요.
그것은 그저 기록된 글자가 아니었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제 영혼에 그냥 쩌렁쩌렁 울리는 거예요.
'너는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해서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일을 하느냐?'
와 이 말씀을 하시는데, 제 심장이 그냥 뛰기 시작했어요.
'아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구나.
성령께서 지금 내 영혼에 말씀하시는구나'
이 말씀이 정말 글자가 아니라, 이 글자가 살아나서,
살아계신 분의 음성으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하염없이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몰라요. 펑펑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 영혼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제 영적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처럼 우리 안에 각인시키시는 것,
우리 마음과 영혼에, 성경 말씀을, 성령께서 불처럼 각인시키시는 것,
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반적인 방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성경 말씀을 사랑합니다. 그 말씀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그 말씀과 함께 하루를 마치는,
그 사람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처럼 우리 영혼 가운데 각인시키시는 거예요.
이 말씀을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 마디'만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탈출하게 됩니다.
'주일 성수해라, 십일조 떼먹지 말라, 술담배 하지 마라'하는 그 세 마디에서부터 탈피해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구체적으로 개입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깨우시고, 잠자는 영혼을 깨우시고,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아멘!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2024년에는 여러분의 하나님도, 모세의 하나님처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불 가운데서 말씀하신 하나님,
성령의 불 가운데 그 말씀을 우리 영혼의 각인시키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번째로 모세의 하나님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신4: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의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늘에서 그 음성을 듣게 하시고
땅에서는 큰 불을 보이신 하나님이셨어요.
그러니까 모세의 하나님은, 초자연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초자연의 하나님이십니다.
근데 여러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뭐냐면 '살아계시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살아계시는 분이 말씀만 하실까요? 당연히 일을 행하시죠.
우리 인생 가운데 개입하셔서, 당연히 (일상적인 + 기적같은) 일을 행하시는 분,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모세의 인생 가운데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모세와 그 백성을 바로 앞에서 탈출하게 하시고,
그 앞에서 매일 만나를 주시고,
또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맙시다.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은, 초자연의 하나님이세요.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분이세요.
초자연과 신비한 것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게 조금 분별이 필요한데,
우리가 초자연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신비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을 읽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행하고.. 이게 건전한 신앙이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을 우리 이성으로 제한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적 신앙이 아닙니다.
제 안에 믿음이 하나 있는 건 뭐냐면,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어요.
그걸 우리는, 나의 짧은 이성과 경험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보통의 경우, 자연법칙 가운데서 행하십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죠.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그것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초자연(기적)도 행하십니다.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초자연으로 행하십니다.
신비주의자와 건강한 믿음의 차이는 이거예요.
신비주의자는 이 일상의 삶(자연법칙)을 무시해요. 그리고 계속 신비한 것만 추구해요.
이건 신비주의자예요.
그런데 건강한 믿음은 뭐냐면, 일상의 삶을 충성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모든 가능성의 문을 열어놔요. '하나님 뭐든지 하실 수 있어!' 이게 진짜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사람은 하루 세끼 먹도록 창조하셨고, 안 먹으면 죽는 거지요.
아무리 여러분들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고 몇 달만 굶어 보십시오. 죽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가, 평소에 건강 관리를 하나도 안 해요.
그러면서 그냥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고 나가면,
그렇게 자연법칙을 무시하고 살다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지요.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대로, 규칙적으로 살고, 음식도 가려 먹고, 운동도 하고,
그래야 건강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이 삶의 방식(자연법칙)을 정한 분이 누구세요? 하나님이시거든요.
그러니까이 삶을 충성되게 산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헌신인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규칙적으로 살고, 운동도 하고, 건강관리도 하고,
이런 것도 이런 룰을 정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존경이고, 존중이고, 믿음입니다.
이 부분(자연법칙)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동시에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세요. 원하시면 뭐든 하실 수 있으세요.
이걸 내가 제한하면 안 돼요. 필요하다면 기적을 나타내 보이실 수 있고,
필요한 경우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거죠.
(*여러분, 선교지에서 특히 기사와 이적이 종종 일어난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거기 오지에는 병원도 없고, 약국도 없고, 있어도 약을 살 돈이 없어요.
거기에는 기적말고는, 다르게 병이 치료될 방도가 없어요.
거기서는 기도하면.. 정말 병들이 기적적으로 낫는 거예요.
어쩌다가 한 번 신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유의 역사가 매우 자주 일어납니다.
회교도들이 가끔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신하는 경우가 있는데,
과거에 보면, 많은 경우 자기가 '꿈에 예수님을 만나서 그 분 음성을 들었다'고 했어요.
왜냐면, 그 중동 회교 나라의 환경에서, 그렇지 않고는 예수 믿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비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예수 믿게 하시는 거죠.
그런 식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현대에서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그리고 음식이 꼭 필요한 상황일 때,
정말 선교사 자신도 믿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신비한 기적이 일어나는 거죠)
신비주의는 뭐냐면, 이성이나 자연법칙을 무시하고, 계속 신비한 것만 우선적으로 추구해요.
그리고 또한 그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기보다는
그 기적의 통로가 된 '자신'을 은근히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요.
그들이 신비한 것을 계속 추구하는 이유가 뭐냐면, '자신'이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거죠.
그러다 보면, 결국은 또 '가짜 신비주의'로 빠져서, 없던 기적도 둔갑시켜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속습니다. 자기가 기적을 행한 줄 압니다.
여러분은 건강한 신비주의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말씀 말고는 안 믿어, 기사와 이적은 오늘날에는 없어!' 이렇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경우, 기사와 이적을 행하심을 믿는
건강한 신비주의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 신유 축귀 기적
▲'초월적인 하나님, 기적적인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사실 남는게 없어요.
초월적인 하나님을 제한시켜 놓고 나면, 철학과 윤리와 도덕... 그런 거 밖에 안 남아요.
잘 생각해 보세요.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다 빼버리고 나면, 철학과 윤리와 도덕밖에 안 남아요.
초자연적이라고 하는 건 뭐냐면,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 삶에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게 초월적이라는 뜻인데, 이걸 다 빼버리고 나면,
내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은 없게 돼요. 그럼 남는게 뭐죠?
철학과 사상과 도덕과 윤리.. 이거밖에 안 남잖아요.
그게 우리 삶을 구원할까요? 아니요. 구원하지 못해요.
'초월적인 (기적의)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붙잡으실 때
우리가 비로소 종교적인 타성에서 벗어나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셋째, 모세의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셨어요.
4:37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
모세의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셨어요.
애굽의 노예로부터, 큰 권능과 펴신 팔로 구원해 내셨어요.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구원하시는데, 반드시 구원하세요.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해 포기를 모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은 결정돼 있어요. 저와 여러분의 엔딩은 결정되어 있어요.
'열린 결말 (뭐가 될지 모르는 결말)'이 아니에요.
저와 여러분의 엔딩은 결정돼 있어요. 해피엔딩, 구원입니다. 아멘이십니까?
중간은 넘어질 수도 있고, 중간은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중간은 힘들 수도 있고
중간에 실패할 수도 아니지만, 마지막은 결정되어 있어요. 해피엔딩!
왜 그렇죠? 구원하시는 하나님, 언약에 따라 반드시 그 (구원)언약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9~31절에서 모세는 이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4:29~31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너희를 구원하리라, 너희와 맺은 언약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죄로 인해서 고난과 환란에 들어가게 될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세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완전히 멸하시지도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하시고 회복하세요.
29절에 보면 '거기서'
제가 이 말씀을 읽을 때 '거기서' 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어요.
'고통 한 가운데서, 거기서'
'절망한 가운데서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한 가운데서, 거기서'
'외로움의 한 가운데서, 거기서'
'질병의 한 가운데서 망해버린 그 폐허의 한 가운데서, 거기서'
거기서 하나님을 찾으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언약에 따라, 반드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거예요. 아멘!
▲23년 전에 저희 교회가 시작되기 전에, 제가 미국에서 다니던 교회가 있었죠.
근데 교회가 정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스캔들이 나면서
교회가 한순간에 거의 무너졌어요. 그러니까 그때 느낌이 어땠냐면
그냥 폐허 가운데 처해있는 느낌이었어요.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교회였는데.. 제가 '교회가 이런 곳이구나' 하는 걸
저한테 처음으로 보여주고, 가르쳐 주고,
'와~ 교회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이럴 수 있구나'
이렇게 저를 정말 살아나게 했던 교회였는데,
한순간에 다 무너지는듯한 느낌이었어요.
폐허한 가운데 있는 것 같고, 실망과 절망 한가운데 있는 것 같고,
앞도 안 보이고, 소망도 없고, 하여간 그러고 있었습니다.
별처럼 반짝이던 교회가, 한순간에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 느낌과 감정이 그랬습니다.
페허가 된 가운데서 부흥회를 하게 됐습니다.
한 목사님이 강사로 오셔서 이런 도전을 주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제 기억에 남아 있어요.
"여러분, 교회 바닥이 새벽마다 여러분의 눈물로 적셔질 때,
그때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다시 회복하실 겁니다."
그 말씀이 제 영혼에 정말 불처럼 각인됐어요. 24~25년 전 얘긴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몇몇 사람들이 그 말씀을 믿음으로 취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폐허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 거예요.
'거기서', 그 절망 한 가운데서, 낙심 한 가운데서, 망해버린 상황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약속대로 교회를 살리셨어요.
그게 오늘의 이 수원하나교회입니다.
그때 정말 소망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한국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시작했던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구원하세요. 약속대로 회복하세요.
아무 소망도 없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이 약속의 말씀대로
'거기서' 주를 부르고, 붙잡고, 부르짖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세요? 반드시 구원하시는 분이세요. 반드시 회복시키시는 분이세요.
이 구원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회복의 역사가 시작될 겁니다.
'거기서' 부르짖는 거예요. 4:29
고통 한 가운데서, 절망 한 가운데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상황 한가운데서,
'거기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회복하신다는 거예요.
이게 모세의 하나님이었어요.
금년 2024년도에는 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넷째, 모세의 하나님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37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모세가 나이 40이 됐을 때, 민족을 향한 열정, 또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애굽 사람을 죽이고, 그리고 나서는 도망자가 됐죠.
그다음부터 모세의 인생은, 그냥 사막에서 양치는.. 방향 없는..
소망도 없고 목적도 없는, 40년의 부평초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모세의 인생을 인도하기 시작하세요.
바로 앞으로 인도하시고,
출애굽 하는 것으로 인도하시고
호렙산으로 인도하시고,
가데스바네아로 인도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모세의 하나님은 인도하신 하나님이세요.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예,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세요.
2024년도에는, 영적인 쉬프트업을 행해야 되는 이때에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 쉬프트업 되는,
믿음이 쉬프트업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shift up
▲만약 우리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1)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해요.
그냥 하나님은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절대자, 신, 종교의 대상으로만 막연히 믿는 거죠.
말씀의 부재, 믿음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은 내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해요. 그러면 당연히 인도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 삶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거라고 하는, 기대 자체가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인도하는 분이세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인식할 때, 거기서부터 인도하심이 시작되는 거예요.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걸, 인지하지 못하면, 당연히 기대도 없죠.
아무런 기대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겠어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진실하게 인도하십니다. 이거 믿으셔야 돼요.
거기서부터 인도하심이 시작됩니다.
2) 하나님은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걸 인정하긴 해요. 그런데 선택적 원함이 있습니다.
이게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예요. '선택적 원함' 이게 뭐냐면,
'하나님, 제 인생을 인도해 주십시오. 그런데 요건 말고요. 요거는 빼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긴 하는데,
항상 하나님 앞에 사지선다 형을 드려요.
'1번 2번 3번 4번 중에 한 가지로 제 인생을 인도해 주십시오.
요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셔야 됩니다.
1번 2번 3번 4번은, 제가 원하는 순서대로 적은 겁니다.
웬만하면 1번부터 해 주시고요. 아니면 2번 정도면 제가 감사하겠고,
정 안 되면 3번, 4번까지는 제가 인정합니다.
만약 그 범위를 넘어가시면, 오답 처리하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말로는 '제 삶을 인도해 주세요'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런다는 거예요. 내 속에 내가 원하는게 있어요.
그래서 요거를 해 주시면.. 내가 따라가고,
요거를 안 해주시면.. 인도함을 받기를 거부하는 거죠. 이게 '선택적 원함'입니다.
'하나님, 웬만하면 1, 2번 중에 고르십시오.
3, 4번은 하나님이 들어주시고도 욕먹습니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1, 2번 중에서 골라주시면, 제가 감사하며 따라갈 거고...'
'선택적 원함' 이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정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한다면,
'예 하나님, 저는 주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할렐루야 감사하며 순종하며 가겠습니다.
주님께서 저보다 제 인생을 더 잘 아십니다.
주님은 선하시고 완전하십니다. 내 인생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줄 믿습니다'
이게 있을 때 인도하심을 받는 거죠.
사실 인도하심 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적인 원리가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죄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회복되려면
내 속에 있는 욕심들, 고집, 자존심, 이것이 캐노시스 됐을 때(비워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들이 임하는 거죠.
꼭 인도하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영적인 원리가 똑같아요.
3) 세 번째로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냥 싫은 거예요.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거에요.
내 정욕이나 욕심이 너무 강해서, 뻔히 그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을 뿌리치고,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좋아 보이는 길을 향해 달려가는 거죠.
성경을 읽을 때, 어떨 때는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대충 알아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기 싫어요. 그냥 내 맘대로 하고 싶은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죄성이죠. 고의적으로 인도의 손길을 뿌리치고 불순종하는 겁니다.
그러면 가데스바네아에서 38년 광야 생활이 시작되는 거죠...
◑5. 다섯 번째, 모세의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38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
:40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모세의 하나님은, 그의 말씀과 규례를 지키는 자들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세요. 복 주시는 분이세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세요.
자 그런데 우리가 shift up (고단 기어로 변속) 해야 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관점이에요.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저주인가요?
복은 뭐냐면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게 복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복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복의 데피니션이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그게 복이라고 정의 되는 거예요.
그럼 저주는 뭡니까? 내 죄 때문에 생기는 결과, 그게 저주예요.
그래서 내 죄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면, 그것은 돌이키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면, 그것은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복이에요.
왜냐면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니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사람의 눈에 복처럼 보이지 않아도, 그게 복이라는 거예요.
이 관점의 쉬프트업이 일어나야
환란도 복이고, 망하는 것도 복이고, 잘 안 풀려도 복이고, 질병에 걸려도 복이고,
시험에 떨어져도 복인 것입니다.
공부 안 해서 시험에 떨어진 건 저주입니다.
근데 공부 열심히 했는데 떨어졌어요. 그럼 복이고,
하여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건 다 복이라는 거예요. 이 관점으로 쉬프트업 돼야 돼요.
그래서 '땅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복과 저주가 헷갈립니다.
막 복이라고 이렇게 했는데, 실제로 보면 저주입니다.
또 어떤 거는 저주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복이에요.
그래서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하는 그 중국 고사성어가
사실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온 거잖아요.
'처음엔 복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저주네.
처음엔 저주인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까 복이네!'
근데 이것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복처럼 보여요.
그런데 실제로 저주인 것도 있고요.
내 죄와 내 욕심의 결과로 뭐가 왔어요.
너무 좋은 거라고 막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사람들도 부러워 하는데
사실은 내 죄의 결과예요. 그건 저주인 거죠.
또 저주처럼 보여요.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 허락하신 거에요. 그건 복이거든요.
이 복과 저주에 대한 관점이 쉬프트업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눈에는, 타락한 인간의 눈에는, 복과 저주가 잘 안 보인다는 거예요. 막 뒤섞여 보입니다.
거꾸로 보인다는 거예요.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복이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좋은 것인데, 복처럼 안 보이는 것은
육신의 관점, 땅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육신에는 힘들어도 영에는 좋은 것일 수도 있거든요.
반대로 육에는 좋아 보이는데, 영은 죽이는 것도 있고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영과 혼과 육이 다 잘 되는 것을 주기 원하세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죄예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왜곡되고 뒤틀리고 부조리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영혼육에 다 좋은 걸 주시려고 해도,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 돼버렸다는 거예요.
어떤 건 그렇게 주실 수도 있어요. 영과 혼과 육에 다 좋은 걸 주실 수도 있는데,
많은 경우에는 영에 진짜 좋은 걸 줬더니, 육체는 망해야 돼.. 뭐 그런 것도 있고요.
또 어떤 건 육체에는 너무 좋아 보이는데, 실제로 영은 완전히 죽는 거죠.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돈이 많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실까요, 가난한 사람이 되길 원하실까요?
아주 원론적으로 얘기하면, 만약에 죄가 없었다면, 다 부자가 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에 보면, 보석이 많잖아요.
영원한 부와 영광을 누리게 하신다고요.
그러니까 원론적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원하시고요.
영혼도 잘 되기를 원하시고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 죄 때문에, 우리가 다 타락하고 왜곡되고 부조리해졌어요.
그래서 부자가 되도록 해 놨더니, 영이 죽어 버리는 사람들이 나오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둘 중에 선택하셔야 되는 거죠.
-얘한테 부자가 되는 복을 주면, 영은 다 죽어 버릴 거고,
-얘의 영을 살리려면 쫄딱 망하게 해야 되는구나...
그래서 쫄딱 망하게 했단 말이에요. 그럼 이게 여러분 복이에요, 저주예요? 복인 거죠.
근데 이 복이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계속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세상이 왜곡되고, 뒤틀리고, 부조리해진 거예요.
그래서 이상해 보이는 건데,
이 죄가 극복되고 ,다시 우리가 부활체를 입고 나서는, 여러분 다 부자일 겁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신데, 다 부자일 거예요. 아무런 부족함이 없으실 거고,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 우리가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복과 저주가 헷갈릴 수 있어요.
어떤 건 복처럼 보이는데 저주고,
어떤 건 저주처럼 보이는데 복이고...
예, 2024년도에는 여러분이 관점이 쉬프트업 되시길 바랍니다.
▲또 성경의 복이, 개인적인 복이냐, 공동체적인 복이냐?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냐, 개인적인 관점이냐?
이 관점도 쉬프트업 되셔야 됩니다.
자 예를 들어서 가나안전쟁이 있습니다. 가나안전쟁은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당연히 복이지요.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건데,
그런데 개인적으로 보면 꼭 복처럼 안 보일 수도 있어요.
전쟁을 하다 보면 사람이 죽는데, 남편이 죽을 수도 있고, 자녀가 죽을 수도 있고...
그 피해 당사자 가족에게는 복처럼 보일까요? 복처럼 안 보인단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는 복이라는 거잖아요.
이 관점을 우리가 바꿔야 돼요.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봐야 됩니다.
그 말씀이 어디 있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33
그 직전에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6:31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게 다 개인의 관점이죠.
개인의 관점으로 북과 저주를 보기 시작하면 헷갈린다는 거예요.
저주를 복이라고 그러고, 복을 저주라 그런다는 거예요.
그거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라.
관점을 바꿔야 돼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나님 나라를 먼저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복인지가 보인다는 거예요.
이 관점의 쉬프트업이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복을)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보셔야 돼요.
또 땅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으로 보셔야 돼요.
육체의 관점이 아니라, 영의 관점으로 보셔야 돼요.
그랬을 때 우리 하나님은, 항상 '복 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돼요.
이 복을 풍성하게 누리는, 그런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