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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세워 달라는 요구 삼상8:1-9
오늘 본문 말씀에는 대단히 아주 유감스럽기도 하고,
또 어찌 생각하면 아주 슬프기도 한 그런 이야기 두 가지가 여기에 나온다.
하나는 본문에 보시는 바와 같이 ‘사무엘이 늙으매’ 그랬다. 삼상8:1
지금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직접 나아와서 하는 말이 이것이다.
'보소서. 당신은 이미 늙고' 그랬다. :5
늙었다는 말이 아주 슬프게 들려온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다스리는 동안 이 나라는 평안했다. 온 백성이 평안했다.
사무엘이 사사로 있고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하였던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그 사무엘은 어떤 의미에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 이 세 가지 직분을 다 수행한 사람이다.
그래서 소위 세 기능을 함께 한 자다. (*이런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는데,
사무엘이 비슷하게 그 직무를 수행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무엘 이후부터, 왕과 제사장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또 선지자가 따로 나선다.
그렇게 해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 서로 분리해서
세 직무를 가진 사람이 따로 나타나게 되지만, 이 사무엘 때까지는 그렇지 않다.
그때까지는 이 세 가지 기능을 한 사람이 다 행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분이 바로 사무엘이다.
그는 사사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장 역할을 했고,
또 백성들을 지방에 순회하면서까지 다스렸고 가르치고 했던 것을 보게 된다.
또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재판하는 그런 사사의 일도 했다.
그런데 그가 늙었다는 것이다. 그가 살아있는 40년 동안 이 백성은 평안했다.
다른 나라가 넘보지 못했다.
어느 민족도 사무엘이 있는 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있는 한,
그 땅을 전혀 넘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외세의 간섭도 없었고
그 나라 안에서도 사무엘의 말에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듯이 순종하게 된다.
물론 그 가운데 잘못하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때마다 사무엘이 그들을 다스렸다.
그래서 온 백성이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 40년 동안 평안했다는 것이다.
삼상7:13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그의 영력, 그의 지도력, 그리고 그의 교훈, 이런 것으로 인해서
온 백성이 평안하게, 자유로운 가운데 자기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사무엘이 늙었다. 이제 영력도 떨어지고 체력도 떨어지고
또 그가 다스리는 지도력도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아들들을 세워서 사사의 일을 대신하게 했다’고 한다. 8:1
그런데 사무엘은 라마에 있고, 그리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백성을 다스렸는데,
이제는 늙어서 부득불 이렇게 한다.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8:2
아들들을 저 먼 곳, 브엘세바(남단), 그곳에는 아들을 사사로 세워서 보내어 일을 하게 했다.
자, 그러고 보니까 사무엘이 늙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이래서 늙는다는 게 참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슬픈 일이다.
사무엘처럼 위대한 사람도, 늙고 나니까 다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부득불 아들들을 시켜서 저 먼 곳에는
사무엘이 직접 가지 못하니까 대신 가서 사사 노릇을 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문제는 그 아들들은 아버지와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를 따라서" 그랬다.
다른 번역에 보면 '욕심을 따라서' 라고 번역한다.
욕심을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그랬다. :3
판결을 바르게 해야 하는데, 이 백성들 사이에 있는 문제,
이런 것을 해결할 때 판결을 꼭 바르게 해야 하겠는데.. 굽게 했다.
잠언에 있는 말씀처럼 "뇌물은 판결을 굽게 만든다."
뇌물을 받고 나면 판결을 바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섭섭한 것은,
‘사무엘과 같은 그런 위대한 분의 아들들은, 왜 아버지처럼 그렇지 못하나?’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야 된다. 아무리 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그 교육이라는 것을 100% 믿어서는 안 된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그렇게 별로 잘 가르치지 못해도, 자녀들이 잘 자라 줄 수가 있고,
아무리 잘 가르치려고 해도, 자식이 잘못될 수도 있고,
자식이 핏줄은 부모를 이어 가지만
그 정신과 신앙의 전통이라는 것은 그게 세습적인 것이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다!
아들은 아들대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하는데
아버지에게서 보고 듣고 한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심령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쎄, 언제 가서 다시 정신을 차릴는지는 몰라도
지금 이렇게 아들들은 아버지 같지 못해서 빈축을 사게 된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사무엘이 늙었다는 것도 서글프지만,
-아들들이 아버지와 같지 못했다는 이것은 더 섭섭한 일이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문제가 생긴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주제다.
자, 사무엘이 늙었으니까 당신 가지고는 안되겠소.
그래서 백성들이 모여가지고 지금 사무엘을 찾아와서 요청을 하게 된다.
왕을 세워 달라고 말이다.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좀 왕을 세워 주세요.’
또 아들들이 사사 노릇을 잘 했더라면
뭐, 사무엘이 죽더라도 그 아들들이 계속 하니까 문제가 없다.
그러나 아들들이 잘 못하니까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때문이다.
백성들이 나타나서 ‘다른 나라처럼 우리도 왕을 세웁시다’ 하고 말하자면 반항을 하게 된다.
항의를 하게 되는데, 이런 부작용이 왜 생겼느냐?
이런 섭섭한 일이 생긴 이유는,
-사무엘이 늙었기 때문이요
-아들들이 아버지 같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유감스럽고 섭섭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왕의 제도라고 하는 것, 이것은 하나의 제도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하면 왕의 제도라는 것은, 세상 문화를 대표한다.
우리 인간들이 문화를 가지고 있다. 나름대로 자기네 풍속을 가졌다.
우리가 먹고 입고 살고 하는 이게 다 풍속이 아닌가? 이 속에 또 제도가 있다.
그런데 이런 제도나 풍속은 하나님이 원래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보면 허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대로 한번 보자. 물론 사무엘이 늙었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아들들이 사무엘 같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불만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영력과 지도력이 충만해야 되는데, 그것이 약해질 때,
백성들의 마음에는 불만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다.
또 모든 일이 잘못되기 시작하니까 불만을 터뜨린다.
마침내 저들은 생각한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왕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 왕을 하나 세우면 모든 백성은 왕의 노예가 되고 만다. 옛날의 왕의 제도는 그러했다.
왕이 모든 백성의 생활을 책임질뿐더러, 백성은 전부 왕을 섬기기 위해서 산다.
완전히 노예적 순종을 하게 된다...
▲본문에 보니까 사무엘이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아주 마음이 아팠다.
‘기뻐하지 아니하여’ 그랬다. :6
도대체 왕을 세우겠다는 그 욕구 자체가, 사무엘로 볼 때는 마음에 안 들었다.
‘그건 나 자신에 대한 불평이구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늙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이러는구나’ 그렇게 생각되니 얼마나 슬퍼요?
그래서 기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6
그런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가서 묻게 된다. 역시 사무엘이다.
이 문제를 놓고 백성들과 다투지 않았다.
하나님께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랬더니 여기 보니 이렇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7
대단히 중요한 요절이다. 대단히 강한 표현이다. 이걸 깊이 생각해야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개별적으로 바로 서면 된다.
무슨 제도가 필요 없다. 이 제도라는 건 참 문제다.
법이 많아지면, 이 법이라는 것은 요렇게 피하고 저렇게 피해서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언제나 더 죄를 많이 짓는다.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그야말로 양심대로 하고, 자율대로 하고, 인격적으로 하면 다 끝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제도나 법이라고 하는 것들은, 부득이 만들어 놓지만
이게 (많아질수록) 좋은 것은 아니거든요. (제약이 많아지니까)
그게 없으면 얼마나 (자유롭고) 좋은가?
그것 없이 살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다면, 법이라는 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왜 이런 말이 있지 않는가? ‘법조문 보다 중요한 것이 판례다’ 라고.
판례라는 것이 있지요. 그 양심의 법이 있지요. 인격적인 법이다.
더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법이 있다.
그리고 그 법안에서 자유하면 되는 것이다.
원래 바른 자유인에겐 법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걸 제도로 만들어서 ‘이건 안 된다, 저건 된다, 뭐, 어떻게 해라’ 자꾸 자유를 구속한다.
(*법과 제도가 꼭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제약'이란 문제점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제도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자유를 스스로 속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안하게 그 자유를 누리면 되는 것이다.
질서는 자연히 지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을 만드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저들의 말을 들으라’ 하신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7
이건 뭔가? 허락하는 것이지요.
마치 뭐와 같은고 하니, 아이들이 뭘 해달라고 조른다.
그런데 안 해 주어야 되겠지만, 해달라고 자꾸 조르면, 마지막엔 견디다 못해서
‘그래 해라. 해 줄게!’ 그런다. 그 대신에 ‘네가 책임져라!’ 그러지요.
내(하나님)가 하라는 대로 하면, 책임은 내(하나님)가 진다.
그러나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책임은 너희가 져라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걸, 우리가 알아야 한다.
가끔 보니까 그런 분이 있다.
부모가 반대하는 연애를 해 가지고, 죽어도 결혼하겠다 하니,
결국 부모는 그래라고 허락한다. 그래서 시집을 보냈다.
결혼식까지는 잘 해주었는데, 이제 그다음에 되어지는 일을 보세요.
이제는 자기들이 책임을 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 부모님들에게는 차마 말을 못한다.
대신에 제게 찾아와서 가끔 그런다.
'내가 부모님이 반대하는 것을 억지로 했더니 벌을 받은 가봐요. 아주 못 견디겠어요.
그러나 내가 부모님의 마음이 아플까봐 이 이야기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부모님 찾아가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그렇게는 못 한대요. 왜요?
‘네가 우겨서 한 결혼, 네가 책임져라’고 말할 것 같으니까, 끙끙 앓는 것이다.
이점을 생각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하면,
모든 일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들면
뭐든지 거기서 오는 후속 결과,
그 모든 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일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이 좋아서, 기뻐서 허락하시는 일도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마지 못해서, 너무 조르니까, 허락하시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으로, 우리가 몰고가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제 탕자와 그 아버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탕자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다.
그리고 집을 나가겠다고 한다. 그 아버지가 내보내고 싶었겠는가? No
마지못해서 허락한 것이다.
'나가지 마라. 내가 죽고 난 다음에도 얼마든지 독립하는데,
뭐 지금부터 독립하려고 하지 마라. 조금 더 배우고 그저 내 앞에서 지내는 게 좋겠다.' 이랬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아요. ‘내 몫의 재산을 주세요. 나가겠습니다’ 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는가? 유산을 갈라줘서 내보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와 같이 오늘 본문에도 보면, 왕 제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니다.
‘저들이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7
사무엘을 버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된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의 요구는 들어주신다. 허락하신다.
그들이 왕을 세우고 제도를 만들겠다는 것을 허락한다.
허락하고 그 다음에는 이제는 왕을 통해서 백성을 다스린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간제도(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간인 왕)가 생긴다.
각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율적으로 하면 좋을 것인데,
그게 아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을 통해 역사 하신다.
다윗(왕)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사실 하나님을 섬기고 자유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왕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왕을 섬기고 왕의 제도를 따라야 하는 그런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들의 자유를 찾아 나가는 것 같아도 그건 자유가 아니다.
이로 인하여 무거운 제도 속에 붙들리게 된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화를 만들었고
하나님은 우리가 만드는 문화를 허락하셨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는 그 문화를 통해서, 문화를 고용해서,
문화를 이용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스리신다.’ *문화를 왕에 비유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방법이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을 좀더 성실하게 따랐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런데 왜 왕의 제도를 만들려고 하느냐?
그것은 저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기 때문에,
또 사무엘이 약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 만도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무엘이 아직도 살아있다. 그의 하는 일에 대해서 불만스러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만하게 될 때, 그 일로 인해서 오는 후속 일이 있다.
그것은 억압이요 부자유요 제도요 불편함이다. 우리는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인격이 될 때 우리는 그만큼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성실하지 못하게 되면, 이제 모든 제도에 매이게 된다.
자유를 잃어버린다.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충성을 하게 되면 그는 자유롭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떠날 때는 그는 어느 사이에 율법의 노예가 되고, 제도의 노예가 되고
부자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양심도 없고 인격도 없고 생활도 결코 자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참 자유가 무엇이며, 참 은혜가 무엇이며, 축복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있는 몇몇 선교사들은 섬을 떠나
고향 네덜란드로 돌아갈지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할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달런 데이블러 로즈( Darlene Deibler Rose) 선교사이라는 분이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선교사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선임 선교사인 재프리 박사가
“나는 여러분이 이 문제에 대해 남편과 아내 간에도 토론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저 무릎을 꿇고‘주여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아니면 그냥 머물러 있어야 할까요?’라고 물으십시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하나님만이 정확하게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곳에서 떠나라’ 하시면
여러분이 겁쟁이거나 도망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머무르라’는 응답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주여, 당신이 저를 여기 있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금요일에 트럭이 선교사들을 데리러 왔을 때
떠나야 한다고 느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재프리 박사는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반대하는 경우로
혼란스럽게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인도하심이라 확신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안전하고 현명한 선택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섬에 계속 머무는 것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을 네델란드로 데려가기 위하여 왔던 배는
항해 3일 후 생존자 없이 난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만약 그들이 ‘머물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고의적으로 거역해서, 자신들의 안전만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서
자기들을 태우러 온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더라면,
그들은 정말 생명을 잃는 위기를 당했을 것입니다...
▲즐겨 순종해야 은혜의 소산을 먹는다
나 (존 비비어)는, 교회에서 담임목사님 직속 직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그런 자리에서 일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교회와 목사님에 대해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배 시간에 목사님의 설교도 전혀 은혜가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내게 ‘은혜의 공급’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문제는, 바로 너한테 있다! 이사야 1장 19~20절을 봐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했다.
너는 순종했지만, 즐겨 순종하지 않았다!.
이 교회에서 네게 은혜의 공급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때 불현듯 내 고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목요일 새벽에 쓰레기차가 오기 때문에, 수요일 밤에 쓰레기를 내다 놓는데,
그것은 내 책임이었다.
“얘야, 쓰레기를 내다 놓았니?”
늘 어머니는 재미있는 TV 프로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내게 물으셨다.
“아직요.”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 버리고 와라.”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네" 하고 대답하며 일어났다.
그러나 속에서는 불만이 끓어올랐다.
어머니께 순종했지만, 즐겨 순종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늘 마지못해 순종하던 것이 나의 오랜 연약함이었다....
나는 즉시 회개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이 되어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같은 교회, 같은 목사님의 설교였지만, 그 아침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즐겨 순종>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게 될 것이다! (이사야 1: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