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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으로 막힌 담을 헐라

LNCK 2024. 1. 31. 14:30

[2024 신년부흥회] "순종으로 막힌 담을 헐라"|24.1.10 - YouTube

 

◈순종으로 막힌 담을 헐라       행5:32        2024.01.10    
   2024 신년부흥회 3일차

오늘은 이번 부흥회 저녁 집회 마지막 시간인데요.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마음에 닫힌 것, 막힌 담이 정말 완전히 무너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한 1시간 정도의 설교 시간인데, 1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면, 
여러분 안에 '모든 막힌 담이 다 무너졌구나' 
그것을 여러분 스스로가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또 그렇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주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과 자신사이에 막힌 담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냅니다. 
그냥 열심히 교회 다니고, 그리고 교회에서 하라고 하는 대로 그저 잘 지켜 행하면 
그게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실제로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마음은 영적으로 답답하고 너무나 메말라져 있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봅니다.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사랑도 없고, 마음의 평안도 없고... 

그렇게 교회 열심히 다니는데 왜 그럴까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거죠.
종교생활에 빠진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과 자기사이에 막힌 담이 생겨 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삶에 실제 REALITY 가 아닌 거예요. 현실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자기 삶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닌 것 같은... 

성경에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신의 삶에는 전혀 그런 일(변화)들이 일어나지 않는... 
이게 정말 무서운 일이거든요. 

'아~ 내 안에 영적인 담이 있구나! 
하나님과 나사이에 막힌 담이 있구나!'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일단은 막힌 담이 무너지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과 사이에 담이 생겼구나...' 
회개함으로 인하여, 그 담이 무너진다고.. 첫 번째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근데 무엇을 회개해야 되는 거죠?

 

오늘 기도해 주신 장로님이, 어제 제 설교를 너무나 정확하게 요약해서 기도해 주셔서 
제가 깜짝 놀랐고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죄는, 
이런 저런 윤리적인 죄뿐만 아니고, 

진짜 죄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데도 전혀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예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는 습관적 신앙생활...

차라리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예수님을 영접했으면서도, 일상의 삶에서 전혀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게 
얼마나 주님께는 심각한 죄인지를 모르고 사는 거죠.
이 점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어놓고, 회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제가 첫째날 집회에서 그 말씀을 드렸어요.  ☞ rfcdrfcd.tistory.com/15981460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무시하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에 고백하고 결심했으면, 

'예수님이 내 안에 정말 계시다'는 사실을 진짜 믿어야 되는 거죠.  
'나는 죽고 이제 예수님으로 사는 자가 되었다' 이 사실을 정말 믿게 되면, 

그러면 그동안에 그렇게 영적으로 답답했던 일, 
말씀을 읽지만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만, 믿는 것 같이 않았던 삶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진짜 내 안에 지금 현실에 살아계시다' 
이 사실 단 하나 믿은 건데, 우리 삶이 그렇게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이 은혜는, 
어떤 사람은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하는게 아닙니다. 

오늘 예배당에 가득 우리 성도님들이 모이셨는데 
오늘 예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임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임하지 않는게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여기 계신 분들, 또는 영상으로 지금 이 집회에 참여하시는 분들까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받은 은혜예요. 
'예수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시는 사실'
이건 믿느냐/ 안 믿느냐 문제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진짜 영접한 사람과, 영접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시라'고 권하고 다녔죠.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교인은 모두 다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그 사실을 진짜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삶을 살고 계세요. 
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하는 것,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마음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근심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고 싶은 소원이 생기고, 
어떻든지 예수 안 믿는 가족, 친척, 친구를 보면 '저 사람도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
찬송을 들으면 은혜가 되고, 설교를 들으면 은혜가 되고...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에게만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마음이 계신 것을, 내가 믿기 때문인 거예요.
오늘 이 시간에 '주님 제게로 오세요'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안 계시기 때문에 '주여 지금 나에게 오시옵소서' 
이럴 사람은 오늘 여기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대신에 '주님, 오늘 저와 함께 계신 주님을 믿어지게 하소서, 믿어지게 하소서!'
이 예배당 안에서만 아니고, 이제 집에 가서도, 
내일 아침에도, 직장 가서도, 학교 가서도, 
친구 만나서도, 혼자 길을 걸을 때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게 믿어지게 하소서!' 

이것이 제가 예수동행일기를 쓰면서, 예수동행운동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해요. 

이렇게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믿어지면, 그러면 예전 가정이 아닙니다. 
예전에 교회 생활이 아니에요. 
직장도, 내가 사는 곳도.. 다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일이 너무나 엄청나고 놀라운 일임을 체험하게 될거에요. 

하나님과 나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게 된 거죠. 
자 이게 어제 드린 말씀입니다.  ☞ rfcdrfcd.tistory.com/15981444

▲그러나 이제 하나 더 말씀을 드려야 돼요. 
정말 중요한 말씀을, 오늘 여러분에게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구나' 이 사실이 믿어지면,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설교 주제, 제목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셨는데, 예수님은 나를 도와주러만 오신 분이 아니고, 
예수님은 나의 주님으로 오신 거예요. 즉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제가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 전에는, 기도할 때마다 늘 도와 달라고 기도했어요. 
'주여 저를 도와주세요. 제가 목회를 하는데 도와주세요.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도와주세요. 심방을 가는데 도와주세요...' 계속 도와달라고만 했어요. 
입에 아주 배였어요. 

근데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나니까, 
예수님은 나를 도와주러 오신 분이 아니고, 나의 왕으로 오신 분이에요. 
과거에 그 점을 전혀 몰랐던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면서도 
실제로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삶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주님이 내 안에 계신데, 주님은 역사하지 않으실까? 
왜 성령님은 내 안에 계신데, 나는 성령충만함을 누리지 못하는 걸까?' 
그게 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큰 숙제였어요. 

근데 이유를 깨달았어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만 믿을게 아니고, 
그 사실을 진짜 믿었다면, 이제는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제가 주님께 순종하면, 그때부터 제 안에 계신 주님의 역사가 
내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나도 잘 모르고, 함께 사는 가족들도 모르고, 교인들도 몰라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데,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있나요?
주님은 내 안에 분명히 살아계신데, 
주님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삶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거예요. 

오늘 저녁에도 여러분이 부흥회에 오신 것이, 
예수님 아니시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자 그런데 그냥 부흥회에만 나오는 그런 삶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내가 정말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면,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야 되잖아요. 
가정에서는 가정대로, 일터에서는 일터에서 
주님은 내 안에 살아계신 역사가 나타나야 되잖아요. 

왜 주님이 역사를 안 해주실까요? 
역사를 안 하시는게 아니고, 못하시는 거예요.

왜 못 하시죠?
내가 주님께 순종하지 않으니까! 

행5:32절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에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성령충만을 우리가 다 원합니다. 
성결교회는 특히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갈망이 뜨거운 교회죠.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하지요? 
성령충만함을 받는 것은, 우리보다 주님이 더 원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집회를 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지 못하는 걸까요?
순종에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그냥 큰 소리로 '주여!'라고 부른다고만, 성령의 충만함이 오는게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은사를 경험하거나, 능력을 경험하거나, 
어떤 뜨거운 체험을 하는게 핵심이 아니에요. 
자꾸 그런 체험에다 초점을 맞추니까, 성령론이 이상하게 흘러가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완전히 지배하시게 되는 것, 
그래서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실뿐만 아니고, 나를 통해서 나타나시게 되는 일이에요. 

그러면 성령충만함이 나타난 것을, 나도 알고 내 주변 사람들도 다 알아요. 
'저 사람이 성령 충만하구나' 

그 말은, 성령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시게 된 거예요. 
주위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거예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냐는 겁니다. 
성령님께 내가 순종함으로 드러나시게 되는 거예요. 

성령 충만의 핵심은 순종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오늘부터 '나는 이제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리라!' 
'주님, 무슨 말씀이든지 하세요.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여러분이 결단하고, 그렇게 사는 동안에,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알게 됩니다. 
주님과 나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는 거죠. 

▲보언리즈 라는 사람이 쓴 <중국의 예수가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1920년대~30년대 중국의 '예수 가정'이라는 지하교회(교단)의 이야기에요. 

그 책에 보면 칭 틴옌이라는 예수가정교회 지도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칭 틴옌 씨는 중국이 아주 전통적인 유교 배경의 가문에서 자랐어요. 
철저하게 유교적인 생각에 젖어 있던 사람이었죠. 

근데 이 분이, 중국 개화기에 '이제 신문물을 공부해야 되겠다' 자각이 생겨서 
도시에 나와서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그때 당시에 신문물을 가르치는 학교는 거의 대부분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입니다. 그래서 선교사 학교에 들어가게 돼요. 

그래서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 들어가서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됩니다. 
성경을 배우게 되고, 예배를 드리게 되고... 어쩔 수가 없지요. 
자기는 유교 신자지만,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하려면 
예배도 드리고, 성경도 배우고... 

그러다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구나. 십자가의 복음이 나를 구원하는 거구나' 하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근데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마음에 성령께서 주시는 책망이 하나 있었어요. 
영적으로 거리끼는 게 있었습니다. 
'내가 진짜 예수를 믿을 거면, 이건 반드시 해결되어야 된다'는 자책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아내를 버린 일입니다.

칭 틴옌의 씨가 예전에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해서 결혼한게 아니고, 
그 옛날 중국 전통대로, 양가 부모님이 서로 약조해서, 
자기가 생전 보지도 않았던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은 거예요. 

근데 얼마나 구식 여자인지, 옛날 중국 여인들의 전통인 전족을 하고, 
도무지 말귀도 못 알아듣는 그런 여자와 결혼을 한 거예요. 

근데 칭 틴옌은 시대가 달라진 것도 알았고, 
신문물도 공부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의식이 개화되어 있었어요. 
'이 여자랑 같이 살아서는, 내가 도무지 새로운 시대에 살아갈 수 없겠다'

또 그때 당시는,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남편이 얼마든지 여자를 버릴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내쫓았어요. 그렇게 파혼이 된 거죠. 

그리고 자기 혼자 공부하러 도시로 나왔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까 
자기가 아내를 버린 것에 대해서, 말씀에 의하여 심각한 책망을 받은 거죠. 

엡5:25절에 '네 아내를 사랑하라' 말씀으로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 말씀 전후를 샅샅이 훑어봤어요. 

틀림없이 '아내가 이쁘면 사랑하라, 말 잘 들으면 사랑하라, 
아내가 똑똑하면 사랑하라' 뭐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아무리 뒤져봐도.. 아무데도 그런 이야기가 없는 거에요. 
무조건 아내를 사랑하라는 거에요. 

그는 너무너무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거면, 이 말씀에 순종해야 되고,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거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게 되고...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 결단해요. '하나님, 제가 제 아내를 데려오겠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처가로 가요. 그리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그때 당시에 중국 남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당신을 버린 것을 용서해 주세요. 다시 내 아내가 되어 주세요.' 

그 칭 틴옌의 아내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제 '집으로 가자'고 했는데, 
자기 집과 처가가 24Km가 떨어져 있었어요. 

그때 당시는 뭐 교통수단도 없으니까, 서민들은 다 걸어다니던 시절이었죠. 
이제 24Km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아내가 전족을 한 여자라, 걸을 수가 없는 거예요.

뭐 말을 빌리든지 했으면 좋겠는데, 
칭 틴옌의 마음에는 당장 그 일을 실천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칭 틴옌은 순종하는 결단을 합니다. 아내를 등에 업었어요. 
그때 당시에 중국 남자가 아내를 업었다... 그러면 정말 사람 취급을 못 받던 시절이었어요.

근데 자기가 아내를 업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려고. 
그리고 24Km가 되는 길을 아내를 업고 갑니다. 
1시간이라도 빨리, 주님께 순종했다고 하는 고백을 드리고 싶어서! 

그리고 24Km를 걸어서 자기 집 문지방을 딱 넘어서는데 
칭 틴옌과 그 아내에게 성령이 임해요. 마당에서 성령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 두 분이, 중국의 예수가정(지하)교회에 아주 훌륭한 지도자가 돼요. 
두 분이 성령 받고 난 다음에, 얼마나 탁월한 리더가 되었는지요! 

▲왜 우리는 그렇게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고 살지 못하는 걸까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도, '왜 예수님은 내게 역사를 안 해주시나?' 
그러면 여러분의 순종을 점검해 보셔야 돼요.

'예수님이 진짜 나에게 왕이신가?' 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만,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왕을 모시고 사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왕이 계세요. 내 안에! 
그분은 나에게 명령하시는 분이에요. 

나는 그 명령에 토를 달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주님이 '하라' 그러시면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순종 밖에 없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리지를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슨 명령을 하시든지, 
어떤 걸 요구하시든지... 완전히 순종하실 마음이 준비되셨습니까? 

제가 드리는 질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산 다 바치라' 그래도, 
'목숨도 바치라'  '자식을 바치라'고 해도, 
하여튼 하나님이 나에게 뭘 명령하시든지간에, 나는 무조건 순종합니다. 
그렇게 하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지금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일단 겁이 나요. 
겁부터 난다니까요. 그게 문제인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과 나사이에 막힌 담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라고 믿어요. 
나를 위해서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아끼시겠어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을 해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두려운 하나님, 까다로운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내 좋은 거 다 가져가시는 하나님, 
진짜 하기 어려운 것만 골라서 지키시는 하나님...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진짜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아니,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이세요. 

나에게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이에요.
이 사실을 진짜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든지 순종하겠습니까?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면, 다 나에게 좋고, 유익한 거죠.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이 나에게 힘든 거 시키면 어떡하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지 말라고 그러면 어떡하지?' 

어떤 권사님이, 자기는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못 하신다는 거예요. 

'왜 그러시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해 가지고, 십자가에 끌려가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도 그런 기도하면, 자기도 십자가에 끌려가 죽을 거라는 거예요. 

참 대단한 믿음이에요. 그러고도 권사 되신게 참 놀라운 거죠. 
그런데 사실 그 권사님을, 흉보고 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나요?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다 사라지셨나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때 졸업반이에요. 
학급 예배를 드리는데, 이제 하루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간단히 찬송 하나 부르고, 성경 말씀 읽고 기도하고, 학급 경건회를 늘 매일 했습니다. 
신학생 전도사님들이 돌아가면서 하루씩 기도회를 인도했는데, 
어느 날 기도회를 인도하시는 전도사님이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 찬송을 부르자고 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뒤에 있는 누가 '아 제발 그 찬송은 좀 부르지 맙시다' 
그래가지고 다른 찬송을 부른 적이 있어요. 

그 찬송은 신학교 졸업반 금지곡이에요.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여러분의 자녀가 지금 신학생이라고 생각해 봐요. 
여러분 사위 될 사람이 신학생이라고 생각해 보라니까요.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야 됩니까?' 
신촌성결교회 같은 큰 교회에 와야죠. 

지금 신학교 졸업반 공부는 같이 하지만,
이제 이번 학기만 끝나면 각자 다 자기 임지를 찾아서 떠나요. 

A전도사님은 신촌성결교회 같은 큰 교회에 가서 사역하고, 
B전도사님은 아골 골짝 빈들에 가서 사역하고... 

그러면, 큰 교회에 부름 받은 전도사는, 하나님의 사랑하고 복을 주신 전도사고,
아골골짝 빈들에 간 전도사는, 저주받은 전도사인가요?  No

아골골짝 빈들에 가면, 거기에 교인이나 제법 있나요? 예배당도 있나요?
생활비는 누가 줘요? 그런 곳에 누가 갑니까? 

여러분의 아들이 지금 목사라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의 사위가 목사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아들이, 사위가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들을 말릴 거예요, 안 말릴 거예요?
현실적으로 부모들은, 다 아들이나 사위가, 시내 큰 교회에서 섬기기 원합니다.

△또 어떤 필요한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감동해서
제법 큰 물질을 교회에 바치라고... 그에게 헌금하라고... 감동을 주실 때가 있죠.

그때 우리는 즉시 순종합니까?
아니면 통장을 쥔 손이 떨리면서,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그게 아닐거야..'
 
혹시 여러분도 그런 느낌으로 주님을 생각한다면 
주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진짜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다 주셨어요. 
그분이 하나님이세요. 
근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네 가진 재산과 물질이 누구거냐?' 물으실 떄,
여러분의 마음이 경직 되고, 만약에 그런 질문이 두렵다면, 
우리 주님은 어떤 마음이실까요? 

△근데 아셔야 돼요. 하나님이 가져가시려고 물으신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 하시려고,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때로는 알아보기 원하시는 거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시지만 
한 가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마음대로 하실 수 없는게 있어요. 
그게 우리의 마음이에요. 
우리의 마음만큼은, 우리가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가져가실 수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 모든 것을 다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세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건데, 단 하나, 우리의 마음이 어떤가를 알고 싶으신 거예요. 

예를 들어 설명해 볼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요구하실 때는, 
그게 하나님의 프러포즈가 되는 때예요. (*물론 이런 걸 이용해서도 안 되지만)

어떤 공원에 젊은 남녀가 이렇게 앉아서 뭐라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해요. 
남자가 그 자매에게 결혼을 해 달라고 청원을 하는 거에요. '나와 결혼해 주세요!' 

자매가 그런 프러포즈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럴 때 어떤 느낌일까요?
'진짜 무섭다. 완전 날강도네...' 이건 잘못된 사이인 거죠.

그런데 자매가 느낌이 너무 좋고, 분위기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 밤 전등불빛 아래서, 남녀가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 나와 결혼해 달라고 청원하는 그 분위기... 
그걸 무섭다. 살벌하다. 끔찍하다. 그렇게 느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실제로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결혼을 해 달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죠?
실제로는 그 여자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드릴 테니, 
당신도 당신의 모든 것을 달라는... 프러포즈(제안, 요청)인 것입니다. 
'이제 내게는 당신 외에 다른 여자가 없어요.' 이런 고백인 거죠.

그때 마음에 드는 남자의 청혼을 받는 여자의 얼굴 표정은 정말 황홀한 거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라면.. 
여러분도 그래서 다 결혼을 하셨잖아요. 

하나님이 만약에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각자에게 (꼭 물질 외에도) 어떤 큰 헌신을 요구하실 때가 있죠.
그건 하나님이 나를 프러포즈 대상으로 여기신다는 뜻이에요.
아니면, 별로 가깝지도 않은데, 그런 큰 요구를 하실 필요가 아예 없죠.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그런 헌신과 순종을 요구하겠습니까?

▲앤드류 머레이가 쓴 <부활의 주와 함께 하라>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물으시더래요. 
'너에게 있어서 나는 어떤 존재냐?'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가 대답을 했답니다. 
'주님은 저에게 늘 첫째이십니다.' 
자기는 정말 대답을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같지 않더래요. 
그는 하루 종일 고민이 되었어요. 
'내가 무슨 대답을 잘못했을까?' 

저녁쯤 가서 깨달았어요. '아 내가 잘못 대답했구나'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하나님은 저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때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셨다고 그 책에 쓰셨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첫째'가 되시는 것과, 
'전부'가 되시는 것의 차이가 뭐죠?

만약에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다고 합시다. 
'여보, 나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예요?' 

남편이 '당신은 언제나 나의 첫째야!' 
그러면 아내의 기분이 좋을까요?
'내가 첫째래, 그럼 둘째는 누구고, 셋째는 누구인거지?'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은 나의 첫째고, 미스킴은 둘째고, 미스리는 셋째고..' 
그러면 좋을까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에는 첫째, 둘째가 없어요. 
그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예요.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셨다니까요. 
독생자까지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있어서는, 첫째 둘째 셋째가 아니라,  모든 것이었어요.
그러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모든 것을 원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도 제게 친근히 동행하실 수 없는 거죠.  

▲저도 신학교 졸업할 때 즈음, '아골 골짝 빈들에는 도무지 못 가겠다'는 마음이었죠. 
'이왕이면 큰 교회, 좋은 교회로 청빙 받아 갔으면 좋겠다' 그런 수준이었어요. 

하나님은 그런 제 마음을 계속 문을 두드리셨어요. 
제가 대학원 공부할 때입니다. 이제 4분의 3학기 마치고, 
이제 마지막 논문 악기만 남았어요. 

근데 그때 제가 부목사로 있었고, 교구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허락을 해 주셔서, 대학원 공부는 할 수 있었지만, 
교구 심방도 해야 되고, 대학원 논문도 써야 되고.. 
둘 다 하기가 참 어렵더라고요. 

제가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제 논문만 쓰면, 이제 대학원 공부가 끝납니다. 
이번 학기도 심방도 잘 하고, 논문도 잘 쓸 수 있게 (둘 다 잘 할 수 있게)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어요. 

근데 어느 날 새벽에 주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너 왜 고민하냐? 심방도 해야 되고, 논문도 써야 되고.. 
그게 둘 다 하는게 힘들면, 
그럼 대학원 석사 학위를 내게 바치면 되잖아?' 

제가 기도하다 말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바로 나왔어요. 
이건 제가 바라던 응답이 아니잖아요. 
저는 '둘 다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학위를 포기하라' 그러면 그게 무슨 응답이에요?

근데 그 이후로 내내, 그 말씀이 제 마음속에 계속 떠도는 거예요. 
'너 대학원 공부는 다 했잖아' 
'논문 개요도 다 써냈잖아.. 그렇지만 여기까지만 하고, 학위는 포기해라, 내게 바쳐라!
그러면 너는 심방 열심히 하고, 교구 목회도 열심히 할 수 있잖아?' 

'뭐? 석사학위를 포기하고, 그걸 주님께 바치라고?'
근데 제가 생각해 보니, 제가 목사가 되고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도 
그때까지 하나님께 뭘 바친게 없더라고요. 

제가 이제껏 주님께 달라고만 했고, 받은 것만 있지, 
주의 종이면서도 바친 게 없었어요. 
'근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 대학원 석사학위를 바치라고 하실까?'

그런데 나중에 오래 후에 제가 깨달았어요.
제게 석사 학위가 없으니까, 박사 과정 진학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신학 공부는, 그것으로 끝이었어요.
그러니 제가 박사학위 탐내지 않고, 그것 때문에 또 시간 쓰지 않고,
오롯이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거죠... 그게 주님의 뜻이었던 거였어요.

제가 석사 학위를 주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그 이후로 또 유학간다고 하면서, 또 박사학위 한다고 하면서... 
그러면 짧게는 2~3년, 길게는 5~10년 세월이 지나가는 거죠.
공부하느라 온전히 목회에 전념할 수 없었을 거예요.

주님은, 남들처럼 석박사 하느라 시간 쓰게 될까봐, 제게 아예 학위를 바치라고 하신 거죠.
결과적으로 석사 학위를 주님께 바친 것이... 제가 목회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그 결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 셈이죠.

(그리고 요즘 석사, 박사 아닌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또 괜히 무리하게 석사, 박사 학위 따느라... 이것도 저것도 안 된 분들이 많지요)

근데 그때는, 제 30대 전후에는, 석사 학위가 제 인생에 상당한 무게가 있을 때였죠.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제가 아버님께 의논을 드렸어요. 

'아버님, 하나님이 저보고 석사 학위 포기하랍니다.' 
아버님이 막 펄쩍 뛰시는 거예요. 

'야, 그거 지나치게 생각하는 거야. 
석사가 문제가 아니고, 이제는 박사가 필요해! 
앞으로 목회하려면 정말 박사학위가 있어야 되는 시대야!'

그렇지만 제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하나님 말고 더 의지하는게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근데 마음이 쉽게 안 잡히는 거죠.
대학원을 다녔으나, 석사 학위도 못 받은 목사! 
이런 사람이 앞으로 어느 교회에 청빙받아 가서 목회할 수 있겠어요?
(어쩌면 서류심사에서 탈락하기 쉽죠)

이제 토요일이면 등록 마감 날입니다. 
하루 전날, 금요철야 기도를 드려야 되는데, 온몸에 열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자리에 누웠어요. 철야기도회도 못 나가고... 
제가 너무 고민이 돼서 그런지, 몸에 열이 엄청 뜨겁게 나는 거예요.

그래도 철야예배가 진행되는 소리를 듣고, 그냥 누워만 있을 수 없어서 
제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야 되겠다..' 근데 기도가 안 나와요. 
입을 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제가 하나님께, 석사학위 바치겠습니다!'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시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말을, 그 서원을 제가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면서 막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하나님이 바로 내 면전에서 저를 보고 계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주여!"라고 입을 여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와 버렸어요.
"주여, 석사학위를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그냥 토해내고 꼬꾸라졌어요. 

이불 위에 꼬꾸라져서 울었어요. 
그 고백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거예요. 
이불을 쥐어 뜯으면서 울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창피한 일을, '그게 그렇게 울 일인가?' 싶은데, 
그때는 '이제 내 목회는 이렇게 끝나나 보다. 
하나님이 나를 정상적인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이렇게 밖에 생각이 안 드는 거예요.

'이제 신학대학원을 수료하기는 했지만, 남들 다 가진 석사 학위도 없이
나는 이제 어디 가서 목회하겠나?' 앞 날이 노랗게 된 거죠.

근데 신기한게, 그렇게 울고 나니까 열이 싹 내린 거예요. 
그리고 한편으로 마음이 편안해 졌어요. 주님 주시는 눌림이나 갈등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바로 그 다음날 학교에 가서 자퇴를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냐? 이제 논문만 써내면 졸업인데...' 
제가 설명을 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냥 사정이 있어서 제가 자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자퇴를 하고, 저는 남들 다 받는 석사학위도 없는 목사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유학도 못 가게 된 거죠. 
(당시는 앞서가는 목사가 되려면, 유학은 꼭 갔다와야 되는 교계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에 부산에 있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감리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이 예배당 건축 끝나시고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그 교회에서 청빙이 왔어요. 

처음에는 그 교회에서 원한 담임목회자 조건이 
'나이는 마흔 이상, 대학원 졸업이상' 그게 이제 기본적인 조건인데, 
저는 나이도 34살에, 대학원 졸업도 못 했잖아요. 

근데 저를 담임목사로 청빙을 해주신 거죠.
저는 앞으로 목회할 길이 안 열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인 거죠. 

그래서 섬기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 허락을 받고, 
부산의 교회로 부임해 가는 그날이, 하필 대학원 졸업식이에요. 

동기생들은 졸업식을 할 때, 그날 저는 부산으로 부임을 해 갔습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목회하다가, 또 성남의 선한목자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지금은 이렇게 은퇴해서, 이제는 부흥회도 인도하고, 또 영성일기 쓰는 사역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제 간증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명령하실 때가, 여러분에게도 다 찾아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분 안에 주님이 정말 계시다면, 
가만히 지켜보고 계신 것만은 아니에요. 여러분의 삶을 이끄시려고 오실 거예요. 

나의 주님으로서, 나의 왕으로서 뭔가 주님이 명하시는 일이 생길 거예요.
그때 여러분은, 무조건 순종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그러면 주님과 사이에 막힌 담이 없어야 되는 게 맞죠.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엄청난 일을 다 하실 수 있어요. 
근데 여러분이 '안 돼요. 주님, 저는 못하겠어요!' 
그렇게 불순종하면, 주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아무것도 못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답답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거예요. 

▲제가 선한목자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예수동행일기>를 쓰는 사역을 2011년부터 시작했습니다. 13년 전이에요. 

제가 예수동행 일기를 교우들에게 쓰라고 할 때, 
제 마음에는 교인들이 너무 기뻐할 줄 알았어요. 

오늘 이 시간에도, 선한목자교회 원로목사 중보기도 팀원들이 
오늘 이 자리에 여기에 와서 같이 집회에 참석하고 계신데, 
저는 우리 교인들이 너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늘 저에게 그랬거든요. 

'목사님, 예수님과 동행하라고 목사님의 설교하시는데, 그게 안 돼요. 
주님과 동행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그들이 늘 그 말을 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제가 모색해서 찾은 거예요. 
'매일 영성일기를 짧게라도 쓰고, 
그리고 그것을, 다른 교인들하고 같이 나눔방에서 나누며 살아보세요. 
그러면 주님과 동행하는데 눈이 뜨이게 될 겁니다.' 

교인들이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었군요. 목사님 너무너무 감사해요!' 그럴 줄 알았는데,
근데 제가 '영성일기를 쓰시라'고 권했더니, 
그때부터 다들 반응이 얼마나 쌀쌀한지... 

'무슨 생뚱맞게 일기를 쓰라는 거야? 
그것도 다른 사람과 내가 쓴 일기를 나누라고?' 
교인들이 반응이 너무 차가운 거예요. 
순간 '내가 이제 큰 실수를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부목사님들한테 '우리 일기를 같이 씁시다!' 그랬더니 
부목사님들이 '이제 이 교회를 떠나야 되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어요. 
'일기를 써서 담임목사님하고 나누라고? 이건 말도 안 돼!' 그러는 것 같았어요.

제가 목회 잘 하다가 '갑자기 내가 무슨 엉뚱한 짓을 한 거지?'
제 스스로 이런 느낌이 확 들더라고요. 

그렇게 교인들에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제로 훈련시켜 드리려고 했는데도 
반응이 너무 차갑고 안 좋은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일기 쓰는 사람이 예상보다 너무 적었고, 
처음에는 전혀 안 되는 것 같았어요. 

여러 외부 목사님들에게도 제가 소개하니까.. 반응이 없으세요. 아주 저조했어요.
목사님들도 관심이 없으세요. '무슨 일기를 다 쓰나?' 이런 생각을 하시더라고요. 

근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너 실패할거다!' 
제가 깜짝 놀랐어요. 실패할 거라는 거에요. 

일기를 써가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하는 것을 '실패할 거래요. 안 될 거래요.' 
제가 힘이 쫙 빠지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또 물으세요. 
"그래서 안 할 거냐?' 

이것은 또 무슨 이야기에요? 
아니 주님이 '너는 실패할 거다...' 라면서, 
실패할 거면 당연히 안 해야 되는 거죠. 실패할 걸 왜 해요? 

그런데 '그래서 안 할 거냐?' 
그때 제 마음에 '아~ 실패해도 해야 되는게 있구나' 그런 생각이 딱 들었어요. 

'나는 실패하겠지만, 예수님께는 실패가 아닌 일'이 있더라고요. 
저는 뭐 100년도 못 사는 거죠. 제가 사는 동안에는 열매가 없어요. 
그러나 그 열매가, 결국은 제가 죽고 난 다음이든지, 
200년 300년 뒤에든지.. 열매가 맺어지면 예수님께는 성공인 거죠. 

스데반 집사가 생각이나요. 
스데반 집사는 부활의 주님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어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니까요. 
그러면 예수 믿을 사람 누가 있겠어요?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사람 누가 있겠어요? 돌에 맞아 죽는데.. 
스데반 집사로서는 진짜 실패로 끝난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이 다 아시죠?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나왔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까지 전해지는 계기가 됐잖아요. 

스데반에게는 실패지만, 예수님께는 대성공인 거죠. 
'내가 실패하는 건 중요한게 아니구나.. 
주님이 기뻐하시냐, 아니냐.. 그게 중요.한 거구나' 

그래서 '주님 실패할지라도 저는 계속 하겠습니다!'
그때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실패하는 길을 계속 꿋꿋이 나아가야 되는 거! 
이건 진짜 어려운 느낌이었어요. 

그렇지만 마음에 하나님이 저에게 다짐을 주셨어요. 
그리고 이제까지 13년이 지나고, 제가 은퇴하고 나서도 지금 '예수동행운동'을 하는데, 
아마 여러분 중에도 예수동행일기를 쓰시는 분들이 있으실 거예요. 

처음에는 별로 반응이 없더니 
지금은 교회 교회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의 갈망을 가지고 
'와서 도와달라, 우리 교회에 와서 교인들을 좀 훈련시켜 달라' 
그런 요청이 너무너무 많이 와요. 

지금 '예수동행운동 - 위드 지저스 미니스트리' 사역이 
해를 거듭할수록 깊이나 넓이가 엄청나게 늘어났어요. 

'주님은 분명히 실패할 거라고 그러셨는데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깨달았어요. 
'실패할 거라도 그대로 나는 순종하겠다!' 
그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만약에 잘 될 줄 알았다면, 아마 저는 중간에 포기했을 거예요. 
왜냐면 반응이 없는 거예요. 

목사님들하고 세미나 하면, 100명 모이면, 한 명 두 명 정도 쓸까, 
거의 대부분은 예수동행일기를 안 쓰세요. 
그러면 그 사역을 계속 해야 돼요, 말아야 돼요?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으면 못 했을 거예요. 
근데 '실패해도 순종하겠다'고 각오하고 나갔기 때문에 
반응이 있든 없든, 저는 상관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런 역사가 일어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