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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하지 아니하였더라

LNCK 2024. 2. 5. 12:00

금하지 아니하였더라            삼상3:13           펀 글 정리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세 가지로 엘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삼상3: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이 어린 사무엘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조용히 들을 수 있는 자(사무엘)에게는 복음이요,

조용한 경고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이것은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음성이 사무엘에게는 생명의 말씀으로,

사무엘에 관한 내용은 없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말씀해 주신 것 자체가 복음이죠.

그리고 엘리에게는 심판의 말씀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음성을 그 소리를 뻔히 들으면서도.. 웬만한 사람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죽습니다. 그 음성을 못 들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 전에 먼저 경고하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아무 경고의 음성 없이, 조용히 데려가시는 경우는... 글쎄 없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말입니다.

 

이 소리를 들을 때, 엘리는 그냥 놀라 자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회개할 기회를 놓쳤다’고도 하는데,

회개할 힘(영력)마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뻔히 알고도, 다가오는 심판을 당하는 것이지요.

혹시나 사무엘이 들은 음성이, 거짓이기를 요행으로 바라면서요...

 

사실 우리가, 엘리처럼, 그런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가정이나 직장이나, 공동체에

뻔히 망하는 일인줄 알고도.. 그냥 비겁하게, 안일하게 내가 침묵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또한 우리는 다 압니다. 그것은

-아는 죄악이고,

-저주를 자청하는 일인데도,

-(내가) 그 일을 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비참한 결과를,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영적인 힘이 저하되거나,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 아는 죄악

 

13절에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아는 죄다. 모르는 죄를 지금 묻고 있는 게 아닙니다.

죄인가? 아닌가?

의냐? 불의냐? 이것을 배워야지요. 가르쳐야죠.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그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양심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것이 지식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속에 깊은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가르쳐서 개발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옳은 일, 그른 일, 잘하는 일, 못 하는 일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는 것’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유명한 기도문이 있지 않는가요?

 

"하나님이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용기와 냉정함과 지혜, 이 세 가지를 구합니다.

 

우리에게 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식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되고요.

또 한번 알았으면 이제 실천해야지요. 알면서도 행하지를 않아요.

그러면 그게 죄가 되는 것입니다. 또 모르면 이건 또 알아야지요.

그래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식도 있어야 되겠지만, 또는 식별하고 냉정함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아는 죄악을 인함이다 하십니다.

아는 죄,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중죄라고 하지요.

우리가 모르고 짓는 죄는 사실 가벼운 죄입니다.

그러나 알고 짓는 죄는 짐짓 짓는 죄입니다. 이것은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인이냐, 도적질이냐, 간음이냐에 있지를 않습니다.

거기에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아는 죄’이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완악해서 알고고 죄를 범합니다.

이 알고 짓는 죄가 큰 죄인 것이다.

 

△30년 전에, 기독교 실업인 모임(CBMC)에 제가 강사로 갔던 적이 있습니다. (펀 글)

한국 재계의 유명 인사들,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대거 모인 자리였습니다.

당시 경험 없던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성경 본문을 잘못 택했습니다.

 

그들의 바램은, ‘내가 하나님의 축복받은 실업인 장로가 되었는데

그것을 추켜세워 달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제가 야고보서를 본문으로 택하니까

‘네가 떼먹은 임금이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고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한 것은 죄이고...’

 

그 때 장로님들이 강의 후에 식사할 때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홍 목사,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렇지.. 정직해서 사업이 되는 줄 알아?”

 

매 번 강의를 마치고 나서, 식사시간에 나는 똑같은 질책을 들었습니다.

실업인들은 제 연속 강의가 빨리 끝나기를 총무에게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놀랍게도, 젊은 기독교 실업인들이 말씀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노력들을 곁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 순종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망해 버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교인도 아니지만,

저는 그 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조용히 중보기도 합니다.

 

경제정의가 이 땅에 아름답게 구현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공의를 행하며...” 대로 살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2. 저주를 자청하되

그리고 두 번째 13b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이렇게 하면 잘못되는 줄 알아요. 그런데도 그 일을 하고 있어요.

이것은 저주를 자청하는 일입니다.

 

뻔히 알고도, 멸망의 길, 저주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많이 봅니다.

 

참 가만히 보면 불행을 자초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그 중요한 나이에 열심히 공부도 하고, 또 경건을 익히고..

그러해야 되겠는데, 그저 잘못된 길로 자꾸 나가요.

잘못된 습관, 잘못된 행위, 그거 시간이 얼마나 아까워요.

 

가만히 생각하면 그것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면 나이가 들어서는 얼마나 후회하겠는가요?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잖아요.

 

심지어 부모가 이런 애타는 호소를 아이들에게 할 때도 있지요.

'내게도 그런 후회가 있는데, 내가 이런 일로 인해서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는데,

너 왜 나와 같은 길을 걸으려고 하느냐? 나는 불행을 자초했지만

너는 이 길로 들어서지 말아라'고 하지요. 하여튼 불행을 자초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도덕적으로 볼 때도, 종교적으로 볼 때도 이렇게 살면 불행이 있다는 것은 뻔해요.

심지어 저주의 길이 눈에 환하게 보이지 않는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불행의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얼마나 불행한 일들인가요?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기 전에 제물을 꺼내 먹고

또 나아가서는 여인들과 불미스러운 관계를 가지기까지 했습니다.

 

성전에서 그런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끝까지 간 것입니다. 이렇게 엘리의 아들들은 저주의 길을 자청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죄는 자청합니다.

내가 스스로 알고 가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불행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청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되고, 그런 사건이 계속되면 반드시 저주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가 스스로 막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큰 사건을 통해서 막아주시는 그런 것도, 우리가 경험하게 됩니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할머니의 기도

또 제(한 UBF 간사)가 캠퍼스에서 만난 한 형제는,

대학 2학년인데, 그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니까,

선교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하였습니다.

 

공부도 꽤 잘하는 장학생인데, 제가 신기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런 꿈을 갖게 되었는지..’

 

그는 네 살 때 아버지가 자살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재혼하셨는데

새아버지도 문제가 있어서 금방 이혼하였습니다.

완전 저주의 가정, 풍비박산이 난 가정환경이었지요.

 

결국 그는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외할머니는 새벽마다 그를 업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아이를 주님의 종으로 키워 달라고’

 

그래서 그는 일찍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오직 자신의 인생을 불태워서 주님께 드리기로 서원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가정환경이 불우해서

얼마든지 불량 청소년이 되고, 삐뚤어질 수 있는 학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운명이 변하여, 세계 선교의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저주와 미움을 불태울 수 있는데,

할머니가 자기를 등에 업고 새벽기도 하는 것을 매일 듣고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생을 불태워서

예수님 사랑으로 세상을 녹이고자 기도하며 준비하는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된 것입니다.

 

▲3. 금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엘리의 세 번째 죄가 나오는데 뭐냐 하면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죄는 금해야지요. 그것도 아주 작은 죄를 범할 때부터 금해야 합니다.

 

끝까지 간다면 소용이 없어요. 금할 수 있을 때 금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알 수 있을 때 알아야 되고, 고칠 수 있을 때 고쳐야 되고,

금할 수 있을 때 금하는 것, 그것이 바른 길인데 엘리는 금하지 않았거든요. 왜요?

그 이유가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자식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일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금하지 아니했습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아이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면 어렸다고 봐 줌으로 해서

어느 사이에 큰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로 자라났다는 사실입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젠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요?

"자녀교육은 네 살로 끝난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의식도 잘 모를 때

그때 옳은 것과 그른 것,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저주의 길을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다.’

그런고로 이제 이 집을 향해서는 멸망이 선포됩니다.

삼부자가 하루에 다 죽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자녀에게 편지라도 쓰십시오.

 

요일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쓰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로(그들로) 하여금 죄짓지 않도록 하려고” 이 서신을 쓰고 있다고 했죠.

 

여러분은 예수 믿어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까?”

“죄 안 짓고 살고 싶습니까?”

 

이것이 열쇠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육신이 약하여

다시 죄를 짓게 되더라도

주님은 완전한 대책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자녀’는

자기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영적인 자녀입니다.

 

 

존 스토트는 여러분들이 잘 압니다.

그렇지만 에릭 네쉬라는 목사님은 여러분이 들어본 적이 별로 없을 겁니다.

 

에릭 네쉬 목사님은, 존 스토트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 고등학교를 찾아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때 그 설교를 듣고 존 스토트가 회심을 합니다.

존 스토트를 회심으로 인도했던 분인데, 정말 놀라운 것은 뭐냐?

존 스토트가 회심하고 나서, 에릭 네쉬 목사님이 5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존 스토트에게 양육 편지를 써요.

그리고 날마다 존 스토트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한 사람이 5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양육 편지 쓰는 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5년 동안, 고등학교, 대학교 시설에 양육 편지를 통해서

그 어떻게 보면 질풍노도의 시간을 겪고 있는 존 스토트를 붙잡아 줍니다.

 

그런 돌봄과 사랑 속에서, 존 스토트는,

20세기 대표하는 그런 탁월한 신학자 존 스토트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삼상3:11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앞으로 4장에 가보면, 엘리의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

이런 엄청난 소식이 들려질 때, 정말 엘리는 두 귀가 울리고,

앉았던 의자에서 놀라 자빠져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의 마음의 귀도 울렸을 것입니다. 깜짝 놀랐고, 두려웠다는 뜻입니다.

‘상상도 못하는 사건이 들리게 되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조용히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고요한 마음, 깊이 경건해 취해 있는 그런 마음의 사람에게 고요히 들려집니다.

그리고 또한 조용하게 응답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번잡하고 때묻고 굳어지고 강퍅해진 사람에게는

조용한 음성은 들려지지 않습니다. 전혀 들려질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