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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마25:19-23 2012.05.27. ☞ ▣ 구제 관련글
제가 지난주에 송아지를 전달하러 베트남에 갔을 때
하노이 시에 있는 크리스천 기업인들의 모임인 CBMC 조찬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호텔에서 식사를 하면서 마침 평소에 친분이 있던,
한국에서 장관을 지내고 방송국 사장도 하셨던 분을 만나
“아니 장관님은 여기 웬일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 말씀이, 한국에서 오케스트라 단원 40명과 함께 공연을 위해서 왔는데
어제 저녁에도 하노이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성황리에 마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게 “목사님은 이곳에 웬일이십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송아지 때문에 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주1)
제 느낌에, 그 장관님은
제가 무슨 대단한 일 때문에 베트남에 왔는지 알았는데
그저 ‘송아지 전달하는 일 때문에 왔다’고 하니까
그분이 조금은 실망스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분이 그런 태도에 ‘저 분은 오케스트라 때문에 왔는데
나는 송아지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니, 저도 좀 쑥스러워졌습니다.
(*이 설교의 주제는 ‘작은 일에 충성’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시할 만한 작은 일이,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대단한 일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지난 주 몽골에 갈 때는,
인천공항에서 같이 가는 일행들과 함께 수속을 하느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저를 알고 있는 대한항공 직원이 저를 발견하고는,
퍼스트클래스의 체크인 하는 곳으로 가서, 저 대신 수속을 해주었습니다.
비행기 자리도 앞에 좋은 자리를 주고,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 이용권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목사님, 몽골에 왜 가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무를 심으러 간다고 하자, 그 직원의 표정이
‘나라의 큰일을 하러 가는 줄 알았더니, 겨우 나무를 심으러 몽골에 가시는가’
하는 실망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송아지를 전달하는 것, 나무를 심는 것...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찮은 것입니다.
그런 하찮은 일 때문에, 제가 시간 내고, 돈 내고 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조금은 무시하고,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런 일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조금은 실망스럽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찮은 일을 하는 것보다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을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을 이장 보다는 면장,
면장보다는 군수나 도지사를 더 훌륭하게 생각하고,
구의원보다는 나라 일을 하는 국회의원을 더 훌륭하게 생각합니다.
잡다한 일을 하는 사원보다는, 사장을 더 큰 인물로 인정해 주는 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작은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기를 원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릅니다. 큰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적은 일을 하는 사람을 더 인정해주고
더 생각해주는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달란트의 비유로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주인의 평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의 칭찬이 무엇이었습니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21
‘다섯 달란트를 남겼으니 잘 하였다’고 칭찬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인의 평가는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도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도 같은 칭찬을 합니다.
‘두 달란트를 남겨서 잘 했다’고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23
주인의 평가는 작은 일에 충성한 것, 보잘 것 없는 일에 충성한 것을 잘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세상의 논리와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을 보며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의 상식과 규범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온 세상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일을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크고 놀라운 일을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시 분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세상에서 오신 일에 걸맞게 스케일이 큰일을 하셔야 마땅합니다.
우선 같이 일할 제자들을 선택하는 것도, 적어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스케일에 맞추기 위해서는, 천하의 인재를 여기저기서 모아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도 천하의 인재를 구합니다.
누가 천하를 인재를 구하느냐에 따라, 대통령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함께 일할 인재를 구하는데, 아주 협소하게 갈릴리 촌사람들, 어부들을 구했습니다.
학자도 아니고, 명문가의 인재들도 아니고, 천하기 그지없는 어부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또 활동하신 지역도, 갈릴리라는 촌지방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면 당시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인 로마에서 활동하셔야 마땅합니다.
자식을 큰 인물로 만들려면 서울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로마는 아니라도 최소한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라도 활동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라는 촌구석에서 지내셨습니다.
▲또한 인류구원의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한을 두고 일을 히야 합니다.
국회의원도 4년 임기이고, 나라의 대통령도 5년 임기이고, 저도 40년 동안 목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딱 3년반 동안만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도 사회적인 이슈나 정치적인 이슈나
세계 인류적인 이슈를 다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하찮은 일을 하셨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귀신들린 사람의 귀신을 쫓아주고, 소경 눈 뜨게 하는 일,
세리와 창녀와 어울려 다니는 일, 하찮은 사람과 싸우는 등
너무도 지엽적인 일을 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제사장이나 서기관들과 싸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체면이 안 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사람들과 싸울 일이 많이 있지만, 체면 때문에 안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3년 동안 하신 일이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정말 ‘작은 일’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큰일 한 번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적어도 그 시대의 그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 등
거창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평생 동안 주위의 자잘한 일들,
동네 사람들의 일들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시다가 3년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한 번 오시는 것이니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방송 출현을 하시든지, 당시는 방송이 없으니까
예루살렘 광장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다가다 생각나는 대로 한 마디씩 가르치셨습니다.
더군다나 열심히 가르치지만 엉뚱한 소리나 하는 모자라는 제자들 몇 사람에게
가르치신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렇듯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거창한 모습, 무슨 원대한 계획을 가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찮은 일에 매달려서 성과도 없는 인생을 사셨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아주 작은 일에 매달려 아주 적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사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마태복음 25장을 조금 더 읽으면 최후의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평생을 살아온 삶을 평가받는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세상을 살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듣지 않고 살 수 있지만
평생에 한 번, 꼭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살아왔던 일생을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성경 가운데 최후의 심판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때 평가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큰일을 했으며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느냐,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선한 일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끼를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 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느냐?
지구상의 심각한 문제인 식량부족의 문제,
의료정책이나 교육의 문제, 환경이나 기후변화의 문제 때문에
얼마나 노력하고 애썼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 주위의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보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에 먹을 것을 주고,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도 유치하고 적고 하찮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 인생의 평가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가르치는 결론은 큰일을 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소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작은 일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네 주위의 배고픈 사람을 그냥 보내지 말고 한 끼라도 정성껏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찮은 일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큰일을 하고 세계를 누비는 일이 중요한 것 같지만
송아지 한 마리를 가난한 나라의 농촌에 보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 몽골 사람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목사님, 우리 집 아이가 병이 들었는데 몽골에서 고치지 못해서 한국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그 병원에서 못 고친다고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응급차를 타고 서울대학병원에 왔는데, 지금 며칠이 지났는데도 진료는커녕
입원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점점 죽어가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도와주십시오.
이 아이를 입원시켜주시고, 할 수 있는 만큼 치료해주시고,
난처한 부탁인데 돈이 없으니 병원비를 안 내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 전화를 받고 난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몽골 사람을 보살피는 사람도 아니고
서울대학병원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울 대학병원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부탁을 받으면 난감한 것 아닙니까?
‘이 사람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의 부탁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정말 양심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절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입니다.
두 번째는 제가 제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아는 사람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아이처럼 생각하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자 하면, 찾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번거롭고 힘든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데.. 부탁은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번거롭고 힘든 일이고,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하는 일입니다.
제가 우리 아이나 교인을 부탁한다면 절실할 수 있지만
저도 잘 모르는 사람의 부탁을 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어려운 일입니까?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의사였다가 국회의원이 된 사람을 잘 알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전화하여 자초지정을 이야기하고
서울대학병원 아는 사람을 한번 찾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제 부탁을 받은 그 사람이 조금 어리둥절해 하였습니다.
자기가 못하면 그만이지, 국회의원이 된 사람에게
‘몽골 사람을 입원시켜달라, 치료를 잘 해달라, 또 돈을 안 내게 해달라’
그런 자잘한 부탁을 하는가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국회의원에게 이런 하찮은 일을 해서 미안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목사님, 권력이 무엇입니까? 그런 일을 할 때 쓸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그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권력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행세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서울대학병원에 부탁을 해서, 지금 어린이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를 잘 받고 있습니다.
제가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전화가 없는 것을 보니, 잘 치료를 받고있는 것 같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아주 하찮은 사람이 권력의 도움도 필요하고 돈의 도움도 필요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이런저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뭐 대단히 높은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아는 사람도 많고, 제가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저런 축복을 제게 주신 것은
이런 하찮은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큰일을 하려고 벼르지 마십시오.
지금 할 수 있는 적은 일이 있거든 주저하지 말고 하십시오.
돈 많이 벌어서 큰 자선사업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것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십시오.
혹시 여러분에게 권력이 있고 여러분에게 돈이 있다면 힘이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것을 주셨을까?’
주위에 있는 하찮은 사람을 돕기 위해 주신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큰일을 하려고 기다리지 말고, 지금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나와 도시락 싸는 일, 그리고 배달하는 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주 하찮은 일이지만 작은 일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거기에 매달리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사무엘하 9장에는 다윗과 므비보셋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윗이 한 많은 일 중에
오늘 사무엘하 9장에 나오는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다윗에 대해 존경과 감동을 합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왕의 손자요, 다윗의 친구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사울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승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패자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윗이 지금 일국의 왕이 되었는데, 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원수 사울왕의 손자를 일부러 찾아냈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 그가 해야 할 수많은 직무 가운데서도, 일부러 므비보셋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에게 호의를 베풀어, 할아버지 사울의 땅도 찾아주었습니다.
자신이 먹는 상에서 같이 밥을 먹도록 하였습니다.
무시하거나 잊어버려도, 괜찮은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다윗의 태도를 보고 므비보셋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죽은 개같은 나를’ 이란 말씀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죽은 개 같은 사람’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다윗이 했던 수많은 위대한 일이 있지만
죽은 개 같은 므비보셋을 사랑으로 껴안고 도운 것은
다윗의 일생에 가장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일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최후의 심판이야기가 나옵니다.
양과 염소를 갈라놓고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으니 필요한 것을 채워주었으니 천국에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한 쪽은 지옥에 가라고 하십니다. 판결을 받은 양쪽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게 돼서 좋은데 정말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언제 대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을 대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너무 하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잊어버린 것입니다.
큰일을 했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상을 기다렸겠지만
이 사람들은 다 잊어버려 기억이 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믿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 일,
하찮은 일에 매달려서 사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면서 남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왜 저런 일에 신경을 쓸까?’
시간 보내고, 돈을 쓰는가 할 만한 아주 적은 일, 사소한 일, 하찮은 일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하고, 우리의 삶을 함께 나누는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신 축복을 주신다는 이 귀한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큰 은혜가 되는 말씀이길 바랍니다.
.......................................
주1) 베트남 농가에 송아지 분양사역
베트남 선교의 일환으로, 베트남 농가에 송아지를 분양하는 듯,
또한 월남전 때 한국 참전과 피해를 준 점에 사과의 의미도 담긴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