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전교인수련회 케노시스 1 | 고성준 목사 | 2023.08.08. - YouTube
*위 설교 23분~46분까지 녹취
◈복음의 시대 정신 빌4:4 ☞<기쁨> 관련글
여러분, 복음에는 <시대 정신>이라는게 있습니다.
뭐냐면 그 복음의 본질은 동일하지요. 그런데 각 시대마다
그 복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는 조금씩 다르다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복음의 시대 정신>이라고 부르는데
예를 들어서 뭐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했던 이런 시대,
그런 시대에 복음은 뭘로 나타났을까요?
불의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겠죠. 이런 게 '시대 정신'이에요.
복음의 강조점이, 시대적 상황, 시대의 처한 현실에 따라
강조점이 약간씩 달라진다는 거죠.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시대에 따라서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똑같은 복음이지만 불의한 시대에는 저항함으로 나타나고
또 망가진 시대의 복음은 회복으로 나타나겠죠.
아픔의 시대에는, 복음은 치유로 나타나고 (강조되고)
무너진 시대에는, 복음은 회복으로 나타나고
어두운 시대에는, 복음은 소망으로 나타나고
분열된 시대에는, 복음은 연합으로 나타나고
원망의 환경 속에서는, 복음은 용서로 나타나고
경쟁의 환경 속에서는, 복음은 희생으로 나타나고
그러니까 복음은 시대 상황에 따라서, (본질은 그대로이지만)
그 표현되는 모습들, 강조점들이 달리 나타난다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복음의 시대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자 그렇다면 2023년 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시대 정신'은 뭘까요?
현재 '복음의 시대 정신'은, 저는 단언코 <기쁨>이라고 믿습니다.
2020년부터 시작된 팬데믹은, 우리 모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서,
긴 시간 동안 (약 3년 반동안) 우리 사회의 모두를 괴롭게 했습니다.
단순한 질병에 대한 염려를 뛰어넘어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던 자유가 통제되고,
또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팬데믹이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그 후유증들을 보고 있습니다.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겠지요.
국민들 사이에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묻지마 범죄'로부터 시작해서, 또 자살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여러분 두렵지 않습니까?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 쌓여 있는 분노, 원망...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면서 나타나는 낙심, 무기력, 우울함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요.
이것이 지금 사회의 모습이죠.
이 상황 속에서 여러분 복음은 단연코 <기쁨>으로 나타난다고 믿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하는 거예요.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023년 '복음의 시대정신'은 기쁨이라고 믿습니다.
(이 시대정신은 2024년도에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 낙심되고 우울해 보이는 이 시대 속에서
복음은 증거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성경 66권 중에, 기쁨을 전체 주제로 하는 성경은 <빌립보서>입니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 자들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가택 연금) 가운데 있습니다.
곧 끝날 줄 알았던 구금기간이 1년, 2년 지속되었죠.
언제 출소될지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바울에게 성령께서는 '기쁨'을 전하라고 하셨지요. *빌립보서를 쓰게 하셨어요.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지금 바울은 '기쁨'과는 가장 반대되는 상황에 있는데,
그런 바울에게 기쁨을 전하라고 하셨듯이,
오늘날 특별히 팬데믹으로 인해, 온 국민들이 기쁨을 잃어버리고,
시대를 뒤덮는 낙심과 염려와 우울과 스트레스와 분노한 가운데서
또는 개인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뿐더러,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문제들 앞에서,
성령께서는 교회에게,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기쁨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게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기쁨을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맞아요. 여러분, 교회는 기쁨을 전하는 곳이 되어야 됩니다.
이 시대에 복음은 '기쁨'의 메시지를 '시대정신'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과 교회는, 현실 상황을 뒤집어엎는 기쁨의 근원이 되어야 되고,
복음과 교회는 상식을 깨는 기쁨의 원천지가 돼야 돼요.
그것이 이 시대에 교회가 감당해야 될 사명인 줄 믿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네, 우리가 먼저 기쁨을 누림으로써, 그게 가능해 집니다.
맞아요. 여러분 교회가 기쁨을 선포한다고 하는 것은,
세상을 향해서 '기뻐하라'고 소리치는게 아니에요.
우리가 기쁨을 누리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요.
우리가 기쁨을 누리는 사는 것 자체가,
이 어두운 시대를 향한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고,
우리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낙심과 절망 속에 있는 세상에 '기뻐하라!'고 하는
가장 강력한 소망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세상에게 교회가 전달해야 될 메시지는 아주 단순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는 거예요.
기뻐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기쁨을 누리고
평강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평강을 누리고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감사하고
요동치는 폭풍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이것이 이 시대를 향한 가장 강력한 메시지인 줄 믿습니다. 아멘.
평강, 감사, 평안... 이게 다 넓게 보면 '기쁨'이죠.
그래서 기쁨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성도와 교회가, 기쁨, 평강, 감사, 평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연기로 연출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복음의 본질을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세상의 빛과 소망이 될 겁니다.
'아 기뻐할 수 있구나, 이런 상황 가운데서 평안할 수 있구나'
지금 세상이 보고 싶어 하고, 세상이 누리고 싶어 하는 게 이거 아니겠어요?
세상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빛을 보게 되고, 소망을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코로나 시국에도 기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메시지가, 우리 각 교회를 통해서, 온누리의 퍼져 가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교제할 때마다 항상 좋았던게 뭐냐면, 여러분들의 해맑은 얼굴이에요.
여러분은 항상 웃으며 기뻐하잖아요. 아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저희 교회도 여러분들처럼 잘 웃거든요.
며칠 전에 어떤 새가족 분이 오셨는데,
'이 교회에 와서 제일 좋았던 거 한 가지가 있는데,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더라'는 거예요.
잘 웃더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부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 외부에서 오면, 보이나 봐요.
기쁨 하나만 가지고도, 여러분 얼마나 강력한 전도가 되는지 몰라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얼굴이 전도용 얼굴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이게 성경적인 성도의 삶인 거예요.
'사람들이 너에게 소망에 대한 이유를 묻거든' 벧전3:15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묻고 싶은' 얼굴을 하고 다녀야 된다는 거죠.
'뭐가 그렇게 기쁘세요. 왜 그렇게 아무 걱정이 없이 평안하세요?'
이런 얼굴을 하고 다녀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전도 아닙니까. 전도형 얼굴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기뻐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도, 복음으로 기뻐하며,
감사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도, 주님이 이루신 일로 인해 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제가 몇몇 선교사들이 암투병을 하면서 마지막에 소천할 때, 그 옆에 같이 있었는데요.
정말 감사했던 건 뭐냐면, 마지막 때 거의 정신이 없고(혼수상태)
거의 정말 임종을 하루 이틀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도
의식이 간간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하더라고요.
임종하기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강력한 메시지인지 몰라요.
이런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성경은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두 가지를 해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사실은 한 가지인데, 이게 단계가 있기 때문에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자신을 비우고,
둘째는 성령으로 채워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자신을 비우고 성령으로 채워야 된다는 거예요.
▲기독교에서는 자기 부인을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막8:34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그랬거든요. 눅9:23
기독교는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는 종교예요.
그런데 이 비움이라는 것은, 불교나 도교에서 얘기하는 비움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불교나 도교에서 얘기하는 비움은, 비우기 위한 비움이에요.
그런데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비움은, 비움이 최종 목적이 아니에요.
채움이 목적이에요.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
그런데 '나(자아)'라는 게 가득 차 있으니까, 성령으로 채울 공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먼저 비우라는 거예요. 비워야 하나님께서 채우시죠.
하여간 십자가의 도에서, '자기 비움'이라는 것은
비움의 목적이 아니라, 채움이 목적입니다.
성령님으로 가득해지고,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겁니다.
▲성경은,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열매>라고 얘기합니다.
사61:1~3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십니다.' 61:2
또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고, 재 대신 기쁨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게 하십니다.
찬송의 옷을 입히셔서 근심을 대신하게 하신대요. :3
또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신답니다. :2
와~ 우리 슬픔과, 낙심과, 억압을, 기쁨과 소망과 자유로 바꾸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언제 그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걸로 시작해요. :1
그러니까 우리 안에 슬픔이 있고, 낙심이 있고, 눌림이 있고, 억압이 있는데
그것이 이제 기쁨이 되고, 자유가 되고, 소망이 되고, 감사가 되고, 찬송이 되는데
이게 언제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사61:1
즉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때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이 우리 안에 있는 슬픔과 고통이,
기쁨으로 바꿔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될 수 있는데, 그 비결이 뭐라는 거예요?
주 여호와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은 철저하게 철저하게 기쁨의 근원은 성령님이라고 얘기해요.
사람들은 기쁨을 외부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면 기쁨이 온다고 생각하고,
또 내가 가지고 싶었던 차를 구입하면 기쁘다고 생각하고,
또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 기뻐진다고 믿습니다.
뭐 잠시 기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거는 항상은 아니라는 거예요.
차를 사면 기쁩니다. 언제까지 기쁜 줄 아세요? 찌그러지기 전까지.
저희 큰아들이 곧 결혼을 앞두고, 처음으로 새 차를 하나 샀어요. 정말 어렵게 샀어요.
이거 완전히 보물처럼 애지중지하며 너무 기뻐했는데,
사고 나서 그만 일주일 만에 차를 긁었어요.
야~ 그때 그 슬픔과 우울한 표정...
새 차를 사면 기뻐요. 그런데 항상 기쁜 건 아니에요.
새 차를 긁으면 속상하지만, 긁지 않았어도 몇 달 지나면 그 기쁨은 다 사라져요.
세상 기쁨은 정말 잠깐이라는 거예요.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뭐 서울대학에만 가면 기쁠 줄 알았어요.
정말 그것만 이루어지면, 내 인생이 끝없이 행복할 줄 알았어요.
감사하게 제가 서울대를 들어갔는데, 그 기쁨이 정말 딱 6개월 가더라고요.
딱 6개월 갔어요. 그리고 6개월이 지났을 때, 제 인생에 가장 큰 우울의 시기가 찾아왔어요.
제가 지난 57년을 살면서, 가장 우울하고 가장 힘들었던 때가 대학교 1학년 때였어요.
참 우울하고, 가장 낙심되고, 아무 소망도 없고, 왜 사는지 모르겠고...
대학에 입학해서 누렸던 기쁨이 딱 6개월 가더라고요.
맞아요.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성취하면 기쁘죠. 하지만 잠깐이에요.
그리고 잠깐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고통과 슬픔과 우울이 우리 마음을 점철하게 됩니다.
(*어떤 부부가 일평생 소원이 전원주택을 갖는 거였대요.
그래서 수 십년 저축해서, 부부가 은퇴하자마자 전원주택을 한 채 지었습니다.
널찍한 마당과, 새로 지은 아담한 집... 처음에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대요.
그런데 한 6개월 지나서, 그 기쁨은 이제 근심과 고통으로 바뀌었대요.
왜냐면 널찍한 마당에서, 그 푸른 잔디밭에서, 매일같이 잡초가 돋아난답니다.
그래서 부부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는 일이래요.
그걸 안 뽑고 그냥 놔두면.. 초록빛 잔디밭 마당이 그냥 잡초가 무성한 폐허처럼 되어버리니까,
매일같이 쪼그리고 앉아서, 잔디밭을 가꾸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성경은 기쁨을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 뭘 하라 그러냐면 기도하라고 얘기합니다.
성령 충만을 기도하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슬픔과 염려로부터 지키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빌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 보면,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거예요. 무엇으로부터?
염려와 슬픔으로부터,
낙심과 우울과 절망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지키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염려와 슬픔으로부터 지키신다는 거예요.
자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마음은,
성령께서 염려와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지켜 주시지 않으면
곧바로 다시 슬픔과 염려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고 조금 있다보면 그렇게 복귀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에 디폴트 세팅된 것은 뭐냐면 슬픔이에요.
왜 슬퍼지냐고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슬퍼져요.
그냥 왜 사는 게 우울하냐고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인생은 그냥 우울해요.
그게 우리 마음에 그냥 디폴트 세팅이 되어 있어서 그런 거예요.
디폴트 세팅이란, 컴퓨터 용어인데, 운영체제가 고정되어 프로그램 되었다는 거죠.
그거는 쉽게 못 바꾸죠.
타락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슬프고 우울하도록 세팅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타락한 인간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 마음을 특별하게 지켜 주시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계속 다시 디폴트 세팅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염려하고, 우울하고, 슬퍼하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성령님께 간구해야 되는 거예요.
'저를 지켜 주십시오.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을 때, 주 여호와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사61:1~3절의 역사가 일어나거나, 빌4:6~7절이 일어나게 돼죠.
할렐루야, 주 여호와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야 돼요!
예배 가운데 주 여호와의 영이 임하셔야 되고,
우리가 기도할 때 주 여호와의 영이 임하셔야 되고,
그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셔야 돼요.
성령님의 보호하심이 없으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없어요.
뭐 잠깐 잠깐 일어나는 일들을 기뻐하다가.. 바로 다시 우울해지고,
바로 다시 낙심하게 되고... 그렇게 됩니다.
세상이 기쁨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 타락한 세상, 나를 둘러싼 외부환경 속에서는, 절대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의 끝은 뭐예요. 죽음이거든요.
타락한 세상의 본질은 어둠이고,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본질은 절망이고,
생명을 저버린 세상의 본질은 죽음입니다.
잠깐 맛보기로 기쁨을 느낄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건 정말 마약 같은 거예요.
잠깐 동안 기쁘다가, 다시 고통스러워집니다.
(성령의) 약발이 떨어지면 바로 다시 고통스러워져요.
여러분, 제대로 된 기쁨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셔야 돼요.
주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기를 기도하셔야 되는 거예요.
▲엡1:17~1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에 보면 주 여호와의 영, 성령님이 어떤 분이래요? 지혜와 계시의 영이에요.
그래서 알게 하신다는 거예요.
주 여호와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다른 것을 보게 합니다.
그 전까지는 뭐를 쳐다봐요? 세상을 봐요.
새로 산 차를 보고, 사람들의 인정을 보고, 성공을 보고,
또 내가 성취한 것을 보고... 계속 그걸 보면서 기쁨을 추구하는데,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시면, 이제 다른 걸 보기 시작합니다.
자 지혜의 영이기 때문에,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게 됩니다.
진리를 알게 되는 거지요. 그 진리가 뭐예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거예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거예요.
그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거예요.
그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을 복으로 주신다는 거예요.
지혜의 영께서, 이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계시의 영이 역사하실 때,
우리는 자기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성도가 누리게 될 영광이 무엇이고,
우리에게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 거예요. 아멘!
자 성령의 역사하실 때이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져서
이 땅에 썩어 없어질 것들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영광과 성도를 향한 놀라운 부르심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때 비로소 우리가, 전에 육체의 눈으로 보던 저주들,
낙심과, 실망과, 슬픔과, 분노에서 벗어나서
기쁨의 축복으로 들어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진리를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가 자유케 된다는 거예요. 무엇을부터?
슬픔과 고통과 저주로부터.
우리 육신의 눈이 매여 있던 이 저주로부터 자유케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때 비로소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만 바라보던 우리 시선이,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을 보게 되는 것,
이게 진짜 기쁨의 근원입니다.
바울을 죽음 앞에서도 기쁘게 했던 그 기쁨,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감사하게 했던 그 능력,
그것은 성령께서 바울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의 영광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신 거예요. 엡1:17~19
여러분, 이 보는 싸움에서 지면요, 마음을 지킬 수가 없어요.
'눈은 마음에 등불이라' 그랬어요.
눅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니까 눈을 통해서 마음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마음이 밝을지 어두울지, 등불이 켜져 있을지 꺼질지.. 정하는게 뭐예요?
눈이라는 거예요. 결국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등불이 켜져 있을지, 꺼질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계속 하늘의 것들을 바라보세요.
기도와 예배.. 이것 없이
여러분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지켜낼 수 없어요.
오직 주 여호와의 신이 임하셔야 돼요. 할렐루야
자 그러기 위해서 한 가지 해야 될게 있습니다. 그게 뭐예요?
자신을 비워야 된다는 거예요. 자신을 비워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