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전교인수련회 "GOOD FATHER" 케노시스 2 2023.08.09. - YouTube
*위 동영상 7:10초~31:45까지 녹취
◈자신을 비우기 P1 빌2:5~11 ☞ <자아> 관련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셨어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지 못하면,
기쁨은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되는데,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한다든지, 도둑질을 한다든지 하면,
아무리 거듭난 사람이라도, 합당치 못한 자신의 삶으로 인하여
평강도, 기쁨도 다 깨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되는데,
복음에 합당한 삶은, 올바른 마음에서부터 나오고,
올바른 마음들은, 한 가지 근원에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 2:5
그래서 이 싸움이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내 안에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까?' 하는 거죠.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게 사실은 빌2:5~11절 말씀과 정확히 같은 내용이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5~8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정확히 같은 말을, 눅9:23절이 먼저 하고 있는 거죠.
이렇게 자기를 비워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빌2:9
십자가에서 나 자신을 죽일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이게 여러분,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하나님과 우리의 콜라보레이션(동역)이에요.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꼬이게 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심'만도 아니고, '전적으로 내가 함'도 아니에요.
두 요소가 같이 들어가는 거예요.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는, 내가 해야 될 파트가 있고, 하나님이 하셔야 될 파트가 있다는 거죠.
이것을 헷갈리면 안 돼요.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 거꾸로 해요.
'하나님이 해야 될 파트'를, 내가 하려고 날뛰고요,
'내가 해야 될 파트'를, 하나님보고 해 주십시오.. 하고는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기만 합니다.
이렇게 하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내가 해야 될 파트'를 했을 때, 하나님이 '하나님이 행하셔야 될 파트'를 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될 파트가 있는데,
그건 뭐냐면 십자가에서 내 자아를 죽이는 거예요.
내 의지를 가지고 자아를 죽이는 거예요. 그렇게 나를 비우는 거예요.
이거는 반드시 내가 해야될 파트입니다. 물론 잘 안 되지만, 내가 해야될 파트이고,
그럴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방언기도 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방언도 똑같지 않습니까?
방언도, 내가 말하려고 할 때 방언이 나오지,
가만히 내가 입닫고 있는데.. 방언이 안 나오죠.
거기에도 내가 해야될 파트가 있고,
그럴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거죠.
방언기도는 어떻게 보면, 믿는 자들의 삶을 아주 함축적,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봐요.
방언 이라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데,
내가 내 의지를 발휘하지 않고, 입을 꽉 다물고 있는데, 저절로 방언이 나오지 않아요.
내가 입술을 열어 기도할 때, 내 의지를 발휘해서
'방언으로 기도해야지, 소리내서 기도해야지' 이렇게 의지를 발휘해서 뭔가를 할 때,
성령께서 기름부으셔서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죠.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로 결정하셨어요.
태초부터 사람과 함께 일하기로 결정하셨어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해야될 파트가 있어요.
그걸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직설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에서 자아를 죽이고, 날마다 나를 따르라'는 거죠. 눅9:23
이게 우리가 해야될 파트입니다.
◑우리가 해야될 파트에 대해서 좀 살펴보겠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은 빌2:5~8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어요.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가 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건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해야 될 파트예요?
우리가 해야 될 파트인 거지요.
만약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게 하리라' 성경에 그랬으면,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죠.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내가 해야 될 일인지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인지를
잘 살펴야 돼요.
제가 저희 교회에서 사역자들에게 한 번 야단을 친 적이 있는데,
대표기도할 때 보니까,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더라고요. 물론 그 의미는 알겠는데, 물론 하나님이 도와주셔야죠.
그런데, '누가 해야 되는지'에 대한 개념들이 없으니까
자꾸 신앙생활이 꼬이는 거예요.
사랑은 내가 결단해서 하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시는 거지,
성령이 하셔야 될 일이 있고,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는데,
자꾸 내가 할 해야 될 일을 가지고, 성령께 도와 달라고만 부탁하면 안 돼죠.
(*신앙에서 자기 의지 will 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럼 거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해야 될 파트를, 내가 먼저 해야 돼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거는 명령법이므로, 마음을 품는 건 누가 해야 될 일이에요?
내가 해야 될 일이에요.
▲'이 마음을 품으라'에서 '품다'는 2:5
헬라어로 '프로네오'인데,
'마음을 훈련하다. 마음을 두다. 관심을 가지다.'
그래서 '순종하다. 주목하다. 생각하다.' 이런 의미에요.
프로네오 단어는 뭐냐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마음이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을 의미예요. 의지적인 선택!
그러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랬을 때 그것은
'의지적으로 네 마음을 선택하라' 이런 뜻이에요.
내 의지적으로 마음을 두고, 또 두고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두었다가 잠깐 다른 곳으로 마음이 흘러가면
다시 잡아다가 거기다 두고...
이렇게 반복적이고 의지적으로 내 마음을 '잡아다 두는' 거예요. '품으라'가!
같은 단어가 골3:2절에도 쓰였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의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생각하다' 역시 프로네오예요.
그러니까 위에 있는 것을 계속 생각하라는 거에요.
그러므로 '위의 것을 품으라. 땅의 것을 품지 말라'라고 해도 돼죠.
그러다가 마음에 땅에 있는 것이 생각나면, 다시 붙잡아다가 위의 것을 생각하게 만들라는 거죠.
이렇게 의지적이고 반복적으로 우리 생각을 계속 (그리스도의 마음을) 붙잡아 두는 거예요.
이게 빌2:5의 '품으라', 골3:2의 '생각하라'입니다. *프로네오
'의지적'이고 '반복적'인.. 이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의지적이고 반복적이에요. 그렇게 할 때 익숙해져 가요.
그렇게 익숙되어진 것을 '태도' 또는 '성품'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할 때 2:5
'마음'은 에티튜드 attitude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로 번역하고 있죠.
'태도'는 훈련된 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는 의미는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두고, 또 두고, 또 반복적이고 의지적으로 훈련해서
익숙해지게 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마음을 훈련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냐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영을 우리에게 부으시는 거예요.
마음은 영을 담는 그릇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 무언가를 둘 때,
뭔가를 계속 마음으로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할 때,
그 영이 임해요.
성령 뿐만이 아니라, 다른 영도 마찬가지예요.
맘몬의 영이 언제 임합니까?
돈을 반복적으로 내 마음에 두는 거예요.
오늘도 돈 생각, 내일도 돈 생각, 아침 먹고 돈 생각, 점심 먹고 돈 생각,
그러면 어느 순간에, 맘몬의 영이 훅하고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영적인 원리예요.
즉 마음은 영을 담는 그릇인데
내 마음에 어떤 생각을, 계속 의지적이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면,
거기에 영이 임하는 거예요.
뭐 맘몬의 영도 그렇고, 음란의 영도 그렇고, 거짓과 탐욕의 영도 그렇고,
약간 모든 영들은.. 내가 의지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강권적으로 내게 임하지는 않아요.
특별히 크리스천들은 절대로 그렇게 임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반복적으로 내 마음에 뒀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임하는 거예요.
'도박의 영'도 다 마찬가지예요.
'음란의 영'은, 계속 음란한 것을 반복적으로 두고 또 두고, 계속 생각할 때
그랬더니 어느 순간에 음란의 영이 훅하고 내 안에 들어오는 거지요.
(한 번 제대로 들어오면, 좀처럼 나가지 않습니다)
하여간 모든 영은 그렇습니다.
자 성령님도 마찬가지예요. 성령님이 언제 우리 안에 훅하고 임하시는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 안에 두고, 또 두고,
그제 잘 안 되지만 또 두고, 실패해도 또 두고,
그럴 때 어느 순간에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훅하고 임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의 마음을 더 깊게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거예요.
이게 영적인 프로세스입니다.
그래서 항상 첫 단추는 어떻게 시작하는 거예요?
항상 첫 단추는 예수의 마음을 품는 거예요.
의지적이고 반복적으로!
물론 우리가 다른 영에게 이렇게 붙잡혀 있을 수가 있어요.
도박이든지, 아니면 돈이든지, 아니면 두려움의 영, 의심의 영, 폭력의 영...
이렇게 뭔가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는데,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계속 내 마음 가운데 두는게 안 돼요.
왜냐면 그 영에 잡히면, 그 생각만 계속 나거든요. 계속 그 생각만 나거든요.
'미움의 영'에 사로잡히면, 계속 미워할 거리만 생각나는 거예요.
그럴 때는 축사가 필요해요. *축사 : 사악한 마귀(사)를 쫓아냄(축)
근데 축사했다고 끝나는게 아니라, 그렇게 축사하고 나서도
또 반복적으로 그 생각을 하잖아요. 그러면 또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축사가 됐으면, 그 다음에 뭐 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셔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고,
그분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시고... 이것을 계속 생각하고, 묵상하고,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생각하고 묵상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 여러분, 어느 순간 우리 안에 예수께서 임하세요.
그 영은 거룩함을 사모하는 영이며,
그 영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영이며,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영입니다.
이 영이 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 안에 있었던 마음과 태도들,
뭐 사랑하고, 하나되고, 긍휼히 여기고, 겸손하고, 돌보는... 이런 마음들을 갖게 돼요.
예수의 영을 받으십시오! 예수의 마음을 부으실 거예요.
언제? 그 마음을 프로네요 할 때! (계속 반복적으로 품을 때, 빌2:5)
▲자 그렇다면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일까요?
그것을 빌2:6, 7, 8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여기 보면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물론 다른 것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에서 시작해요.
-첫째는 자기를 비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죽기까지, 복종 순종하시는 거예요.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2:6~8
그러니까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5
미 말씀은 '끊임없이 예수의 마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프로네오 하라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또 비우고 또 비우고
동시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또 순종하고 또 순종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이거를 계속 프로네오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생기는데,
자기부인과,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게 됩니다.
이게 예수님의 영성의 핵심입니다.
자기 부인과, 복종
자기를 부인함으로 비우고
그 비운 곳에 복종함으로 하나님으로 채우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인데요...
◑<자기 부인>을 먼저 살펴보죠.
자기부인은 자기를 비우는 것인데, 케노시스(비움) 라는 말을 씁니다.
캐노시스는 먼저 자신의 권리를 취하지 않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케노시스 : 빌2:7절의 '자신을 비워'에 해당. 수도원 영성가들이 쓰는 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셨어요. 동등하신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 동등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권리가 있어요.
'나는 이 정도는 대접 받아야 되고,
이 정도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야 되고,
그래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권리는, 권리가 침해받기 전까지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 자신도 '무엇이 내 당연한 권리인지' 잘 몰라요.
그런데 이 권리가 침해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속에서 분노가 올라옵니다.
(그때 자기 권리의 범주가 드러나서 알게 되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와요.
△여러분은 자기 권리를 침해 받으신 적 있으세요? 제가 그런 적이 한 번 있어요.
한 10년 전쯤인 거 같은데, 제가 차를 몰고 청담동에서 약속이 있었서 거기로 갔어요.
수원이나 이런 '시골쥐'들은 가면 안 되는 동네인데 *동화 이야기 패러디
하여간 시골쥐가, 이제 청담동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약속이 생겼어요.
그래서 제 차를 몰고 갔습니다. 그 차가 이제 20년 된 현대 라비타 라고 하는 소형차였어요.
그때 이미 15년 이상 지난 차였으니까, 거의 엔틱(골동품)에 가까운 차였어요.
고급 레스토랑들은 발레파킹을 해 주잖아요. 근데 발레파킹을 안 해 주는 거에요.
내 앞차도 해 주고, 내 뒷차도 해 주고 다 해 주는데, 제 차만 안 해 줘요.
야 그 순간에 약간의 분노가 올라오죠.
이 사람들에게 내 권리가 침해받은 거지요.
그러니까 권리가 침해받기 전까지는 잘 안 드러나요.
그런데 권리가 딱 침해받고 나면, 이제 분노가 속에서 올라오는 거죠.
여하튼 내가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
즉 '나는 이 정도는 대접 받아야 되고,
나는 이 정도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야 되고...'
이렇게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는데
이 기준대로, 남들이 나를 대접해 주지 않으면 분노하고 삐집니다.
이게 뭐냐면 '자아, 에고'예요.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이 자아, 이 권리주장을 버려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게 건드려지면요. 분위기가 살벌해집니다.
멀쩡히 예배 worship 인도하던 사람을, 아무 말 없이 6개월만 안 세워 보십시오.
무슨 일 벌어질까요? 거의 예외 없습니다. 거의 발광합니다.
이건 예외 없어요. 멀쩡하던 사람을 딱 6개월만 안 세워 보세요.
셀리더, 소그룹 리더하는 사람을 갑자기 끌어내려 보세요.
'당신 셀리더 그만하십시오' 그러면, 아마 10명 중에 8명은 교회를 나갑니다.
나가서도 가만히 있지 않죠. 교회에 대해 안티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이제 새로 오신 분들이 많이 오는데
다른 교회에서 장로하시던 분, 목사 하시던 분, 선교사 하시는 분들도 많이 오거든요.
한 1년만 모른 척하고 있어 보십시오, 무슨 일이 생길까요?
물론 안 그러신 분들도 많아요. 정말 겸손하게 케노시스 되신 분들도 제가 정말 많이 봅니다.
그런데 케노시스(자기 비움)가 안 되신 분들은요. 정말로 살벌해집니다.
정말로 살벌해져요. 온갖 저주와 공격이 난무합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뭐냐면 '이 교회는 문턱이 높아'
그러다가 조금 더 그냥 모른 척하면 '담임목사가 교만해'
조금 더 오래 모른 척하면 '이단인가봐!' 그러고 나가십니다.
예 정말 살벌한 공격이 난무합니다.
이게 건드리면 안 되는 역린을 건드린 거예요.
*역린 : '군주의 노여움을 뜻함. 용의 몸에 붙어 있는 81개 비늘들 중 딱 하나,
목 아래에 거꾸로 붙어 있다는 비늘로, 일종의 급소'
사람에게는 건드리면 안 되는 역린이 있어요.
이게 죄의 본질인데, 보통 때는 그게 안 드러나요. 자기도 그게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게 한번 딱 건드려지면, 분위기가 살벌해져요.
별의별 저주가 다 나옵니다.
그만큼 우리 내면에 예민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이런 부분이 없다면, 바울이 왜 그렇게 죄에 대해서 탄식했겠어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런 깊은 탄식이 왜 나오겠어요?
인간 안에 있는 이 타락한 본성을 딱 끄집어내서 보니까,
이게 정말 괴랄하더라는 거예요.
*괴랄 : '어떤 현상이 괴상함을 느낄 정도로 지나치다'의 뜻을 가진 인터넷 유행어
이게 한번 건드려지면, 미안하지만 별 지랄 발광을 다 하고
별의별 저주를 다 쏟아내는 그런 더러운 구정물이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거죠.
여러분은 안 그러신 거 같죠?
저와 여러분 안에 한번 끄집어내면, 보기에도 역겨운... 이게 가득하다는 거예요.
왜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나요?
왜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자아를 십자가에 죽이라 그러겠어요?
죽일 만한 거니까 죽이라는 거죠.
이게 (옛자아) 안 건드려지면 몰라요. 건드려질 때, 비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괴물입니다.
'나는 이 정도의 사람이야, 나는 이럴 권리가 당연히 있어!'
인간 안에 가장 예민하고 위험할 부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아침에, 지금 인간의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위험한 수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 외부강사가 '자아를 건드리는' 설교를 했다가는,
잘못하면 돌에 맞고 쫓겨나고, 다시 저를 강사로 안 부를 텐데,
그만큼 가장 민감한 부분이에요.
그것이 '자아의 권리'라고 하는 건데,
이 권리가 사실은 아이덴티티, 자기 자존감과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존재 가치에 관련돼 있어요.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절대 타협이나 양보가 불가능한 부분이죠.
그래서 여러분 인간의 가장 큰 욕구는 돈도 섹스도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큰 욕구는 뭐냐면 '나의 존재 가치'예요.
'나는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이게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그래서 이런 정도의 대접은 마땅히 받아야 돼, 그럴 권리가 있어!'
사람이 돈 없이는 살아도, 가오 없이는 못 살아요. *가오 : 일본말로 얼굴, 체면, 자존심을 뜻함
다른 말로 이것을 '권리' 또는 '사람들의 인정' 또는 '사람의 영광'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내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의미에서
'자아관, 자아상' 이렇게 부를 수 있죠.
▲예수님의 케노시스(자기 비움)는, 자아 또는 자아관을 내려놓는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게 전쟁이에요. 가장 괴물 같은 괴랄한 자와의 전쟁이에요.
아마 우리가 싸워 온 모든 전쟁 중에 가장 치열할 것이고,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전쟁이에요.
여러분 인생의 가장 치열한 영적인 전쟁입니다.
아주 압도적인 빌런(악당)을 여러분 앞에 두고 계십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의 자아예요. 우리 안에 있죠.
이것을 7절에서는 '자기를 비워'라고 표현하고
그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는 메시지인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에서 죽기 싫어하는 그 자아의 본성,
그 본성이 뭔지 깊게 들어가 보면, 거기에 이런 것들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케노시스의 두 가지 핵심, 즉 '예수님의 마음'에 두 가지 핵심은
자아 부인과 십자가입니다.
예수 믿고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될 것은 바로 이 자아예요.
자아관, 또는 자아상
'누구든지 예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누구든지'라는 말은, 예외가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 믿고 나서 제일 먼저 해결돼야 될게 뭐예요?
이거부터 해결해야 되는 거예요.
뭐 '누구든지 목사, 선교사가 되라' 이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누구든지' 예수를 따르려고 하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누구든지' 예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거예요. 눅9:23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제일 먼저 다루어져야 되는게 뭐예요?
'자기 자아'의 문제예요.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내 자아'를 뜻하죠.
불행하게도 현대 교회는, 이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아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이해는 됩니다. 교회에서 이거 다루려고 도전하면, 정말 온갖 발광을 다 봐야 돼요.
제가 앞서 얘기했잖아요.
"교회 문턱이 높다, 목사가 교만하다, 이단이다'는 말이 난무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교회를 처음 나왔어요.
그 사람 앞에 만약에 직언을 해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형제님은 매우 교만하시네요. 자아가 아직 처리가 안 돼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직언해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당신(새신자)은 자기 의로 가득 차 계시네요.
보니까 당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인정받기를 원하고 계시네요.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온갖 구정물과 쓰레기가 다 올라오게 돼죠'
이런 식으로 직언하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지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이걸 안 다루는 거예요.
이런 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설교자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거든요.
예수께서 이거 하시니까, 바리새인들이 잡아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거예요.
자기들의 타락한 자아를 탁 건드리니까!
바리새인들의 자아를 딱 건드리니까.. 그냥 예수님을 잡아 죽였어요.
그러니 웬만하면 이걸 다루지 않고 슬쩍 넘어가는게 편합니다.
이거 다루려고 달려들면.. 정말 자기 생명을 걸어야 돼요.
이거 다루려고 하면, 그 목회는 그다음부터는 가시밭길의 연속입니다. 가시밭길이에요..
P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