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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비우기 P2

LNCK 2024. 2. 12. 12:01

https://www.youtube.com/watch?v=pVYnhILW0xM
*위 동영상 31:45~끝까지 녹취           

자신을 비우기 P2        빌2:5~11               <자아> 관련글

참 감사한 것은, 제가 배웠던 복음은, 
제가 믿은 지 초창기 때, 대학생 때 저를 양육해 주었던 선배들은
이 수고를 기꺼이 감당해 주셨어요. 참 보면 용감하셨던 분이에요. 
이 살벌한 위험을 감수해 주셨습니다.   *나의 자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심

지금 돌아보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한테 정말 직언을 해주셨어요. 
"너는 말하는 것이, 굉장히 부정적이야. 
네가 계속 그렇게 말하면, 네 주위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야" 

"너는 왜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선 그렇게 무관심하고, 네 감정만 중요하냐?"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이게 쉽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니거든요. 
근데 정말 그 위험을 감수하고 직언해 주셨어요. 

제가 지금 돌아보면,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제가 배웠던 복음은, '예수 믿으면 제일 먼저 자기 부인 self-denial 부터 다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왜냐면 타락한 우리 자아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괴물 같은 존재고, 
이것을 다루지 않고 1년~ 5년~ 10년 신앙생활을 하면, 
그다음에는 건드릴 수 없는 괴물이 됩니다. 건드릴 수 없는 괴물이 돼요. 

(왜냐면) '내가 교회 안에서 권사인데, 장로인데, 목사인데, 선교사인데...' 
누가 이걸 다루겠어요? 그다음부터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해요. 

그래서 이것은 예수 믿자마자, 자아는 때려잡아야 돼요. 자아는 몽둥이밖에 약이 없어요. 
아니 오죽했으면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거 밖에 답이 없다' 그랬겠어요...

여러분은, 자기 자아가 해결되셨습니까 
물론 한 번에 되지는 않아요. 평생 싸워야 되는 싸움이에요. 

그래도 '이런 과제'를 인식하는 사람과, 인식 못 하는 사람은 달라요. 
이게 한 번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날마다, 매일매일 매일 
십자가를지고 따르라 그러셨거든요. 눅9:23

죽을 때까지도 해결은 안 돼요. 하지만 그것이 다뤄져 본 경험이 있어야, 
그것이 다시 드러났을 때 '아이고, 주님, 제 자아가 아직 살아있었군요..' 
그리고 주님 앞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이게 한 번도 다뤄지지 않은 사람은, 주님 앞으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저 놈의 자식이 왜 그래?' 하면서 다 밖으로 쏟아내죠.

이렇게 해서는 답이 없어요. 
여러분은 자아가 다루어지셨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내 자아는, 내 생각보다 훨씬 괴물 같은 존재입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자아가 건드려지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여러분은 안 그러실 거 같죠? 아니요. 예외 없습니다. 저도 똑같고요. 
특히 착하게 살아오신 분들은 (자아가 죽는 게) 더 힘들어요. 

그래서 이제 새로운 가족이 오셨을 때 '너무 착해 보인다' 
그럼 저는 그때부터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착한 분들이 진짜 힘들어요. (*대체로 자기 의가 강하거든요)
자기 자아가 그렇게 착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성도들이 알기 시작하고, 직언하기 시작하면... 무섭게 돌변합니다. 

제가 지난 30년 동안 목회하면서, 제가 무수히 봐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타락한 죄인이에요. 
선한 것은 없으니 하나도 없어요. 

감사하게도 이게 제가 (대학생 때, 대학생 선교회에서) 배웠던 복음이에요. 
제 선배들에게 받았던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자아가 다뤄지지 않고도, 대충 다 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할 수도 있고, 사역도 열심히 할 수도 있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다 할 수 있어요. 직분도 받습니다.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심지어는 목사, 선교사도 다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중이에요. 
자기 자아가 다뤄지지 않은 사람은,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신앙 행위를 하는 근본적인 동기, 
마치 (자동차의)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과 태도가 
예수님의 마음과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비워지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나'로 가득 차 있어요. 
'나는 이런 존재고, 그래서 나는 적어도 이렇게 대접 받아야 되고,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인정하고 대접해 줘야 돼!' 

이런 마음의 기저에는
'자기가 비워지지 않은' 자아가 가득합니다.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는데, 
전혀 다른 자아가 내 안에서 펄펄 살아있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기를 비우심으로써 
어떤 권리도, 어떤 인정 recognition 도 주장하지 않으셨죠.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냥 높이신 거예요. 
이게 영적인 원리거든요. 

우리도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자아가 부인될 때, 
높이는 건 하나님이 높이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성경에서 제일 좋아하는 두 인물이 있습니다. 다니엘과 요셉이죠. 
공통점은 총리가 된 거에요. 

그런데 잘 보세요. 그분들을 총리로 올리신 건 하나님이 올리신 거지, 
두 사람이 스스로 총리에 올라가겠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순전함을 지키기 위해서, 계속 싸움을 싸웠던 것 뿐이지, 
총리로 올리신 건 하나님이 올리신 것이죠.

자아의 문제가 똑같아요. 우리의 자아의 문제를 
계속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고, 싸우고, 울고, 회개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높이시는 것이고, 권위도 주시는 것이고... 그러는 거지, 

이거(총리, 높아짐)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잘못된 동기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평생 잘 안 돼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도, 제 안에 머리로는 이 원리를 잘 알아요. 
'내가 목회하는 것은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충성을 다 하는 거지, 
목회가 얼마나 성공하는지.. 교회가 얼마나 커지는지.. 
이것들을 생각하면, 그때부터 망하는거다.' 이론은 제가 잘 알아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주일날 교회 예배 딱 끝나고 나면 뭐부터 물어봐요? '오늘 몇 명 왔어요?' 
이런 거부터 물어보거든요. 이게 사람이 해결이 쉽게 안 돼요. 

그래도 포르네오(품기)가 뭐예요.  빌2:5 '이 마음을 품으라'
해결이 안 되면, 마음을 다시 붙잡아 놓고, 
안 되면 또 붙잡아 놓고... 이 싸움을 싸우라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주님, 저는 정말 안 되는 자입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은혜를 주십시오. 제 힘으로는 안 됩니다.'
이 싸움을 싸우라는 거예요.

내 자아가 건드려졌을 때, 바깥으로 손가락질(반격)하는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요. 
그래서 이게 (깨어지지 않은 견고한 내 자아)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다른 엔진(내 죄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거예요.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나의 자아가 원하는 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계속 그렇게 움직이는 거죠. 그건 엔진이 달라요! 마음의 동기가 다른 거예요. 

똑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마음(동기)으로 하느냐? 
그러니까 전혀 다른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으니, 
그게 무슨 영적인 일이 되겠습니까? 종교생활을 하는 거죠.

이 싸움을 여러분은 싸우셔야 돼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수를 따르기로 하셨을 때, 자아가 다루어지셨습니까? 
자기 부인되고, 자아가 깨어지셨습니까?
I am nothing 이라는 고백이 있으십니까? 

무시당해 보셨습니까? 내 생각이 꺾여 보셨습니까? 
내 고집이 꺾여 보셨습니까? 자아가 다루어지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내 자아가 펄펄 살아 있습니까? 

제가 예수 믿고 처음 복음이 그거(자아의 깨어짐)기 때문에 
지난 30년 넘게를 계속 그런 삶을 살아왔어요. 추구해 왔어요.

제자훈련의 본질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자아를 다루는 것이거든요. 
뭐 성경 지식이나, 외적으로 드러나는 훈련들은 사실은 쉬워요. 
한 1년만 바짝하면, 높은 수준으로 올라갑니다.

군대도 그렇잖아요. 그냥 가둬놓고 1년만 뺑뺑이 돌리면 
아침에 정확하게 일어나고, 정확하게 밥 먹고, 정확하게 자기 임무를 해요.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걸 훈련시키는 건, 제자훈련에서 아주 쉬운 파트예요. 

제자훈련에서 진짜 깊은 것은 뭐냐면, 이 자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건가 하는 거예요.
'내 자아의 문제를 어떻게 끄집어내서 때려 죽일 건가?' 
이게 제자훈련인데, 

감사하게도 제가 처음 예수 믿었을 때, 
캠퍼스 선교단체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곳에 있던 선배들이 제 자아의 문제를 용감하게 다루어 주셨고, 

그래서 제가 30년 넘게 이 사역을 하면서, 
죄송하지만 이렇게 여러분 얼굴만 봐도 이제 대충 다 보여요. 

저희 교회는요, 정말 제가 이렇게 성도님들 얼굴만 보고 있어도 
'아이고 저 분은 힘들겠다, 아 저기는 좀 됐구나, 아이고 저기는 불가능하겠구나, 
결국 저분의 자아를 다루려 그러면 다음 달쯤에는 교회 나가겠구나' 
제가 거의 예언가 수준이 됐습니다. 

저희 교회에 새가족반 담당하는 목회자가 
'이번에 새가족분 오셨는데 뭐 어쩌고저쩌고' 저한테 설명을 쭉 해요.  
그러면 제가 '6개월 있으면 나간다. 봐라'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딱 6개월 있다가 나가더라고요. 

(*성도들도 강대상에 앉아 있는 목사님 표정만 봐도 대충 안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가 힘이 있겠구나.. 오늘 설교는 맥이 빠지겠구나')

물론 자기 자아가 완벽히 부인된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드러났을 때, 즉 자아가 건드려졌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아는 사람이 있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안다는 건 뭐냐면, 
이런 자기 자아의 깨어짐의 문제를 가지고 
애통해 하고,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사람... 이게 돼 있냐는 거예요? 

이게 뭐 완벽히 부인되는 건 끝까지 안 돼요. 
안 되지만... 그런 자기 자아 문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걸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고, 

그게 건드려지면 분노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 공격, 즉각 반격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걸 다뤄야 된다는 거예요. (종종 코브라에 비유되지요)

분위기가 좋을 때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좋을 때는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간이라도 다 빼줄 거 같아요. 
너무 선하고 충성된 사람처럼 보여요. 

그런데 막상 자기 자아가 건드려지면, 
막상 자기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일이 진행되거나, 
막상 자기가 기대했던 것만큼 목사님이나, 교회 리더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지난 30년 동안 제가 많이 봐왔습니다. 
아니 많이 시달리려고 왔습니다. 제가 볶여 왔어요. 
자아가 다루어지지 않은 사람은.. (본성이 드러나면) 무섭습니다. 

근데 이걸 통과해야, 진짜로 하나님의 기쁨이 역사할 수 있죠.
'자아의 깨어짐'이라 그러죠. brokenness

바울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스가 뭐였냐면 빌립보 교인들이었어요. 
빌립보 교인들로 인하여 바울이 참을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데 
이게 해결 안 되면, 사람이 나의 기쁨의 근원이 되지 않아요. 

도리어 '사람은 나를 짜증나게 하고, 화나게 하고, 경쟁해야 될 사람이고, 나쁜 놈들'이 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해요. 자기 자아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래서 정말로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기쁨을 누리는 
그런 축복이 있기 위해선, 십자가(자아의 파쇄)를 통과해야 돼요.
이 자아의 깨어짐을 통과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제가 30년 넘게 지내오면서 꾀가 좀 생겼어요. 
젊었을 때는, 제가 정말 직접 대놓고 자아를 도전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소그룹 리더할 때는, 뭐 배운게 그거였으니까,
배운 그대로 저도 똑같이 했어요. 직언을 했던 거죠.
 
단순히 권면(직언)만 하는게 능사는 아닙니다. 
권면(직언) 하나 하기 위해서는, 
용납하고 사랑하는 말 10개를 해야 돼요. 
안 그러고 권면하면 큰일납니다. 이게 부작용이 있거든요.

그런데 용서하고 용납해 주는 걸 한 열 개 하고, 
그다음에 권면(직언) 하나 하는 거예요. 대충 그 정도 비율로 하셔야 돼요.
네 그래야 이것이 부작용 없이 작동을 합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권면만 막 하게 되는데, 그러면 교회가 진짜 진짜 살벌한 곳이 됩니다. 
이해가 되셨죠?

하여간 제가 젊었을 때는 하여간 직언들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문제도 많았지만, 열매가 정말 있었습니다. 

제가 소그룹 리더를 하면서, 제가 이렇게 직접 권면하고 이렇게 해서, 
목사, 선교사가 된 사람이 거의 한 100명 가까이 되더라고요. 
이것이 직언의 위력이에요. 

제가 혼자 한 건 아니고요. 자매들은 제 집사람이 직언하고...
그래서 저와 제 아내의 직언을 받은 형제 자매가 또 서로 결혼하는 일도 있었고...

요즘은 이제 꾀가 생겨지고서, 그렇게 곧장 직언을 잘 안 해요. 
그거 한번 하고 나면 후폭풍이 너무 심해요. 
그걸 제가 일일이 다 다루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서 
지금은 어떻게 하냐면, 요령이 생겼는데, 그냥 가만히 냅두는 거예요. 

새로운 분이 오면, 
'두 달 지나면 자아의 문제가 드러나겠구나' 하는 분도 보이고,
'6개월은 그냥 가다가 증상이 나타나겠구나' 하는 분도 보여요.

그러면 그 다음에 그냥 가만히 냅둡니다. 
그분이 뭐 목사든 선교사든 뭐 당대에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든 아무 상관없어요.
그냥 가만히 한 1년 2년 가만히 있어요. 

그러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절로 드러나요.
자기 자아가 해결이 안 된 분들은, 깨어지지 않은 분들은, 결국 드러나요.

그러나 케노시스(비움)의 영성이 계신 분들은, 그래도 전혀 불만이 없으세요. 
그냥 하나님 앞에 감사가 계속 있어요. 
'나는 어차피 은혜로 사는 사람인데, 은혜로 끼워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을 해 주던, 안 해주던 
교회가 뭐라고 하든, 안 하든 
그냥 한결같이 그 (낮은) 곳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시는 분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 자아가 부인되는 케노시스를 한 번도 통과하지 않으신 분들은 
대충 6개월에서 1년 지나면 이제 증상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나오는 말이 뭐냐면 '교회 문턱이 높네요.' 이렇게 점잖게 한 마디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나를 좀 알아주세요!' 

그렇게 점잖게 얘기하는데도, 또 가만 놔둬요. 
그러면 '목사님이 교만하시네요..' 
이거는 최후통첩이란 뜻이에요. 
'여기서도 내 말을 안 들으면, 내가 들고 일어날 겁니다'

그래도 계속 그분을 높여주지 않으면 '이단이야!' 그러고 나가세요. 
그래서 제가 가만히 기다리는 거예요.

'자아의 깨어짐, 자기 부인, 케노시스' 이게 검증돼야 
그 다음에 뭐 소그룹 리더를 하시던, 뭐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하시던, 
그것을 제가 자리를 마련해 해드립니다. 

그런데 검증이 안된 분께, 무슨 자리를 맡겼다가,
나중에 관두고 나가버리시면... 교회도 약간이라도 타격이 있게 돼죠.

그래서 제 꾀예요. 아무나 뭘 척척 맡길 수가 없는 거죠.
두고 보면서, 검증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여간 과거에 제가 정말 그랬어요. 제 자아의 끔찍한 모습을 직시하고 나니까 
정말 하나님 나라에 저를 끼워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더라고요. 

저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저는 담즘우울인데다가 INTJ라서요. *용의주도 전략가, 과학자형 
굉장히 생각도 많고, 굉장히 교만하고, 그런 사람이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뭐냐면, 제 누님이 얘기를 해 주셨는데,
'나는 천재야, 나는 천재야!' 맨날 이러고 다녔다는 거예요.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까요.
과거에 저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냥 자기 잘난 맛에 살았던 사람이었죠.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쉽게 분노하고...
나를 무시하면 아주 예민해지고... 

그런데 제 자아가 꺾이고 나니까, 그냥 끼워주신 것만 해도 감사해요. 
'와 하나님은 어떻게 나 같은 자를 사용하실까?' 
이건 그냥 입에 발린 고백이 아니에요. 정말이었어요. 
'하나님 어떻게 나 같은 자를 사용하십니까?'

제 자아가 크게 다뤄진 경험이 제게 있었는데 
그때 정말 진지하게 하나님한테 뭐라고 고백했냐면 
'하나님, 저 같은 사람은요. 쓰시면 안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쓰시면 안 됩니다... 
저는 그냥 사고나 치는 사람이지, 
진짜 평생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 민폐나 안 끼쳤으면 좋겠습니다.' 

'평생, 하나님, 저를 쓰지 마십시오' 
'제 평생의 소원은, 그냥 하나님 나라에 해를 안 끼치는 겁니다. 
저는 뭐 그렇게 주님이 사용하실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게 제 진짜 고백이었어요. 
그래서 한 때는, '기도원 같은데 들어가서 평생 혼자 살까?' 뭐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뭐냐면 딱 그 고백이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저를 목회를 시작하게 하셨어요. 

정말 저는 창졸간에 (갑자기 졸지에) 목회를 시작했는데,
그 전까지 저는 교회에서 사찰 집사였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있을 때였는데, 그 교회 사찰 집사였어요. 
아침에 일찍가 가지고, 교회 문 열고, 다 끝나면 문 닫고 돌아오는 사람이었죠. 

제 취미 중에 하나가 이제 목공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나무 가지고 목공 일을 해서, 교회 시설물을 고쳐 놓고, 
컴퓨터가 고장났다 그러면, 제가 수리하고... 그래서 제가 정확히 사찰 집사였어요. 

그거를 계속 하다가 하여간 그 교회에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목사님이 갑자기 교회를 그만두시게 되었어요.

그게 단순히 목사님만 연결돼 있던게 아니고, 
우리 안에 있던 교만이 한꺼번에 다 드러난 거예요. 

우리는 잘 하고 있는 교회고, 우리 교회 같은 교회는 그 지역에는 없고, 
제가 다니던 교회가, 사실은 굉장히 특별했던 교회는 맞습니다. 

자아를 다루는 것들을 정말 용감하게 다뤄줬고요. 
그걸 다뤄줬기 때문에 제가 오늘 여기에 있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한데, 
그러다보니까 그 한 교회에서만, 큰 교회도 아니었어요. 
그 한 교회에서만 풀타임으로 목사, 선교사가 된 사람이 400명 이상 나왔어요. 

그러니까 이게 보통 교회는 아니죠. 
정말 헌신되어 있는 교회였는데, 
그러면서 그 안에 뭐가 올라왔냐 하면, 교만이 올라온 거예요. 
'우리는 잘하고 있어' 

그리고 그렇지 못한 교회들에 대한 정죄,
뭐 이런 것들이 복잡하게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딱 보여주신 거예요. 
'너희 안에 있던 교만이 뭔 줄 아느냐? 
너희는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데, 언제 너희가 그렇게 교만해졌냐?' 
이거를 치셨거든요. 

그러면서 제가 그 앞에 정말 납작 엎드리면서 
진짜로 그 여호와의 임재를 봤던 이사야 같은 심정이었어요. 
'내가 죽게 됐구나..' 부들부들 떨면서, 
거의 1년을 제가 부들부들 떨면서 지냈어요. 

그러면서 제가 하나님한테 드렸던 고백이 
'저 같은 사람을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큰일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정말 어떤 느낌이었냐면 
숨어 있던 다윗을 사무엘이 찾아와서 강제로 기름 붙는 느낌이었어요. 

갑자기 하나님이 저를 담임목사로 세우시고, 
창졸 간의 생각도 못했던 목회를 시작하게 하시면서, 
23년 전에 수원하나교회가 시작됐고 
그래서 지금까지, 정말 부족하지만, 사고 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빌2:7~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통과할 때 
거기에 하나님은 영적인 권위를 주시는 거예요.

영적인 권위는, 드러나는 모습으로 주어지는게 아닙니다.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들은, 1년짜리 관계에서는 속아요. 

그런데 10년짜리 관계에서는 속지 않아요. 
소그룹에서 한 2~3년만 같이 지내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밑천이 다 드러납니다. 

말은 화려하게 하고, 사역은 잘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안에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이 괴랄한, 괴물이 지랄하는 것 같은, 자기 자아가 그냥 생생하게 살아있는게 드러나요.

그게 참 고통스럽지만, 저와 여러분의 현실이에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현실, 
'오호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바울이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그런데 이 죄인 중에 괴수, 정말 괴랄하는 괴물 같은 우리가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를 통과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위에 영적인 권위를 부으시는 거예요.

이 권위를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숨어 있어도, 
사무엘이 여러분을 찾아와서 기름 붙듯이 
하나님은 지구 끝까지라도 여러분 찾아가실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혹시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몰라보면 어떡하지?' 
사람들은 속아도, 하나님을 속지 않으세요.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준비된 자가 있으면, 즉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통과한 자가 있으면, 
하나님은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그를 기름부어 다윗처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세대에,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오는 걸 보고 싶어요. 
그냥 성공하고 싶어서 막 자기를 show up 과시하고, 자랑하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숨고, 또 숨고, 또 숨는데 
끝까지 찾아가서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세우시는 그런 다윗의 세대가 일어날지어다!
다윗의 세대가 일어날지어다!  이 교회가 그렇게 일어나게 될지어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내 자아를 다룰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간단하게 얘기하면 
말씀과, 기도와, 공동체예요.
말씀, 기도, 교회.. 이 세 가지를 기억하세요.

1) 말씀은.. 내 자아가 어떤 건지를 보여주는 거울 같은 겁니다.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내 자아가 드러나는 거예요. 
말씀에 비춰볼 때, 내 안에 있는 동기들이 드러나는 거예요.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싶어 하는지, 
내 안에 나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는 추한 모습, 
내 고집과, 내 생각과, 인정받기 원하고, 칭찬받기 원하고, 성공하기 원하는 내 자아...
말씀을 대면할 때, 이것이 드러나는 거지요. 

2) 그러면 그 다음에 기도의 자리에 가서 씨름을 하는데 

3) 그 사이에 뭐가 있냐면 교회가 있는 거예요. 
교회는.. 그 말씀이 현실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곳이예요. 

뭐냐면, 예를 들어서 아침에 '시기하지 말라' 하는 말씀을 읽었어요. 
그러면 머리로는 알아요. '시기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그것이 언제 실제가 되냐면, 
교회 안에서 우리 소그룹에 있는 쟤를 보면 자꾸 시기가 생깁니다. 
이런 상황이 있는 거예요. 그게 사실 교회거든요. 

또 나에게 직언을 해주는 형제들, 그런 사람들을 맞닥뜨릴 때 
그 말씀이 나한테 실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반드시 필요해요. 

그렇지 않고 성경만 가지고 하잖아요. 그러면 머리로는 아는데,
그 싸움이 추상적인 싸움이 돼요. 

그런데 교회에서, 소그룹에서 실제로 부딪히잖아요. 
그러면 굉장히 고통스러워요. 이건 경험해 봐야 돼요. 빨리 해결 안 돼요. 

저도 그렇게 직언을 받았을 때, 금방 금방 해결되는게 아니에요. 
어떤 거는 막 1년씩... 그것 때문에 씨름하고, 
어떤 건 그래도 해결이 안 돼 가지고서... 
그때 제 리더였던 형한테 지랄 지랄하고, 
'네가 날 알아?' 하고 대들고...

그런 엄청한 싸움을 거쳐서, 비소로 자아가 드러나고, 깨어지고, 비워지고,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참 고통스러워요. 이게 현실 상황에서는 무척 고통스러워요. 

그냥 자기 혼자 말씀만 가지고 살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아요. 
말씀이 우리의 속썩이지 않고, 말씀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아요. 
자기 혼자 말씀 묵상하고... 그거는 그냥 추상적이기 쉬워요. 

'그렇지 내가 용납해야지' 굳게 결심을 하지만,
그런데 진짜로 지랄하는 사람을 만나서 겪어보면...
현실에서는 너무너무 힘들어요.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그 점을 가지고, 기도의 자리에 나가서 씨름을 하는 거예요. 
어떨 때는 한 달.. 그래서 안 되면 3개월, 6개월, 
그래도 안 되면 금식하면서 씨름하는 거예요. 그렇게 애쓰면서 자아가 차츰 다루어지는 겁니다. 

이거 참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저와 여러분 안에 반드시 다루어 져야야 부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참 슬프게도 현대 교회는, 이걸 잘 안 다루려고 그래요. 
저도 이거 하려고 그러면 한숨부터 나와요. 
그냥 소그룹 리더할 때는 한 열댓 명 있으니까 어떻게 해봤는데 
또 담임 목사가 되고, 교인이 이제 천명 넘어가고, 1,500명 이렇게 되면
이거 다루려고 그러다가는 제 명에 못 살아요. 

그래서 저도 피하고 싶은데, 그래도 이거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그래서 사실 여러분, 그 작업을 해 주시는 분(나를 힘들게 하는, 또는 직언자) 들에게,

고마워 하셔야 돼요. 

저는 (저를 다루어준) 제 선배들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이 있거든요. 
그 힘든 일을 해줬거든요. 
그러니까 그분들에게 원망하고 막 삐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맙게 여기셔야 돼요.
이 어려운 작업을, 나를 사랑함으로 해 주시다니... 

자아가 다 부인된, 자아가 깨어진, 자아가 비워진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주님,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해 주시고 
우리 안에 있는 괴랄한 자아들이 다 무너지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 마음 가지고 우리 주여 한번 부르짖고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