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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화목하라

LNCK 2024. 2. 13. 07:35

https://blog.naver.com/kaikk/60013048189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5:17~21, 요일4:10     2002.01.06.  ☞ <화해, 화목>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면, 인간과도, 환경과도 화해할 수 있으며, 

화해에는 화목제물이 필요하다는 주제

 

◑죄는.. 분열, 반목, 갈등을 가져오는 원인

 

화목하지 못하면 아무리 성공한 것 같아도 자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도록 고생하며 수고한 모든 것이 순간에 낭패가 됩니다.

 

아내와 남편이 가정에서 화목하지 못하면 아이들과 친척이 모두 고통을 당합니다.

어떤 직장에서 일하면서, 그 직장의 상사와 화목하지 못하면

그것처럼 괴롭고 힘든 일이 없습니다.

 

정치계가 화목하지 못하고 늘 갈등과 반목이 가득하니 나라 전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 전쟁의 고통도 화목을 잃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불화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파생되는 결과 일뿐입니다.

 

에밀 브루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는 존재 전체를 갈라놓는 분열이다"

예를 들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분과 불화하니,

세상에 저주가 임하고, 자연과 관계가 깨어지고,

아내와 남편이 서로 저 사람 때문이라고 죄를 전가하며,

아내는 남편을 평생 섬기는 저주의 관계로 파괴되었습니다.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에 뼈’였던 사람이 원수 중의 원수로 바뀌었습니다.

자연도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서, 인간의 땀흘린 경작의 수고에 반항합니다.

 

착취와 억압의 관계로 변했습니다. 사랑하는 유일한 동생을 예배드리는 와중에

돌로 쳐죽이는 극악한 죄악이 최초의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이 깨어진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비극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한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반면에 이사야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하나님께서 꿈꾸는 세상은

이처럼 화목할 수 없는 관계들이 화해하고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느냐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껄끄러운 관계 속에서,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한 해의 아픔은 여기에 그 근본 원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것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해야 화목을 찾을 수 있습니까?

 

◑1. 화목의 시도자

 

먼저 화해를 시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목을 시도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화해의 악수를 청하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셨습니다.

 

고후5:18절에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여기에서도 화목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9절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역시 하나님께서 화목의 주도자가 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화목하고 싶다."

 

마치 아버지 속을 상하게 하고 자식을 집을 나간 자식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광고를 하며, 용서했노라고 돌아만 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감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는 날마나 밤새 기다리신다오..."

 

"내가 종일 너희에게 손을 벌렸노라" 이것이 하나님의 노력입니다. 롬10:21

사실 먼저 화해의 악수를 내미는 것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시인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정의보다 사랑의 중요성을 두시기 때문입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가는 사람은, 새해에 먼저 화목의 악수를 내미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저 사람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서로 잘못의 시발점을 상대방에게 전가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먼저 느낀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먼저 손을 내미셨는데 부끄러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만이 그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화목의 시도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갈등과 증오가 가득한 민족의 가슴에

화해의 시도자로 교회가 나서야 합니다.

 

이 시대는 화목의 시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지만 그 시도자가 있어야 공동체와 개인관계가 행복할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모두 화목의 시도자들 되시길 바랍니다.

 

◑2. 화목의 희생자

 

그런데 이런 화목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화목을 위해서는 한 쪽의 선행적인 희생이 필수 불가결합니다.

그 희생의 제물이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후5:18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19

 

여기서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도대체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5:21

 

여기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없는 분이 죄인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죄인처럼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이런 화목의 길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준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약에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 제물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취한 것같이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의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레4:35, 26, 31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매일 아침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화목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찌며" 레6:12

 

그런데 바로 이 화목의 제물이 바로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고편이었고,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실체가 십자가 위에 나타났으니 곳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골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같은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땅히 보답하는 양으로 화목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나라를 사랑하신다면

여러분이 바로 그리스도처럼 화목을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5:1-2

 

화해의 시도자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처럼 희생의 제물이 될 각오를 한 사람입니다.

제물될 사람은 없고, 제물을 요구하는 제사장과 죄인들만 가득하니 화목이 없는 것입니다.

화해를 외치면서도 희생의 제물이 될 사람이 없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알프스에 사는 재미있는 개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개미들은 특이합니다.

개미 집 속에 불타는 초를 세워놓으면 개미는 몸으로 불을 끄는 데 전력을 다합니다.

개미의 몸이 불타면 ‘키츤스’라는 불연성의 진액이 나와 불이 꺼진다고 합니다.

 

미물인 곤충 개미도 자신을 희생의 제물도 드릴 줄 압니다.

불같이 타오르는 갈등 속에서 몸을 태우며 그 불을 진화할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화목의 제물이 될 사람이 그리운 나라입니다. 올 한해는 내가 가정의 불화의 불을 끄는

화목제의 제물이 되야겠다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 민족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을 끄는

화목의 제물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부디 우리 교회에는 제사장도 죄인도 없이 향기로운 화목제물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생축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3. 화목의 사명자

 

그리스도인이란 이 화목을 위해 새로운 피조물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18절을 보면, 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절에도 "...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우리의 사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신 즉 대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0절).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는 인생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명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우리를 대신 죽으심은 우리가 그분을 대신하여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대신 사는 사람 즉 대사는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한 미국대사가 자기 개인을 위해 이 땅에 와 있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도 이 땅에 거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책이면서 중요한 일인지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명자의 삶을 결단하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매사에 임해야 합니다.

 

▲선교학의 필독서인 돈 리차드슨의 [화해의 아이 Peace Child]라는 책이 있습니다.

1960년대에 석기 시대의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살았던 뉴기니 부족들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에는 선교사가 경험한 뚜안족과 사위족의 전쟁과 화해의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싸우는 부족이 화해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한쪽 부족의 추장이 아이를 낳아 100일경이 되었는데, 다른 원수 부족의 추장에게 보냅니다.

소위 ‘화해의 아이’입니다. 상대편 부족도 그렇게 합니다. 추장의 갓난 아기를 맞교환하는 거죠.

 

그러면 추장은 그 아이를 정성껏 키웁니다. 만약 아이를 맡긴 부족이 전쟁을 일으키면

제일 먼저 추장의 아이가 죽게 되니, 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한편 반대편 부족의 추장은 아이를 키운 정이 생겨서, 모든 원수들 중에 이 아이만은 신뢰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이 아이를 중재자로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아이가 있는 동안에는

이 두 부족간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화해의 아이’라고 합니다.

 

돈 리처드슨 선교사는, 이 부족 풍습을 알게된 후에, 이 풍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화해의 아이'로 이 세상에 보내진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사위 부족 사람들이, 모두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님-화해의 아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는 이 선교 경험을 책으로 써서 [화해의 아이]로 남겼던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이런 분입니다. 하늘의 왕자로서 영광스러운 그 자리를 떠나

낮고 천한 이질적인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분을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도 그분처럼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만 이 땅에 보내진 존재들입니다.

주님을 우리를 보내실 때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화해의 아이로 활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새해는 여러분 개인들, 또한 저희 교회와 한국교회가 화목의 대사, 화해의 아이로

이 땅에 살아가시길 하나님은 기대하십니다.

이것이 올 한 해의 우리의 사명이며, 교회의 표어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이웃과 민족을 향해 이렇게 외칩시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러면 인간들과도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죠.

 

 

▲‘올랜드 매직의 성공비밀’의 내용 중 재미있는 디즈니의 한 일화입니다.

디즈니 초창기에 에드 킴벨이라는 전설적인 만화가가 있었는데

그는 23살에 미술대학을 졸업하여 월트 디즈니사에 스카웃 되어 입사하였습니다.

 

그당시 10분을 초과하는 만화가 없었는데

그는 최초로 영화 길이와 맞먹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라는 야심만만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이 작업을 하면서 그린 많은 그림들 중에

백설공주를 위해 난쟁이들이 수프를 끓여서 바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은 불과 4분 30초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장면을 위해 그는 무려 8개월 동안이나 혼신을 다해 그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매우 흡족해 하며 월트 디즈니 사장에게 그것을 갖다 드렸습니다.

디즈니 사장은 그림을 보더니 매력적이고 참 잘됐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완성한 그 장면이

영화의 전체 줄거리에는 별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되었다는 말을

사장으로부터 듣게 된 것입니다.

 

그의 8개월 동안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그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새벽쯤 자꾸만 사장의 얘기가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전체 줄거리에 별 의미가 없잖아. 오히려 이야기 흐름에 방해가 된단 말이야.”

이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다가 그는 사장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작품 자체는 매력적이지만 전체 줄거리에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신의 그림을 깨끗이 포기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건을 바라보는 아주 중요한 시각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내가 회사를 위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회사가 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까?

 

전체 작품을 위해 내 그림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 그림을 위해 전체작품이 있는 것입니까?

 

너무나 자명하지만, 이것 깨닫고 수긍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이기적인 인간본성의 타락상입니다.

 

지금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명심해야 합니다.

내 개인의 명성이나 수고의 보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의 유익을 위해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나는 먹고 살 수 있고,

실력을 발휘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사명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지, 사명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이거나 수용하기에 대단히 힘든 진실입니다.

내 수고가 헛것이 되고, 내 모든 투자가 쓰레기가 되어도 내가 존재하는 사명,

즉 어떤 일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