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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것

LNCK 2024. 2. 15. 10:50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것' (2024.02.11) (youtube.com)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것          행3:1~10            ☞ 사도행전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앞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저희 가족이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놀란 것은, 그 사회가
장애인과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서였습니다. 

어느 날 저희 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었는데요. 
자폐 장애가 있는 큰 아이가 4~5살 정도 되었기 때문에, 통제가 잘 안되었습니다. 

부모인 저희가 아이 손을 꼭 붙잡고, 나름 조심하며 다닌다고 다녔는데, 
순식간에 아이가 그냥 손을 뿌리치고 나가가지고
통로 옆에 있던 장식조명 하나를 그냥 넘어뜨려 버렸습니다.

이 조명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너무 놀랬는데, 백화점 직원이 막 달려와 가지고 먼저 물어봅니다. 
'아이가 괜찮으냐, 다친 데는 없느냐?' 

제가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는데 
'미안합니다.이 조명값을 저희가 변상할게요' 

그러니까 직원이 그럽니다. '아닙니다. 아이들이 원래 그렇죠.
이 깨진 조명은 본사에 리턴하면 되니까, 그냥 걱정하지 말고 쇼핑을 계속 하세요' 

그 조명 가격이 족히 몇 백 불은 됐던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 회사는, 그 몇 백 불의 돈보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고객의 신뢰를, 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가치를, 돈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아, 이게 진짜 선진국이구나' 싶었습니다. 이것은 그 단적인 한 예입니다. 

△본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한 가난한 장애인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기껏해야 그냥 약간의 동정을 베푸는 그 정도였는데, 
그러나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다르게 대합니다. 

그 구걸하는 장애인을 존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전인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본문의 사건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것은, 본문을 통해서 보면, 
 <주님의 눈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고, 그를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간 배경은 제9시 기도 시간이라고 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서 기도를 했는데요.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율법을 따라서 
아침과 저녁마다 어린 양을 번제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을 '타미드 올라 (상번제)' 라고 하죠.  민28:10 등

출29:38~42절까지 이 상번제의 규례가 나오는데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제사를 드리는 시간에 맞춰서, 같이 기도를 했습니다. 
'제 구시 기도시간'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오후 3시, 
그러니까 저녁 번제, 저녁 기도회에 해당됩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기도를 드릴 때, 우리가 지금 드리는 그냥 자유로운 기도하고 
조금 다른 기도를 드립니다. 좀 정형화된 기도입니다. 

시편을 낭독하고, 기도서를 낭독하는데요. 
성경말씀을 입으로 쫑알쫑알 계속 읊조리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대표적인 게 신명기 6장의 쉐마 이스라엘, 
또 다윗의 시23편.. 이런 것들인데요. 

아마 베드로와 요한도 이런 유대인들의 기도 관습을 따라서 그대로 기도하고 
그래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던 겁니다. 

▲근데 성전에 올라가는데,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40년 이상을 장애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4:22
'그가 미문 앞에 앉아 있었다'고 했는데요.
미문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문 beautiful gate' 입니다.

미문은, 성전 동편에 '여인의 뜰'에서 '이스라엘인의 뜰'로 들어가는 
오늘날의 니카노르 문이라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미문은 워낙 거대하고 정교해서 
금과 은으로 만든 문보다도 더 아름다웠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성전 문 아래에서, 심한 다리 장애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사람이 구걸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참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구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선을 굉장히 중요한 경건의 한 덕목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선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 나가는 중요한 방편이라고 이렇게 생각했는데요. 

신15장에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 명령에 따라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다 그에게 얼마씩이라도 이렇게 돈을 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그 당시에 마침 돈이 없었습니다.

랍비들은 '만약 가난한 자에게 줄 돈이 없으면, 대신 그에게 따뜻한 축복의 말을 하거나 
아니면 친절한 행동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이상을 합니다. 
행3: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먼저 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죠. 아마 눈을 마주쳤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즘 사람들은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설령 그에게 약간의 돈을 주려고 할 때도, 눈을 마주친다거나 또 말을 거는 것, 
이런 것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 사람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라'고 합니다. 
그저 불쌍한 거지가 아니라, 그를 하나님의 형상이자 존엄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대하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 '우리를 보라'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우리가 당신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것처럼, 
당신도 우리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고, 비굴하거나 낮은 자세를 취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한 유대인 엄마가 유치원생 딸과 함께 길을 지나가다가 구걸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얼른 엄마가 그 사람에게 돈을 하나 살짝 내려놓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데 
딸이 엄마의 팔을 붙잡아 세우고 말합니다. 
'엄마, 지금 저 아저씨한테 엄마가 율법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 같아요.' 

엄마가 깜짝 놀라서 '아니 얘야, 그러면 내가 뭘 더해야 되니?' 그랬더니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저씨랑 눈을 마주치고, 축복의 말을 해 주셔야죠! 
자선을 행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라고 율법에서 명령하잖아요.' 

그 아이가 유치원에서 율법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던 겁니다. 
엄마가 딸의 말을 듣고,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 걸인에게 다가갑니다. 

다시 지갑에서 돈을 꺼내주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을 주시고, 
형편을 더 낫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하면서 그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만 조금 전까지 그냥 거지로 보였던 그 사람이. 
한 인간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을 우리가 그냥 그저 동정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과, 
나와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는 것.. 이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아무리 많은 도움을 주고, 아무리 많은 돈을 쥐어 주더라도 
사람을 그저 동정의 대상으로만 대하면, 
그 사람의 존엄함을 세워줄 수는 없는 겁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그분에게 굴욕감을 주고, 의존성만 더 키울 뿐이지요. 

우리가 사람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할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존엄성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먼저 쳐다봤던 것, 
그리고 그에게 '우리를 보라'고 했던 것, 이게 바로 그 목적입니다. 행3:4

▲그렇게 하니까 그 걸인에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5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와 요한이 일반 사람들처럼, 돈 한푼 던져 주거나 
아니면 그냥 따뜻한 말 한마디 그냥 해주고 그렇게 끝내지 않았을까요?
왜 발걸음을 멈추었고, 눈을 마주쳤고, 그를 인격으로 대하는 수고를 했을까요?

그 사람을 세상적인 잣대로 보지 않았던 겁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그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눈으로 보실까요?
베드로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벧전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께 소속된 사람이니..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우주의 주권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이런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세상은 '내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 내가 얼마나 많은 소유를 가졌나? 
내가 어느 아파트에 살고, 어떤 차를 몰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를 보는 눈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적인 조건과 전혀 상관없이 
'너는 나의 보배이다' 이렇게 보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사람을 대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만약 세상의 잣대로 보면, 내 가족이나 심지어 내 자녀들도, 
자꾸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해서, 뭐가 부족하고, 뭐가 모자라는지...
이렇게 안 좋은게 더 많이 보이는 거죠. 이게 사람의 심리인데, 세상적 시각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보면 자식이 그냥 '원수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 보는 눈이 달랐지 않습니까, 비결이 뭘까요?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 그러면, 하나님 앞에 자꾸 뭐 달라 달라 구하는 것, 이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도는 '구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도를 어떻게 봤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것, 그게 기도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우리의 눈이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 전통 속에서도, 기도라는 것을 
'하나님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
그렇게 인식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중세 초기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은, 하루에 5번씩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때마다 시편을 한편씩 낭독하며 기도합니다. 

하루 5번 시편을 한편씩 기도를 하면, 
한 달이면 150편 전체를 다 낭독하며, 의미를 묵상하며 기도를 합니다. 

근데 그렇게 1년, 2년, 3년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 기도가 아예 입에 배이고, 아예 몸에 배여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기도로 튀어나옵니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이 보시는 그 눈으로,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달라집니다. 

아무리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그냥 기도하면, 
그때부터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에 잘 안 드는 자녀도,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충만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보배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 엄마가, 너무나 힘들어서
'하나님, 왜 저한테 하필 이런 아이를 주셨습니까?' 막 원망하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시는 겁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보배를 너에게 맡겼는데, 
너는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렇게 사랑해 줄 수 없겠니?' 
그 말씀을 듣고 펑펑 울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를 보는 엄마의 눈이 완전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이런 주님의 눈이 없습니다. 
사람을 경제적 효용 가치나 기능으로 등급을 매기는, 그런 눈이 있을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겁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와야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기도할 때,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울 때 
우리는 주님의 눈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이렇게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고 대하는
이 주님의 눈을 가질 때, 
그때 우리가 도모하고 있는, 우리 교회가 힘쓰는 
해외선교, 이웃 사랑 사역도.. 더 성숙해질 것이고 강력해질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최고의 방법은, 그 사람에게 굴욕감을 주지 않고 
그분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은과 금을 주는 것만으로, 사람의 존엄을 회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자선단체들이 모금을 하는 방식이 주로 일대일 결연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요, 그 사람이 얼마나 어려운 사정인지를 다 노출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굴욕감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도움을 주는 사람도 자기를 밝히지 않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되도록 노출되지 않게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저희가 처음 유학생활을 할 때
신학교에 있는 팬츄리(식품 창고)를 종종 활용했습니다. 

그 팬츄리에 가면, 주변 교회들이 기증한 식재료도 있고, 그리고 옷도 있고, 
여러 가지 필요한 이사 물품들이 있습니다. 
그게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누가 기증했는지 모릅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고요. 
그리고 기부자도, 마음 편하게 기부하고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뭘까요? 
은과 금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을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도 아닙니다. 

한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보배로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눈'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세상에는 없는 그 새로운 눈으로 
보다 성숙하고 높은 차원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두 번째로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하는 것은 
<전인을 회복시키는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바라보는 그 걸인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왜 중요할까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행할 때, 
거기에 그리스도의 능력도 함께 나타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더니
:7~8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었다'고 말합니다. 
지금 인간 베드로의 그 능력이나 영빨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걷지 못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분은, 베드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이름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그리스도께서 친히 일하십니다. 

▲본문의 사건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그 사건을 우리에게 연상케 만듭니다. *요5장
또 침상채 데려온 그 중풍병자를 일으키는 그 사건을 우리로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눅5장 

무엇을 말하는가요? 
지금 이 베드로를 통해서,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렇게 말했을까요? 
제가 좀 의아했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빈털털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자랑하는 건가요? 
그런데 한 주석가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돈이 없다는 베드로의 말은, 가난한 동료 신자들과 함께 물건을 나누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 

앞서 2:44~45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하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 
이미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소유를 나누었습니다. 
근데 이것도 굉장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 아닙니까. 

세상의 총칼로 빼앗아도 될까 말까 한 일들을, 
총칼 하나 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두가 자기의 것을 내놓았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이제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사람의 전인이 회복된 것입니다. 
둘 다 양상은 다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능력입니다.  *2장의 통용과 3장의 치유 둘 다

▲3:8절에 보면, 예수 이름의 능력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었는지 이렇게 묘사합니다.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본문의 그 헬라어 원어를 보면, 일곱 개의 동사(+분사)가 현재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들어가면서, 걷기도, 뛰기도 하고, 찬송하니' 

무슨 의도인가요? 이 사람의 회복이 완전했다는 것입니다. 
그 회복이 지속적이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그런데 병만 나은게 아닙니다. 존재 전체가 회복되었습니다. 
병 나았다고 좋아서 그냥 집으로 돌아간게 아니고, 
이제 함께 성전으로 뛰어 들어가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신체 장애 때문에 스스로 나아올 수 없는데, 
사람들이 그를 메고 미문 앞에 이 사람을 데려다 주었습니다. 
왜 이 사람을 미문 앞까지만 데려다 주었을까요?

율법에, 신체 장애가 있으면,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그 미문앞에서, 그냥 그 문만 통과가면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수가 있는데, 

장애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 사람의 영적 상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한 신체 장애의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해 파생된 문제,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현실,
즉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소외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볼 수도 없고, 그냥 그저 땅만 쳐다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이제는 전인이 회복되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대열에 앞장서는 예배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이 사람이 찬송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9~10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여러분, 감히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찬송하는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치유에 포커스가 있지 않습니다. 예배자가 되었다는데 제일 중요한 포커스가 있습니다.

△영화 <이집트 왕자>를 보면, 클라이막스에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좌우로 갈라진 물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저희가 보게 됩니다. 굉장히 압도적인 명장면인데요. 

그래서 사람들이 보통 <이집트 왕자> 영화에서
바로 그 장면을 결론으로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아십니까? 
오늘 집에 가서 한번 다시 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시내산에 도착한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그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데요. 

이게 무슨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영화의 마지막 엔딩 신 scene에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백성이 
이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바뀌었다는게 결론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위대한 민족이 되었겠습니까? 
'그냥 출애굽으로 끝났다'하면, 속박에서 자유는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민족이 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스라엘이 위대한 민족이 된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생 걷지 못하던 사람이 
'와 일어났다. 할렐루야!' 이걸로 끝난게 아닙니다. 

'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했습니다!' 이게 결론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우리의 전 존재를 다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드리는 것이고 
이 예배가 우리 삶의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사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여러분,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보고, 경제적 잣대로 보고 
뭐 이런저런 재주가 좋다는 기능적 잣대로 그렇게 규정하는데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전인이 회복된다는 것, 이것보다는
'그냥 어떤 부분이 좀 나아졌다. 어떤 게 더 좋아졌다'는 식으로
눈에 보이는 낮은 목표에 만족해 버립니다. 

예수 이름으로 육신이 건강해집니다. 
예수 이름으로 경제적으로 살만해 집니다... 거기서 만족해 버리는 겁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 열심히 해서, 자녀가 의대에 가고, 명분대는 갔는데,
이 자녀들이 어떻게 평생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
신앙을 가르치는 일은 뒷전이 됩니다. 

육신의 회복.. 중요.하죠. 영혼의 회복도 중요하고요. 
자녀들의 공부도 중요하고, 우리의 경제적인 회복도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그를 전심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오늘날 사지가 멀쩡하지만, 은과 금에 눈이 가려진 사람들, 
먹고 살아가는 생존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어둠의 권세의 짓눌려서 삶의 의미와 의욕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신 것은 
그 사람들이 그것(세속적 가치)을 뛰어넘어서, 온전한 예배자로 세워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이름의 능력은, 가난한 사람을 부하게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은, 사람을 그저 낫게 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은, 죽음과 지옥의 권세를 깨뜨리고,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는 가장 위대한 구원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인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 이노센트 2세를 만나기 위해서 거기 접견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교황이 탁자 위에 가득 쌓아둔 황금 동전들을 세고 있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시오, 오늘날의 교회는 베드로처럼 금과 은이 내게 없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요' 

그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대신 지금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지요!' 

온갖 보화를 끌어모으고 세력을 과시했지만 
정작 예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렸던 중세 교회의 그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은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어떠합니까?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부유해졌습니다. 
교회 안에는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분들도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세상에 정말 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고 있습니까? 
제가 지금 단순하게 '예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이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기적이나 치유가 본질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정말 나타나는게 본질이 아닙니까! 

벧전4: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으로써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대충 일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먹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럭저럭 세상 사람들 눈에 '그냥 괜찮아 보이는 정도, 체면치레하는 그 정도' 
그러면서 '우리 교회도 참 좋은 일 한다' 
그 정도로 해놓고,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일, 성도가 하는 일은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이 나타나는, 최고 수준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하나의 동사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 분이 제게 이 이야기를 하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은 동사 하나로 표현하면 '듣다. listen' 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다. think' 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의 인생은 '만들다. make' 라고 합니다. 

그런 말ㅇㄹ 들으면서 '내 인생의 동사는 뭘까?'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새우다. build' 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나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무너져가는 조직을 세웠고, 
또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웠고, 
또 공간을 새롭게 세웠고 
집을 세웠습니다. 
아마 우리 교회에서도, 제가 세우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세울까요? 오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인을 회복시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를 세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세대를 연결해서 믿음의 유산을 전수하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다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한 개인의 능력과 지혜로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의 능력과 지혜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날에 우리는 너무 은과 금을 의지하면서 일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도 너무나 많은 카드들, 대안들을 나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게 과연 우리에게 그게 득이 됩니까?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을 보십시오.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은... 
말 그대로 진짜 은과 금은 없는 빈털터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가장 중요한게 있었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통할 법한 우리 자신의 카드를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심으로 구할 때,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친히 일하실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이 시대 속에 드러내어 
하나님 앞에 그 한 영혼 한 영혼들의 전인을 회복시켜
참된 예배자로 세우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