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마음을 못 지키면서 무슨 구원론?

LNCK 2024. 2. 21. 09:21

https://www.youtube.com/watch?v=eV5Hu9BPXcU

https://cafe.daum.net/heavendeer/VzTh/4    2018.04.05.

 

마음을 못 지키면서 무슨 구원론?   잠4:23, 롬7:19~24     ☞ ▣ 믿음론 (구원론)

 

잠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제가 어제 오후에 목사님 한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교회생활을 잘 하시던 두 가정이,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구원론에 대한 개념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저는 전화로 통화하는 중에, 서로 다르다고 하는 그분들의 구원론과

목사님의 구원론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함정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2018년 설교

십자가 복음을 통해 구원을 얻고 누리는 일에 집중하지 않고

각 교회별로 서로 다른 구원론을 붙잡고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해력과 입맛에 맞는 구원론을 하나씩 골라잡고는

그 구원론 안에서 구원의 확신에 차 있습니다.

 

실제로는 자기 마음 하나도 지킬 수 없는 구원 밖의 상태에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원받았음의 증거가 삶의 어느 부분에서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내 입맛에 맞는 어느 교회의 구원론을 붙잡고는, 구원의 확신 안에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증거가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구원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음의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강원도 두메산골에 살고 있는 화전민 할머니가 구원받았음의 증거를 보인다면,

어느 교회의 구원론을 모르더라도 틀림없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음의 증거가 없는 상태,

즉 내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라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인간이기에, 마음을 지키는 것이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야한다는 확신과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 괴로움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반열에 들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마음을 지켜야한다는 것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마음을 지켜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하지도 않고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유전죄적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롬7:19~24절에서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갈등, 싸움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육체의 법’이라고 하는 말은 육체만의 죄가 아닙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마음속에 들어있는 유전죄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경제적, 지위고하 신분 등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 온전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문제는 구원론이 아닌, 지금 내 마음을 돌아보아서 구원의 증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기쁨과 만족과 감사로 넘치고 있다면

그것이 곧 구원받은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마음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 상실된 삶을 살고 있다면

아무리 구원론을 확신할지라도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이 현재 기독교에서 교리를 알고 신앙이 깊다는 사람들이 빠져있는 함정입니다.

 

강원도 두메산골에 사는 할머니는 구원론에 대한 논쟁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 아버지로 충만함을 누리며

구원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세기의 신학적 석학일지라도 구원론을 놓고 갈등하며 싸우다가

자기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잃는다면, 구원받지 못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구원론은 그 자체로 결코 여러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제게 전화를 주신 목사님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면

그 구원은 끝까지 변함없는 구원인 것인지,

 

혹은 사도 바울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한 것처럼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만 구원이 유지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저는, 캘빈이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말했듯이

한 번 구원 받으면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붙잡아 주신다는 것도 맞고,

믿음이 흔들려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맞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둘 다 맞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믿음의 개념을 실천한다면,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의 반열에서 이탈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믿음을 맹신하고 있다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확신과는 별개로 구원에서 떨어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믿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 전체를 통해서 ‘지혜를 얻고 지키는 중요성’에 대해서 반복하는데,

23절을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지혜를 지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지켜지고 있는 상태가 구원인데, ‘마음을 지킨다.’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킨다.’라는 말은 곧 빼앗기지 않고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무엇으로부터 지키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킨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경제를 지킨다면 외국 자본의 침투로부터 지킨다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경쟁자들로부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너 자신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청소년들을 탈선시키는 악의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킨다는 말에는 구체적인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솔로몬이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한 것은 무엇으로부터 지키라는 것일까요?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바로 이 세상으로부터 지켜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8:23절에서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이 없다면, 아무리 입으로 주님으로 고백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에 캘빈사상으로 구두시험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교수님이 캘빈사상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캘빈신학의 요체는 예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들께서 모두 기뻐하시며 저를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일화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실제로 주님과의 연합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내 마음이 예수님을, 연합해야 될 대상으로 모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하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우리도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되는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17:14절에서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하면 마음을 잃은 것입니다.

세상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마음을 장악하고 있느냐,

내 마음의 문 바깥에 존재하고 있느냐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마음지킴을 결정짓는 기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골3: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주1)

 

사람은 생각을 통해서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가족이든 직장이든 돈 문제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상황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에 받아들이면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위에 있는 하늘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세상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세상이 나를 장악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지혜의 장점과 유익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지킬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와의 연관성 안에서 어떻게 마음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는 만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가 있다면 그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것도 스스로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은 지켜집니다.

 

물론 배우자와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판단이 필요합니다.

다만 배우자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100% 수입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나라가 기름 수입의존율이 100%인 것처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나에게서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 의존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이 있을 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런데 판단기준의 과정은 판단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판단을 씨앗으로 삼아 생각하고

생각이 발전하여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신앙인이라면 이 씨앗이 되는 올바른 판단인 지혜를, 전혀 생산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지혜를 100%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알 때에 마음은 지켜집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면 마음은 결코 지킬 수 없습니다.

 

당장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걱정하고 근심되는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걱정 근심을 하는 이유는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멈추세요.

그러면 자녀의 문제로 여겨지던 상황이 마음 바깥으로 밀려나갈 것입니다.

 

올바른 판단인 지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판단하지 않을 때에

내 마음에 들어왔던 세상의 가치들은 다 빠져나가게 되고

세상이 빠져나간 자리는 비어지게 됩니다.

 

뉴스를 보면서도 정치적으로 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안 드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판단을 멈추세요. 그러면 마음에서 정치가 빠져나갑니다.

경제상황이 안 좋다는 뉴스가 나올 때에 그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뉴스에서는 안 좋다고 하지만 나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전문가들의 마음속에서도 올바른 판단이 나올 가능성은 0%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땅에서 기름이 단 한 방울도 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전문가들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맞는 말이 없습니다.

노벨 경제학상의 이론대로 된다면 세상에 경제적 문제가 일어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신일 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장악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경제라는 요소를 빼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판단하기를 멈출 때에

세상의 가치들이 빠져나가면서 마음은 지켜집니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지켜진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시는데 이것을 본문 23절에서는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마음은 생명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이 마음을 지킬 때에 생명이 주어진 증거가 샘물처럼 솟아나게 됩니다.

 

마음에는 수용성과 자발성이 있습니다.

수용성은 외부의 것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자발성은 마음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외부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할 때에 마음은 자발성이 아닌 수용성을 띄어야만 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향해 수용성을 가질 때

세상에 대해서는 자발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즉 기쁨과 만족과 감사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가 될 때에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씀의 핵심 내용입니다.

 

‘생명’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한 이유가 이어지는 3절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의 공백을 채우시고 기쁨과 만족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은 영원하시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도 영원합니다.

이것이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일들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면 마음이 지켜집니다.

판단하지 않는 자에게는 많은 사건이 있을수록 득이 됩니다.

그 모든 사건을 내가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하지 않을 때에 마음이 지켜지고 마음의 공백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생명이고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믿음입니다.

연합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나도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세상에서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나 사람을 만날 때에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으면 마음은 지켜지고, 지켜진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기쁨과 만족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이제까지는 배우자와 마주할 때마다 마음에 배우자를 수용하려고 했습니다.

배우자가 내 마음에 맞는 행동을 할 때에만 기쁨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헝그리 정신을 발동하고 있었습니다. 돈에 대해서도 내 판단기준대로 물건을 사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헝그리 정신으로 쇼핑을 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돈으로 불행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명품백이 있어야 행복하고, 외제차가 있어야 행복하고, 여행을 가야 행복하다’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지혜와 반대되는 헝그리 정신이 발동되어서

오히려 굶주림과 목마름의 불행을 돈을 주고 사고 있는 셈입니다.

 

▲믿음 안에서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생겨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로부터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난 기쁨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발성입니다.

 

나로부터 시작되어서 외부로부터 뻗어나가는 방향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은 이미 만족했기 때문에 타인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는 믿음이 작동되는 동안에 마음은 지켜질 수 있고,

생명현상이 내 마음을 통해 뿜어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

 

주1) 골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에서 ‘생각하다’는 헬라어로 '프로네오'인데,

 

빌2:5절의 '이 마음을 품으라'에서 '품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프로네오’

이 단어의 뜻은

'마음을 훈련하다. 마음을 두다. 관심을 가지다.'

그래서 '순종하다. 주목하다. 생각하다.' 이런 의미에요.

 

프로네오 단어는 뭐냐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마음이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을 의미예요. 의지적인 선택!

 

그러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랬을 때 그것은

'의지적으로 네 마음을 선택하라' 이런 뜻이에요.

 

내 의지적으로 마음을 두고, 또 두고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두었다가 잠깐 다른 곳으로 마음이 흘러가면

다시 잡아다가 거기다 두고...

이렇게 반복적이고 의지적으로 내 마음을 '잡아다 두는' 거예요. '품으라'가!

 

같은 단어가 골3:2절에도 쓰였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의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생각하다' 역시 프로네오예요.

그러니까 위에 있는 것을 계속 생각하라는 거에요.

 

그러므로 '위의 것을 품으라. 땅의 것을 품지 말라'라고 해도 돼죠.

그러다가 마음에 땅에 있는 것이 생각나면, 다시 붙잡아다가 위의 것을 생각하게 만들라는 거죠.

 

이렇게 의지적이고 반복적으로 우리 생각을 계속 (그리스도의 마음을) 붙잡아 두는 거예요.

이게 빌2:5의 '품으라', 골3:2의 '생각하라'입니다. *프로네오

 

'의지적'이고 '반복적'인.. 이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의지적이고 반복적이에요. 그렇게 할 때 익숙해져 가요.

그렇게 익숙되어진 것을 '태도' 또는 '성품'이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