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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LNCK 2024. 2. 23. 16:45

◈두려움 없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행4:1~22       2024.02.18.설교녹취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잡아서 가두었을 때,

두려움없이 사도들이, 그들과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 하는 내용입니다.

 

◑도입

 

저희가 사도행전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충만하게 된 사도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지게 되었나를 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 거침없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

너무나 담대하게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제사장들, 성전 맡은 이들, 또한 사두개인들이 싫어했습니다.

당시에 유대교의 권력자들 이를 싫어했던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잘 보면, 그들이 싫어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헤서 그들이 사도들을 잡아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믿는 자의 수가 계속 늘어납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령님이 하시는 일, 성령의 역사는,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님의 역사를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보았고, 기억하고, 마음에 새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보고 경험했고,

무엇보다도 부활의 영광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관하여 들은 자들입니다.

분명히 보고 들은 것이 있는 자들인 것이죠.

 

분명 보고들은 것이 있는 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기에, 믿음으로 담대한 삶을 사는 것이죠.

 

▲오늘 본문 행4장을 보니까, 유대종교 권력자들이 잡아온 사도들에게 질문합니다.

그들이 본의 아니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물어보게 돼요. 증거의 기회를 열어줍니다.

 

행4:7절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들은, 공회의 사람들, 그 권세자들이 무서워 이리저리 도망쳤던 사도들입니다.

근데 그들이 성령 충만하게 되니까, 두려움 없이 대답하고 증거합니다.

 

세상 권세자들은 힘과 권력으로 억누르고 겁박하며 물어본 것인데,

이 질문이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누구신지를' 증언할 기회가 되었던 것이죠.

하나님의 역사, 섭리가 놀라운 것입니다. 역사에 종종 이런 일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행4:10~11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진짜 놀라운 것이죠.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일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진 일이다.

그리고 그 예수가 우리의 삶과 생명의 근원이 되어 주셨다.'

사도들이 이렇게 선포한 겁니다.

 

나아가서 '모든 이들을 향한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하고 담대하게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분명했어요. 자기들이 분명히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구원의 주님으로 모든 이들에게,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이들에게 거절당하셨지만, 그 거절한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낮은 자리에 주춧돌(모퉁이 돌)이 되어 주셨습니다. :11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삶을 이끄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병들어 동당하는 자, 그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고 계신 분,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세요.

그런데 여러분, 사도들은 진짜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진짜 믿은 거예요.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정말 누구십니까?

'우리의 삶 너무나 생생하게 변화시키시고 이끄시는 분'이라는 구체적인 증거,

그 예수님에 관한 삶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했습니다. 당시 권력자들이 보기에도

이들이 참 지혜롭고, 거침없이 담대하게 말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13

부활을 목격한 데서 나오는 담대함입니다. 또 성령충만한데서 나오는 담대함입니다.

 

그렇게 그들 권력자들이, 사도들을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그들이 늘 자기들이 하던 방식대로 사도들을 몰아가려고 합니다.

다름 아니라 두려움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17절에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말하지 말게 하자'

이런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

18절에 '그들 (사도들)을 불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고 금지시킵니다.

 

21절에 이르면 '처벌할 방법까지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요, 위협하고, 경고하고, 금지시키고, 처벌한다고 하면서

우리 성도들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따라오도록 두려움 심어주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런 두려움을 심어 주고자 하는 세상에

우리가 어떻게 맞서고, 세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분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그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반대 정신'으로 나아가는 것,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죠.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만 챙겨, 너의 삶을 챙기기도 쉽지 않찮아?

너의 삶만 사랑하며 살면 되는 거야'

 

그러 우리가 아는 거죠.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말하고, 가르치고, 기억한 것을

우리가 마음에 품고있는 거죠. '그래 원수까지 사랑해야지, 끝까지 사랑해야지,

그리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어야지'

이렇게 반대 정신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이를 금지시키려는 것이죠.

 

▲예수가 달린 십자가, 그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해서,

분명히 경험하고, 증언하고, 가르칠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고전1:19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는 너무나 분명하게, 예수의 이름, 예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증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에는, 구원의 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죽음도 넘어서는 권세가, 예수의 이름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그 은혜를 경험하고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요?

끝까지 서로 사랑하며 품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4:8절을 보면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러분, 죄가 드러나면 세상에서는 어떻게 할까요?

판단하고 정죄하고 죄를 끝까지 묻습니다.

 

물론 죄의 대가는 지불해야 하지요.

하지만 끝까지 품어주고 사랑하는 것,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그 일을 살아가고,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천사를 통하여

이미 예수의 이름의 의미를 알려 주셨어요.

'모든 자를 구원할 자'

또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란 의미가

예수의 이름에는 이미 담겨있어요.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저 이름의 뜻이 뜻이 아니라

이 놀라운 이름의 뜻이, 이미 우리 삶에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음으로 취하는 것이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칠 때, 세상 사람들이 꼼짝하지 못합니다.

 

◑2. 두 번째로, 복음으로 인한 변화의 증거가 있으면,

세상은 성도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삶의 증거가 있으면, 우리 성도들은 흔들리지 않게 되고,

세상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행4:14절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진짜 놀라운 것이죠.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자가

이제는 일어나서 뛰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했습니다.

 

이 사실을,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증거로, 그 사람이 사도들 옆에 서 있는 겁니다. 사도들과 함께 서 있는 거예요.

너무나 분명한 복음의 변화의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한 삶의 변화를 기억하고, 그 증거를 품고 있으면,

우리 성도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도, 복음으로 인한 변화의 증인이 되기 시작하면,

그 교회 공동체는 든든히 섭니다. 세상 가운데서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도 목회를 해 오면서, 교회의 재정의 어려운 문제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젊은이 교회'라는 한 1천여명 되는 청년들 전체를 책임지고 이끌고 있을 때,

늘 하나님의 뜻대로 재정을 흘려보내야 하는, 믿음의 도전을 계속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행했습니다.

젊은이 교회에, 나이 많은 선배 그룹을

이제 본 교회 장년부로 올려 보내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 청년부 선배 그룹이 다 사회에서는, 다 인정받아서 믿음도 성숙되고,

재정에도 헌신적이며, 시간에도 헌신적인.. 모든 것을 다 성숙하게 하던 그룹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나이로 끊어서, 다 장년부로 올려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결정 이후에, 재정의 여유가 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젊은이 교회' 매주 재정 결제를 할 때 보면,

'돌아오는 한 주간은 좀 쉽지가 않을 수도 있겠다.

재정이 좀 긴축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교하고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는, 늘리면 늘렸지

위축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선교사역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감사의 제목으로 더욱 분명하게 쌓여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구제하는 일, 주의 손과 발이 되어서 섬기는 일,

그것만큼은 더하면 더했지, 계속해서 그거는 결코 재정을 줄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살아있는 간증이 쌓이고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함께 사역하던 사역자 그룹이 16명 정도가 됐는데

그분들 사례비를 드려야 하는 주간이 다가오는데, 이게 쉽지가 않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사역자들을 다 모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음 주간 저희 청년부 교회에서 사례비가 못 나갈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청년부를 '젊은이 교회'로 따로 독립시켜 줌. 자기들끼리 운영하라고.

미국지역교회에 한인교회가 들어가 있듯이)

 

형편이 닿는 대로, 후배 전도사님들부터 드리겠습니다.

선배 전도사님들이나 목사님들은, 다음 주에 사례비를 못 받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근데 모두가 믿음으로 기쁨으로 이 소식을 받아 주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더 채우시고, 그때부터 교회가 더욱 부흥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진짜 놀라운 일이죠.

 

여러분, 복음으로 인한 변화, 그 증거와 간증을 붙잡고 기억하고,

그것을 놓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나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는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미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엄청나게 놀라운 일들을 수없이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어서 보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이 열리길, 주의 일을 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변화의 증거를 붙잡으시면 됩니다.

결코 우리가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3. 세 번째로 어떤 형편과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삽니다.

 

행4:21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아멘

 

여러분이 말씀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사도들을 처벌할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지금까지 되어진 증거와 증언, 말씀의 선포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시작했어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시작하니까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게 없었어요. 그저 말로 위협하는 것 뿐입니다.

다른 건 못 했어요.

 

사실 거꾸로 세상이 (사도들과 교회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게 뭡니까?

우리 삶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우리 삶에,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았던 우리의 삶에서, 이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을 우리의 통치자요, 우리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정말 제대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지으시고, 구원하시고, 이끄시는 분이

우리 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영광을 올려드릴 때,

 

세상은,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일(해코지)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움을 심어주는 일인데,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며 믿음으로 사니,

세상이 성도를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죠.

 

▲여러분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낙심시키고 조정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다보니, 어렵고 힘든 일을 왜 안 만나겠습니까.

 

그런데 진짜 질문해 봐야 하는 거죠.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일, 그것 때문에 지금 내가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내 삶에 온전한 주인으로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제가 함께 공동설교 나눔방에서 함께 말씀을 연구하는 목사님들이 계신데,

우리가 매주마다 함께 모일 수는 없으니,

온라인 줌을 통해서 같이 늘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또 말씀을 통해서 교회마다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번 모임에 한 목사님이 행3:19절 말씀을 나눠주셨어요.

행3:19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새롭게 되는 : 아납푸시스 refreshing, recover breath, take the air, cool off, revive

숨을 회복하는, 공기를 쇠는, 그래서 새롭게 되는

딤후1:16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제 동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새롭게 되는' 이 구절의 의미를 책을 통해서 보게 되고 묵상하는데

이 '새롭게 되는' 이라는 의미 중에

'숨을 쉬게 된다' 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숨 막힐 것 같은 세상 한 가운데 놓여 살고 있지만,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잖아요.

뭐라고 말 한마디도 내어놓기가 어렵고, 숨이 턱턱 막히는 형편,

 

그런데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께 온전히 돌이켜 회개하며 나아갈 때,

주님만을 신뢰할 때, 숨이 다시 쉬어지는 거예요.

 

가야 할 길이 보이고, 생명의 길을 걸을 믿음이 다시금 부어지고,

그것이 깨달아지니까 너무 감사했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생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셨잖아요.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호흡을 넣어 주시며, 우리를 창조하셨어요.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진짜 믿어지면, 구체적으로 새롭게 된 삶을 누리며 살게 되는 거예요.

사도들이 새롭게 변화된 것은, 다른 어떤 요인이 아닙니다.

 

이제 새롭게 숨을 쉬며 살게 된 거예요.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요’ 3:19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 주인이 되신다,

이것만 증언하며 살게 된 겁니다. 그러니 세상이 어쩔 수가 없는 거죠.

 

베드로를 보세요. 그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성령 충만 해졌어요.

그는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강력한 말씀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계속 보아도, 그는 믿음에 더 깊이 들어가요.

더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서서 성령충만한 사역을 감당합니다.

 

제가 그런 질문이 생겼어요.

'수많은 성도들이 한 때 성령 충만하여 은혜를 누리며 은혜를 누리며 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낙심하고, 믿음 없는 삶으로 넘어질 때가 있는데,

도대체 베드로는 어떻게 그토록 성령 충만한 삶을 계속 유지하고,

더 깊이 믿음에 더 굳건히 서게 되는 건 어떤 이유였을까?'

 

제가 깨닫게 된 것이, '베드로는 복음을 계속 전하고, 증거했구나

그는 복음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전하고, 증거했구나..'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말씀이신 예수님,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베드로의 삶을 변화시키신 거죠. 여러분 말씀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말씀대로 살기 시작하면

삶이 뒤집어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계속 증거하는 삶을 살면, 말로만 아니고 삶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면,

베드로 사도처럼 그 생명력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을 이길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 설교의 주 논지

고난도 넉넉히 감내할 믿음이 있으십니까?

 

아마 선뜻 대답 못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믿음은... 지금 우리가 어떠하든지 믿음은 자라납니다.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사도들이 그랬잖아요. 공회의 권세에 두려워서

처음에는 다 도망갔다가,

 

(오순절 후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담대한 삶을 살게 되었어요.

여러분 믿음은 변하고 성장한다는 것을,

12사도들을 볼 때, 사도바울을 볼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완전히 변화되는 거예요.

 

행4:19~20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보고들은 것을' 말하고 증거하는 사도들!

보고들은 것을 말하고 증거해야.. 우리의 삶이 살게 됩니다.

 

세상이 위협하니까, 죽을 것만 같았는데,

사실 누가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까?

 

세상이 두려워하니까 오히려 사도들을 위협하고 있는 거예요.

(*개가 짖는 이유가 그렇다고 하죠. 개가 두려워서 짖는다고 합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보고들은 것을 증언하며, 예수의 증인으로 설 때,

세상이 두려워 떨며 도망가게 돼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믿어지면

어떤 고난도 이길 믿음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으로부터 보고들은 것에, 내 생명을 걸면,

우리 삶은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

지금도 내 안의 역사하시는 그 주님으로부터 보고 들은 것에

내 생명을 걸고 나아가면, 주님이 우리의 삶을 이끄시며 변화시키실뿐 아니라

책임을 져 주십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우리가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 엉뚱한 것에 내 생명을 걸고 살면, 어떻게 되는가요?

그 결과는, 한때는 잘 나가는 인생 같을지 모르나,

두려움에 휩쌓이고, 죄의 종노릇하며 사는 삶으로 더 깊숙히 빠져 버리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매일매일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더 보기를, 주님의 음성을 더 듣기를 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으로 더 채워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사는 자,

죽음의 권세도 이기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성도는... 담대한 삶을 삽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세상 가운데 놓여 있을지라

주의 말씀으로 깨달아

무엇이 생명의 길이고,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내가 가야 하는 길인지 깨닫습니다.

머리로만 깨닫고 마는 게 아니라, 그 길을 걷습니다.

보고들은 것을 행하며 살게 됩니다.

 

여러분 증인이 어떤 사람이죠? 보고들은 것이 있어야 증인이 됩니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해야겠죠.

출두를 해서 정직하게 증언해야 증인입니다.

그가 진짜 증인인 것이죠.

 

담대하고 정직한 증언이 판결을 바꾸어냅니다.

세상의 법정도 최소한 이런 원칙을 지켜 나가고자 하는 거죠.

 

하지만 죄악된 세상이라서, 그대로 이런 최소한의 원칙도 못 지킬 때가 가끔 있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누굽니까?

십자가 그 은혜와 사랑이 이미 부어진 자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몸된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함께 하시며 일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주님께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살 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증인의 사명이 기쁨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이기고도 남을 믿음을 가진 성도이죠!

 

여러분 한번 스스로 점검해 보세요. 믿음이 있는 사람, 믿는 사람은

정말로 두려움 없이 순종하며, 담대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말씀의 순종하는 자가,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고, 말해야 할 것도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혜도 부어 주십니다.

 

막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

 

▲증거하지 않으면, 소명마저 잃어버린다

한 때 잘나가던 유럽교회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소명 받은 사역자의 급감입니다.

 

유럽의 수많은 교구가 안고 있는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교회나 수도회 문을 닫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기까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성직자들, 그리스도인들이 증거의 삶을 살지 못한데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증거하는 삶을 살지 못하다보면.. 차츰 차츰 그나마 남아있던 믿음마저 까먹고 맙니다.

반대로 강력한 성도의 삶을 살려면, 어떤 형태로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증거가 필요했을 때, 아무런 증거도 하지 않고 침묵했던 결과를

아래 글은 잘 보여줍니다.

 

독일의 목사 마르틴 니묄러는 '전쟁책임 고백서'를 집필하며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 고등부 학생들은 동계수련회를 하면서.. 둘쨋날..

대구역 앞 쪽방(판자촌)에 가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이것도 <증거>의 한 형태죠.

교회 이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봉사이니까요.

 

거기서 우리 학생들은 물론 고생은 했지만.. 고생보다 값진 봉사의 기쁨을 만끽하였습니다.

그때 그 봉사활동에 참석했던 한 학생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우리 2조는 수련회 둘째 날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요셉의 집」으로 출발했다.

요셉의 집에는 우리 조 5명이 갔는데 봉사는 엄청나게 하고 왔다.

 

그곳에는 독거노인들과 실직자 그리고 쪽방 거주자들까지 200여명이나 살고 있었다.

우리들은 처음 조금은 망설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열심히 일 했고 칭찬도 많이 들었다.

그분들은 일찍부터 오셔서 밥을 드시고는 한 분 한 분 어디론가 가 버렸다.

 

우리들은 주방 한쪽에서 설거지를 했는데.. 설거지는 정말.. 끝이 없었다.

그분들은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적어 긴 줄을 서서 점심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그들을 위한 봉사를 완벽하게 감당하였다.

식사를 배식하고.. 물도 날라 드리고... 설거지도 완벽하게 감당한 것이다.

 

모든 정리를 끝내고 이번에는 「쪽방」이라는 곳엘 가서.. 다른 조와 함께 봉사했다.

처음에는 쪽방이 무슨 방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난 후에는 가슴이 무척 아팠다.

정말 여러 번 느꼈지만 이번 봉사활동은 너무 좋았다.

쪽방에서 가져간 옷도 나눠주고 그들의 방을 청소도 하면서 나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쪽방이란 동네는 입구부터 사람 사는 곳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게 생긴 곳이었다.

맨 처음 그곳으로 갈 때 우리는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좁은 골목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허름한 옷을 입으신 할아버지 한 분이 이 추운

날씨에 맨발로 나오셨다. 할아버지가 나오신 방을 보니 정말 사람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그런 작은 공간이었다.

그곳에 이불을 몇 겹 깔아 차가운 기운을 막고 지내고

있었으며, 바닥을 보니 시멘트 바닥 그대로였다.

 

이 모습을 본 우리들은 모두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황당해 하였다.

"아니, 사람이 이런 곳에서도 살 수 있다니..." 다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쪽방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갈 때 쪽방 간사님께서는 지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누워있는 노숙자들을 보고 왜 저 사람들은 일도 하지 않고 사는가?

왜 삶을 포기하고 사는가? 하면서 손가락질을 할 때 우리들이 나서서 노숙자들의 심정과

저들이 처한 환경들을 대변해 주고 이해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나도 그동안은 길거리에서 누어있는 사람들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직접 그들을 눈으로 보았고

그들의 상황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싶다.

이번 동계수련회는 남들이 해보지 못한 봉사를 경험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으며

이런 귀한 봉사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렇게 증거하는 삶을 살 때, 성도는 더욱 담대해집니다.

그러나 삶속에서 ‘증거’가 점점 살아져 갈 때, 성도는 더욱 나약해져 가는 것입니다.

 

전도자들이 습관을 따라 계속 전도하는 중 한 가지는,

전도를 하기가 너무너무 싫지만,

그래도 억지로라도 전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충만과 강건함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되는’ 거죠. 행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