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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예배

LNCK 2024. 2. 26. 18:36

최고의 예배 –  (삼하12:16-20절)│고성준목사│2022.6.5 주일예배 - YouTube

*위 동영상 7:25초부터 녹취 

 

최고의 예배      삼하12:16~20     ☞ ▣호스피스 설교모음

 

◑도입       

 

여러분 김OO 선교사 위해서 오래동안 기도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월요일, 김OO 선교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022년

 

'죽음'은 몇 번을 경험해도 쉽게 적응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전에 레바논의 선교사님도 소천했고,

다른 많은 우리 성도님들도 암으로 소천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사실은 뭐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좀 익숙해질 만도 한데

사실 죽음은 익숙해지지가 않지요. 모든 죽음이라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작별의 고통이 그냥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하는 것은, 참 큰 고통이고 또 큰 어려움입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은 고통은, 어떤 거로도 상쇄되지도 않고, 위로도 되지도 않고요.

어떤 말을 해도 사실 위로가 되지 않고, 그 고통이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또 상쇄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고통은, 재밌는 일을 하거나, 뭐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하면 상쇄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죽음으로 말미암은 고통은 그렇게 상쇄되지도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죽음으로 인한 고통은, 참 잔인한 것 같아요.

잔인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에게 십자가가 필요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만약 죽음으로 인한 고통이 상쇄될 수 있거나, 그것이 위로될 수 있다면

아마 십자가가 필요 없겠죠.

 

십자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것이 상세되거나

그것이 위로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함께했던 사역자, 또 동역자이자 또 영적인 제자를

먼저 떠나 보내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뭐 예전에도 그런 경험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매번 겪을 때마다

이렇게 적응이 잘 안 되고, 힘들고 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현실 같습니다.

 

그와 더불어서 또 하나 우리를 참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왜 하나님이 (암을 고쳐달라는) 우리의 기도의 응답하지 않으셨나?' 하는 것입니다.

 

참 열심히 기도했잖아요. 여러분들도 열심히 기도하시고, 매일 저녁 나와서 기도하시고 그랬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런 것들이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또 어떨 땐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래요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시고, 또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내 삶의 고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도 하고, 두려워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죠. 원망이 올라올 수 있죠. '하나님은 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까?

또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십니까?' 하는 원망이 올라오기도 하고,

 

또 열심히 기도했는데, 기도와는 전혀 다르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뭐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뭐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거나, 또 소중한 사람이 소천 했거나,

불의가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의인이 고통받거나 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선교사의 투병 과정과, 또 그분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또 죽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김선교사를 옆에서 지켜보고, 또 병원에 들르면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때보다도 많이 생각하게 되고,

또 가까이서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들,    https://rfcdrfcd.tistory.com/15971953

그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고,

또 하나님께서 왜 그런 것을 허락하시는지를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죽음에 대한 사실들을 좀 고찰해보고

죽음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가?

꼭 죽음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상황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죽음에 대한 첫 번째 고찰은 <죽음은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고통보다도,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죽음입니다.

 

다른 고통들은 소망이 있지요. '이 고통이 언젠가는 좋아질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반전이 있을 거야' 뭐 이런 소망이 있는데,

죽음이라는 것은, 그런 소망을 아예 차단해 버리지요.

 

물론 우리에게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지만

'부활의 날까지는 이것(죽음)을 어찌할 수 없다' 라는 그런 절망감이 함께 있기 때문에

아마 죽음이라는 것은 큰 고통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죽음이 주는 고통이, 사실은 죄의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거예요.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이 주는 슬픔과 고통이라는 것은

사실은 죄가 가져오는 슬픔과 고통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 그게 사실 성경이 얘기하는 죄지요.

죄인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아가는데, 그 죄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고통(사망)이 있는데

이 고통을 평상시에는 망각하고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냥 바쁘게 인생을 살면서, 정신없이 살아가면서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고,

죄가 우리 인생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죽음'이라는 것이 갑자기 찾아오죠.

전혀 예상치 못한 때,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 죽음을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했습니다.

'어영부영 살다가 갑자기 맞이하게 되는 불청객'

 

죽음이 더욱 잔인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때 찾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갑자기 찾아와서는, 우리가 도저히 포기할 수 없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앗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가장 슬프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잔인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은 죄가 우리에게 주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고통이, 사실은 이런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치 마약에 중독돼 있으면, 삶의 고통이 있어도 그것을 망각하고 살아가듯이,

죄에 중독되어서, 그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고 정신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 잠깐 멈춰 서게 되면,

'아 죄라는 것이 이런 고통을 우리 삶 가운데 가져오는구나.

죄로 말미암아 우리 삶은 이런 고통 위에 세워져 있구나!' 하는 것을 직시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여러분의 삶에서 '죽음이 멀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망각이고 착각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예상치 못한 때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뭐 이 땅에서 천수, 만수를 누린다고 해도

백년 뒤에 여기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적어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100년 안에 자기 죽음이라는 것을 대면하게 돼요.

그리고 그 죽음을 대면하여 서게 될 때,

죄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하고, 죄의 고통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있었는지를

비로소 직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죽음은, 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고,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죄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것(죄)의 파괴적인 결과와 그 고통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삶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삶입니다.

결국 사망이 역사하는 삶입니다.

 

그 삶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우리가 보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그런 고통과 절망과 괴로움과 슬픔이 역사하고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과 떠나 살아가는 인생의 본질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죽음에 대한 두 번째 고찰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정직하게 합니다.>

 

죽음 앞에 설 때, 비로소 내 안에 진짜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되죠.

죽음 앞에 서게 되면, 내 안에 있던 것들이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임종을 살펴보면, 다양한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어떤 이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저주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며 떨기도 합니다.

 

분명히 믿음이 좋았던 사람들이고,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고

또 천국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었다고 고백했던 사람들인데,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기도 하고,

또 심지어 (자기에게 죽음을 주신) 하나님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죽음 앞에서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죽음 앞에서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죽음 앞에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욕을 하기도 합니다.

 

이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뜻밖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사실은 뜻하지 못했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안에 진짜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우리 안에 진짜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가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본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죽음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실 것 같으십니까?

지금 두려워 하셔야 됩니다. 두려워 하셔야 돼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가게 되면,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요. 그렇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게 될 터인데

사실은요,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도,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미 드러나게 돼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본질이 무엇이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고,

내가 살아왔던 삶이 어떤 삶이고, 내 믿음이 무엇이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내 속에 무엇이 있든지, 그대로 드러나게 돼요.

 

그러므로 여러분, 긴장하고 두려워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무엇이 있든지, 죽음 앞에서 그것이 드러나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거예요.

참 감사하게도 김OO 선교사가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드러냈던 것은, 예배였어요.

예배,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였습니다.

 

오늘 영상에서 봤던 마지막 모습은

사실 소천하기 바로 며칠 전에 함께 예배했던 모습입니다.

 

사실은 몰핀이 없으면 잠시도 그 진통을 참을 수 없고,

의식도 오락가락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김선교사가 선택했던 건, 예배예요.

 

'계속 예배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계속 예배하기 원했고,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그래서 제 안에는 참 큰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비록 그의 육신은 하나님께서 일찍 데려가셨지만,

그 영혼이 마지막에 이 땅에서 보여줬던 것은

김선교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우리로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참 성공적이고, 참 멋있고, 참 완전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감사이고 기쁨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에 김선교사의 마음속에 소중하게 생각해 온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고, 경외함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고백이었어요. 

그것이 죽음 앞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말씀들을 하세요.

'아휴, 그냥 이 세상 사는 동안은 내 맘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죽기 직전에 믿고 천당 가면 되지' 그런 말씀 여러분 들어보셨어요?

 

사실 여러분,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제가 경험해 본 바에 따르면, 사람이 죽음에 가까워 오게 되면, 어느 선이 있어요.

그래서 그 시간을, 그 선을 딱 넘어가게 되면 (혼수상태?)

그 다음부터는 자기 마음대로 신앙을 선택하고,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고 하는게 안 돼요.

 

그 전까지는 내가 의지적으로 뭔가 할 수 있어요.

내가 회개할 수도 있고, 믿을 수도 있고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가게 되면, 그냥 오랫동안 살아왔던 삶의 모습들이

쭉 관성에 의해서 마지막까지 유지되는 것이지,

거기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많이 일어나지 않아요.

 

정말 특별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가 있으면,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임종 직전 영접이)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그렇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생각이 있고, 또 자기 안에 어떤 믿음이 있고,

자기 안에 어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있어도,

평소에 그것을 남들에게 여과없이 다 보여주진 않습니다. 그렇죠.

 

보여주면 창피한 것들도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내가 감추기도 하고, 포장도 하고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잘 포장된 모습입니다.

내 안에 있는 진짜 생각들이 여과없이 다 보여지는게 아니에요.

 

내 의지를 가지고, 말하는 것도 잘 관리하고,

또 남들에게 보여지는 내 모습도, 잘 필터링을 해서, 좋은 모습이 보여지도록

사람들은 애를 쓰고 힘을 쓰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그냥 그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안에 정말 본 모습이 뭐가 있는지는 사실 잘 몰라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를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잘 몰라요.

자기 스스로도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기 말이나 행동을 통제하기 때문에,

이렇게 보여지고 싶은 모습이 있고, 실제 내 모습이 (따로) 있죠.

 

보여지고 싶은 모습이 있고, 실제 내 모습이 있는데, 그 사이에 괴리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이 자아는, 내 안에 있는 의지는,

계속 보여지고 싶은 모습으로 나를 치장하고, 포장하고 싶어해요.

 

계속 그렇게 포장하기 때문에,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그렇게 비춰지고,

자기 스스로도 '그게 내 모습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 내 모습을 그거하고 좀 다르거든요.

진짜로 내가 원하는 거, 진짜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진짜로 내가 삶의 가치라고 여기는 것들은, 좀 다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아니 실제로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데 죽음이 점점 다가오게 되고,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몸이 쇠약해지고, 몸의 기능들이 하나씩 둘씩 정지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뇌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 뇌에 있는 기능들이 점점 약해지고

뇌에 있는 기능들이 점점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을 딱 지나잖아요. 그러면 그동안 내가 유지해 왔더니 쉴드(방패)들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보여지고 싶은 내 모습'

그래서 나의 의지를 사용해서 계속 그렇게 나를 남에게 비춰지게 하고,

포장하고 애썼던 것들이, 어느 순간에 이제 와해되면서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는 지점을 지나게 되는 거예요.

더 이상 내가 스스로 컨트롤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순간을 딱 지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내가 평소에 살아왔던 삶의 모습,

내가 평소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평소에 속으로 욕을 많이 했거나 이런 것들이 있으면,

그게 내 뇌의 신경망이 다 그렇게 굳어져 있는 거잖아요.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신경망이 있는데

그것을 내가 억지로 다르게 보이도록 제어할 수 있는 힘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냥 여과없이 쭉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이제 죽음을 가까이 가다가, 어느 순간을 딱 넘어서게 되면

더 이상 감출 수가 없게 돼요. 그냥 내 안에 있는 것들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내 생각, 내 믿음,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들,

그런 것들이 여과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게 진실인 거예요.

이게 죽음이 보여주고 있는 진실인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내 의지를 사용해서, 속이고 감추고 있던 것들이,

(죽음이 가까워오면서) 의지가 와해 되고, 의지가 무너지면서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김선교사의 삶을 옆에서 쭉 지켜보면서

물론 고통이 너무 심해서 힘들어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 가운데 특별히 마지막에, 모든 의지가 다 와해되어 갈 때,

 

그래서 더 이상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뭔가 하기가 참 어려워졌을 때

그가 보였던 반응은, 계속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하고, 계속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그 모습이 그대로 보여지면서,

제 안에 '아 이게 그분의 인생이었구나, 이게 김선교사의 인생이었고,

참 멋있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몰라요.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고, 그래서 평가할 수 없지만

마지막에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참 멋있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죽음이 보여주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하루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지막에 어떤 모습이 드러날 것 같으세요? 두려워 하셔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지금 여러분들이 취하고,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 마지막에 그대로 드러나게 될 겁니다.

그대로 드러나게 될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두렵고 떨림으로 오늘 하루를 사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시고,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사시고,

오늘도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사시고, 믿음으로 사시고, 그런 삶을 선택하십시오.

 

이렇게 하루 하루 그런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여러분의 진실이 되고,

여러분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갈 여러분의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천국에 가져가게될 여러분의 유업입니다.

보화를 천국에 쌓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혹시 여러분 가운데, 복음을 전해야 될 가족이나 친지가 있다면,

너무 늦기 전에 하십시오. 어느 선을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참 어려워집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할 수 없는 순간을 넘어가게 돼요.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복음을 전하십시오.

물론 뭐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적인 은혜가 있어서,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에요.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너무 늦기 전에 복음을 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죽음에 대한 세 번째 고찰은, <죽음은 소망을 대면하게 합니다.>

 

죽음은 이 땅에서 우리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부질없는 것인지를 보게 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지요.

집이나 자동차같은 물질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의미들, 삶의 목표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계들, 배우자와의 관계, 자녀들,

 

이런 관계들까지도, 참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고,

이게 없으면 인생이 큰일 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죽음 앞에 딱 서게 되면, 그게 다 정말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것은, 그래서 정말 참 소망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 이 땅의 것들은 나의 소망이 될 수 없는 거구나'

'이 땅의 것들은 결국에 가보면, 한 줌 흙밖에 남는 것이 없구나'

 

이 땅에서 우리가 아무리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 땅에서 우리가 아무리 그것 때문에 죽느니 사느니 얘기했어도

결국 마지막에 가 보면, 영생과 천국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임을 그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아등바등 정말 열심히 뭔가를 이루기 원하고, 뭔가를 열심히 소원하고,

이거 없으면 큰일 날 것 같고...

 

지금 내 코앞에 엄청난 인생의 위기가 닥쳐서

이것이 내 인생을 송두리 채 다 무너뜨릴 것처럼 느끼지지만

사실 죽음 앞에 딱 서 보면, 그냥 다 한 줌 흙이예요.

별로 큰 의미가 없는 것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왜 이것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했지?

이게 도대체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했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목사로 살면서 뭐 열심히 하는 목회의 일이 있겠죠.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일이 더 드러나기를 원하고, 선교지에도 더 많은 사역이 일어났으면 좋겠고...

그런 사역조차도, 죽음 앞에 딱 서게 되면, 그건 그냥 한 줌의 흙이예요.

그냥 한 줌의 흙이예요.

 

우리의 진짜 소망은...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 딱 서게 되면,

비로소 그때 진짜 소망이 보이기 시작해요. 참 아이러니 하죠.

'아 진짜 소망은 하늘에 있는 거였구나.

진짜 소망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거였구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거였구나!'

 

죽음은 이 사실을 직시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죽음은, 어떻게 보면 저주받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이 사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축복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인생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무언가를 행하며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진짜 인생을 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진짜 시간은, 여기가 아니라 저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우리가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그래서 마치 이게 안 되면 죽을 것처럼.. 그렇게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하지만

 

사실은 죽음 앞에 섰을 때, 그것은 한 줌 흙일뿐입니다.

사실은 그 일을 성취해도 마지막에 한 줌의 흙이고요.

그 일을 실패해도 마지막에 한 줌의 흙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는 줄 앎이라'

 

흔들리지 말라는 거예요. 보이는 것들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 소망하는 일, 계획하는 일, 이런 보이는 것들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흙으로 돌아가면 끝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주의 일에 힘쓰라'는 거예요. 즉 하늘에 소망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힘쓰는 것만, 그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거예요.

헛되지 않은 일에 여러분의 삶을 투자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천국에 속한 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나팔 소리가 날 때,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고

영광의 몸을 입고, 영광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곳에 여러분의 보화를 쌓으십시오.

이것은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도전이 아니라,

가장 실제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지혜입니다. 죽음이 보여주고 있는 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꼭 저주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배려가 그 안에 숨어 있습니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속아서 살지 않겠어요?

이 땅의 것이 중요하고 전부인 것처럼,

영원히 의미 없는 이 땅의 일들을 하면서 속아서 살아갈 것인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죽음'이라는 관문을 모든 사람 앞에 허락하셔서

이것을 볼 수 있게 하신 거죠.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시는 거예요.

 

창세기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3:22~24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이 타락한 상태로 영원히 살까봐,

생명나무 열매에 접근하지 못하시도록 지키셨다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사람에게 죽음을 통과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영원히 살까 봐,

죽음을 통과하도록 하셨다는 거예요.

 

죽음을 대면하지 않고 영원히 이 땅에 살게 되면, 타락한 인간은 어떻게 살겠어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영원히 추구하며 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신 겁니다.

'너희는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야.

너희는이 땅에서 살아갈 존재가 아니야. 너희는 하늘에 속한 존재야.

너희는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우리가 땅의 것을 아무리 많이 성취한다고 해도,

죽음 앞에 딱 서는 순간, 허무함을 느끼게 돼요.

'내가 그동안 뭐 한 거지, 내가 일평생 무엇을 위해 산 거지?'

 

'너희는이 땅의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너희는이 땅의 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너희는 이 땅의 것으로 기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죽음으로 통해서 교훈해 주신다는 거죠.

 

저와 여러분은 하늘에 속한 존재입니다.

하늘의 뜻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존재고, 하늘의 영광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존재고

그 영광을 살아야 될 운명이 있는 존재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참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죽음이라는 관문을, 타락한 인간들에게 허락하셔서, 이 현실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천국이 꿈이고 이 땅이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이 땅이 꿈이고 천국이 현실'이라는 거예요.

 

이 땅의 삶이 꿈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어느게 더 본질이냐는 거예요.

 

사실 이 땅에서 살아왔던 분들이,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는

거의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인생은 일장춘몽 같다'는 말씀을 하세요.

'한여름 밤에 꿈같다'는 거예요. 잠깐 눈 떠봤더니 인생이 흘러갔다는 거예요.

 

맞아요. 여러분, 그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본질입니다.

유한한 시간 동안, 유한한 일들을 하면서, 결국엔 흙으로 돌아가는...

사실은 꿈 같은 것이 우리 일생이고, 진짜 우리의 본질은 하늘에 있는 거예요.

 

진짜 우리의 본질은 부활한 이후에, 그 영광 가운데 하나님과 영원히 보내게 될 그 시간,

그 시간에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가 진짜로 쓰여지는 거예요.

 

죽음은.. 이런 현실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해 주는 거예요.

'너희는 이 땅에서는 꿈꾸는 것이고, 결국 하늘에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죽음은 이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터키를 가기 위해서 아부다비에서 환승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월요일이었는데, 그때 김선교사의 소천 소식을 카톡으로 들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알아보니까

아부다비는 경유하는 곳이기 때문에, 어떻게 방법이 없더라고요.

 

일단 터키까지 가서, 거기서 제일 빨리 돌아오는 편을 알아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부탁을 해서, 터키에서 제일 빨리 돌아오는 비행기 편을 알아봐 달라고...

그러고 이제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아부다비에서 터키로 가는데, 비행기가 이륙해서 올라가는데, 아침이었어요.

 

하늘이 정말 파란 거예요. 창밖으로 너무 예쁘게 파란 하늘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김선교사가 지금 저기 있겠구나, 하늘나라에 있겠구나'

 

그래서 속으로 물어봤습니다. '동훈아, 거기 어떠니?'

그랬더니 정말 놀랍게도 저한테 목소리가 막 들렸어요. 물론 생각이겠죠.

 

목소리가 들렸는데, 호기심 많은 우리 동훈 선교사가 막 신날 때 하는 얘기가 있거든요.

뭔가 새로운 걸 발견했을 때, 항상 저한테 와서 얘기하는 톤이 있어요.

하이 톤으로 '목사님 목사님' 하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여기 정말 끝내줘요. 여기 정말 끝내줘요. 완전 신세계예요. 목사님도 빨리 오세요.'

그 목소리가 내면에서 들리는데... 제 생각이겠죠.

그 순간에 하늘 소망이 다시 확인되더라고요.

 

'그렇지 그렇지... 우리 소망은 하늘에 있는 거지,

우리는 저기서 살아가는 거지,

거기가 우리가 진짜 있어야 될 곳이지...'

 

여러분 '죽음'이라는 것은, 놀랍게도 소망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이 땅의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이 소망이라는 거예요.

진짜 소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이고,

또 정말 (죽음이) 저주처럼 보이지만, 그 저주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축복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늘의 부활을 쌓으십시오.

헛되지 않은 일에 여러분의 삶을 드리십시오.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일에 여러분의 삶을 투자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일에,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네 번째 죽음에 대한 고찰은 <죽음은 우리를 최고의 예배로 인도합니다.>

 

사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당황하고 실망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지?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김선교사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는데,

왜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으셨지?' 당황하게 되고 실망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어떨 때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고

-어떨 때는 응답하시지 않는지...

그 기준이 뭔지, 원리가 뭔지... 사실은 전혀 모르겠어요.

 

우리 안에 꼭 죄가 있기 때문에 하는 응답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기계적으로 되는게 아니더라고요. 정말 정말 모르겠어요.

 

왜 어떨 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어떨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 생각과 전혀 다르게 움직이시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예정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주권대로 다 하시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사실 기독교 2천년 역사 동안 가장 뜨거웠던 신학적 논쟁은

자유의지와 예정론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선택해서 만들어내는 것인가? *자유의지론

우리가 기도하면 미래가 바뀔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이런 생각과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모든 걸 예정하셨고

우리는 그 예정을 따라갈 뿐이다.. *예정론

하는 주장이 지난 2000년 동안 팽팽하게 대립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감리교는 자유의지 쪽에도 무게를 두고 있다면

장로교는 캘빈의 예정론에 무게를 두고 있죠.

 

물론 장로교에서도 극단적인 예정론(하이퍼 캘비니즘)을 믿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 번 우리 선교사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이런 생각들이 굉장히 복잡하게 제 안에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저는 이 다음에 또 이런 일(암환자 기도해도 안 나아도) 이 있어도, 또 이렇게 기도할 거예요.

또 이렇게 기도할 거예요.

 

11년 전에 레바논 선교사가 똑같이 암으로 소천 했습니다.

그땐 저도 훨씬 더 어렸고, 훨씬 더 미성숙했고,

그때는 제가 정말로 (지금도 정말로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치유해 주실 거라고 믿고, 온 교회가 기도를 했습니다.

 

소천하기 전날까지도 그렇게 기도했고,

소천한 이후에서도 그 자리에서, 저도 그렇고 집사람도 그렇고,

'혹시 하나님이 다시 부활시키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동안 떨칠 수 없었어요.

그만큼 간절히 기도했었기 때문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교사님을 데려가셨습니다.

그러고는 제가 굉장히 혼란스럽고 어려웠어요.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성도들에겐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정말 하나님이 고치실 거라고 믿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그때 제가 나눴던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섭리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다음에 혹시 또 이런 일이 생겨도, 저는 지금이랑 똑같이 할 겁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으로 기도할 거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살려주실 것을 믿을 거고,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다시 혼란스럽게 되고,

그것 때문에 제 신학이 다시 흔들리게 되고,

그런다고 할지라도 저는 두 번이든, 세 번이든 계속 그렇게 할 겁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계속 (고쳐주심을 믿고) 그렇게 할 겁니다. 간절히 기도할 겁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결과가 우리 생각과 다르면...

그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기도인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미국의 토저 박사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와서 물었어요. '토저 박사님, 당신은 예정론자입니까, 아니면 자유의지자입니까?'

 

그때 토저 박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는 과거에 대해서는 예정론자이고,

미래에 대해선 자유의지론자입니다.' 

 

저는 그 말에 200% 동의합니다.

지나온 과거의 일들은 돌아보니까 '와 하나님이 하셨다' 이 고백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이 보인다는 것이죠.

'이게 모두 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구나.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셨구나

내가 한 거는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믿는다는 거예요.

그게 토저 박사의 믿음이었고, 저도 여기에 200% 동의합니다.

 

저도 지나온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합니다.

'내가 이해가 되던, 이해가 되지 않던..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시고 완전하십니다.'

 

그러나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미래의 큰 그림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고, 그 큰 그림 속에서 작은 부분들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바뀔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큰 그림은, 아무리 기도해도 못 바꿉니다. '작정'이라 그러죠.

관련글. 체스의 고수이신 하나님 https://rfcdrfcd.tistory.com/6250919)

 

미래 일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남이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준비하고 계세요.

 

우리의 유한한 지혜와 인간의 한계로 인하여

그것이 우리에게 슬픔처럼 보이고, 고통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예비, 준비하고 계세요.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그것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다 예정하고 계실 거예요.

그러나 그 예정이, 우리가 생각하는 운명론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의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그런 하나님의 초월적인 예정이시지,

그 부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로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사용하셔서 응답하시고, 미래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의 예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다윗의 이야기가 정확히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하12:16~20절을 읽어보십시오.

 

밧세바와 사이에서 난 다윗의 아기가 죽게 됐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간절히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이 뜻을 바꿔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결국 아이가 죽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원망하거나 시험에 들거나 하지 않아요.

몸을 깨끗하게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올바른 태도라고 믿습니다.

아이가 아파도,, 살아 있을 때는 끝까지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을 때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가 죽어도, 삐지거나, 시험에 들거나, 원망하거나 하는 대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그곳에서 경배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차려 먹지요.

 

여기서 음식은, '단순히 음식을 먹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은 구약에서 왕은 여호와의 대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힘을 내서 다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도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윗의 모든 예배 중에,

본문 삼하12:20절에 묘사된 이 짧은이 구절이, 최고의 예배였다고 믿습니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0

 

저는 이것이 다윗의 최고의 예배였다고 믿습니다.

다른 예배는 예배할 만한 상황에서 예배했어요.

그러나 이것은 예배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사랑하는 어린 자녀가 죽었고,

자녀의 죽음이라는 것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가장 큰 고통인데, 그 고통을 겪었고,

이때는 감사할 수도 없고, 감정도 따라오지 않고, 그렇잖아요.

 

여러분, 이때 예배할 만한 기분이겠습니까?

이해도 되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저는 이것이 다윗이 그의 평생에 드렸던 모든 예배 중에

가장 위대한, 가장 하나님께서 높게 평가하신 예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저와 여러분이 이런 최고의 예배를 드려야 될 때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김선교사의 암치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만 하나님이 데려가셨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최고의 예배를 드려야 될 때라고 믿습니다.

 

사실 여러분, 모든 것이 완전할 때는,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때

그때 예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한 것이 다 이루어지고, 사업이 번창하고,

내가 기도함으로 모든 갈등이 다 해소되고, 문제가 다 풀어졌어요.

그러면 여러분 누구라도 예배하죠. 누구라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에요.

그래서 욥기에 보면, 하나님은 처음에 욥이 드리는 예배를 굉장히 기뻐하시고 감격하셨어요.

'봐라. 욕 같은 자가 없다.'

 

그때 사단이 옆에서 고소하기 시작합니다.

'에이 모든게 다 잘 되니까 예비하겠죠.

자녀도 많고, 재물의 축복도 많고, 건강하고, 모든게 완벽한데, 예배 안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거 뺏어 보십시오, 욥이 어떻게 행하는지...'

 

우리의 문제는,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이 왔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아요. 내 감정도 거기에 받쳐주지 않아요.

고통스럽고, 원망스럽고, 한없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런 상황 가운데 어떻게 할 것인가? 욥은 그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다윗이 드렸던 예배 아닙니까!

다윗이 보여주는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