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OagP5Ck6F44
◈성령과의 밀당에서 지는 법 딤전4:7~8, 히10:25 2023.01.29.
목회 칼럼에서 보고드린 것처럼,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데이튼 오하이오에서 지내고 왔습니다.
유나이티드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한인 목회자들을 지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저는 주저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억지로 나를 이쪽으로 인도 하셨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강의를 하고, 듣고, 나눔을 하고, 그리고 돌아오면서 생각하는 동안에
제 마음에 뚜렷하게 새겨지는 이번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너의 삶과 목회에 성령을 위한 여지를 더욱 넓혀라' 입니다.
▲저는 제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 증거이고요.
또한 제 인생 여정 중에 일어난 일들도, 그 사실을 제게 알려줍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이후에
성령께서는 제 안에서 내주하시면서, 그분의 일을 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저는, 제가 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제 안에 계시는 성령을 일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적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때에도, 성령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리기 위해 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저의 영적 생활이 일관되지 못해서,
자주 성령님을 밀어내고, 또한 밀당(밀어내고 당기기)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과의 밀당에서 자주 저는 이겼습니다.
그러다가 깊은 영적인 어둠을 만났고,
그 어둠을 헤쳐나오는 과정에서, 성령님의 주권을 매일 전적으로 인정하는
그런 영적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되었습니다.
매일 첫 시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성별해서 바치고,
하루의 일과 중에도 자주 멈추어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인이 되시도록'
저 자신을 일깨우는 영적 훈련을 지속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의 밀당에서 지기 to lose 를 힘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럴 때 제 삶 속에 성령께서 일할 여지가 더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데이튼(지명)에서, 제 눈에 보인 모든 장면과 제가 들은 모든 말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것이 정말 신앙생활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해온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성령께 제 삶과 저의 자신을 맡겨 드리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한 주간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저는 '성령과의 밀당에서 제가 더 자주 지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 드렸습니다.
▲여러분 '지는 씨름'을 해 보셨습니까?
사람의 씨름은, 이기는 게 쉽지 않죠.
그런데 성령과의 밀당에서 이기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지는게 어렵습니다.
그냥 내 생각대로, 내키는 대로, 나 좋을 대로 살아가면,
그러면 성령과의 밀당에서 이기는 겁니다.
매일 매 순간 성령의 인도를 분별하면서,
그분께 내 생각과, 내 욕망과, 내 의지를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지는 것인데, 그 지는 일은 훨씬 어렵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교회를 섬기면서도, 성령께 주권을 내어드리기 위해 노력을 해왔습니다.
교회로 모일 때 성령께서 일하시기를,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보일 때마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 사건이 더 자주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서 만난 수 닐슨 키비 교수는
그것을 '합류의 순간 Conflux Moments' 라고 불렀습니다.
두 개의 강이 만나서 합류하는 지점이 있죠.
경기도 양수리에 가면, 춘천, 청평쪽에서 내려오는 북한강과
충주, 양평을 거쳐 내려오는 남한강이 합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중에 일하시는 사건은
마치 영적인 강줄기와, 현실세계의 그런 강줄기가
만나서(합류해서) 폭발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 순간을 보게 되면, 갑자기 내가 살던 이 세상이, 신비로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 계시다고 믿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실제로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지요.
전에 제가 살던 동네에 숲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숲길 끝에, 산책로 끝에,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가끔 그 산책로를 걸으면서 묵상을 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연못가에서 물끄러미 앉아서 연못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잔잔한 호수에 오리 몇 마리가 평화롭게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림처럼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그 순간, 호수 한 편에서 물이 출렁거립니다.
팔뚝만한 물고기가 물 위로 솟구치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 순간, 얼마나 강한 신비감에 사로잡혔는지 모릅니다.
불과 1~2초밖에 되지 않는 순간이지만, 그 연못에서 보낸 그 모든 시간의 경험을 뒤엎는
그런 신비로운 사건이 생긴 것이지요.
혹은 하이킹을 하다가 노루나 사슴을 만나 보셨는지요?
앞만 보고 열심히 걷다가, 저 앞에 고개를 빼고 긴장하고 있는 사슴이 눈에 들어오면
신비감이 그 순간 압도를 하지요.
놀란 사슴은 껑충 껑충 뛰어서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고 나면 신비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것을 한번 경험하고 나면, 다시 그 사슴이나 노루를 보고 싶어서 두리번거립니다.
사실 보고 싶은 것은, 그 사슴이나 노루가 아니라,
그 사슴이나 노루가 만들어주는 그 신비감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시고,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할 때,
이곳에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실 때가..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을 사는 것 같은 권태감과 무료함을, 한 순간에 날려 보내고
신비감으로 우리의 마음이 채워지는 것이죠.
온 천하에 계시다고 믿었던 하나님의 임재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았던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는
그 장면(하나님, 성령님의 임재, 합류의 순간)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번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제 자신이, 제 자신의 삶 속에 성령을 위한 여지를 더 만들어 드려야 되겠다고 하는
기도와 동시에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합류의 순간 Conflux Moments' 을
어떻게 더 만들어 낼 수 있을까? ...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성령님과 우리의 만남'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내주 하십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만지지 않으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고, 매일매일 그렇게 살고 있다면
내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 바울 사도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고전12: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의 터치가 없이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사람 안에는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믿는 사람들의 몸을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인데, 하나님이 우리 몸 안에도 계시니까요.
고전6:19절에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외출할 때 샤워하고 옷을 입고 거울을 보지요.
그 거울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볼 때 무엇을 보십니까?
겉으로 점점 허물어지는 육신만 볼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을 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내 육신을 볼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거울 안에 있는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고전6:19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지요.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성매매 여성을 찾아가는 남성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매매 여성을 찾는 것은,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6:16~19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는 것은, 그토록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어떤 분들은 의심 없이 '예,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습니다' 라고 답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내면의 변화와, 외면의 변화를 경험하고 살면
그 사실을 의심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던 것이 이상하게 믿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던 죄책감이 온전히 사라지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벗어나지 못하던 죄악된 욕망으로부터 자유해지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질병, 혹은 마음의 질병이 치유되기도 하지요.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정말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반면에 '정말 그런가?'하고 의심이 되거나,
전혀 믿어지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께서 그동안 만들어 내신 변화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다'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만들어 내시는 변화가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감정이 아닙니다. 언약입니다.
감정은 파도처럼 왔다가 다시 떠나갑니다. 바람처럼 일어났다가 잦아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맺어 주신 언약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취소되지 않습니다.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언약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낌에 휘둘리지 말고, 언약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무런 느낌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이 있으면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시다'고 믿어야 합니다.
반면에 환상도 보고, 대단한 이적도 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이 없다면,
그것은 악한 영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내 마음에 감정의 장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여쭙겠습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내주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까?'
부디 그 언약을 믿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술을 마시면 어떤 사람은 그 사실이 겉으로 즉시 드러나고,
어떤 사람은 웬만큼 마셔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알콜 측정기를 입에 대고 입김을 불면, 그 사실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해 보면
성령께서 정말 내 안에 계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에 내 진심이 실려지면, 성령께서 내 마음을 만지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미 내 안에 내주 하신다면,
왜 성령이 일하실 여지를 만들어 드려야 합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성령이 어떤 분인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은 인격입니다. 어떤 힘이나 에너지만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하는 인격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주의 먼지와 같은 우리와 관계 맺기 위해서 보내주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것을 존중하시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우리 속에 들어오셨다고 해도, 마음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사탄은 노예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연인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그분을 찾아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면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거부하면, 성령님은 물러서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초청하면, 다가오십니다.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후에도, 성령께서는 당신의 마음대로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권을 포기하고, 그분께 맡기는만큼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하는 겁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내 주권을 포기하고 물러서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내려놓고,
성령님께 내 주권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지 말고, 그분께서 판단하고 결정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그것을 매일 매 순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성령께 내어 맡기는 일을 잠시라도 멈추면,
어느새 내 삶에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귀한 손님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분을 반갑게 맞아들입니다.
그리고는 응접실 소파에 그분을 모셔 드리고는, 음료수와 과일을 내어 드립니다.
집주인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지금 급히 처리할 일이 있는데
그 일만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래서 자기 방에 들어가서 컴퓨터로 일을 하다가,
그만 손님이 와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 먹습니다.
일에 푹 빠져서 한참 지내다가, 그제야 그 손님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급히 응접실에 가보니까, 그분이 기다리다가 지쳐서 소파에 기대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지요.
하지만 우리 믿는 이들의 생활 속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제게서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마음의 응접실에 앉아 있게 하고는,
나 혼자 급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분망하게 뛰어다닙니다.
그렇다고 내 힘으로, 내 혼자 처리하는 일이.. 잘 되지도 않습니다.
일처리가 꼬이게 되고, 도리어 더 악화되지요.
그러다가 파국에 이르면, 그제야 성령을 찾습니다.
물론 그때라도 성령을 찾으면 다행인데요.
그러나 그때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너무나 많은 문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후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생활의 매일의 목표는, 성령과의 밀당에서 매일 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매일의 영적 생활입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당부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딤전4:7~8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경건의 훈련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 안에서
진행되게 만들뿐만 아니라, 장차올 세상의 삶까지도 약속해 준다는 말입니다.
바울사도가 권면한 대로, 매일 아침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해
자신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분께 그 날 하루의 주권을 내어드리고,
그 날 하루를 사는 동안에도 늘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도록 힘쓴다면
우리의 삶에는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드라마틱하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럴 때 누가 '당신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할 때
주저하지 않고, 그러나 겸손하게
'예 그렇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살고 있습니다.' 라고 답할 것입니다.
▲저는 올해로 6년째 '사귐의 소리'를 통해서
여러분의 매일 아침의 영적 생활을 돕기 위해 힘써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가장 먼저
제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께서 일하실 여지를 할 수 있는대로 열어두려고 하는 것이고요.
또한 여러분들이 그러한 영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끝냈을 때, 이 과정을 통해서 매일 성령께 내 삶의 주권을 양도하고
성령께서 일할 여지를 넓혀 드리는 일에 습관이 되어서 그렇게 살아간다면
'저는 제 목회의 결실을 좀 얻었다'고 자평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 안에도 내주 하시지만,
믿음의 공동체가 모였을 때, 그 안에도 함께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믿음의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셨죠.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그건 곧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서너 가정이 속회 cell group 로 모였다면 그게 교회입니다.
식당에서 믿음의 식구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나누며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거기도 교회입니다.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현재형 동사를 사용합니다.
'그들 가운데 내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미래형으로 말씀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내가 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요.
이런 경우를 '영원한 현재 eternal present'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약속과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함께 모여 있으면,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곳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언제나 그렇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믿는 이들이 서로 연합하여,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지체는 많고 다양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지체는 한 몸으로 연합합니다.
그 몸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분열 가운데 있는 고린도교회에게, 바울 사도가 하신 말씀을 읽습니다.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6:19절에서는 '우리 몸을 두고서 성전' 이라 했고,
위 구절은 '믿음 안에서 모인 교회'를 향해서 '성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지금 우리가 성전으로 모여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지금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고전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이것은 이 예배당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중에 역사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모임을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주일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 한 달에 한 번씩 속회로 모이는 것,
믿음의 식구들이 밴드로 모이는 것, 그렇게 모일 때마다 우리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성전인 몸이 모여서, 더 큰 성전을 이루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모닥불 모여서 활활 타오르는 이유는
장작 하나하나에 붙어 있는 그 불이 함께 연합하기 때문에, 더 커지는 것입니다.
장작을 따로따로 분리해 놓으면, 그 붙어 있는 불도 꺼지기 쉽지요.
믿음의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섬기고 교제할 때,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성령의 임재가 더 활활 그 불길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10장 25절에서 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여기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이라는 말은
이 편지를 쓸 때 '모일 필요 없다. 그저 혼자 자신의 시간에,
자신이 처한 곳에서 기도만 해도 된다. 왜 굳이 모이느냐?'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속회로 모일 때, 성경 공부를 위해서 모일 때,
찬양을 위해 모일 때, 중보기도를 위해서 모일 때, 선교로 혹은 봉사로 모일 때,
혹은 임원회로 모일 때, 그곳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기에 모이는 것을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일 때, 성령께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성령과의 밀당에서 더 자주 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우리가 모일 때, 어떻게 성령께서 일하실 자리를 더 넓혀 드릴 수 있을까?'
질문을 하며 돌아왔습니다.
성령에 드러나심에 관한 우리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합류의 순간 Conflux Moments' 에 대해서 우리는 배가 고픕니다.
우리 개인적인 삶에서도,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더 보고 싶구요.
그리고 교회로 모일 때, 더 자주 그 순간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순간을 기대하면서 자주 모이면서
성령께 그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목사로서 저의 과제고요. 속장님들의 과제고요.
임원들의 과제이고요. 교사들의 과제이고요. 그리고 모든 교우들의 과제입니다.
여러분 안에, 내 좋아하시는 성령의 형편은 어떠하십니까?
혹시 마음의 응접실 소파 안에 앉아서, 성령님이 쿨쿨 주무시도록 내버려둔 것은 아닙니까?
혹은 '성령님 마음대로 하시되, 이 응접실은 벗어나지 마세요.
제 방에는 절대 들어오지 마세요.' 라고 금을 그어 놓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앉아 계시다가
제가 도와달라고 하면 그때나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령과의 밀당에서, 거듭 여러분이 이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밀당에서 너무도 자주 이기다 보니까,
이제는 성령께서 나를 끌어당기는 힘도 못 느끼는 것 아닙니까?
성령과의 밀당에서 지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현실에서의 승률은 높아집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늘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의 절대 주권 안에 있어도, 병들 수 있고요. 실패할 수 있고요.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병드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어려움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복의 도구가 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얻어야 할 승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영적인 삶에 신실하게 임하십시다.
개인적으로는 경건의 연습을 더 신실하게 지속하십시다.
매일 첫 시간을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성별하는 일에 더욱 성실하십시다.
하루 일과 중에 자주 멈추어서 '내가 지금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있는지?'
자신을 깨워 일으키십시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느끼면, 우직하게 순종하십시다.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던 잉어가, 공중으로 솟구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존재를 확인하는 '합류의 순간 Conflux Moments' 을 기대하면서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모이기를 더욱 힘쓰십시다.
은혜받는 모든 모임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우리 가운데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내어 드리도록 힘쓰십시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그 일을 하십시다.
믿는 이들이 모여 성령의 나타나심을 기대할 때
우리는 그 옛날 야곱처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고는
'이곳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하며
탄성을 지르며 충격하며 사로잡히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에,
2023년에 더 분명하게, 더 자주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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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에게 속고 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한다고 말하면서도, 종종 속을 때가 있습니다.
백설공주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계모는 항상 거울을 보고 이렇게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우리가 지금 ‘계모처럼’ 그렇게 묻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의 재주에 취해 있다는 것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지금 예수 제일 잘 믿니?”
‘바로 너!’ (자기가 거울 대신 마음속으로 자문자답 하죠.)
“거울아, 거울아, 누가 지금 제일 좋은 교회니?”
‘바로 우리 교회!’
“거울아, 거울아, 누가 노래(지휘, 반주, 성가대)를 제일 잘 부르니?”
‘바로 너!’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현명하게 설교 잘 하니?”
‘바로 너!’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훌륭한 구역장이니?”
‘바로 너!’
바로 이런 생각이 드는 그 순간, 우리는 마귀에게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장난 그만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과 동행하지 못할 때, 마귀의 미혹을 받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넘어질 수 있는 성도이고,
우리는 항상 넘어질 수 있는 교회입니다.
성도가 가질 올바른 생각은,
‘항상 부족합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입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승패가 갈렸습니다.
싸움에 진 수탉은 깊은 상처를 입고 구석에 시무룩하게 있었고,
싸움에 이긴 수탉은 승리의 기쁨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담장 위에 올라가 “꼬끼오~”라고 큰 소리를 내지르며
자신의 승리를 알렸습니다.
이 소리를 하늘에 있던 독수리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담장 위의 수탉을 낚아채서 하늘로 날았습니다.
이제 암탉은 누구의 차지가 되었을까요? 오히려 싸움에 진 수탉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영원한 승자, 영원한 패자는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늘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특히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더욱 이 겸손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패배보다 승리 때문에 몰락하는 사람이 더 많다.”
성도가 승리한 후에도, 몰락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자기 속에 계신 성령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합니다.
자기 속에서 성령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결정하실 수 있는, 주도하실 수 있는
권한과 기회를 더 많이 내어드려야 하는 거죠.
▲어느 분이 미국 유학을 해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그리고 미국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되기 위한 심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그동안에 제 설교를 들으면서 참 은혜는 받았지만
'예수님만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라'는 그 메시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교수 채용 과정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반드시 교수로 채용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데
'주님께 다 맡기라. 오직 주님만 바라보라'는 제 메시지가
너무 막연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 저를 이번에 교수 채용 되게 해 주셔야 됩니다.'
이미 최종심사 단계까지 갔으니 거의 된 거나 마찬가지지만
여전히 마음엔 두려움이 있었던 그는,
이제껏 큰 고생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너무 마음이 힘들고
그리고 유학생활이 쉽지는 않았는데, 빨리 좀 공부 과정 끝나서
자기가 교수로서 미국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는 소원이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주님께만 전적으로 맡기라 주님만 바라보라'는 메시지는
자기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는 교수 임용에서 탈락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바로 그 순간에, 자기 마음이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목사님의 설교가 이해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무슨 일을 당하든지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이니까
우리를 낮추시고 죽게 하실지라도 주님과 동행하면 그러면 충분한 거잖아!'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거 자체가 행복한 일이잖아요.
그러면서 오직 예수님 그 분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제가 교수 임용에는 내가 실패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으니,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신 분들 십자가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십자가 예수님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깨닫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실패자로 끝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데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까지 흘려 주셨는데
우리가 우울하고 낙심하고 실패 무너지고 그렇게 처절하게
우리 삶이 그렇게 끝나게 하나님이 계획 하셨겠습니까?
우리를 어떻게 구원 해 주셨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절대로 실패로 끝날 인생이,
그 믿음에서부터 우리 마음속에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을 중에 내 마음 속에서부터 감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이 반드시 나를 회복시키실 것이 믿어지니까
주님이 나를 구원하실 게 너무 분명하니까
하나님의 나를 포기하실 리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