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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출10:24-26 ☞ <온전, 완전>, ▣성결, 성화
◑서론
출애굽기를 구원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모형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은 세상의 모형이고, 바로왕은 사단의 모형이고,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홍해를 건너가는 것은 바로 세례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고전10:2절에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애굽 땅을 나와,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세상과 죄악에서 나와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세례를 받고 광야의 생활을 겪으면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바로왕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모세에게 갖가지 계략을 사용해서 대적합니다.
그래서 바로 왕이 바로 사단의 모형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아니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다”(고후 2:11)
사단은 궤계(scheme)를 사용합니다. 궤계는 간사스러운 속임수, 사악한 속임수입니다.
마음에 성령이 가득한 사람은 나다나엘처럼 마음에 간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간사하고 거짓말하기를 떡먹듯이 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를 통해서 이 사단의 속임수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바로왕의 언어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도입 : 바로 왕의 말에 나타난 사단의 속임수
모세가 내 백성을 가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도 바로왕은 그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계속해서 보내자 조금씩 물러서서
결국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 장자가 다 죽는 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그 백성을 내보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바로 왕의 언어를 살펴보면
우리는 사단이 역사할 때, 단계적으로 나타나는 궤계를 알 수가 있습니다.
1) 열 재앙 중 넷째 재앙은 ‘파리 재앙’입니다.
파리의 재앙이 임하자 바로 왕이 처음으로 물러서기 시작을 합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출 8:25).
바로왕은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좋은데,
광야로 들어가지 말고 애굽 땅에서 드리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마귀인 자신에게 여전히 속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모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출 8:26).
모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겠나이까? 우리가 돌 맞을 일이 있습니까?
왜 애굽땅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습니까? 그러니까 못하겠습니다.”
2) 그러자 바로왕은 두 번째 단계로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출 8:28).
광야에 가기는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기를 떠나지는 말라는 거죠.
예수를 믿어도 너무 심하게는 믿지 말라,
주일 낮에만 아무도 모르게 1시간 왔다가 가고 저녁 예배, 수요 기도회는 오지 말라,
금요철야 오지 말고, 아~ 헌금! 그저 주일에 조금 하면 되는 것이지
십일조는 왜 하느냐고 속삭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모세가 기도해서 파리떼를 거두어 주자 바로왕은 또 다시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말한 것조차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재앙이 계속 더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전염병, 독종, 우박이 계속됩니다.
3) 우박 재앙을 견디지 못한 바로왕이 조금 더 물러갑니다. 모세에게 말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러 갈 자는 누구뇨?”(출 10:8). 관심 있는 것처럼 물어봅니다.
이에 모세가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출 10:9)
그러자 바로 왕이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출 10:11)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왕은 그 후에도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보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또 다시 우박이 남긴 것을 메뚜기가 와서 싹 먹어버리는 메뚜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메뚜기가 밭의 채소와 나무열매를 다 먹어버리고 애굽 전역에 푸른 것은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꼬리를 내리고 “여호와께 득죄하였으니 나의 죄를 이번만 용서해달라”고 말합니다.
“이번만 용서하라” 이 말이 마귀의 전용용어입니다.
이번만 용서해 달라 하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메뚜기 재앙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바로왕은 이번만 용서해 달라고 하고서는 또 다시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홉 번째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4)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자 캄캄한 흑암이 애굽 전역의 땅에 임하였습니다.
캄캄해 사람들은 서로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광명이 임했지만
애굽 전역에는 흑암이 임해 캄캄해서 사람을 알아볼 수 없으니
누가 내 가족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삼일동안을 있으려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드디어 바로가 말합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출 10:24).
참 많이 양보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단호합니다.
출10:25~26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한 마리도 남 길 수 없다는 것이 모세의 단호한 결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사단의 전략과 궤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전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일부라도 갖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전부를 빼앗겼다면 그 중에 일부라도
차지를 하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다 빼앗겼더라도 쫒아가서 일부라도 다시 찾아오겠다는 것 아닙니까?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고 출애굽을 하도록 허락한 이후에도
군대를 모아 쫒아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일부라도 잡아오려고 했던 것이 바로왕입니다.
사단의 전략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은 단호합니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소이다.”
이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이고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원리인 것입니다.
◑본론 / ‘한 마리도 남기지 않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서 핵심적인 원리가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이스라엘에 속한 가축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구원하는’ 원리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인한 구속사역은
성도의 영, 혼, 육의 전인적인 구원, 온전한 구원을 뜻합니다.
세상에는 택함 받은 자, 구원 받은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 구원 받지 못한 자가 나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택함 받은 자, 구원 받은 자, 그 한 사람 속에
어느 영역은 구원 받고, 어느 영역은 구원 받지 못하는...
그런 불완전한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 성도의 온전함에 이르는 구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믿어 구원을 얻은 후에
더욱더 온전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요.
이것이 이 설교의 주제요, 요지입니다.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나도 예외 없이
다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구원하러 오셨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동안 처절하게 실패한 실패자일 것입니다.
지금도 실패하고 있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사명 선언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택한 영혼들이 있고
창세전에 택한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영혼들을 위해서, 이 땅에 십자가를 지시고
그들의 죄 값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속하신 영혼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속죄의 근본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이 예외 없이 다 구원하러 오셨다가
인간이 자유의지로 방해해서 예수님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한 영혼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창세전에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창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혼들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모두 다시 살리시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라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구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근본사명입니다. 이 원리는 마태복음에도 명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선언은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것인데,
‘온전한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0:10).
예수님은 양에게 영생을 주시되, 풍성한 생명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양들 가운데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 길 잃어버린 양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가도 낙망해서 방황하는 양들도 있을 것입니다.
길 잃은 양도 있고 방황하는 양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나, 아직 온전해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갓태어난 아기나 영아는, 아직 걸음도 제대로 못 걷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점점 소년으로, 청년으로 성장해 가지요.
마찬가지로 거듭난 성도는, 장성한=온전한=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숙해 가야 합니다.
혹시 나는 양인가 염소인가? 의문이 드는 분이 있을 겁니다.
내가 양인가 염소인가 고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양입니다.
염소는 그런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염소는 그런 관심도 없습니다.
구원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염소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인가? 나는 구원받은 사람인가?
양인가 염소인가? 고민하는 것은 하나님의 양된 특징입니다.
그 사람은 더 말씀공부하고 더 기도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얻고,
나아가 구원의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는 것은 속죄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의 한 부분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는 두 번째 의미는
예수님은 우리 성도의 한 부분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온전한 구원)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내 영혼의 주인은 누구인지
그것을 먼저 분명히 해야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느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우리는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육신도 하나님의 것이고,
내 영혼도 하나님의 것이고, 내 모든 소유주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육신 조금 드리고, 헌금 조금하고, 충성 조금하고 나서
“하나님 나에게 빚지셨죠? 갚으세요!” 이런 태도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는 누가 소유주고 누가 종인지 그 근본개념이 정립이 안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그 일부를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은 우리가 빚을 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갚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로
조금 드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그저 액세서리쯤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인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혼과 육신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주인이 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Saviour and Lord” 구원자요, 주님입니다.
구원자이기 때문에 내 죄를 값아 주신 것이고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 영혼과 육신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영혼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마귀를 따른다든지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고 하는
완전한 구속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오른손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왼 손으로는 마귀의 일을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부분으로는 자기사랑, 쾌락사랑, 돈 사랑과 같은 잘못된 사랑으로 간다면
그것도 잘못입니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소이다”
이것은 우리 영혼, 육신 어느 한 구석도 마귀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집에 도둑이 일곱 명이 들었습니다. 주인이 몽둥이를 들고 도둑 여섯 명을
다 때려 눕혔습니다. 그런데 보니 한 놈은 잘생겼습니다. ‘저놈은 어째 때려눕히기다 아깝다’
해서 살려 두었는데, 그 도둑놈이 전부 도적질해갔다고 한다면
여섯 놈 때려 부순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농사지을 때 천 평을 지으면 열 평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열 평은 마귀보고 농사지으라고 남겨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열 평 농사짓느라고 정신없으면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Gude man’s craft” 라고 합니다.
우리 영혼에는 이런 것을 남겨 놓으면 안 됩니다.
우리 영혼 한 귀퉁이를 마귀에게 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영혼과 육신은 100%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궤계는 우리 영혼 한 귀퉁이라도 차지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 영혼 일부라도 차지해서 우리가 영혼의 일부에 문을 열어놓고
마귀의 디렉토리를 만들어 놓으면 마귀는 거기 들어가서 귀신들을 집어넣습니다.
‘야,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백성이니
내가 이 사람을 장악할 수는 없고 이 사람 한 귀퉁이라도 들어가서 차지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해야겠다.’ 하는 것이 마귀의 전략인 것입니다.
영혼의 한 귀퉁이에 “Gude man’s craft”와 같은 방을 만들어 놓으신 분 안계십니까?
자꾸 열어 놓으시면 마귀가 들어옵니다. “나는 술은 못 끊어” 한다면 방 하나 열어놓은 것입니다.
술에 열어놓고, 음란에 열어놓으면 그곳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올수록 인생이 파괴되고, 건강이 파괴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적질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영생이요 풍성한 생명인데도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맘속에 빈방을 만들고 귀신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다 가질 수 없다면 일부라도 차지하겠다고 하는 사단의 궤계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와서 더러운 귀신으로 자꾸 우리 영혼을 차지하려고 할 때에
우리 영혼에 영적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 때 우리는 원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소이다!”
이 원리를 우선 정확하게 해 놓아야 이론과 행동이 바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열어놓은 문 닫고 “내 영혼에서 썩 물러갈 지어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
선포하고 승리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회복하십니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는 것은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회복하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다 잃어버렸지만,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모두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프랑스 리옹에 교부였던 이레니우스는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은 총괄적으로 다 갱신했다고 해서
소위 총괄갱신설(Recapitulation theory)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시고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아담은 하나님과 자유스럽게 교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아담은 행복했고 존귀한 존재였으며 세상을 다스리는 자였기 때문에 뱀이든, 호랑이든,
사자든 아담의 이름지어주면 그것을 자기 이름인줄 알았습니다.
아담은 만물을 지배하며 참으로 존귀하고 영생하는 생명을 가진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아담에게 주었고
아담도 그것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은 심하게 훼손되어 버렸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었고, 축복은 저주로 변했습니다.
행복은 슬픔으로 변했고, 영생을 상실하고 영벌을 받을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상실하고 마귀의 자녀라는 비참한 신분으로 추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이 잃어버린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회복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이제 하나님과 화친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의 문이 열리게 되었고,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고,
슬픔은 사라지고 성령의 기쁨이 임하게 되었고,
영생을 다시 회복해서 이제 다시는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가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회복하게 되어
하나님의 양자됨의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모두 회복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이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한 마리도 남기지 아니하고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한 완전한 속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원 사역’이라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100% 성도를 온전하게 해 주셨으니,
우리는 가만히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으면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자기 의지’를 제외시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으니,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그 목표로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점점 온전함을 추구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다 주셨는데, 그래서 저절로 다 얻게 된다는 게 아니고
가나안 땅의 성읍들을 하나씩 싸워서 차지해 나가는 것이죠.
자기가 의식하지 못한 채로, 점점 온전해지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분명히 알 때, 그 온전함에 이르는 숙도가 빨라질 것입니다.)
마치는 말
출애굽 과정에서 보여준 바로왕은 사탄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전략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절대로 줄 수 없다는 것, 그래도 안 된다면 하나라도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양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속한 일부라도 더 차지하고 있어야겠다는 거죠.
그러나 우리는 그 전략을 향해서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소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영혼과 육신의 어느 한 부분도 마귀에게 내어 줄 수 없음을 깨닫고
마귀에게 문 열어준 부분을 모두 닫아 버려야 합니다.
그 동안에 들어온 악한 영들 모두 다 예수 이름으로 내쫒아 버리고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서 우리에게 회복된 영생을 주시되
풍성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풍성하지 못한 것은 사단의 장난이요 방해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탄이 자리하지 못하도록 성령충만하여져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남김없이 누리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라도 남길 수 없소이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위대한 신앙원리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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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칭의론과 성화론을 동시에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해 집니다.
칭의론만 믿고 추구하면, 불완전한 구원론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칭의론만 구원론인줄 압니다.
그리고 성화론은 현실적으로 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받은 12지파가, 하나씩 싸워서 차지해 나가야 하듯이요.
또 한가지 교인들이 성화론을 무시하는 이유는,
‘성도가 죽으면 그리스도처럼 자동 온전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성경적 근거 구절이 뭔지 궁금합니다.
요일3:2절에,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위 구절은, ‘성도가 죽으면 그리스도처럼 자동 온전해진다’는 근거 구절이 아니라,
‘성도가 죽으면, 죽을 몸이 그리스도처럼 죽지 않을 몸으로 된다’는 뜻입니다.
mortal body가 immortal body가 된다는 말이죠.
만약 성도가 죽어서, 자동 그리스도처럼 온전하고 거룩해진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모두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낸 AI 로봇’처럼 될 것입니다.
그건 주님이 원치 않으시고, 우리 각자도 원치 않습니다.
그런 ‘천사같은 사람들’은, 천국에 수두룩빽빽하게 많습니다.
주님은 ‘인격을 가진 신부’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화’를 강조하는 구절이, 수 십~수 백 구절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인격은, ‘영혼의 지문’과 같아서, 매우 고유한 것이고, 나만의 독특한 것입니다.
나의 성품이 예전에는 마귀에게 속해 있었으나, 이제 거듭난 이후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살려하는 욕구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인 거죠. 거듭나자마자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계속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으니, 지레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게 안 됩니다.
나의 신앙인격이,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 성숙=온전=장성 (텔레이오스, 모두 같은 말)
하게 되지 않으면, 천국에 입장이 거절될 것입니다.
왜냐면 천국에 가서도, 변화되지 않은 내 신앙인격이,
거기서도 계속 분열, 거짓, 당짓기, 모함, 탐심, 미움 등을 계속하면,
거기가 천국이 되지 못하고, 이 지상처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아예 입장을 못 시키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는 ‘흰 옷, 예복’을 입지 못했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구원론은 칭의론과 성화론이, 동전의 양면처럼 둘이 같이 가야 합니다.
한 쪽만 강조하면 큰 오해입니다. 불완전한 구원론이 되죠.
(영화는.. 그냥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크게 신경 안 써도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