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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쉼과 안식을 누리는 제자도

LNCK 2024. 3. 5. 19:33

https://www.youtube.com/watch?v=81R1DOysPAU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쉼과 안식을 누리는 제자도     마11:25~30     ☞▣제자도

여러분, 현대 사회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저는 이 현대 사회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가장 살기 좋은 세상에 살면서도, 가장 많은 불평을 하는 세상!' 

여러분 아십니까? 인류 역사상 사실 지금 우리가 가장 최고로 행복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가 있어요. 
미국 사회도 그렇고, 한국 사회도 그렇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산재해 있지만 
여러분이 과거와 비교해 보시면, 사실 우리 세대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우리보다 더 큰 평화를 누리는 세대는, 인류 역사 속에 없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만 놓고 봐도, 우리 세대가 과거에 비해서 정말 잘 살아요. 
또한 남들에 비하면 훨씬 잘 살아요. 사실 우리 중에 가난하신 분들도, 
인도나 북한, 혹은 남미의 가난한 나라들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굉장히 잘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모두 다 살기가 팍팍하고 힘들다고 아우성이죠.

자 그런데 이러한 세태가, 세상에만 있으면 좋은데, 교회 안에도 존재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여러분 우리가 그런 말을 하죠. 

'과거에는 예수님 섬기기가 참 쉬웠었을 것 같은데, 
지금 우리 세대는 예수님 따르기가 너무 힘들어!' 
그런 불평을 저는 목회자로서 종종 듣습니다. 

자 그런데 아십니까?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가 미국이나 한국사회에서
점점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고, 또 기독교를 깔보는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굉장히 좋은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여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를 있는 그대로 한번 평가를 해 보면요. 
우리가 쓸데없는, 필요 이상의 불평을 늘어놓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불평을 하느냐면, 이런 거예요. 

"아휴, 기독교인으로 살려면, 해야 될게 이렇게 많아요"  *의무 조항
"어휴, 예수님을 따르려면, 왜 그렇게 하지 말아야 될게 이렇게 많아요?" *금지 조항
라고 하면서, 마치 내가 엄청난 것들을 희생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불평하는 경우들이, 종종 우리 눈과 귀에 들립니다. (오늘 여기에 대한 답을 찾아볼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어려운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주저하고 있어요. 

자 또한 스스로를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버겁고 힘들어서, 굉장히 괴로워하거나 우울해하면서 
마지못해 신앙생활을 이어 나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간증을 들어봐도요. 주님을 위한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단순히 기쁨에 의해 나온 순종이 아니었고요. 
'그냥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억지로 하는 것인양' 간증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속으로 좀 의문을 가져요. 
'저분들이 정말 제자도 discipleshpi 에 대해서 

정말 바르게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들 얘기하는데요, 다른 말로 '제자가 되어야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믿는다'는 말에는, 제자도를 포함하고 있죠. 믿어도 제자가 못 되면, 구원받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사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쉬운 삶이 아닌 건 맞아요. 
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게 쉬운 일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렵고 힘들기만 한 삶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되려, 큰 특권과 안식을 누리는 삶임을 기억해 주세요.  *주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극소수에게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이며 
참된 쉼과 안식을 누리는 삶입니다.    

여러분,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 
그것이 굉장히 큰 특권이고요,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평안과 안식과 쉼을 허락하는 길임을... 오늘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버거운 일이라 여기지 말아야 될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엄청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로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흔하지 않은 삶이 분명합니다.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가 급격히 쇠퇴하고 있죠. 사실이에요. 
미국은 실제로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줄어들고 있고요.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사실 참되게 복음을 믿고 살아내지 못하고, 그냥 종교생활 식으로 
교회를 그냥 왔다 갔다 하시는 분들도 굉장히 많아요. 

앞으로 복음을 믿고 참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로 인해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기억해 주세요. 
왜 그러냐면, 여러분 아십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죠. 
이스라엘 민족 안에 많은 사람들의 숫자가 있었잖아요. 
아십니까? 그 중에 오직 소수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남은 자'들로서 
참된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오늘날 제자가 소수인게 어쩌면 당연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 민족은, 얼핏보면 아주 많은 숫자인 것 같았으나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게 되었을 때, 결국은 하나님께 충성한 그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오직 소수밖에 없었어요. 

구약시대에만 그랬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역사를 공부해 보시면, 사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의해서 
아주 좋은 환경에 처하게 되었죠. 주후 4~5세기 때 사회에서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교로 선포되었어요.

그때부터 로마 사회에서 기독교는 굉장히 권력을 갖는 종교가 됐어요. 
근데 그 이후에,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던 많은 사람들이 나왔지만, 
오직 그 중에 소수만이 참되게 복음을 믿고 선포하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어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소수로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의아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왜냐면 교회 역사 속에서 항상 하나님은, 극소수의 사람만을 선택하셔서, 
자신을 따르도록 도와주셨다는 것이죠. 

예수님을 바르게 따르는 우리가, 극소수인 '제자 그룹'에 속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극소수의 제자 그룹에 속했다는 사실이 엄청난 특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볼멘 소리를 할게 아니라요.

마11:25~27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특권은, 겸손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은혜로써 주어집니다.  :25~26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힘들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시는데요. 그 이유가 뭐죠? 
바로 '아버지께서 이 일을 지혜있고 똑똑한 사람에겐 감추셨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들 Jesus 을 알고, 아버지 God 를 아는 그 지식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 스스로 권력, 힘이 있다 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계시가 되지 않았고요.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을 몰랐어요)

반대로 스스로 부족하고, 자기 어리석음을 잘 인정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던 자들에게 계시되었음을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인데요.
이 지식이 바로 극소수의 어린 사람들과 어린아이,

영적인 의미인데, 뭐냐면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요. 
자신의 모자람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사실 이 땅의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 더 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렘9:23~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세상은 다 어떻게 하죠?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죠. 자기의 힘을 자랑하죠. 자기의 부 wealth 를 자랑하죠. 

근데 위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거 자랑하지 말아라! 
왜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거든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즉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러한 일을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랑하라고 
유일하게 명령하신 한 가지가 있는 거예요. 

그게 사람의 지혜도 아니에요. 힘(권력)도 아니에요. 내 부도 아니에요. 
바로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거 하나만으로도 너희가 감사하고, 기뻐하고, 그것을 자랑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구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히, 야다) 지식은, 단순한 지적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물론 지적인 지식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아주 부부가 서로를 친밀하게 경험적으로 알듯이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가치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누구에게 주어졌나요?
:25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어린 아이'란, 문자적으로 나이가 어린 꼬마를 뜻하지만,
지금 예수님은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모자람을 알았던, 예수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고 계신다면 
여러분 겸손한 어린아이들 중 하나인 것임을 기억하세요. 

제자인 우리는, 이 세상에서 뽐낼 만한 지혜도 없어요. 힘(권력)도 없어요. 물질도 없어요.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비참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모자람과 비참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어린 아이의 믿음을 갖고 예수님께 나아갔을 때,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갖게 되는데, 
더 이상 내 생각이 옳지 않음을 인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을 선택하죠.

그것은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길이에요.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 세상 눈으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예요.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왜 뭐하러 자기를 부인해? 왜 바보처럼 무능력자처럼 살려고 해?' 

그러나 우리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다 부인하고 예수님을 선택한 그 사람들, 
바로 그들을 예수님께서 지금 '어린 아이'라고 부르고요.  *네피오스

그 의미는, 어린아이와 같은 (아무 것도 모르는) 믿음을 가지고
무턱대고, 무작정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그들이 구약으로 치면 '남은 자'요, 
당시에 '택함 받은 소수의 제자들'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무겁다고 불평이 나올 만한 일이긴 하지만, 
사실 본질은, 소수의 선택받은, 은혜받은 사람들이므로... 특권으로 여겨야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런 놀라운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아시나요?
물론 어린아이와 같고, 겸손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선택했으니까 주신 건 이해가 돼요. 

근데 그 이상의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을 따르는 특권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은혜로써 주어졌음을 기억해야 됩니다. 

제자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이유는, 
바로 단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전적인 은혜로 선택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26절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새번역)
바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기시고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그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어린 아이들과 같이 아무런 가치 없는 사람들이었을 때 
우리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그 특권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가 뭐라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지 않아요. 
내 안에 어떤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에요. 

지금 누구의 선택이었어요? 바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각자를 제자로 선택하신 거예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저는 예수님의 선택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가끔 여러분이 제게 물으실 수 있어요. 
'조영휘 목사님, 목사님은 왜 예수님께서 목사님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세요?' 라고 물으신다면,

제 정말 진실하고도 솔직한 대답은 이겁니다. '잘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여러분 저는요, 제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여러분보다 제가 제 자신을 너무 잘 알아요. 

여러분, 제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그런 죄성들이 있죠. 
제가 목사지만, 여전히 제 머릿속에 들어오는 그런 사악한 생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막 살았고요. 믿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막 살았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저를 변화시켜서 이제 사역자로서 살게 하신 그 후에도, 
저는 끊임없이 넘어졌었어요. 끊임없이 하나님을 실망시켰었어요. 

그런 저를 스스로 바라볼 때요, 저는 '예수님이 왜 저를 선택하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저는 저를 선택 안 했을 거예요. 

제 대답은 오직 이겁니다. 주님이 저를 선택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시고,
또한 목회자로 부르셔서 주님을 섬기게 하신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 은혜와 특권이 어찌나 큰지.. 저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진리가 제게만 적용되는 진리인가요?
아니죠. 여러분 모두에게도 다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자 그러함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한 명 한 명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가 뭐냐면, 바로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도 이렇게 대답하셔야 돼요. 
'자매님 형제님, 왜 예수님이 당신을 선택해서 예수 믿게 하시고, 제자로 따르게 하셨나요?'
그러면 여러분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주님이 저를 선택해 주셨으니
저는 몸들 바를 모르겠고, 이 큰 특권으로 인해 저는 너무나 감사가 넘칩니다!' 

지금 이런 말씀을 계속 드리는 이유를 아시죠? 설교 서두에 던졌던 질문,
'예수 믿는데 왜 그리 금지조항이 많고, 또 의무조항이 많습니까? 괴롭고 힘듭니다!'

그런 하소연이 이해가 되기는 하죠. 사실 그런 면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참된 성도, 참 제자가 가져야 되는 올바른 생각은, 그런 푸념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말할 수 없는 은혜로, 소수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특권으로 여기고, 오히려 감사 감격하는 것이.. 올바른 제자의 자세입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게 되어있다는 거죠!

▲제가 여러분과 전에 나눔의 시간을 갖다 보면
'조영휘 목사는 참 자신감이 넘친다.' 이렇게 보인다고 말들을 하세요.
 
네, 제가 자신감 있게 설교하고, 행동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가 제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이 아니에요. 

제가 말씀을 전할 때, 최대한 자신감을 저는 이유는, 제가 똑똑해서가 아니에요. 
제가 한 가지 확신하는 것, 제가 자신감을 갖는 건 바로 이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저를 선택하셨고, 그래서 자신감이 넘치고요,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이 복음이 진리 임을 제가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여러분에게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자신감을 갖고 사셔도 돼요. 
그 자신감이 나에게서 나오는게 아니죠. 내 가치에서 오는게 아니에요.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셔서, 이 큰 특권을 주셨음에 
자신감 갖고 사실 필요가 있는 겁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그 사실, 
예수님이 은혜로 나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다는 그 특권으로 인해 
여러분이 충분히 자신감 갖고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삶은, 결코 쉽지 않은 삶이에요. 

그럼 함에도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아주 중요한 진리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선택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된 우리는,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욱 더 큰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버겁게 여기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참된 쉼과 안식을 누리는 삶>이기 때문이에요.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것을 
아주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는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삶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맘대로 못 하게 되고, 
또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굉장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 나오시면서도요. 그런 불평이 속에 가득해요. 

'왜 교회 다니면 술도 먹으면 안 돼지? 왜 욕설도 하면 안 돼지? 
왜 담배도 피우면 안 돼지? 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도 보면 안 돼지?' 그런 생각들을 많이들 하세요. 

특히 모태교인으로 자란 어린 아이들도 그런 불평을 쉽게 하죠. 
'왜 우리 엄마 아빠는, 이걸 못 하게 해?' 
'왜 우리 엄마 아빠는, 내 친구들은 다 안 하는데, 날 억지로 이렇게 시키는 거지?'
어린아이들은, 아직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그런 불평이 나올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똑같은 불평을 하게 된다면,
아직 제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제자도의 깊은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해 주세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은,
불필요한 수고와 무거운 짐을 더하는 선택이 아니고요. 
도리어 참된 쉼과 안식을 얻는 선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뭐냐면, 결국 정말 참된 쉼을 얻기 위한 거예요.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한 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11:28절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참된 쉼과 안식을 누리는 삶인가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참된 쉼과 안식을 주시는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쉼(참 안식)을 주심을 기억해야 됩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8 

▲우리는 마태복음의 전체 맥락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짐인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무거운 짐'을, 단순히 살다보면 당연히 뒤따르는 '삶의 무게'로 생각하겠지만,
그것과 더불어 '율법주의 종교가 주는 큰 짐, 무게감'도 있습니다.

복음서를 공부해 보시면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당시에 정말 잘 나갔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참 증오했어요. 
결국 그들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죠. 

근데 그들에 대해서 예수님께 아주 흥미로운 비판을 하십니다. 
마23:1~4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가르쳤던 건 맞아요. 
그들이 옳은 말을 할 때도 있었어요. 

자 근데 '그들은 가르치기만 하고, 그것을 행하지는 않았다'라고 말씀하시고요. 
4절에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자기도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데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러분 이게 거짓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에요. 

마23:4절의 의미는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어요. 
(여기까지는 옳죠.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이 모세 율법을 더 잘 지키게 하려고, 더 많은 율법을 만들어냈어요. 

그래서 구약성경의 계명을 613 개조로 규정하는가 하면, 
거기에 따르는 하부 조항을 수천 개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식사 전에는 무조건 손을 깨끗이 씻어라'
정결법이 율법에 나오지만, 그걸 확대 적용해서 수많은 시행규칙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스라엘에 가면, 극우파 유대인들은, 주일날 전기 스위치를 자기 손으로 안 켭니다.
그런 규정은 율법에 없지만, 자기들이 만들어낸 거죠.
목적은 선했을지 모르나, 그게 '사람들의 등에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행했는데,
사실 구약 율법에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 하라'는 규례가 나오지 않아요. 
자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면서, *아마 일출~일몰까지의 금식
마치 그것이 대단한 것인냥 뽐내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여러 가지 명령을 더 많이 만들어냈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에요. 
그건 지킬 필요가 없는 것들이에요. 자 근데 그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결국 사람들에게 점점 더 무거운 짐을 지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라고 말씀했을 때는, 
그 무거운 '종교적 짐, 전통의 짐, 형식적 율법준수의 짐'도 포함한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된 종교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수고와 짐을 더하시는 분이 아니셨죠. 
되려 예수님은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짐을 풀러주고, 쉬게 하십니다.

▲또한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사람들이 스스로 벗지 못하는 '죄짐'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짐진 자들을 어떻게 섬기셨고, 또한 그들에게 어떻게 쉼을 주셨죠? 

마20:28절에 나오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셔서 자신의 제자들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의 짐은,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최고로 무거운 짐인 거죠.
근데 그 죄짐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지요. 

여러분의 죄짐을 풀어놓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죗값을 다 치르셨다면
더 이상 여러분이 짊어져야 할 죄짐은 없음을 기억해 주세요. 

그 죄의 짐에서 벗어난 우리 모두는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과 안식을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렵고 힘들기만 한 삶이 아니라 
참된 쉼과 안식을 누리는 삶인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온유하고 겸손함이 넘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께 배울 때 
우리는 참된 쉼을 얻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러분 기독교인의 삶, 제자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 매는 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어떻게 할지 모를 때 있잖아요. 
그 순간순간 우리가 바라보고 배울 수 있는 선생님이 이제 생긴 거예요. 
그분이 누구예요? 바로 예수님이시죠. 
이것이 곧 기독교, 제자도의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만물 위에 군림하시는 만왕의 왕이시지만 
그와 동시에 그 누구보다 온유하시고, 친절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세요. 

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과 힘을 가지셨지만 
친절과 겸손을 보이시는 분이 우리의 선생님이 되셨기에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며 제자도의 길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학교 다닐 때 보면, 어떤 선생님은 명문대 나오고, 정말 똑똑하고, 능력이 출중해요. 
근데 너무 교만해서 따르기 싫은 선생님도 있어요.

어떤 선생님은, 너무 수학박사 예요. 못 푸는 문제가 하나도 없이 다 풀어내요.
그런 선생님이 '수포자'같은 학생을 바라보면서 '너는 그것도 못 하냐?' 하고 꾸지람하면,
학생은 (자기 잘못이 있지만) 그런 선생님을 따르고 싶지는 않죠.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선생님이 되세요. 
예수님은 모든 걸 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분이세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자란 모습을 보시면서, 엄하게 꾸짖으시는 분이 아니에요. 
온유하신 분이세요. 겸손하신 분이세요.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다 이해하시는 분이세요. 
그리고 참아주고 기다려 주시는 선생님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놓고 그 예수님께, 나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거죠.

▲여기서 '멍에'는 
바로 소 두 마리 등에 얹어서 밭을 가는 멍에다... 
이 멍에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같이 지시는 멍에이기 때문에 
나는 쉬운 멍에를 진다. 그럴수도 있겠지만, 

원래 '멍에'는, 물지게 질 때처럼, 양쪽에 균형을 맞춰서 지는 멍에를 뜻해요.
두 사람이 지는 멍에라기 보다는, 한 사람이 지는 멍에라는 거죠.

29절에서 '멍에'가 나오는 이유는, '예수님과 같이 진다'는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멍에가 있으면, 짐을 쉽게 진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한국 농부들도 다 지게를 졌습니다.
지게 자체의 무게도 상당하지만, 지게가 있으므로, 더 많은 짐을 쉽고 가볍게 질 수 있기 때문이죠.

팔레스틴 땅에도, 물지게처럼 양쪽 균형을 맞추는 멍에(나무막대기)가 있었다는 거죠.
(동남아에 가면, 나무 막대기 양쪽 끝에 달린 바구니에, 과일 등을 양쪽 균형을 맞취서 담고, 
그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운반하죠)
 
이 멍에를 왜 지냐면, 바로 이 멍에를 지면, 더 크고 무거운 짐을 쉽게 운반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멍에가 없으면, 무거운 짐을 내 어깨에만 지고 나르면... 더 힘든 거죠. 

그런데 그 무거운 짐을, 멍에 양쪽 끝에 매달고서, 균형을 맞춰서 가면,
더 큰 짐을 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멍에라는 거죠.

그래서 이 멍에는, 우리에게 더 큰 쉼과 안식을 주고, 
일을 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멍에'가 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29
'나 라는 멍에를 메라'는 뜻이죠.
'배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라는 뜻이고요.

그래서 설교 서두의 질문, '예수 믿는 것이, 제자로 사는 삶이 팍팍하고 힘듭니다'
왜냐면 예수님 자체가 '멍에'이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자체가 '멍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멍에가 있어야, 오히려 짐이 더 가벼워진다는 사실을요!

요즘에는 '멍에'를 안 쓰고, 대신에 손수레, 리어카를 씁니다.
그것 자체도 무게감이 상당하지만, 그것으로 더 많은 짐을 실어나르고,
짐을 가볍게 해 주기 때문이죠.

여러분, 혹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계십니까?
그 짐을 가볍게 하려면, '예수님의 멍에, 즉 예수님이란 멍에'를 먼저 지셔야 해요.
그러면, 그 짐이 훨씬 더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30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제자는,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겁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즐겁게 지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을
1. 주님이 나를 선택해주시고, 은혜로 주님을 알게 해 주신 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2. 우리의 모든 죄짐, 모든 율법주의적 외식의 짐을, 주님은 다 자유케 해 주심을 믿고 감사하며,
3.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 배우는.. 안식과 쉼을 누리는
제자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람 가운데 
편안한 삶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실 때는 
분명히 우리를 편안한 삶으로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이제 곧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데, 고난 주간만이 아니라, 
평생에 이 십자가 제자의 길을 기쁨으로 살아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그저 성경 몇 구절에, 내가 머리를 끄덕이고 동의했다고,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제자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하게 ‘복음의 도’를 자기 삶에서, 추구하고, 구현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와 교회가 착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제자의 삶을, 평소에 살지 못하면서, 아니 탐욕적 삶을 살면서 
자기가 교회에 다니고, 성경 구절 몇 가지(영생을 준다는)를 알고 있다고 해서, 
자기가 ‘영생을 얻은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