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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기도1

LNCK 2024. 3. 6. 18:21

https://www.youtube.com/watch?v=ErJxZTjs3Hg 정리

사도바울의 기도1     엡1:15~19, 약3:17       에베소서10강    -교정 예정-

엡1:15~19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본문에 앞서 엡1:1~14까지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향해 준비해 놓으신
풍성한 선물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6가지 선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것을 물려받은 대단하고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러한 존재인 것을 아십니까?

믿음은.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 하는 것을 알고서 믿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행하고/ 행하지 않고의 문제 이전이에요.

왜냐면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믿는 그 믿음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행동을 컨트롤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군지에 대한 아이덴티티(정체성)가 바뀌면, 
그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정말로 알게 되고, 믿게 되면
그 믿음에 걸맞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율법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계속 말씀하시죠.
왜냐면 율법은, 안에 있는 나의 아이덴티티를 바꾸는 게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는 나의 행동을 계속 규제하고, 바꾸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율법은, 별 소용 없습니다.
사람을 바꾸려고 하지만, 사람이 율법의 규제로 바뀌어지지 않을 뿐더러
사람을 더 정죄감으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 성령의 인도로 계명을 지킵니다)

그래서 진짜 복음의 변화는 뭐냐면, 내 안에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아, 나는 그냥 우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그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가운데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모든 것들을 물려받은 그런 상속자이구나' 하는 것을 정말 알고 믿게 될 때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게 본문 이전에 나오는 내용이고요. 1:1~13

오늘 살펴볼 1:15~19절까지는 사도바울의 기도문입니다. 

◑엡1: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모든 성도를 향한'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향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기도라는 거예요. 

자기가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고, 
누군가가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중보기도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가 들어올 때, 수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고, 수많은 선물들을 받게 되는데 

사실은 선물들을 받고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기도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1:1~14절까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 얼마나 어마어마한 선물을 준비해 놓으셨는가 
하는 것을 쭉 얘기하고 나서, 바로 이어서 말하는 것이 뭐냐면 
'성도들이 이 선물을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거예요. 

그래서 이 기도의 내용을 보면, 기도의 내용은 아주 명백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고 
이게 사실은 그 선물의 내용이었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 

-그리고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성도의 기업이 (성도가 물려받게 되는 유업이_ 얼마나 엄청난 지를 알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이게 뭐예요? 
사실 앞에서 살펴봤던 선물의 구체적인 내용들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1~14절까지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대단한 선물을 준비해 놓으셨는가'
'사람들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때 어떤 것들을 누리게 되는가?' 
하는 이야기들을 쭈욱 이야기하고 난 다음에 바로 기도합니다. 

뭐라고 기도하냐면 
'모든 성도들이 이것들을 알고 누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어떤 소망을 준비해 놓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유업을 우리에게 준비해 놓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능력을 우리에게 누리도록 하셨는지를, 
마음의 눈을 밝히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다 알고 누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이, 오늘 본문 1:15~1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1:16

여러분, 바울이 왜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할까요? 기도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바울이 얘기했던 1~14절까지의 이 선물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실 우리가 첫 시간에 살펴봤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래요. 

영어로 보면 spiritual blessing, 영적인 복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누려야 되고, 또 하나님께서 누리라고 주신 복들은, 
땅에 속한 어떤 육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라는 거예요. 영적인 복! 

그래서 이 영적인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적이어야만 영적인 복을 누릴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영적인 것을 누리기 위한 아주 중요한, 절대적인 유일한 방법과 조건은 뭐냐면 
'기도' 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요. 
기도가 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은, 절대로 영적인 것이 아니에요. 

모든 영적인 일들은, 항상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단계가 있는데, 그건 뭐냐면 기도예요. 
모든 영적인 일은, 기도라는 단계를 통과해서만, 그 일을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고
이 땅에서 우리가 알 수 있게 되지, 
'기도'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로 영적인 일을 
우리가 알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고전2:12~14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성경에 보면 아주 명확하게 못 박아 얘기했습니다. 
세상에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거예요.  2:12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
이게 에베소서에서 살펴봤던 '그리스도 안에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은 뭐냐면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해야 된다'는 거예요. 
'영적인 일은, 육신의 노력으로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충만하게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17
지혜와 계시의 영은 성령님 입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주십시오' 
여러분 삶 가운데 '지혜와 계시의 영'이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억하세요. 여러분 우리에겐 뭐가 필요하다고요? 기도가 필요해요. 
기도 없이는 절대로 이런 것(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들을 누릴 수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고,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돼요. 

이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거예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다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여러분들은 '독고다이' 아니에요?  *혼자서 결정하고 실행하는 사람

교회를 나오긴 하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고, 인사하는 사람도 없고, 혼자 신앙생활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이런 중보기도를 누릴 수가 없거든요. 

바울이 이 풍성한 선물들을 누리게 해달라고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 했는데, 
이 중보기도를 통해서 영적인 것들을 알고, 누리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여러분을 위해서도, 누군가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돼요. 
그것은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거예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 부탁하는 것도 이상한 거고, 
설령 그 부탁을 한다고 해도, 그가 들어주겠어요?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은 누구겠어요? 관계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15절에 보면 뭐라 그러냐면, 
'너희 믿음과 성도들의 사랑을 나도 듣고' 
바울이 이들과 계속 교제하는 가운데
이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계속 들었다는 거예요. 관계가 있었다는 거에요.

관계를 통해서 바울의 기도가 흘러갔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교제, 펠로우쉽을 통해서 기도가 계속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누리고 받게 되는 특권인 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으세요?'
있으시면 할렐루야 입니다. 
만약 없다면 빨리 관계들을 만드셔야 됩니다. 
빨리 관계들을 만드셔야, 하늘의 것들, 신령한 복들을 기도를 통해 누릴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디자인 하실 때 
아주 이렇게 얽히고 설키게 디자인 하셨어요. 무슨 얘기냐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있는데, 이것을 누리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계속 강화되고 누릴 수 있게 하셨어요.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설 때 
사람들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하셨어요.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는 
서로 얽히고 설키고, 얽히고 설켜서 서로 분리가 안 되는 거에요. 

이것을 억지로 분리하려고 해서 '난 사람들은 귀찮아, 그냥 하나님이 좋아!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상처만 되고, 힘들고... 그냥 나 혼자 믿을래' 
이렇게 할 수 없도록 디자인 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반드시 성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더 강화되도록 하셨고 
또 성도들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더욱더 강화되게 하셨어요. 

그래서 여러분, 반드시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바울의 기도 내용>

자 사도바울의 기도의 내용 1:17~19 에 대해서, 저희가 3회에 걸쳐서 살펴볼 텐데
이 기도의 내용은 크게 4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1)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고' :17
'마음의 눈을 밝히사 (아래) 세 가지를 보고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8~19
2)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십시오 
3) 성도가 받게 되는 그 유업이 얼마나 크고 영광된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4)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 알게 해 주십시오. 

이 네가지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간구 1: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
'계시'란,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신 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의 시작점은 뭐냐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스스로 내가 누군지도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내가 누군지 절대로 스스로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봤냐고요, 우주가 시작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냐고요? No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어요. 왜냐면 우리가 존재하기 전 얘기니까요. 
그래서 누군가 얘기해 주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세상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창조주가 누구신지, 
그리고 너희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건지... 이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계시'라는 것은, 기독교의 시작이 되는,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인데
이 계시에 대해서 오늘날은 이런 불필요한 논쟁들이 많아지면서 
계시를, '성경을 기록하는 것만 계시다' 라고 제한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그런 시도들이 있는데, 
그것은 조금 무리한 시도인 것 같아요. 

만약에 성경을 기록하는 것만을 '계시'라고 한다면, 
본문에 사도바울이 '모든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고'
이걸 어떻게 해석할 거예요? 

그러니까 좁은 의미의 계시는.. 성경을 기록한 거예요. 
그것은 초대교회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던 특별한 권한입니다. 
그런 좁은 의미의 계시는,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고, 
성경을 읽을 때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게 하는.. 
이렇게 성령께서 조명 하시는 역사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잖아요. 

만약 성령께서 이런 일들을 하시지 않으신다면,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우리 믿음의 시작이거든요. 

그럼 성령께서 '계시'하시는 일을 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단 말이에요. 아멘.

그래서 성령께서 하여간 계속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시는(계시하시는) 일들을 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은 '계시'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구하는 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충만케 하사' 
즉 성령께서 충만하게 일하셔서 
우리 (에베소 교인들) 안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이것을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7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시작점입니다. 

인간은 '내가 누군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절대로 스스로 알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육적으로도 알기 위해서 뭐가 필요해요? 
여러분 얼굴을 스스로 보신 적이 있으세요? 내가 내 얼굴 본 적은 없지요. 
그럼 거울을 통해서 보지요. 그래서 이것을 '거울 진리'라고 부르는데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먼저 알아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 (거울처럼) 나를 비춰 봤을 때, 내가 누군지를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칼빈은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 첫 부분 1장에서
'하나님을 알아야,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고 자세히 논증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구나' 이것을 알게 됐을 때 
'아~ 나는 하나님의 자녀구나' 
'아 하나님이 나를 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구나' 이걸 알게 된단 말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내가 누군지에 대한 걸, 아무리 연구해 봐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철학자들이 엉뚱한 얘기들을 하는 거죠)

놀이동산 같은데 가면 요술 거울이 있죠. 
오목거울, 볼록거울에 따라, 내 모습이 길게도 보이고, 짧고 굵게도 보입니다.

그래서 거울이 어떤 거울이냐에 따라서, 인간은 다른 이미지를 갖게 돼요. 
영적으로도 아주 비슷합니다. 

'알라의 거울'에 우리를 비춰보면, 사람은 어떤 존재예요? 
그 거울에 비춰보면, 우리는 나쁜 놈들이고, 가치 없는 자들이고, 죄인이고... 
이게 알라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선포예요. 

또 '불교나 부처의 거울'에 비춰보면, 우리는 어떤 존재예요? 
'우리는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시간 가운데,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부질없는 존재'가 되죠. 

'자연의 창'에 비춰보면, 사람은 어떤 존재예요? 
아메바에서 진화된, 다른 동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동물의 일종이에요. 
우리가 존귀해야 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거울'에 우리를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가장 존귀한 자녀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존엄성은요. 하나님께 비춰볼 때만 나오는 거 아십니까? 
이거 외에는 절대로 인간이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결론에 이를 수가 없어요. 
어떤 거울에 비춰봐도 그런 결론이 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셨다'라고 하는
이 위대한 성경의 계시 이외에는, 절대로 인간의 존엄성을 획득할 수가 없어요. 

저와 여러분은 존귀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래요.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예요. 
'지혜와 계시의 영이 충만할지어다!' 그래야만 이것을 알게 돼요. 
'아~ 내가 이런 존재구나. 아~ 내가 하나님의 소중한 자고, 존귀한 자구나! 
나는 세상에서 나를 뭐라고 평가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이미 소중하고, 이미 존귀하고,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구나!' 

이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충만할 때만 알게 되는 거예요. 아멘! 
이 영이 여러분께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혜
'지혜와 계시의 영' 속에 나오는 '지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이 지점 부터, 설교가 엡1:17~19절 주해에서, 약3:17~18절로 바뀝니다.

엡1장 본문의 '지혜'와, 약3:17절의 '지혜'를 매치 시켜서 주해합니다.

 

약3:17~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여기 보면, '위로부터 난 지혜'가 있다는 거예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다는 거예요. 

두 가지 종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늘의 지혜
-땅의 지혜

'땅의 지혜'는, 인간의 꾀, 묘수, 잔꾀, 잔머리..
하여간 인간이 노력해서 얻게 되는 그런 것들이 땅의 지혜죠. 

그런데 이런 땅의 지혜와 구별되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영이에요. 
그래서 지혜의 영이라 그랬어요. spirit of widsom 

여러분들 가운데, '땅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이 지혜가 충만해야 돼요. 

땅의 지혜가 충만한 사람은, 그 마침은 멸망이고 패망이에요. 
땅의 지혜가 충만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어디로 가는지를 우리가 요즘 보고 있잖아요. 
'대학원'에 갑니다. 밥도 그저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땅의 지혜가 충만한 것의 결과입니다. 

'땅의 지혜'는, 잠깐 동안은 우리를 좋게 만드는 것처럼,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잠깐 동안에는 더 많은 것들을 얻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 마침은 멸망이에요. 
절대로 땅의 지혜는, 여러분의 인생을 존귀한 자리로 올려주지 않습니다. 

땅의 지혜의 속성은 뭐냐면,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서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올라서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것을, 먼저 알고 탁 채가는 거죠. 이게 땅의 지혜의 속성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땅의 지혜는, 그 지혜를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원수들이 생겨요. 
'저 놈 봐라, 내가 하려는 것을 자기가 먼저 챙기네'

땅의 지혜는, 하면 할수록 그 결과로 원수들이 생겨요. 그래서 그 끝에 가면 멸망이라는 거죠. 

'하늘의 지혜'가 있으셔야 돼요. 위로부터 오는 지혜. 
하늘의 지혜는, 본문을 보면, '그게 왜 지혜야?' 이런 생각이 드신 분도 있을 거예요. 

약3:17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저도 젊었을 때는, 이게 왜 지혜인지 몰랐어요. 
내가 '하늘의 지혜' 라는 이 말씀을 아무리 결코 읽어도 
'지혜'라는 단어와 이 내용이 어떻게 매치가 되는지... 이해를 못 했어요.

제가 알고 있었던 '지혜'는 스마트하고, 똑똑하고, 총명하고.. 뭐 이런 것인데,
'성결하고, 화평하고, 오래 참고, 긍휼히 여기고, 거짓이 없고...' 이거는 좋은 것이긴 하지만,
이것들을 지혜라고 부르는 약3:17절 말씀을, 저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까, 제가 좀 더 성숙하고나서 보니까, 
이게 지혜가 맞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어요.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이 말씀에 감탄을 하게 돼요. '아 이게 참 지혜구나!' 

이렇게 살게 되면, 마지막에 여러분 어떻게 되냐면, 그 사람이 존귀해져요. 
이게 하늘로부터 온 지혜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의 속성은 뭐냐면,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게 아니에요. 
하늘로부터 온 지혜의 속성은, 다른 사람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성공하게 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같이 성공하게 되고, 함께 윈윈 하게 되죠. 이게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지혜의 영'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 중진, 고딩, 초딩들 잘 들으세요. 

'너희는 이 땅에서 머리만 좋다고 성공하는게 아니야. 하늘의 지혜가 있어야 돼!
그래야지 장처 너희들 인생이 성공할 수 있어!' 아멘! 

자, 하늘의 지혜의 특징들을 좀 살펴보려고 하는데 
약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서 3장에 나오는 '지혜'에 대한 말씀들을 쭉 요약해 보면, 
지혜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거룩하고 뭐 이런 것들이에요. 

1)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pure' 약3:17 
(성적인 순결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나 동기에 악함이 없음을 의미하며 
'거짓된 지혜'의 이기적인 동기와 대조를 이룹니다.  truly, certainly, surely, indeed

2) 둘째는 화평한 것입니다.  peaceable
화평, 관용, 선한 열매... 이와 같이 표현을 했는데, 다 비슷한 카테고리입니다. 

하늘로부터 난 지혜,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선한 지혜예요.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약3:17
꾀를 내서 누군가를 모함하고, 무너뜨리는 지혜가 아닙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특징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선한 지혜예요. 
그래서 이 지혜는 '화평케 한다' 그랬어요. 약3:17

약3:17, 18절에 보면 '화평'이란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거 아십니까? 
지혜는.. 화평케 한다는 거예요. 피스, 샬롬을 준다는 거예요. 

묘수는.. 묘수 같아 보이는데, 그 결과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갈라놓는 묘수, 
이거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니라는 거죠. 

'정말 기가 막힌 방법이야, 맞아 그렇게 하면 될 거 같아!' 
그런데 딱 한 가지 부작용이 염려되죠. '그러면 사람들이 분열될 것 같아!' 
이런 지혜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니라는 거죠.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징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갈라놓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면 위로부터 난 지혜 특징은 뭐예요? 그 결과가 화평케 하는 거예요. 
오히려 갈라졌던 사람도 다시 하나가 되게 하고, 
우리 안에도 샬롬이 있고, 이런 것들이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인가, 아니면 땅에 속한 지혜인가?' 잘 모르시겠거든 
그 결과를 보라는 거예요. 
'지혜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3:13

지혜는 결과로 말미암아 그것을 보여준다는 거예요. 
그 지혜를 사용한 결과가, 선한 결과들이냐 살펴보라는 거죠.
특별히 하나 되게 하는, 평화와 샬롬을 주는 결과가 있냐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지혜로운 것인지 잘 모르겠거든 
그냥 화평케 하는 길을 선택하세요. 그게 지혜입니다.   

'이 일을 추진했을 때, 나한테 무슨 유익이 될까?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일까?'
그게 애매하고 모를 때는 '화평케 되는 결과'를 고려해서 결정하라는 거죠.
그러면 지혜로운 선택이 된다는 거죠.

'야 이건 정말 기가 막힌 방법이야' 이런 생각이 들어도, 
그 결과가 사람들은 나누어지게 하고, 마음을 나눠지게 하고, 관계를 깨지게 하고, 이러는 거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 선택의 결과는 패망인 거죠.

그래서 만약 여러분들이 구체적으로 '셀에 있는 어떤 자매에게 이 얘기를 해줘야 돼, 말아야 돼?
이 얘기를 옮겨야 돼, 말아야 돼?' 막 고민이 되면, 
그 얘기를 옮겼을 때 무슨 결과가 생길지를, 제발 생각을 하시라는 거예요. 

이 얘기를 했을 때, 무슨 결과가 올지를 제발 생각을 하세요.
'이 얘기를 옮겼을 때, 첫째, 그 듣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평화가 있을까? 
아니면 그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인가?' 

물론 어떤 것들은, 그의 속을 뒤집어 놓더라도, 우리가 진리를 말해 줘야 될 때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이 말을 했을 때, 이 사람과 다른 사람의 관계가 깨지고 분열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하나가 될 것인가? ...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게 하늘로부터 난 지혜예요. 

뭐가 뭔지 잘 모르겠거든, 화평케 하는 길을 선택하라는 거예요. 
그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아마 젊은 사람들은 그게 왜 지혜인지 잘 모를 수도 있어요. 
저도 젊었을 때는 몰랐어요. 잘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근데 인생을 좀 길게 살아보면, 그게 (화평, 관용, 양순이) 왜 지혜인지를 알게 돼요. 
그게 결국 여러분들에게 복이 되는 길이에요.

3) 또한 위로부터 온 지혜는 셋째로 관용  gentle   약3:17

'관용하다'는 건, 너그럽고 오래 참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너그럽고 오래 참는 것이 지혜입니다. 아멘! 

여러분, 살다 보면 욱할 때가 있지요. 
'정의가 다 죽었냐? 내가 정의를 보여 주마!' 하면서, 욱하고 일어날 때가 있죠.

근데 여러분, 성경이 얘기하는 지혜는, 잘 잘 들으십시오. '관용'이라는 거예요. 
관용이 지혜라는 거예요. 

오래 참는 것이 여러분, 정말 지혜입니다. 
순간을 못 참아서 말을 뱉어 놓고, 후회한 적 여러분 정말 많지 않으세요? 
'조금만 더 참을 걸... 그때 그거 한 번만 더 참을 걸...'

욱해서 성질부려 놓고서, 나중에 '그때 그 성질만 안 부렸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그 욱하는 바람에, 사람도 잃고, 돈도 잃고, 기회도 잃고... 뭐 이런 적이 많을 거예요. 
'그때 한 번만 더 참을 걸.. 그때 한 번만 더 생각할 걸..'

그래서 여러분 하늘로부터 난 지혜의 특징은 뭐냐면 '오래 참는 관용' 이예요. 
너그러운 거예요. 

제가 50년 넘게 살았는데, 50년 넘게 살아보니까 관용이 지혜예요. 
오래 참고 너그럽게 처신하는게 지혜예요. 손해 보는게 지혜예요. 

여러분 조금 손해 보는 길을 계속 택하세요. 너그럽게 하세요. 
너무 야박하게 하지 말고, 조금도 손해 안 보려고 하면, 
나중에 결국 몇 배로 더 손해 봐요. 

성경은 관용 gentle 이 지혜라고 얘기합니다.   *에피에이케스
관용이 (도)덕이 아니고, 지혜라는 거에요.

딤전3:3, 딛3:2절에서, 바울은 '교회지도자의 자격은 관용 gentle' 이라고 말합니다. 
또 빌4:5절에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습니다. 관용은 덕목이기 이전에, 지혜라는 거예요. 
우리 인생의 최고의 선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너무 손해 안 보려고 아등바등 하지 마시고요. 좀 손해를 보세요. 
아 좀 넉넉하게 하세요. 할렐루야! 

예수님이 명하셨던 대로 '오리를 가자 그러면 십리를 가 주고'
'속옷 달라 그러면 겉옷까지 주고'
그러면 결국 그게 여러분에게 돌아봐요. 
지혜롭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남의 부족한 점을) 알아도 모른척 하고, 그러고 좀 넘어가 주시고요... 

△성격적 차이에서 오는 비판
MBTI 성격진단에 마지막 4번째 카테고리가
'인식형 Perceived' 과 '판단형 Judgmental' 으로 나눕니다.

인간은 이해(관용 Perceived) 과, 판단 Judgmental 의 양면성을 한 인격에 모두 가집니다.
그런데 7:3식으로 비판이 관용보다 더욱 발달된 사람은 ‘판단형’ 이고
반대로 이해나 관용이, 비판보다 8:2식으로 더 발달한 사람은 ‘인식형’ 이라 구분하죠.

무조건 비판을 잘 하는 사람은... 반대 기재인 관용심을 더욱 보완할 필요가 있고,
무조건 관용만 하는 사람은... 반대 기재인 비판심을 더 보완해야 합니다.

인식형은.. 자기나 남에 대해 좀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고,
판단형은.. 자기나 남에 대해 좀 더 수용적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성격은 타고난 것이라서,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기 성격의 '편향성(치우침)'을 인정하고,
자기 반대 기재인 성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게 내게 불편하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좀 더 성숙한 인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인도가운데요.

▲4. '양순하며' reasonable, considerate 약3:17
 헬라어 '유페이데스'는 '유'(좋게)와 '페이도'(순종하다)의 합성어로 
'말을 잘 들어주는, 이해를 잘 해주는, 유순한'을 의미하죠. 
이것은 교만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것과(14절) 대조되는 것으로 
위로 난 지혜는 하나님께 잘 순응하는 성품을 소유케 합니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언니 (펀 글)
이런 소리를 해도 좋을는지 모르지만 이해하시고 들어 주세요.
서울 중구 신당 동에 살 때, 우리 집(이 글의 저자) 바로 위에는
종로 3가에서 어느 한식집(요정)을 운영하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요정 사장이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기네 가게에는 많은 여 종업원들이 있었답니다.
외모가 예쁜 언니도 있고, 똑똑한 언니도 있고, 그저 그런 언니도 있었답니다.

손님들이란 보통은 예쁜 언니를 찾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월말에 월급을 주려고 계산을 해 보면,
예쁜 언니들 보다, 똑똑한 언니들보다,
그저 그렇고 그런 언니들의 월급이.. 더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더 많은 정도가 아니라, 훨씬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능력급인 모양이죠.
자기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참 이상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외모는 신통치 않은데도 많은 월급을 받아 가는 그 언니들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그 언니들은 손님들이 하는 말을 정성껏 잘 듣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할 소리, 안 할 소리, 별별 소리를 다 해도
그 언니들은 한결 같이 그 소리를 잘 듣고, 맞장구도 잘 치고,
상황에 맞게 착- 착- 응대를 잘 하더라는 것입니다.

손님들이 처음에는 잘 생긴 언니나 똑똑한 언니를 찾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 예쁜 언니, 똑똑한 언니보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언니들을 더 찾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외모는 별로지만, 찾는 손님이 많은
<말을 잘 들어주는 언니>들이 월급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5.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full of mercy and good fruits
'긍휼'과 '선한 열매'는 상관 관계를 갖습니다. 
'긍휼'은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자들을 실제로 도와 주는 마음자세로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게 됩니다. 2:13
이러한 긍휼을 드러낼 때, 그 결과로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7:17, 18

▲6.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without partiality, and without hypocrisy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새번역, 공동번역)

편견, 편벽은 한 쪽으로 쏠리는 거죠. (*요즘 좌우 이념에 한쪽으로 쏠리는 분이 많죠)

거짓된 지혜의 당을 만들고 구별하며, 자기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위로 난 지혜는, 편벽이나 위선이 없는 공평함과 신실함이 가득합니다.


마치는 말

이것이 하늘의 지혜예요.  
그런데 이런 지혜를 어떻게 가질 수 있다고요?
노력한다고요? 천만에요. 그렇게 가질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지혜의 영'이 임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으로 충만할 때.. 이런 위로부터 오는 신령한 지혜가 있게 된다는 거죠.

영적인 것은, 머리로 안다고 되는게 아니에요. 
알아도 실천이 안 돼요, 왜냐면 영적인 거니까! 

그래서 이런 영적인 것들은 언제만 가능하냐 하면, 
성령이 역사할 때만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지혜와 계시의 영이 충만하기를 기도한 거예요. 엡1:17
'너희는 그냥 지혜롭게 살아라' 이렇게 권면하지 않았고, 
먼저 '지혜의 영이 충만할지어다' 하고 바울이 이렇게 기도했던 이유는, 
그 기도를 통하여, 성도들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실 때,
그때 위의 모든 지혜들, 덕목들이 우리 삶에 열매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었죠!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