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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델비아 교회

LNCK 2024. 3. 7. 19:46

◈빌라델비아 교회     계3:7~14      2024.03.05. 설교녹취, 정리    계시록

 

오늘은 일곱 교회 중에, 여섯 번째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라'는 내용입니다.

 

교회들에게 메시지를 주지만, 이 교회들의 준 메시지의 마지막 결론은

'귀에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3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임을 기억하십시오.

 

빌라델비아 교회의 특징은,

서머나 교회와 함께 칭찬 받은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와 서머나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 칭찬받은 두 교회입니다.

다른 교회들도 칭찬을 받았지만, 책망도 동시에 받고,

그리고 이렇게 하라는 지시의 말씀을 들은 교회들이 대부분인데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받았습니다.

 

이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혼합적으로 섞여 있는 것 같아요.

그중에는 칭찬받는 교회가 있고, 그 중에는 책망 받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비율이 어느 정도 될까요? 계2~3장에 보니까 일곱 교회 중에 두 교회만 칭찬을 받았어요.

다섯 교회는 책망을 받은 교회들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2대 5의 비율로,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

칭찬받는 교회와 그리고 책망 받는 교회가 나누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칭찬받는 교회가 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정말 다섯 교회가 비난받고 책망 받는 교회였다면,

두 교회만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를 살펴보면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도 칭찬받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그런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같이 함께 상고하기를 원합니다.

 

◑도시 빌라델비아의 기원 및 특징

 

빌라델비아는 주전2세기, 버가모 왕 아탈루스 2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Attalus II

아탈루스는 자기 형 유메네스에 대한 형제 사랑이 각별했습니다. Eumenes

그래서 그의 별명이 “형제 사랑” 곧 빌라델비아였습니다.

 

아탈루스는 그의 형 유메네스가 헬라에서 암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자기의 형 유메네스를 대신해서 버가모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의 도시를 짓고 자기 형을 생각하며, 그 이름을 빌라델비아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죽었다던 그의 형이 뜻밖에 살아서 되돌아 왔습니다.

그 때 아탈루스의 신하들은, 형을 죽이고 왕위를 유지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아탈루스는 그러한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는 자기 형 유메네스에게 왕위를 고스란히 넘겨주었습니다.

 

▲도시 빌라델비아의 특징은 3가지 였습니다.

 

1) 빌라델비아는 지형적으로 “동방의 관문”(gateway to the East)이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그 당시 무시아, 루디아 그리고 브루기아의 세 지역이 서로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탈루스는 그 당시 꽃을 피우던 헬라문화를

동방 오지에 있는 성읍들에게 확산시키기 위해서

그곳에 빌라델비아라는 도시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는 “동방의 관문”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와 관련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 아래 설명

 

바로 이 열린 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 빌라델비아는 지질학적으로 지진이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화산 활동으로 인하여 종종 지진이 일어나던 곳이었습니다.

주후 17년에 있었던 대지진은 빌라델비아 도시 전체를 파괴해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도 빌라델비아에는 계속되는 여진이 있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집밖으로 뛰쳐나가야 했습니다.  :12절관련, 아래 설명

지붕과 벽에 자기 몸이 깔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에 있는 든든한 기둥이

되기 때문에 결코 다시 나가는 법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

 

3) 빌라델비아는 산업적으로 포도가 많이 생산되던 곳이었습니다.

빌라델비아 주변의 농토에는 많은 화산재가 쌓여 있어서

포도를 재배하기에 적합했습니다. 이와 관련 빌라델비아는

그 수호신으로서 술의 신 디오니수스(Dionysus)를 섬겼습니다.

빌라델비아가 그 수호신으로 술의 신을 섬겼으니까,

그들의 향락과 방탕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라델비아에는 이외에도 많은 신전들이 있었으며,

각종 종교적 행사들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는 “작은 아덴(아테네)”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아름답고 신실하며 충성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전혀 받지 않고, 예수님의 칭찬만 받았던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3:7a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본문 말씀은, 모든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 이 본문을 쓰신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1. 열린 문

 

3:7 '빌라델비아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라'

'사자(앙겔로스)'는 '천사 angel'란 뜻도 있지만, '메신저 messenger, 편지전달꾼'이란

뜻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전문) 편지전달꾼을 통해서 편지를 보내라'는 뜻이죠.

앞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믿을 만한 그 편지전달꾼에게, '편지하라'는 그를 통해 편지를 보내라.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할 말이 있다..

적용하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 빌라델비아 교회가 되기 원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7b~8a절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이 구절은, 이사야서 22장에서 인용된 구절입니다.

사22:1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20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1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히스기야 왕 때, 셉나 라는 대신이 있었어요.

그는 남유다의 국고를 맡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죠.

 

그런데 그가 국고를 횡령해서, 자기의 묘실을 부유하게 꾸미다가,

하나님께 호되게 꾸중과 책망을 듣습니다.

그리고 셉나가 갖고 있던 모든 권력을, 엘리야김에게 넘겨주겠다고.. 이사야가 예언합니다.

 

그런데 사22:21절에 보면, 엘리야김에 주겠다고 하신 권세가

다 메시아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 엘리야김이 ‘다윗의 열쇠’를 받습니다.

이때는 히스기야 때이고, 그 국고 창고는 다윗이 세웠나 봅니다. '다윗의 (창고의) 열쇠'

 

사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1차적, 문자적으로는, <왕궁의 보고의 열쇠를 맡았다>는 뜻, 재무장관이 되었다는 거죠.

 

본문 계3:7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요,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고 묘사하신 것은,

 

엘리야김 처럼, 예수님은

하늘의 보고를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권세를 가지셨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통해, 하늘의 모든 보화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엘리야김이 다윗의 집을 관리하는 열쇠를 소유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열쇠를 소유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와, 들어갈 수 없는 자를 결정하십니다.

 

한편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에 대한 해석으로 당시 빌라델비아의 정황을 반영합니다.

 

당시 빌라델비아에 많이 거주하였던 유대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다윗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였죠.

 

그러한 상황 속에 살던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계시한 것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선민 의식에 대한 반론이며,

그리스도 자신이 천국의 주권을 가진 메시야이심을 강조함으로써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위로하신 것입니다. 1:18

 

(적용) 지금 빌라델비아 교회의 현실은 작고 가난합니다. :8 '네가 적은 능력..'

그런데 하늘 창고의 보화를 가지신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하시고, 그들을 알아주고 계십니다.

 

<그 작은 빌라델비아 교회>와

<하늘 창고의 풍성함과 그 열쇠를 가지신 주님>이 대비됩니다.

 

쉽게 말하면, 열쇠(권한)를 가지신 주님이, 명령하시면,

모든 게 다 부여되고, 주어집니다.

물론 ‘영적인 보화’가 주로 우선이고, ‘물질적 보화’는 뒤따라올 수도 있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들에게 안 주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만약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주님은 아낌없이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창고의 열쇠를 갖고서, 열면 닫을 자가 없는 분이시기에!

 

▲'열린 문'은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요.

1)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열린 기회’라는 뜻입니다.

아래 구절들의 ‘문’이 그런 뜻이죠.

 

고전16:9절에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고후2:12절에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골4:3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위 구절에서 모두 '전도의 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침 우리가 '새생명의 축제' 선포식을 하는데, 오늘 본문 말씀과 우연히 일치하는군요.

 

우리가 정말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전도들,

그 사람은 정말 예수 믿기 힘들다고 생각되는

몇 번 해봤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들에게도

 

우리 주님께서 오늘 열린 문을 여시고, 전도할 문을 여시고

그에게 복음이 전화 전파되게 하시면 복음을 듣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그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문을 우리에게 여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믿음으로 여러분들이 태신자를 작정하시고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주님께서 문을 여셨으니 문을 닫을 자가 없다'는 그런 확신과 그런 굳은 믿음 가운데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2)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두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빌라델비아의 위치와 역사와 상관이 있어요.

그래서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열린문'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무슨 뜻인지를 금방 알았어요.

 

빌라델비아 도시가 위치해 있는 곳은, 골짜기(통행하기 쉬운 곳)의 끝에 있어서

반드시 빌라델비아를 지나야 동방으로 갈 수 있는,

(터키 중부에서) 유일한 통로가 되는 곳이었어요.

그곳이 바로 빌라델비아였습니다. 유일한 관문이었어요.

 

그 문을 통과해야 동방으로 가고,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해야 무역로가 열리고

그 문을 통과해야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바로 그 장소가 빌라델비아 였는데

이 빌라델비아의 '열린 문'이라고 말할 때,

이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다 알았어요.

 

빌라델비아의 문이 열리면서, 굉장히 많은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이 증거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 문을 사용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빌라델비아를 통해서,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 언어가

동방세계 각국(이란, 인도, 중앙아시아)으로 전파되고 그리고 동쪽으로 퍼져나간

그 유일한 관문이 빌라델피였습니다. 그런데 그 헬라 문화의 힘이 엄청났어요.

 

헬라어, 헬라철학, 헬라건축, 헬라 문물이 빌라델비아의 ‘열린 문’을 통해서

동방으로 전달되었기에, 그래서 그 도시의 ‘열린 문’을 통과하는 자들,

그 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헬라 문화의 파워와 힘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고 있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복음이 전파되는 문을 열었다'라고 말씀하세요.

'너희들은 힘이 없지만, 너희들은 정말 연약하지만,

너희들의 힘으로 그 복음이 힘있게 저편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빌라델비아에 있는 그 열린 문을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문화가 세상으로 전파되게 할 것이다’ 라고 주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빌라델비아의 ‘열린 문’을 통해서, (헬라문화처럼) 복음도 그렇게 활발히 전파될 것이다.

너희들의 힘 때문이 아니라, 내가 뒤에서 밀어주는 그 바람이

너희들로 하여금 그것을 경험하게 할 거야'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들은 약하지만, 우리 교회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우리가 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그 열린 문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뒤에서 힘있게 밀어주신다는 거죠.

 

빌라델비아를 통해서 그리스의 문화와 언어가 동방세계 각국으로 힘있게 퍼져 나간 것처럼,

오늘 우리들을 통해서, 우리가 ‘열린 문’의 축복을 받을 때,

복음이 가까운데 우리 가족들로부터 멀리 그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모두 증거되고

퍼져 나갈 것을 믿습니다.

 

그 영육간의 보화의 문을 열 수 있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만 '다윗의 (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문을 우리 주님께서 여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축복의 문을, 우리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귀한 시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열어 주시기만 하면, 세상에 닫을 존재가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궁극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구원의 문'입니다.

'다윗의 열쇠'는 다윗 왕국과 연결되어 있는데요.

다윗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메시아 왕국(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메시아 왕국은 우리 주님이 통치하시는 바로 그 천국, 하나님 나라이죠.

바로 그것 그것을 여는 열쇠가 우리 주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문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열리는 거예요.

그 구원의 문이 열리면서, 가장 최고의 보석, 최고의 보물이 하늘나라에 있는데

그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것,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여시는 열쇠요.

우리 주님께서 여시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여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은 ‘내가 (열린) 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성도인 우리는, 열린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는 출입을 하고 있으며,

또 주님이 ‘열린 문’, 복음의 문,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때,

아무도 닫을 자가 없을 줄 믿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3:8

 

 

◑2. 말씀을 지키며

 

3:8b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칭찬하신 내용입니다.

'적은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크란 에케이스 뒤나민'은 '능력이 거의 없다'는 의미로

그 지역에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신분이나 지위 등의 외적 능력이 변변치 못함을 나타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유대인들이 가하는 시련과 온갖 유혹 가운데서도(9절)

진리의 편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았음을, 주님은 칭찬하십니다.

 

이 도시가 비옥했지만, 포도가 많이 열리는 그런 땅을 가졌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빌라델비아에 있는 모든 포도원들의 절반은 포도나무를 뽑아버리고

거기에다 옥수수를 심으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표면적으로는 식량 대책에 관한 메시지였지만, 사실은 이탈리아의 포도주에

더 집중하도록, 타 지역의 포도주를 감산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은 지진이 있고, 지진의 여파가 있고,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기에 당국자들은 시민들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서

문화와 체육과 그리고 종교 축제가 굉장히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종교 축제는 신전에서 했을 것이고, 그리고 스포츠가 굉장히 발전해서

그곳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그 문화에 동참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스포츠에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신앙생활은 점점 힘들어지는 그런 상황들..

그런 상황들이 지금 빌라델비아의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빈번한 지진의 여파로 점점 어디에 견고히 서 있을 수 없는

그런 불안한 상태에, 경제는 치명적인 영향을 받았고

그리고 신앙생활 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는 굉장히 세속화로 흘러가는

이 상황에 있는 지금이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에게

 

어떻게 견고히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오늘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굳게 굳게 서 있을 수 있는가?

굳게 지킬 수 있는가?

이 말씀을 오늘 본문은 주고 있습니다.

이 내용이 :12 '너희를 성전 기둥이 되게 하겠다'로 이어집니다. '흔들리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죠.

 

우리들에게도 이것이 필요한 것이,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흔들리는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들이 경험한 것처럼

우리들의 경제나 우리들의 또는 육신이나 또는 우리들의 삶의 환경이나

우리들의 자녀들이나 우리들은 모든 삶의 상황이

이렇게 뒤흔들리는 날이,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처럼 흔들리는 날이 있을 것이기에

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8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들, 그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때

오늘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그 음성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지켰어요.

여기서 '지켰다'라는 단어는 '테레오' 라는 헬라어인데요.

 

이것은 ’말씀을 잘 순종해서 행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봤다 observe‘는 의미도 있습니다.

 

말씀을 순종하려면,

먼저 그 말씀을 주의 깊에 살펴봐야 하는 거죠.

건성으로 말씀을 보면, 말씀대로 행할 수 없게 되는 거죠.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았기에 (본문에 '지키며')

그 말씀이 자기 인생에 가이드가 되게 했다는 거예요.

'말씀을 깊이 상고했어요. 말씀을 주의깊게 보았어요. 그리고 말씀을 붙들었다.'

바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말씀을 상고하고,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네가 인내하게 될 것이다.

네가 정말 인내하고 있구나. 참고 견디는구나'라는 결론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10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고,

오늘도 들리는 이 말씀에 집중하며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면서 인내하게 될 것이고 :10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딤후1:14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이란 '복음'을 가리키고,

'지키라'는 본문 3:8절의 '지키며'와 똑같은 '테레오'입니다. observe

 

이 단어는 '말씀을 준행한다'는 뜻도 있고, '보호하고 지킨다 guard' 라는 뜻도 있지만,

'주의깊게 지켜본다, 돌본다 observe, take care of' 라는 뜻도 있습니다.

말씀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지키는 거죠.

 

우리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요? :8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집중하는, 붙드는' 데서 (테레오) 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어요.

오늘 이 말씀에 집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 필라델비아 성도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했던 모든 사람들,

 

이 본문이 쓰여질 때가 AD 96년경이지만 (AD 64년 로마 대화재로 시작된 핍박이)

AD 313년 기독교가 공인될 때까지 200년이 넘게, 그리스도인으로 너무너무 큰 핍박을 받았어요.

너무너무 잔인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인내할 수 있었어요.

 

그들은 견딜 수 있었어요. 그 핍박이 그렇게 극심했지만 그리스도인은 점점 더 늘어났고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주님을 찾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희들이 내 말을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이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거예요.

 

◑3.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3:9절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겠다 라고 말씀하시며

너를 핍박하는 자들, 너를 괴롭히는 자들, 그 사람들이

네 발 앞에서 너에게 전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세요.

 

사실 당시 크리스천들은 다른 이방인에게도 핍박을 받았지만,

유대인들에게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회당 중심의 공동체와 유대종교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았어요. 유대인들이 성도들을 자기들 회당에서 쫓아냈습니다.

유대인들이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에, 이들을 외부인 취급을 했어요.

 

우리가 잘 쓰는 말이 있죠. 인싸와 앗싸가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인사는 인사이더, 앗싸는 아웃사이더 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크리스천들은 아웃사이더 였습니다.

그래서 내쫓고 회당문을 닫아 버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사도바울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행21:30절에 보니까 사도 바울과 그 일행 때문에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하고

백성들이 달려와 모여서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고 그리고 성전 문을 닫아버렸어요.

 

그건 성전 밖으로 바울을 내쫓아버렸다는 의미죠.

그리고 혹시 성전에서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는 피흘림’이, 성전 안에서는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조치였죠.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성전 문’을 닫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문을 누가 여십니까?

예수님이 문을 여시는 분이잖아요. ‘열린 문’을 두시는 분이잖아요. :8

 

그리고 예수님이 닫힌 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문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다고 하시잖아요. :8

 

혹시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 ‘닫힌 문’처럼 보이는, 그런 환경에 처한 분들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여실 것이고,

문을 열고 닫으시는 주권은, 우리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몇 사람이 너희에게 와서, 너희(빌라델비아 교인)에게 절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어요.

 

성경에서 그런 사람들의 예를 찾아볼 수 있죠.

요셉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형들이, 사람들이 너무나 혹독하게 요셉을 괴롭혔지만

결국 그들은 요셉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당신은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하고 고백을 했지요.

 

이런 일들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거예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에 누군가로 인해서 마음 상하고

누군가를 위해서 괴롭고 누군가로 인해서 슬프고

누군가에 의해서 절망스러운 그런 순간에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가 다 이기게 해 줄게. 내가 문을 연다.

내가 문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리고 그들이 와서 네 앞에 무릎을 꿇고

네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지 고백하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9

 

세상에 네가 당하는 그 모든 고난과 고통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야!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유대인들은 본래 이방인들이 자신들에게 찾아와 굴복한다고 믿고 있었어요. (사45:14, 60:14)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믿는 바와는 반대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와 굴복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구약에 보면, 하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르드개를 핍박하다가,

결국은 모르드개가 탄 말을, 앞에서 시종처럼 말고삐를 잡고 끄는 수모를 당했지요.

결국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도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네 앞에 와서 절하게 하리라’ 이 말씀은 진리이고,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4. 성전 기둥이 되게 하리니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비그리스도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시험의 때'는 '면하게 하리니'와 상관관계 가운데 해석해야 합니다.

 

'면하게 하리니’

이 말은, 성도가 환난에서 떠나 보호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환란 면제설’은 성경 전체 맥락과 맞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 맥락은 ‘환란 통과설’이 맞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사단의 역사로 인한 고난(대환란 포함)은 받을지라도, 통과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는 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온 세상이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땅에 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교회를 대적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죠.

그렇기에 본절의 '시험할 때'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당하는 일반적인

환난의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때를 가리킵니다.

 

‘너를 시험에서 이기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과거를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별의별 시험에서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보호해 주셨구나.. 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 많은 사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지켜주시고,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보호하시고

내가 시험당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빌라델비아 지역은 지진이 많은 지역이라 그랬습니다.

지진이 나면, 사람들은 모두 건물 밖으로 나갑니다. 대피합니다.

건물이 무너지면 깔려서 죽거나 부상당하니까요.

 

그런데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니’

그 성전과 기둥이 너무 튼튼하기에,

혹시 지진이 나도.. 밖으로 나갈 일, 대피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고대 유적들을 봐도, 기둥들은 대거 남아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렇게 자신 스스로가 성전 기둥으로 굳게 버티고 서 있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좋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후에 이 시간 우리들에게까지

본문을 통해 그들의 영향을 계속해서 미치고 있습니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경기장에서 선수가 상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히12:1-4)

빌라델비아 교인들도 지속적으로 영적 무장을 통해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인내의 말씀을 지켜 승리해야 함을 시사합나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들 빌라델비아 교회는, 기둥 같은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개의 교회가 등장하지만 기둥 같은 교회는

이처럼 작지만 충성되게 자기 길을 간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마치 아시아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빌라델비아 (작은) 교회가 기둥이 되어 받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 성 프란시스가 중세를 받치던 기둥이었습니다.

 

그가 청빈과 선교 운동을 벌이고 이 운동에 대한 인준을 받기 위해서

로마 교황청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프란시스의 운동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교회의 인준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황청이 있는 성 요한 성당이 무너져가고 있는데

그것을 떠받치고 있던 사람이 바로 성 프란시스였습니다.

 

이 꿈을 꾼 후 교황은 성 프란시스의 운동을 허락합니다.

프란시스가 중세의 기둥이었습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전의 기둥은 가장 튼튼합니다. 지금도 성지 순례나 고대 유적들을 돌아보면

벽체나 건물 형태들은 다 사라지고 기둥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문화 유산 1호라는 파르테논 신전이란 곳도 가면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기둥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둥 같은 존재로 삶을 사람들은

바로 이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믿음을 변치 않고 충성하는 (:8) 사람들입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맡은 자리에게

기둥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기둥 같은 존재가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에도 기둥 같은 존재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에도 기둥 같은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갈2:9)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가 될 자 누구입니까?

 

▲마치는 말

오늘 이 ‘열린 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회의 문이 열리고, 축복의 문이 열리고, 전도의 문이 열리고, 하늘 나라의 문이 열리는...

그 열린 문!

 

결론적으로 그 열린 문의 모든 주권은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하는 것입니다.

모든 통치권은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의 통치권이 누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전도의 문이 누구에게 그 통치권이 있다고요?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한번 따라서 합시다. "예수님이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표가 찍히는 거예요.

그리고는 사람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그것이 오늘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주님 앞에 모일 때마다

우리가 해야하는 정말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들의 삶이 일주일 동안 살면서

평소에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 그 우리들의 시선이

일주일 동안 생활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각도가 틀어집니다. 벗어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조금 틀어지고 또 조금 틀어지고

또 오른쪽으로 틀어지는 가면 왼쪽으로도 틀어집니다.

자 그런 상태인 우리들이 교회에 와서, 오늘처럼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면서

그 틀어져 있는 그 각도를 누구에게로 옮기는 거예요? 누구에게로 재설정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로 초점을 재설정하는 거예요.

약간 왼쪽으로 틀어져 있던 우리들의 관점과 우리들의 생각과 우리들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 여러분들의 생활에 모든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집중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지 않는 그런 삶 흐트러진 삶

우리의 관점이 많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난 그런 삶을 살아가기 쉬워요.

 

왜냐면 사람들이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중에 굉장히 중요한 주제가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What(무엇) 이기 때문에, 그 ‘무엇’을 찾으면서 살아가요.

무엇을 가질까, 무엇을 얻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슨 집을 살까, 내가 무엇을 해야 될까?

 

그리고 그 무엇을 성취하고 도달하면,

곧바로 다음에 ‘또 무엇을 하지?’ 하면서, next what 을 찾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갑니다. ‘무엇 what’을 일평생 추구하죠.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절대로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해요.

그것으로 인해서 만족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왜냐하면 ‘무엇 what’은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만들어진 이유는, 대신에 ‘who 누구’를 찾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찾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누구를 찾느냐에 맞추어져서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 누구가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만이

자기 삶에 만족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누군가가 죽으면

'여보 최신 스마트폰 내가 한 번만 더 보고 죽을게 갖고 와 갖고 와'

‘새로 산 차 한 번 더 타고 보고 싶어’

‘새로 산 이태리제 소파에 한 번 앉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죽으면서 다 돌아가는 것이 어디입니까?

‘누구’이신 바로 예수님이시죠.

 

내가 일평생 ‘무엇 what’을 위해서 살았지만

내가 결국 돌아갈 곳은 ‘누구 who’ 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빌라델비아 교회 주신 메시지를 읽고 그리고 들으면서

우리의 시선이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집중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