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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7장 막16:7 2014.02.02. ☞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요즘 ‘제4차 로잔대회’가 가까움에 따라 ‘하나님의 선교 Mission Dei’라는 말이 부상하는데,
이 말은 20세기 후반부터 선교학계에서부터 쓰기 시작해서, 널리 퍼진 말입니다.
이 사상은, 과거와 같은 공간적, 양적 교세 확장적인 선교를 거부하고,
개인의 영혼구원 만을 최고로 삼는 선교가 아니라,
혹은 개교회 중심과 개교파 중심의 선교사상과 운동을 지양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교회의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로 대치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즉 ‘하나님의 선교’란, 영혼구원 사역 외에도, 창조질서의 보존(환경 보존), 사회적 책임 등
사회 전반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선교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이죠.
이런 흐름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있는데,
긍정적 평가는.. 마땅히 영혼 구원과 아울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와야 하므로, 기독교가 사회 전반적인 선교에 참여해야 된다는 입장이며,
부정적 평가는.. 그렇게 사회적 책임, 사회 참여에 집중하다 보니,
기독교 고유의 ‘영혼 구령’이 식어지고, 자유주의나 WCC처럼 흐를 수도 있다고 우려합니다.
그런데 뭐든지 일단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은, 건강한 시각이 아니라고 봅니다.
뭐든지 좋게 사용하면 좋은 것이고, 잘못 사용하면 잘못된 것이 되는 거죠. *돈, 밥처럼
아래 설교는 일찍부터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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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갈릴리교회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성경은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 중에도 16장이 우리 갈릴리교회의 정신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갈릴리교회라는 이름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6장을 근거로 해서
28년 전 교회를 개척 설립할 때 지어진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된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세 명의 여인이 예수님을 장사한 무덤에 향품을 넣기 위해 가니 무덤은 이미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부활하여 보이지 않고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그는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고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리에서 뵈오리라.” 막16:7
마가는 예수님은 부활하시자마자 갈릴리로 먼저 가셨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기록한 마가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가신 곳이 갈릴리이고,
제자들과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짧고 급한 메시지를 전하고, 마가복음을 서둘러 끝맺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성경의 막16:9~20절까지는,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원래 원본에는 막16:8절로 끝난다는 거죠.
신약성경의 사본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본은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시내산 사본입니다.
이 두 사본에는 마가복음 16잘 8절로 말씀을 끝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성경에 보면, 9절부터 끝까지는 괄호( )를 쳐놓은 것입니다.
후대에 삽입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원래 마가복음은 “갈릴리에서 만나자!”가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이미 가 계시니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급하고 간결한 메시지로 끝맺고 있습니다.
마가가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면서 마가복음을 마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가는 지금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시니 때문에
자신도 그곳에 급하게 가야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마가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갈릴리에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마가는 ‘종으로 오신 메시야’에게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고난받는 메시야, 섬김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찾아간 곳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섬김의 자리에 가 계시는 주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가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가는 거침없이 그리고 아주 단호하고 분명하게
갈릴리에서 만날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마가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고 한다면
종교의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갈릴리로 가야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마가는 지금도 주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서성이고 계신다고 은연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 아래에 우리 교회의 이름을 ‘갈릴리교회’라고 지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급하게 달려가신 그곳 갈릴리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겠다는 신앙고백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가치가 담겨진 이름입니다. 이 이름 속에는 2천년 전의 갈릴리가 아니라
오늘의 역사와 현장 속에서 갈릴리를 찾아가겠다는 선교적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을 “Mark 17, 마가복음 17장”이라 정했습니다.
우리교회가 처음 설립했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이 정신을 역사와 현장 속에서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성경에는 마가복음이 16장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주님께서 갈릴리로 찾아가시는 선교의 역사는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가가 쓴 마가복음은 16장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는 마가복음 17장은
오늘 우리가 오늘의 갈릴리에서 기록해야 할 역사요,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급하게 찾아가신 갈릴리라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종교적으로 접근했다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소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소를 참배하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이렇게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머무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교적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리적 정치적인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비교하면 갈릴리는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소외된 땅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빈정거렸습니다.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랴?”
촌구석에서 무슨 위대한 인물이 나오랴는 멸시함이, 당시 사람들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정치적 지리적 개념으로 예수님이 접근했다면 갈릴리로 가시지 않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경험적으로 접근하여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으니까 갈릴리에 가셨겠지’
하고 싶게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만 맞는 대답이고, 결정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갈릴리를 찾아가신 이유를 종교적으로 접근하고, 지리적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경험으로 접근하면.. 올바른 갈릴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학적으로 접근해야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자마자 갈릴리에 가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갈릴리는 물이 풍부한 곳이어서 곡창지대였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는 가난한 소작농들이 로마의 곡물을 조달하는 장소였습니다.
수탈의 현장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갈릴리에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가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목수로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사셨고,
가난한 자에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이 아니고는 위로를 받을 때가 없는 사람,
하나님이 아니고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하더라도
이 마음을 품고 살아야 갈릴리 예수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나눔이 있어야 갈릴리 성도요, 예수 안에서 가족 된 사람입니다.
▲바로 이 정신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28년 전에
구로동 노동자의 눈물이 가득한 곳에 갈릴리교회를 세웠습니다.
1) 닭장 같은 작업 현장에 갇혀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국내 노동자의 아픔을 보면서
‘바로 이곳이 갈릴리구나!’ 하면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2) 또한 이주노동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도 대변해 주는 사람 없고,
임금을 받지 못해도 누군가 말해 주는 사람이 없던 시절,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기계취급 받던 시절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저들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들의 아픔을 함께 고민하고 나누어 짊어졌습니다.
이주노동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연상하면서 말입니다.
3)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땅을 갈릴리로 여기고 달려갔습니다.
폴포트 정권이 지식인과 기능공 3백만 명을 학살한 어둠의 땅에 기술학교를 세워서
버림받은 땅 끝에서 저들에게 기술과 노동 정신을 가르치면서 미래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4) 베트남 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우리의 과오가 있는 그곳을 갈릴리라 생각하고
아무 연고 없는 농민들에게 ‘카우 뱅크’를 통해 희망의 송아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5) 어둠과 착취의 땅 아프리카 가나에 컴퓨터 학교를 세워
무지와 가난의 쇠사슬을 끊어가고 있습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흑인들의 눈물의 역사를 갈릴리라고 여겼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신대륙으로만 끌려간 흑인 노예가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노예 상인들이 몸이 아픈 흑인노예들을 바다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한 사람이
7백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곳을 갈릴리라 여기면서 아프리카까지 달려갔습니다.
6)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었고,
지금도 대치하고 있는 북녘 아이들을 우리의 갈릴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말을 하고,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고, 우리와 생김새가 똑같은 북녘의 아이들이
밥 한 그릇 때문에 눈물 흘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뛰어넘기 힘든 이념의 갈릴리가 북한이고,
상처의 갈릴리가 북한입니다.
우리가 북녘 아이들 5백명을 매일 우리의 식탁에 초대하는 하는 것은
인도주의적인 차원과 이념적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밥 한 그릇 때문에 눈물 흘리는 저곳을 갈릴리라 생각하고
주님이 먼저 찾아가실 것 같아 우리가 북한 어린이 돕기를 하고 있습니다.
7) 우리는 여기서 거치지 않고 생태계의 갈릴리를 찾아 몽골 사막으로 나갔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호수의 물이 말라가는데 심은 놓은 나무마저 베어냅니다.
오랜 유목 습관 때문에 나무를 심어놓으면 맹수들이 숨어서 가축을 공격한다고 생각하고
나무를 심어놓으면 목초지가 사라진다는 짧은 생각 때문에 나무를 베어냅니다.
그것은 악순환이 되어서 호수가 말라가고 먹을 물마저 고갈되어 가고 있고
사막의 황사는 서울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런 생태계의 악순환을 끊고자 몽골 땅 바양노르 호수에 나무 심기를 통해
아파하는 지구 생태계를 살리고 있습니다.
단순한 환경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기 위해
생태계의 갈릴리 몽골 사막에서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8) 1997년 말 IMF 구제금융 이후 듣도보고 못한 ‘노숙자’라는 신종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갈 곳이 없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구조조정으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라 여겼지만 자본주의 적응에 실패하고
경쟁사회에서 밀려난 가장들이, 이 추운 겨울에도 이슬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강도 만난 이웃으로 여기고
노숙자 쉼터를 통해 선교하고 있습니다.
9) 우리 사회에서 약자로 여기고 있는 독거노인들과 장애인들을
우리와 함께 사는 갈릴리 사람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사랑의 도시락 150개를 손수 만들어
아이들과 부모가 손을 잡고 택배서비스까지 하고 있습니다.
작년 연말 사랑의 도시락을 받고 있는 목동에 있는 장애우 형제집을 찾아갔습니다.
어릴 적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12살 차이나는 장애우 두 명과
보육원에 보모로 있던 권사님, 이렇게 세 분이 사는 보금자리였습니다.
나이가 다른 세 명의 말띠가 사는 집이었습니다. 37살, 49살, 61살
그중에 한 형제는 말을 잘못하지만 총명한 시인이었고,
한 형제는 말을 잘 하는 데, 지능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는 의사소통이 잘되었습니다.
저는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한 사람이 통역을 해주어야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형제들이 큰 걱정을 하더라구요.
‘갈릴리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새로운 목사가 부임한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받는 사랑의 도시락이 중단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교회가 이 사역을 계속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안심은 시켜드리면서 참 기뻤습니다.
‘사랑의 도시락을 받는 이웃이 이렇게 감사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발이 뒤틀려서 글씨도 쓸 수 없는 형제가, 입으로 컴퓨터 자판을 찍어서 시를 쓰는데
우리교회의 아름다운 미덕을 극동방송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꿈꾸는 새”라는 필명으로
우리 교우들을 향한 감사의 글을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언제나 말없이
주님의 큰사랑을
전하는 마음들이 있기에
세상은 또 하나의
천국을 그리네
언제나 그렇게
한 자리에서
조용히 천국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 땅은 새로운
희망이 되어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네
주님이 행하신
나눔을 이젠
작은 교회에서
실천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언제나 지켜보고 계시네!」
이런 아름다운 갈릴리 이야기를 사랑의 도시락을 받고 있는 장애우 형제가
세상을 향해 스토리텔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쓰고 있는 ‘Mark17, 마가복음 17장’의 선교 이야기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지상 명령을 사도행전 1장 중심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을 지리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미를 향해 뻗어나갔습니다.
이것은 서구 교회들과 오늘의 한국교회가 행하고 있는 일반적 선교 시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땅 끝을 지리적 공간적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회적 문화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선교를 감당해 왔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아니라 마가복음을 재해석하여 갈릴리를 찾아가는 선교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Mark 17. 마가복음 17장을 쓰는 갈릴리교회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과 소외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수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이 있는 곳이 바로 갈릴리이고, 바로 그곳이 땅 끝이고, 주님이 거기 계신다고 믿고
선교사역을 감당해왔습니다.
우리교회는 성도 수가 많은 교회도 아니요, 헌금도 많이 나오는 교회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만큼은 어느 교회도 부럽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촛대의 등불을 밝혔던 교회,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에베소교회를 보면
큰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만큼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우리교회가 크기와 헌금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선교 역사의 중심이 되는 교회입니다.
촛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였습니다.
우리교회는 이 갈릴리 선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산 50% 선교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갈릴리교회’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세계에서 헌금을 가장 값지고 보람 있게 사용하는 교회’입니다.
잘 사용할 뿐만 아니라 10원짜리 하나도 투명하게 사용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쓸 것 다 쓰고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아끼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선교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처음 오시는 분은 주보를 보면서 신통찮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보기에 좋은 칼라 주보 인쇄소에 맡기면, 무슨 재정으로 선교를 감당합니까?
우리교회는 버스도 운행하지 않고, 교회 차량도 봉고차 달랑 한 대 있습니다.
우리의 편리함을 다 누리고 나면, 어떤 재정으로 선교합니까?
우리 교회는 관리집사도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편리를 위해서 재정 사용하면 가난한 이웃에게 돌아갈 몫이 줄어집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면서도 이웃을 위해서 통 크게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시는 성도님들은 헌금의 종류가 굉장히 많다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는 십일조를 두 가지 형태로 드렸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입니다. 이것은 성전과 제사장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특별히 성전 봉사를 맡은 레위인은 땅 분배 때에 기업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위지파는 12지파 성도들이 드리는 십일조로 살도록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였습니다.
또 다른 십일조는 이웃을 향한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레위기 본문에 나타나듯이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해 밭모퉁이에 곡식은 거두지 말고 이삭도 줍지 말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신명기에는 매 3년에 한 번씩 특별 십일조를 드려서
가난한 자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만 기억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웃을 향한 십일조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이런 전통을 따라서
수입에서 드리는 십일조와, 지출에서 드리는 십일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소득이 생겼을 때 하나님의 분깃으로 십일조를 먼저 뗍니다.
그리고 지출 십일조는 쓰일 때마다 뗍니다.
우리 아이 교육시킬 때 북녘 땅에 아이 한 명 더 있다는 마음으로
북한 어린이 돕기, 전기와 자동차를 사용할 때 배출되는 CO2헌금,
일주일에 한 끼는 가난한 이웃을 식탁에 초청하는 마음으로 식료품비 아껴서 사랑의 도시락 헌금,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때에 베트남 송아지 헌금,
자녀들 등록금 내면서 이주 신학생돕기 헌금,
보너스 받는 달에는 직장 주신 것 감사하면서 노숙자를 위한 사랑의 징검다리헌금
이렇게 지출의 십일조를 드려서
이 땅에 갈릴리라 여겨지는 곳에, 갈릴리 사람들이라 여겨지는 곳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목회자들이 농담 삼아 ‘갈릴리교회는 갈릴리교회가 아니라 예루살렘교회’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당을 보거나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을 보면, 갈릴리 사람 같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교 실상과 매 주일 모이는 이주노동자교회를 사역을 보고나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 자체의 살림을 사는 것을 보면 ‘갈릴리교회가 맞구나!’ 말합니다.
우리교회는 우리를 위해서는 십원짜리 하나도 아끼는 교회지만
이웃을 위해서 아낌없이 사용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헌금도, 성도, 건물도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 여기고 갈릴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마치는 말
주님은 부활하시자마자 서둘러 갈릴리로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사회적 역사적 현장 갈릴리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곳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나고자하는 신앙고백으로 뭉쳐진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오늘의 갈릴리를 찾아서 Mark17, 마가복음 17장을 나눔과 섬김으로 써내려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