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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이 복음 안으로, 더 멀리 세상 속으로

LNCK 2024. 3. 8. 17:16

 

더 깊이 복음 안으로, 더 멀리 세상 속으로 - YouTube

 

◈더 깊이 복음 안으로, 더 멀리 세상 속으로       행1:1~11     2024.01.07.  

 

오늘부터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합니다. 
1년 52주 중에 교회력으로 따로 설교해야 되는 날 빼고, 40주일 계획이 나와 있습니다. 

전국에 많은 교회들이 같은 진도로 발맞추어 매주일 함께 합니다. 
cgntv에서는 이 계획에 맞춰서 매일 묵상을 내 보냅니다. 
국내외 훌륭한 목회자들이 나누어서, 돌아가면서 묵상 시간을 인도하십니다. 

TV에서, 또 유튜브에서, 또 '퐁당'이라는 기독교 ott 채널이 있습니다. 
핸드폰으로도 보실 수 있는데, 다양한 방법으로 묵상을 꼭 함께 챙기셔서 
함께 유익을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행한 일의 기록' 이라는 말입니다. 
1:1~2절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내가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승천까지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야기에 이어서, <교회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이죠. 

여러분, '교회의 이야기'는 언제나 '예수의 이야기'에 붙어 있어야 됩니다. 
교회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가 먼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예요. 

교회가 스스로 아무리 잘라도, 아무리 화려해도, 아무리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의 이야기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이야기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됩니다. 

때로 교회에 무성한 잎이 달리기도 하고,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뿌리가 땅에 닿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예수 이야기'라는 뿌리가 없으면, 
교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힘도 없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에 이어서 사도행전을 썼다는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가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다가 승천하시고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계속되는 이야기다.. 오늘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을 쓴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총체적 회복'

사도행전은, 예수님 때문에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정도 계셨는데, 
제자들과 계속 함께 계셨던 것은 아닌 거 같고요. 
간간이 나타나시면서 제자들과 교제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마지막 즈음의 이야기입니다. 
1:6~7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뭔가 결정적인 때가 다가왔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회복이, 이제야 일어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이 질문을 :6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그런 거 없어, 영혼의 구원이 중요하지, 개인전도가 중요하지, 
이스라엘 회복.. 그거 다 철이 지난 잘못된 이야기야!' 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면요.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묻는 이 제자들의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다. 버려야 될 기대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죠. 

대신에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되는 건 맞는데,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 맡겨 놓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7

사도행전 마지막 28장에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바울이 하는 말이 

행28: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그냥 나 혼자 스스로 잘 살 수 있는 내가, 
이렇게 죄수가 되어가면서까지 뭔가 노력하는 그 노력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다' 라는 거죠. 

여러분 행1장에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말이 나왔고요. 
행28장에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말이 나오는데, 같은 말입니다. 

▲‘회복’은, 여전히 우리가 기대해야 될 바입니다. 그런데 어떤 회복인가요? 

3: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여기 '회복'이란 말이 나오죠. '만물 회복하실 때까지' 
그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 그랬을 때 
'그거 아니야, 개인 구원이 답이야! 

 

그래서 이 세상은 불타서 없어지든 말든 그건 모르겠고, 
그냥 전도 열심히 해서 천국 가자는 이야기만 하면 끝이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만물의 회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라는 이 꿈의 크기를 확 줄여서 
'개인 구원'에만 집중하자는게 아니고요. 
반대로 훨씬 확장해서 '만물의 회복'으로 키워야 되고, 시야를 넓혀야 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해서 이루고자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만 잘 사는 것 아니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2~3

'너로 말미암아' 
이것은 '너를 통하여' 라는 말입니다. through you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그로 인해 만들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목적은,
'너희들만 복 받아라'가 아니고 
'너희들을 통해서 온 세계 모든 민족을, 세계 역사 전체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큰 구원계획 안에서 부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회복하시는 전체 과정이 '구원'이고,
이 회복이 '미시오데이, 하나님의 선교'죠. Mission Dei, Mission of God 의 라틴어, 신학용어

우리는 인간들은 생각이 좁고, 시야가 좋습니다. 
그래서 늘 이쪽 하나를 강조하면, 저쪽 반대편을 놓치구요. 
저기에 집중하면, 이걸 소홀히 하게 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자'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인데, 
거기에 시야가 한정된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은 개인전도에 집중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 변혁을 강조하고... 다른 걸 놓쳐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십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이 모두를 다 포괄하는 거예요. 
사도행전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선교, 총체적 회복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요? 


1) 개인 구원

행2:38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한 영혼이 회개하고 회심하여 주께로 돌아오는 개인 구원..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고, 

2) 질병 치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하는 질병의 치유,  3:6

3) 경제적, 사회적 회복 
‘믿는 우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라고 하는 경제적인 회복  

4) 도시의 회복, 변화
또 에베소 도시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19:18~19

사회에서 '미신이 타파' 되는 거예요. 
한 사회의 문화가, 악의 영들이 떠나가고, 사회와 문화가 새롭게 되는 거예요. 
이런 사회의 총체적인 변혁과 회복이 가능하고, 오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게 여러분 복음이고 회복입니다.
이 모든 회복, 전체 변화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악이 정복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악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고약한 악이 무엇입니까? 
그건 사망이죠. 사망! 

여러분 죽음, 사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에요. 
본래는 생명으로 충만해야 할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히는 나쁜 세력입니다. 
부활은, 그 사망이 정복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물의 회복의 출발점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만물의 회복을 향해 가는 힘찬 행진, 새 역사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 생명이 시작되었다.. 이 일에 증인이 되라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 되었다'라고 말하는데요. 
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내 증인'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저기 어느 동네에 어떤 훌륭한 사람이 살았는데, 
모함을 받아서 억울하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대요.. 라고 하는 
한 개인의 고립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물을 회복하시는 새로운 역사를,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시작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회복이, 지금 21세기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다는, 현재의 이야기라는 게 
복음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이 복음이 들어가는 모든 곳에는.. 회복이 일어납니다. 

물론 모든 것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행3:21
이 말은 아직 회복 안 된 부분이 남아 있을 거라는 말이죠. 

그러나 분명히 새창조는 이미 시작되었고, 
역사는 예수의 부활을 기점으로 그 회복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병고침을 비롯해서, 죽은 자도 살아나고요, 많은 기적이 나오는데 
성경 이거를 '표적'이라고 해요. 영어로 사인이란 말이에요. *세메이온

표적이란, 병고침 자체보다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이 세상이 회복되고 있다는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싸인 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날도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회복이 일어납니다. 
다양한 회복,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필요한 회복은, 어디든지 언제나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 병고침으로 회복이 일어납니다. 
-때로 자존감의 회복으로 일어납니다. 
 위축되어 살던 사람들이 '나도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건강한 자의식이 생기는 거죠.

-가정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한 도시를 사로잡는 죽음의 타락한 문화가 극복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해가 일어나는 거예요. 
유대인들과 로마군인들은, 서로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근데 이 사람들이 같이 한솥 밥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같은 꿈을 꾸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동일한 화해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가능한 줄 믿습니다. 
동일한 회복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가능한 줄 믿습니다. 

왜냐면 사도행전 당시의 역사하시던 하나님의 성령이 
오늘 우리 가운데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금년 한해 사도행전 말씀 듣는 가운데서 
우리 교회에서, 또 한국에 많은 교회들에서, 이 사도행전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회복이 일어날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회복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 모든 회복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물론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 일을 위한 <복음 전파의 역사>예요.  *전통적 선교방향

◑승천

오늘 본문 말씀에 두드러진 주제는 '승천'이죠. 
근데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승천'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잘 나오지 않아요. 

사복음서 가운데, 승천을 구체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복음서는 누가복음 뿐입니다. 
이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에 비하면, 덜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복음서가 중요하게 다루잖아요. 
'승천'은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집중해서 
'성경이 왜 '승천'을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사도행전, 줄여서 '누가행전'이 승천을 말하는 이유는 조금 다른데 있습니다.
히브리서와는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승천과 재림을 말할 때, 주로 '구름 타고 오신다'고 그러잖아요. 

어떤 교회학교 어린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죠? 그럼 구름에서 여기 지상까지는 뭐 타고 오세요?' 
구름은 300M 이상 높이 떠 있잖아요. 그래서 나름 과학적인 질문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구름은, 예수님이 교통 수단이 필요해서, 
헬기처럼 이용하시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름이 없이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인간이 표현하기 힘든,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 구름 타고 올라가셨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실까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9 

위 구절에 '구름 타고 올라가셨나요?' 그런 말은 안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냥 승천하신 거 같아요. 구름하고 상관없이! 
예수님이 높이 올라가시니까, 이제 구름이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된 거지, 
구름 타고 승천하신 게 아닙니다. 구름이 무슨 승천 수단이 아니에요.

그냥 예수님이 올라가셨는데, 구름이 있으니까 그 모습이 안 보이더라.. 
하는 아주 평범한 묘사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이,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승천을 보도는 하지만, 
이걸 구체적으로, 더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고대의 문서들은, 유대교 문서나, 비유대교 문서나 
승천 혹은 비슷한 장면이 나오면, 굉장히 요란하게, 화려하게, 웅장하게 묘사합니다. 

구약의 엘리야의 승천을 봐도, 많이 요.란하진 않지만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니라' 왕하2:11 

엄청 멋진 모습이죠. 
여러분 뭐 컴퓨터 그래픽을 하든지, 이걸 영화로 만들려면 돈 좀 들 것 같아요. 
불수레에 불말을 표현해야 되니까요. 

근데 엘리야에 비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우리 생각에는 불수레와 불말이 한 1천대는 와야 될 것 같아요.
천군천사의 수 십 군단을 동원해야 될 것 같아요.

근데 예수님의 승천에는, 그런 화려한 묘사가 전혀 없어요. 
여러분, 사람이 중력을 이기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특이한 건데, 
사도행전은 그것을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부러 담담하게, 아주 건조하게 드라이하게 기록합니다. 
왜 그럴까요? 

1:11절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 
'주목하느냐' 이 말입니다. 
하늘을 주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천사는 '하늘을 왜 쳐다보느냐?' 무슨 말이에요? 어디를 보란 말입니까 
'땅끝까지 가라' 그러셨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하늘이 아니고 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어야 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에 대한 오해는, 하늘에 대한 지나친 관심입니다.  
세간의 그런 사람들을 일부 있잖아요. 
'내가 뭐 하늘에 가봤는데, 뭐 방이 몇 개 있고, 맨션이 있고...'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하늘을 보지 마라' 그러셨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승천',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면 너무너무 중요한 사건 같은데,
세 복음서가 승천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것, 그 이유는 뭘까요? 

겨우 보도하고 있는 누가복음, 사도행전도.. 굉장히 간단하게 드라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승천 자체를 스펙터클하게, 매우 거창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성경은 전혀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라는 말입니다.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어디가 중요해요? 하늘이 아니라 지금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하늘도 거기에 따를 것이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땅에서 소수의 인원이 모여서 기도하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면 하늘이 (그 땅의 성도들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물론 하늘의 차원이 중요해요. 
근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우선적인 관심은,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될 일에 있다는 겁니다. 
복음 전파가 뭐예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한다는 거예요.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러분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역시 땅의 평화, 땅에 대한 관심, 땅 끝을 강조합니다.

◑이 땅에 관심가진 '하나님의 선교'의 예

▲여러분, 행1:8절의 '땅 끝'이, 오늘날은 어디입니까? 
2천년 전 당시 사람들에게는 스페인 일 수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스페인이 땅끝입니다?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 보세요. 
그렇다면 영국은 어디죠? 

땅끝은 이디오피아 일수도 있고, 흑해 너머 러시아, 조지아가 땅끝일수도 있습니다.
지중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상을 볼 때는 그렇겠죠. (그 지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

중요한 것은, 
'땅끝으로 간다'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낯선 땅을 밟고, 
낯선 사람과 대화하고, 낯선 문화를 마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은, 
그 땅이 주님의 땅임을,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땅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스페인이든, 에티오피아든, 흑해든, 어디든 갈 수 있고 
이거는요 우리가 오늘 해석하기에 갈 수 있는 한, 내 능력의 최대치까지 가고, 
그 너머까지 가는 거예요. 

그런 찬송이 있습니다. '땅끝에서 주님을 만나리' 
내가 최선을 다해서 갈 수 있는만큼 가는 거예요. 그게 나의 '땅끝'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능력, '내 인생은 여기까지요.'
'요 정도는 감당하겠어' 그 끝까지 가고, 거기서도 바운더리를 넘어서는게 
땅끝을 향하는 정신입니다. 

▲여러분 과학의 발전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과학의 발전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영역에 발을 디뎠던 것입니다. 

여러분, 종두법을 발명한 제너 아시죠?
처음 백신을 발견했던 의사입니다.
아무도 임상실험을 안 도와줘서, 자기 애기한테 처음 백신을 맞춰 가지고 
그래서 세상에 천연두 백신이 나온 겁니다. 낯선 땅을 밟는 거예요. 

크리스천 학자들이 과감하게 상상하고, 담대하게 시도하고, 실험하고, 
그래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가서, 
그 땅에서 하나님을 고백하고 증거하는 것이, 그러면서 인류에 기여하는 것이 
그게 바로 '땅끝'으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교' 개념

같은 원리로 사업가들의 '땅 끝'이 있을 것입니다. 
창조적으로 사업을 구상하고,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사업모델을 창출하고, 
가치를 실현하고, 그래서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거예요. 

문화예술가들에게도 땅끝이 있습니다. cultural mandate
여러분, 한국 지금 대중문화가 되게 많이 발달했다 하는데 
크리스찬 문화는 굉장히 빈약합니다. 
우리 마인드 자체가 너무 위축되어 있고, 보수적이어서 그렇습니다. 

본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보다 더 창조적일 수 있습니다. 
땅끝을 넘어가는 거예요. 

이전에 안 했던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증거하고, 
그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 예술이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야 됩니다. 
그게 문화예술인의 땅끝인 겁니다. 

여러분 '땅끝'이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진취적이 되고 창조적이 됩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것을 포용할 수 있는, 포용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한국에도 땅끝이 있죠. 전남 해남에 가면 땅끝마을이 있습니다. 
부산 영도에 가면 '땅끝 교회'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보면, 지구 반대 대척점 칠레가 땅끝이라고 하죠. 
혹은 아마존의 깊은 밀림, 아프리카 오지, 네팔의 히말라야 어귀의 어떤 마을이 
그런 '땅끝'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진짜 땅끝은 북한입니다. 가장 멀잖아요. 
독일도 가고, 히말라야도 가고, 멕시코도 가고, 러시아도 가는데.. 북한은 못가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옆집이 땅끝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죠. 
'절대로 꼴보기 싫어' 하는 그 집이 땅끝일 수도 있죠. 
어쩌면 오래도록 등지고 사는 형제끼리, 땅끝에 있을 수도 있죠.
'부부 사이'라고 말하려고 하니까, 너무 슬프네요. 

이 세상에서 나하고 가장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내 배우자라면,
그 집은 바벨탑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성령이 임하시면 소통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말이 통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은혜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이 주는 꿈, '만물의 회복'

▲말이 통하기 시작하고, 마음이 통할뿐 아니라, 같은 꿈을 꾸게 됩니다. 
여러분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땅끝으로 같이 나아가게 되는 거죠)

아내와 남편이 같은 꿈을 꿀 때. 
여러분 자녀와 부모가 말이 통할뿐 아니라, 같은 말을 할뿐 아니라, 
함께 같은 꿈을 꾸고 달려 나간다면요, 여러분 가정이 정말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엄청난 복을 받을 것입니다. 

기업도 그래요. 여기 포항제철에서 평생 보내신 분들이 많은데 
생각해 보세요. 포항제철의 최고 전성기가 언제였습니까? 

나라 경제가 좋을 때? 
정권이 팍팍 밀어줄 때?
아니에요. 모든 직원들이 같은 꿈을 꿀 때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밖에서 밀어줘도, 그걸로는 부족해요. 
모든 임직원이 같은 꿈을 꾸고, 그 꿈에 헌신할 수 있다면, 
그때가 그 기업의 전성기입니다. 가정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힘들다. 큰일났다' 그러는데요. 왜 힘듭니까? 
지금은 대한민국 역사상, 한반도 역사상, 
잘 살 수 있는 조건을 정말 제대로 갖춘 유일한 시기입니다. 

단군 이래 국운이 웅비할 조건을 오늘날 같이 갖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들 '힘들다. 큰일났다' 그러는 거죠? 

여러분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백성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으면.. 잘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온 국민이, 온 민족이 한 꿈을 함께 꾸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여러분,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인이 같은 꿈을 꾸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한국과 일본이 같은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같은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중국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중국몽, 중국의 꿈을 실현하자!' 
여러분 그 꿈이 실현되면, 다른 나라에도 좋을까요? 인류 평화에 도움이 될까요? 

미국과 중국이 같은 꿈을 꾸고, 인류 평화를 위해 손잡는게 가능할까요? 
여러분 우리 시대에 가장 심각한 질문이고, 
이것이 바로 성경의 복음이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만물의 회복'을 향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은요. 이스라엘 나라만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만물이 회복되는 역사를 향해서 나아가는 거예요

이 하나님 백성의 역할을, 이제는 육체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인 신약교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라고 하는게 사도행전이에요.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만물의 회복을 향해서, 오늘날 세상 역사가 나아갑니다. 
그 출발 step one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에요. 
그 다음 step two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3

즉 예수를 아는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 안에서라도 
당장 세계 만물이 회복이 안 되어도, 
그 교회 안에서 먼저 같은 말을 하고, 마음이 통하고, 같은 꿈을 꾸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헌신하고 달려가는 거예요. 

사도행전은 이 희망의 이야기, 이 희망적 공동체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여러분 '땅끝까지 갈 수 있다'라는 것은
<복음의 보편성>을 전제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가서 줄 것이 있어야 돼요. 

만약에 내가 여기서 멋진 농사 기술을 개발해서, 저 멀리 남미로, 아프리카로 간다고 하십시다. 
근데 거기로 가면, 이 농사 기술이 그 땅에서 통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이 기후에서, 이 토양에서는 안 돼' 그러면 갈 필요 없어요. 

한국에서 어떤 성공한 기업의 모델이 있어요. 
그러면 '몽골이나 카자흐스탄에 가서 해보자' 합니다. 

'아이고, 한국에서는 그 기업 모델이 성공했을런지 모르나,
이 나라 사람들, 이곳 문화에서는 그게 안 돼' 그러면 갈 필요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간다는 것은, 거기서 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복음이면, 여기서 기쁜 소식이면, 
거기 땅끝에서도 기쁜 소식인 줄 믿습니다. '복음의 보편성'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복음이면, 
아프리카에서도, 히말라야에서도, 아마존에서도, 
그 어떤 굳게 닫힌 공산국가에서도 복음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선교가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140년 전에, 우리 한국 땅까지, 미국과 영국과 호주에서 선교사님들이 오신 것 아닙니까. 

예수 믿고 예배하는 것, 크리스천 라이프를 사는 것, 
'그거는 우리 영국, 미국사람에게는 맞는 거지, 저 조선 땅 거기 사람들에게는 안 먹혀요.
거기는 문화가 달라요. 토양이 달라요.' 만약 그랬다면 복음이 오지 않았겠죠. 

그런데 조선 땅에 복음이 왜 왔습니까? 그 선교사들이 모험을 좋아해서 온 거 아니에요. 
한국에 대해서 뭐 대단히 잘 알아서 온 거 아니에요. 
조상 때부터 무슨 인연이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그 선교사님들은 조선에 아무 연고도 없잖아요. 
지역 (고향) 연고도 없고, 말도 안 통하고, 핏줄 하나 안 섞이고, 
음식도 입에 안 맞고... 그런데 왔잖아요. 와서 일생을 바쳤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에요. 

이것만 봐도 여러분, 세상에 소망은, 정치에 있지 않습니다.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줄 믿습니다. 

십자가의 그 사랑, 부활의 생명의 능력,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저 땅끝에 아프리카, 또는 아마존의 사람들도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복음, 하나님 사랑의 그 기쁜 소식은, 
그 땅에서도 삶의 해답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복음의 중심이 없으면, 땅 끝까지 가는 것은 별 의미 없습니다
'가자, 흩어지는 교회 되자!' 좋아요. 

'그런데 가서 뭐 할 건데요?' 가서 줄게 없어요. 
물론 돈을 가지고 가서 나눠줄 수 있겠지만, 좋은 일 할 수 있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해요. 

그래서 선교를 말할수록, 땅끝으로 멀리 가자 할수록, 
우리에게 복음의 중심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사람이 돼야 됩니다. 

올 한해 우리교회 주제는 '더 깊이 복음 안으로, 더 멀리 세상 속으로!' 입니다. 
더 멀리 세상으로 세상 구석구석에 모든 영역에 가기 위해서는요. 
우리가 더 깊이 복음 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나가는 선교가 중요할수록, 모이는 교회,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겨서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는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중심이 든든해야 확장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몇 년간 코로나 이후에, 한국교회의 최고의 시련과 도전이 바로 이겁니다. 
원심력이 커지는 거예요. 

교회 안와도 유튜브로 예배드려요. 편하고 좋죠. 그게 습관이 되어 가지고
이제 막 주일 예배도 쉽게 빠지고 다녀요. 

수십 년 평생동안 신앙생활하면서, 한 번도 주일 예배 안 빠졌던 사람들이 
코로나 지나고 나니까, '리조트에 가서 유튜브로 예배 드리지 뭐' 합니다.

이게 여러분 우리 신앙의 위기입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그렇게 반듯하게 주일 성수를 해도
이 신앙이 자녀들에게 내려갈까 하는데,
그런데 벌써 이렇게 흐트러지면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심력과 원심력 사이에 늘 균형이 있어야 됩니다. 
멀리 나가는 거 좋아요. 
우리 예배의 방법과 처소가 다양해지는 거 정말 좋습니다. 어디서든 예배할 수 있죠. 

그러나 그럴수록 구심력이 없으면요. 우리의 신앙은 산산이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복음의 중심이 확고해야, 우리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일에 주목해야 되지만, 
그럴수록 천국 열쇠, 하늘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의 도전을 받을수록, 
세상에 할 일이 눈에 많이 보일수록,     *이상 원심력
더욱 예수 중심, 말씀 중심으로 기도하며 살아야 됩니다.  *구심력

그러한 복음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멋지게 사용하시는지 
세상에 보여주는 우리 모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