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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를 主로 섬기며 살라 (골16강)

LNCK 2024. 3. 9. 09:00

2022-08-14 주일예배 // 그리스도 예수를 主로 섬기며 살라 - YouTube

◈그리스도 예수를 主로 섬기며 살라      골3:15~17        2022-08-14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3: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근데 우리가 성경을 좀 읽다 보면, 가끔씩 조금 혼란이 생기는 것은
'평강'이 어떤 구절에는 '평화'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고, 
또 요한복음 같은 데는 '평안'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한글은 평강, 평화, 평안으로 각각 다르게 번역했지만,
헬라어 단어는 똑같이 '에이레네' 입니다. 평강, 평화, 평안은 다 같은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은혜와 평강'은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때,
그 결과로 우리가 가지게 되는게 무엇이냐? '평강, 에이레네'를 가지게 됩니다. 

근데 이 평강은, 구약성경으로 하면 '샬롬'입니다. 
성경에서 평화는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누리기를 원하시는 가장 온전하고 복된 상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의 가장 온전하고, 조화롭고, 풍성한 상태'가 바로 평화, 평강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15 
그런데 여기서 '주장하게 하라'는 말은, 성경에서 드물게 사용되는 표현인데 
어디에 사용되는가 하면, 운동 경기에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축구를 한번 생각해 보시죠. 축구하면 선수들이 격렬하게 경기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심판이 꼭 있어야 됩니다.
심판이 없으면 축구장은 난장판이 될 겁니다. 

요즘 교회마다 체육대회가 많이 사라진 이유가, 워낙 서로 싸우니까요. 
교회 체육대회에는 심판의 권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잘 싸우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심판이 없으면, 축구를 포함해서 정말 모든 운동경기는 잘못하면 난장판이 되죠.

그래서 심판의 역할이 아주 큽니다. 
바로 운동 경기의 모든 갈등들을 잘 조정해 가지고, 
룰에 부합되면 허락하고, 룰에 어긋나게 되면, 그것을 중단시키고 패널티를 주게 되죠. 

본문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는 말은 
'평강이 심판(레프리)이 되게 해라'라는 뜻입니다. 

심판 Referee 은, 해야 될 행동과, 하지 말아야 될 행동을 잘 구분해 줘서 
모든 것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마음에도,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 행동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지금 우리 속에도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데,
이 싸움에 심판이 무엇이 되게 해야 되느냐? 
그리스도의 평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가 
바로 이 모든 내면의 다툼에 심판자, 조정자가 되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여기 '한 몸'은, 교회입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해서, 한 몸인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면 이 평화는 또 무엇을 지배하는 하나의 가치가 되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교회 생활이죠. 

이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성도님들의 내면과, 인격과, 교회의 생활에 
심판자가 되게 해야 된다' .. 이렇게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님들이 말하거나 행동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심판자, 조정자가 되어서 
우리 마음의 평화, 그리고 교회 평화를 도모하는 일' 
거기에 부합되게 우리가 말하고, 행동해야 된다는 거죠. 

▲자 그런데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나면, 
우리가 누리는 큰 은혜 중에 하나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근데 이 평화가 자꾸 깨어져요. 이 평화가 깨어집니다. 무엇 때문에? 

때로는 사람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나, 아니면 건강 문제..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이 평화가 깨어져서 
평화가 우리들의 삶을 주장하지를 못합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좀 몇 구절 찾아보겠는데요.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 여기 나오는 '평안'은 바로 에이레네 입니다. *헬라어
여러분의 삶에 어떤 근심과 두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가 주실 수 있느냐? 예수님이 주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다락방 교훈(요14~16장)을 주신 다음에 
내가 왜 다락방 교훈을 가르쳤느냐? 
'너희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너희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여러분, 세상에 아무리 환란이 많아도 
그것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의지하는 백성들에게 무엇을 주시느냐? 
평화를, 평강을 주실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평강의 근원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시는 말씀이죠.
빌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여러분 우리들의 삶을 가장 많이 지배하는 염려, 
그러나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라고 권면합니다. 

'모든 일에' 
우리를 염려하게 만드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
지각은 헬라어로 '누스'입니다. 
그러니까 고대 헬라 사람들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신, 아니면 이성, 
모든 정신, 모든 이성을 뛰어넘는,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에이레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이다... 

염려, 근심, 두려움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에 평화가 깨뜨려질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께 그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면, 
주님께서 모든 지식, 모든 이성, 모든 정신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안,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겠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 평안이 있으신가요? 요즘 평안이 있으십니까? 
어떻게 하면 이 평안을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우리 성도님들께서 후원을 해 주셔서, 한 5년 정도 토론토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했습니다. 
5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어쩌면 너무 단순한 것 같은데, 
저한테 아마 가장 큰 도움을 준 것 한 가지는, 

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거는 저도 그렇지만 우리 성도님들도 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그 순간이,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가치와 역할을 할 수 있나? 

저는 항상 뭐라고 생각했는가 하면, 
이거는 '일회적인 것'으로 생각을 했어요. 그냥 지나간 경험이죠. 
그리고 '첫사랑을 기억해라' 그러면, 
가끔 한 번씩 떠올리는... 

그런데 제가 영성신학을 공부를 쭈욱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그 순간은,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우리들의 평생을 위한 것이다. 
우리들의 평생을 위해 가장 기초가 되는 경험이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여러분 제가 만약에 평안을 잃어버렸다면, 
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평안을 회복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길은 무엇이냐? 
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를 기억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거를 매일매일 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타나는 현상, 그리고 그 내용, 또한 방식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지만,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깨달았던 거는 (똑같아요) 사실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 용납, 자녀삼음)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을,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증거로 보여 주셨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두 번째는 무엇을 깨닫느냐? 
여러분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분은, 내 삶이 아무리 망가져 있다 할지라도, 
그분은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께는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무엇을 통해 확인할 수 있나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죠. 

성도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들에게는 바로 이것, 
-얼마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분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았을 때, 
우리들의 삶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평화, 평강이 내게 주어졌습니다. 

저는 제 삶에 있어서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 가장 평강이 넘쳤던 순간은 언제냐,
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죠. 
그때 제 삶을 지배하고, 제게 주어졌던 그 놀라운 평화...

우리 찬송가에도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가 있죠. 
그 평안은, 과거의 일회적인 경험으로 만들지 말고, 
매일매일 그 경험을 마음속에 새기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나! 
그분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있는가! 
그것을 굳게 붙잡았을 때,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고, 

이것이 우리 성도님들의 모든 생활에 '심판자가 되도록 해서' (지배하게 하라)
거기에 부합되는 삶은 기꺼이 살아가고, 
개인과 공동체에 이 평화를 깨뜨리는 삶은, 심판이 옐로카드도 주고, 레드카드도 주면서 
그것을 행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해라' 
즉 '여러분의 마음에 심판자가 되게 해라' 이렇게 도전을 했습니다.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5절은 그리스도의 평강이었다면,
16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우리 개인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 된다 라는 뜻과 함께, 
우리 공동체에, 복수입니다. 여러분들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 된다. 
이렇게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을 합니다. 

그 다음에 뒤에 나오는 표현은 분사입니다. 

(거하여 .. 본동사

가르치고, 권면하며, 찬양하고 .. 분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분사)

권면하면서 (분사)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분사)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해야 된다는 거죠. (본동사)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들 각자, 그리고 교회 공동체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려면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해야' 됩니다. 

 

여러분 바울이 '가르침'은   
쉽게 말하면 '교리'입니다. 복음의 진리와 관계되는 내용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믿는 진리, 예수님에 대한 진리, 그 진리를 가르치는 거죠.

'권면'은 무엇이냐?
이 진리에 근거해서, 바로 이 가르친 내용에 근거해서 
하지 말아야 될 행동, 해야 될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권면'입니다. 

가르침은 내용이고, 
권면은 그 내용의 비추어서, 우리가 해야 될 행동, 하지 말아야 될 행동을 알려주는 적용입니다. 


본문 16절은 1:28절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우리가 그(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권면하고), 가르침은
(가르치는 이유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1:28

여러분 지금 가르치는 일은 누가 하는 겁니까? 
'우리' .. 사도바울과 그 일행들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목회자들이죠. 

목회자들이 어떻게 하느냐?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면합니다. 
모든 지혜로. 

이제 우리 성도들이, 정말 그 성도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려면,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냐? 영적인 지도자들의 도움이 필요하죠. 
바로 그들이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쳐야 됩니다. 1:28

그런데 이것 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본문 16절에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을, 또 누가 해야 된다는 거죠?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라'  3:16
이거는 서로서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은, 목회자들만 하는게 아니라, 
성도들이 서로 서로 해야 된다...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걸 우리 교회로 말씀드리면, 본문의 바울처럼,
목회자들이 가르치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설교 시간이죠. 1:28

그런데 이것이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거죠. 또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 
우리 성도님들이 셀그룹 모임을 통해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 꼭 있어야 된다는 거죠. 3:16

▲우리 집사람이 소그룹 모임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때 우리 큰 애가 유치원을 다닐 때였는데, 
갑자기 어느 날은 애가 유치원 가려고 하는데, 집사람이 애를 붙잡아 놓고 
'얘야, 이리 와 봐' 하더니 갑자기 애를 안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막 하더라고요. 

제가 갑자기 놀라서 '아니, 평소 안 하던 행동을 왜 갑자기 하느냐?
매일 그냥 애를 보내더니만, 오늘은 왜 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보내느냐?' 

 

그러니까 집사람이 이야기 했습니다. 
'어제 교회 가서 삼공일(셀그룹) 성경 공부를 하고 나눔을 하는데, 
집사님들이 자기 애를 유치원에 보낼 때, 꼭 이렇게 기도를 하더라'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제가 이제 좀 순간적으로 기분이 살짝 나빴던게 
'아니 내가 입학 전부터 그 말을 했지 않느냐? 
애가 유치원 등원할 때, 애를 안고 기도해서 보내라고,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내 말은 안 듣고, 집사님 말은 듣는 거냐?'

그러니까 집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했는가 하면 
'아니, 집사님 말과, 목사님 말이 똑같느냐?' 갑자기 그런 말을 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목사님들이 하는 이야기는 뻔한 이야기 아니냐? 
성경 보고, 그게 자기 업이니까 뻔하게 하는 일이지만, 
그러나 집사님들이 하는 말은 다르다...' 대충 그런 뜻이었습니다.

'목사인 당신이 애를 키워 봤냐? 
그런데 집사님들은 정신 없이 애들 키우면서... 
그러니까 목사의 말과, 삶의 체험 현장에서 집사님들이 하는 말은.. 온도차가 다르다'는 거죠.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거죠.

여러분, 제가 설교를 하지만, 제 설교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설교로 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 밭을 한번 갈아엎는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 말씀이 여러분 삶 속에 들어가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고 
그리고 서로 격려할 수 있는 일은, 소그룹에서 나누어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이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말씀만 들으면 어떻게 되나요? 머리만 굵어질 수 있어요. 

거기에 무엇이 포함되어져야 되느냐? 
성도들과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들이 있을 때,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말씀이 풍성히 거할 수가 있습니다. 

▲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16
해석하기 참 어려운 부분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입니다. 

여기에 대해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직전 16a절의 '가르치고 권면하는' 말을 수식하는 건가?  
2) 독립적인 것인가?  
3) 뒷부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해라' 그것을 수식하는 건가? 
학자들마다 입장도 다르고, 영어 번역을 봐도 번역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가장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1)입니다.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서로 권면하는데, 그 방법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가르치고 권면해라' 라고 해석합니다.

어떻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교육적인 측면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고대에 어떻게 사람들이, 지금처럼 출판된 글들이 희귀한 시대에,
그러면 사람들에게 역사와 중요한 가르침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느냐? 
시와 찬송과 노래였습니다. (*노래로 하면 긴 내용도 외우기가 쉽죠)

'시'는 구약의 시편을 뜻합니다. 
시편을 보면, 거기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살아있는 교훈들이 그 시 속에 담겨져 있죠. 

'찬송'은 무엇이냐? 
안 믿는 사람들도 고대 영웅들을 찬송하는 시가 있었습니다. *호머의 서사시 등

    그래서 신약성경을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골로새서에서도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먼저 나신 분이시다.' 

위 구절들은
대부분 성경학자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불렀던 '찬송시'의 가사로 이해합니다. 

'신령한 노래'란, 성령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바로 지금 주어지는 살아있는 노래, 
그 노래를 통해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라'는 거죠. 

정리 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려면 
우리 성도들 가운데 세 가지가 일어나야 되는데,

1) 말씀을 듣고 여러분이 마음에 새기셔야 됩니다. 
2) 소그룹에서 함께 나누면서, 삶의 경험들을 통해 말씀을 확인합니다
3) 세 번째는 함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찬양을 통해서, 그 가사,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을 통해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풍성하게 가질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16절 마지막에 나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해라' 
공동체적으로 설교 말씀을 듣고, 또 서로 나누고, 함께 찬양들이지만 
여기에 꼭 대해야 될 행동이 무엇이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일 때,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풍성하게 새겨진다는 겁니다. 

공동체적인 노력과 함께,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찬양하고 높일 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게 됩니다. 

△저는 이제 어릴적부터 교회생활 하면서 쭉 자라왔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일종의 컴플렉스가 하나 있었어요. 
그게 뭔가 하면 '나는 기도를 잘 못하는 사람이다' 하는 컴플렉스를 항상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어린 시절에는, 그 때는 시중에
영적인 체험들이 한국교회에 풍성했기 때문에 
제 또래 아이들 중에도 기도를 잘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고, 
특별히 제 동생도 기도를 너무너무 잘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머리는 좀 돌아가는 거 같은데, (학교공부는 잘 하는데)
기도만 하면 버벅대며 기도가 되질 않았어요. '나는 왜 이렇게 기도를 못 하나?' 

그때 한 목사님께서 '찬송가는 곡조 있는 기도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희들 어릴 때는 이런 말을 많이 들었죠.   

그래서 제가 그때 어렸을 때부터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기도를 잘 못하기 때문에, 내가 기도를 하나님 앞에 잘 드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곡조 있는 찬송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쭈욱
그리고 특별히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정말 제 삶의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 
그때 제가 제일 많이 했던게 뭔가 하면, 
대학 기숙사에서 강의실까지가 한 15분 정도 걸렸어요. 

그래서 그 길을 오갈 때, 매일 찬송가를 한 장씩 정해서 
1절부터 4절까지 제가 다 종이에 적었습니다. 

그래서 오가는 길에 항상 그걸 그냥 속으로 묵상을 했어요. 
기억이 안 나면, 그 종이를 꺼내놓고 외우면서 불렀어요.
묵상하고 부르고, 묵상하고 외우고... 

도서관에 있을 때도, 그 찬송가 적은 종이를 펴놓고 
그냥 1절부터 4절까지 속으로 불렀어요.
'하나님, 저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찬양이 곡조 있는 기도라 헀으니, 제 찬송이 기도가 되어서, 
저의 입에서, 저의 마음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은혜를 좀 주십시오' 
그래서 정말 찬송가를 많이 불렀어요. 

제게 있어서 찬송가는, 좀 과장하면, 
찬송가 한 장, 한 장 속에, 제 모든 삶이 어쩌면 담겨져 있고, 
저의 모든 희노애락이 그 속에 담겨져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정말 찬송가 많이 외우고, 묵상하면서 정말 많이 울기도 했고, 
그리고 그 찬송가를 통해서 '야 이런 기도를 내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겠구나' 
고스란히 저의 기도가 되었던 찬송가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 
-공동체적으로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겨야 되고, 
-소그룹에서 삶에서 경험된 말씀을 같이 나누고 권면하고, 함께 찬양하고 
-혼자 있는 시간에 주님을 찬양하며,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할 때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거할 수 있습니다. 

 

◑골3: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의 평강,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해서
어떻게 살아야 되나요?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이 말은 '모든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잖아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고 행동할 때, 
우리가 주인으로 모신 예수님, 그분의 성품, 
그분의 뜻에 부합되는 말과 행동을 해야 된다는 거죠.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제가 좀 과장해서 예를 들면, 어떤 부부가 중국집에 가서 갑자기 기도를 합니다.
무슨 기도를 하나 들어보니 '하나님, 짜장면을 먹어야 되겠습니까, 짬뽕을 먹어야 되겠습니까, 
볶음밥을 먹어야 되겠습니까?'

그러다가 갑자기 남편이 박수를 치면서 '응답을 받았는데, 탕수육을 시켜라' 
그랬더니 아내도 잘 시켰다고 좋아했어요.

그렇게 기도응답을 받아서 탕수육을 시켰는데, 먹으면서 서로 싸웁니다. 
여러분 이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게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주님의 성품과 주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는 말과 행동을 하면, 
그것만큼 사람들 마음에 혐오감을 주는게 없잖아요.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거는, 
주님의 성품, 주님의 뜻에 부합되는 말과 행동을 하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에 넘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서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다 
우리가 주인으로 모신 예수님, 그분의 성품과 뜻에 부합되게 해라... 

근데 여기 또 하나 당겨진 중요한 의미는 무엇이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말과 행동이 주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해라!' 

여러분 지금 교회 안에서만,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가정과 일터에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할 때, 주님의 뜻에 부합되고, 주님의 성품에 부합되고,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예배가 되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롬12:1~2절을 보면, 압축적으로 요약을 해 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영적 예배가 무엇이라고 했죠?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이게 바로 영적인 예배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너무 오해를 해 가지고, 
저는 어릴 때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했냐면,
저는 우리 할머님 따라서, 어릴 때 부흥회를 제가 다녔어요. 

하루는 부흥회에 갔는데, 아무리 자고 자도, 목사님 설교가 끝이 안 나더라고요. 
어린 제가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자면서 있었지만, 
그 긴 설교 중에 한 번씩은 지금도 생각이 나는 재밌는 예화, 이야기가 종종 있었어요.

그때 제가 하나 들었던게, 어느 영국의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고,
부흥회 마치는 날에 헌금을 드리는 시간이 있어요. 

반주 소리와 함께 헌금 주머니를 돌리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당황스럽게 하는 일이 일어났어요. 

보니까 헌금 주머니가 돌아가는데, 한 어린아이가 그 헌금 주머니에 자기 머리를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너 왜 이러냐?' 이러니까 
그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몸밖에 드릴 것이 없어, 이 몸 드립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커서 나중에 선교사가 되고, 또 들리는 이야기는 
리빙스턴 같은 위대한 선교사가 됐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 제가 어린 마음에 '야 내가 죽기 전에 저거는 꼭 해봐야 되겠다.' 
제가 평생 꼭 해보고 싶었던 미션이 뭐냐? 
헌금 주머니 돌릴 때 머리 집어넣어 보는 거, 
그래서 사람들이 물으면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드립니다'
저는 이거 한번 하고 나면, 바로 천국 갈 줄 알았어요. 

저는 바로 이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하는 내용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성경을 공부해 보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내 몸으로 하는 모든 행동'입니다. 

몸으로 하는 모든 행동, 
즉 본문 17절으로 표현하면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와 .. 같은 내용입니다.

내 몸으로 하는 모든 말, 내 몸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무엇이 되어야 되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

제 청년시절에, 저를 가장 놀라게 하고 흥분시켰던 말씀이 바로 이거였어요. 
저는 신앙생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은, 
교회와 관련된 것만, 하나님과 관련된 것만.. 하나님을 섬기는 행동인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 '내 몸으로 하는 모든 행동, 내 몸으로 하는 모든 말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산 제물, 살아있는 예배가 되게 해라'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부족하지만 말 한마디를 통해서, 
그래도 제 말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를 원했고,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평범한 그 생활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기를 원했죠. 

△정리하면,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나요?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들의 마음을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 넘쳐나서,
우리가 몸으로 하는 말과 모든 행동이 
다 주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거룩한 예배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말 한마디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우리가 말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이 이제 마지막 3장 17절 마지막,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데, 마지막 분사입니다. 
'그를 힘입어'는 '예수님을 통해서' 

'감사하며'는 분사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면서' (분사로 해석하면)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바로 우리들의 새로운 삶, 우리들의 말과 행동이 주님 앞에 거룩한 예배가 되게 하는 
그 중심에는 무엇이 있느냐? 
예수님 통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감사가, 
우리들의 거룩한 삶의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엡5:18~20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본문과 표현은 틀리지만, 내용은 같은 구절입니다.
우리가 술 취하지 말고, 즉 세상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는 삶을 살 때, 이 일이 우리들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한 주간도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그리스도의 평강, 그리스도의 그 말씀이 여러분 속에 풍성히 거하여서 
모든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찬송가 289장을 부르겠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제일 많이 부르고, 
이 찬양만 드리면 막 가슴이 뛰었던 찬송입니다.

1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후렴)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듯 내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2. 주예수 내맘에 들어와 계신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머리털 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 보다 더 희어졌네

3. 내 맘에 소망을 든든히 가짐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버림도 주 예수 내맘에 오심

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다가 밝은 빛 홀연히 보고 
저 멀리 하늘문 환하게 보임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5. 나이제 천성에 올라가 살기는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천성을 향하여 내가 곧 가리니 그 기쁨 비길데 없네

후)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