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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질 용기

LNCK 2024. 3. 11. 11:14

https://www.youtube.com/watch?v=iyS3BsbdImY
*위 동영상 6:18초부터 녹취

 

약해질 용기            행1:12~26         2024.01.14.         -교정 예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 우리가 구할 것은, 
고난과 불행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그렇게 (완전 면제) 하지 않으십니다. 

믿지 않는 이들도, 하나님의 자녀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잘 믿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고난과 불행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때로 겪지 않아도 될 고난과 불행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난과 불행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어서 좋은게 뭐냐?' 라고 묻고 싶겠지요. 
믿어서 좋은 것을 열거하자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주제인, 인생여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난과 불행에 국한에서만 말하자면 
믿어서 좋은 이유는, 고난과 불행을 이겨낼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을 요즘 심리학자들은 '회복 탄력성' 영어로 resilience 라고 부릅니다. 
고난과 불행을 당해서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힘을 말하지요. 

▲인생여정에 있어서, 고난과 불행은 기본값입니다. 
따라서 인생 여정을 완주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회복 탄력성 resilience 리질리언스 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어떠한 고난과 불행을 당해도 꺾이지 않는 마음을, 나에게 가지게 해줍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만사형통하고 꽃길만 걷는다는 뜻이 아니라 
고난과 불행을 당해도 완전히 꺾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 믿음이 회복 탄력성을 얻게 해줍니까? 
믿음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강한 의지력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약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회복 탄력성'을 가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을 영어로 vulnerability 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을 '약해질 용기'라고 그렇게 번역을 합니다.  *설교제목

'약해질 용기'란, 자신이 전능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이해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견디는 힘에도 한계가 있고, 
때가 되면 병도 들고, 늙고, 장애를 입을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르고 의롭고 선하게 살기를 힘쓰지만, 때로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꽃길만 걷는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고난과 불행을 당해서 깨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남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약해질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약한 것을 '죄악' 혹은 '수치'로 여기는 문화 속에서, 우리 한국 남자들은 자랐기 때문입니다. 

하긴 여기 미국에 살아보니까, 백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남성이 된다 하는 말은 '강해진다'라는 말로 동일화시킵니다. 

그래서 남자들의 눈물은 수치의 상징입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는 것이, 남자다운 남성상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한국에는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남성들 가운데, 이 말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만큼 한국 남성들은 '눈물 흘리는 말라고' 하는 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그렇게 양육 받아 왔기 때문에 약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 남성이,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고, 약해지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고난이나 불행을 겪는 힘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훨씬 강합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여성들이 '약한'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여성의 눈물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실패를 당해서 무너져 통곡하는 남성의 모습은 불쌍하지요. 
그 사람의 인생이 끝난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여성은 불쌍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서워 보입니다
통곡한 후에, 다시 일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약해질 용기'가 없이는,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다만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하고, 자신을 개선할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철저히 절망하고, 하나님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서 
'나를 구원해 주소서' 라고 호소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강해지기 위해서 분투한 남성들은, 그렇게 하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믿음에 있어서 훨씬 나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성들은 평생 약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서, 그분의 구원을 갈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남성들에게는,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죽기보다 싫은 일입니다. 
그래서 남성들은 믿음을 가지기가 어려운 겁니다. 

믿음을 가졌다 해도, 교회에 나온다 해도, 
끝끝내 자신이 약해지는 것을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0년~30년 교회를 다녔어도, 진정한 믿음을 얻기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는 '로잔 어게인' 말씀동행의 순서를 따라서 
승천 이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읽었습니다. 행1:12~26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시자, 
사도들과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한 집으로 돌아가지요. 
예수님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었던 그 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을 합해서 12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이어서 누가는 11명의 사도 이름을 소개하면서 
밋디아를 뽑아서, 가룟유다의 죽음으로 인해서 생긴 빈자리를 채웠다는 이야기를 보도합니다. 
12사도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새로운 족장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그 빈자리를 채워야 했던 것이지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가룟유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12제자는 모두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다가,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그들은 모두 조국 독립의 때가 드디어 왔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그들은 모두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이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혼자 물러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요. 
다른 11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집으로 모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열두 제자들은 동일한 일(지도자의 십자가 형)을 겪었는데, 
왜 한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다른 길을 택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유다에게는 '약해질 용기'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추측하는 데는, 여러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혁명당원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의 이름 '가룟' 이라는 말은 '시카리' 에서 나왔다고 학자들은 봅니다. 

유다는, 유대민족 해방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가 고락을 함께 했던 그 시카리 동지들을 떠나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는, 
'그분의 지혜와 능력이면, 로마 제국의 압제를 깨뜨리고, 
조국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갈릴리와 그 근방에서만 주로 활동하시는 것을 보고, 
유다는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동생들이, 형님인 예수님에게 말하지요. 
'형님, 갈릴리에서만 썩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진출하십시오. 
형님의 능력 정도면, 예루살렘에도 통합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지요.  요7:3~4
유다도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향했을 때, 유다의 마음은 요동쳤을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조국 해방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온 순례객들로 북적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이적의 능력을 한 번만 드러내시면, 
삽시간에 군중들이 몰려들 것이고, 로마군대를 한 순간에 밀어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서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행했던 그 많은 이적들을 하나도 행하지 않으시고 
성전 부근에서 가르침과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유다로서는, 그런 예수님의 행보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일주일간의 축제 기간을 끝내면, 그러면 기회를 또 잃어버리게 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다는 이번 명절이 끝나기 전에, 예수님이 행동하도록 몰아세울 방도를 찾았습니다. 
궁리 끝에 그가 찾아낸 방법이, 그분을 대제사장에게 넘겨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궁지에 몰리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자기가 숨겨 놓았던 이적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될 것이라고 여겼겠지요. 

갈릴리에서 보아온 그분의 지혜와 이적의 능력이면, 
로마 주둔군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후로, 일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무슨 영문인지,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도,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앞에서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겁니다. 

그분은 아무 말 없이, 아무 저항 없이, 권력자들의 손에 이끌려 다니다가,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룟유다는 대제사장에게 찾아가서, 자기가 받은 돈을 집어 던지고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왜 유다는 그런 결정을 했을까요? 무엇이 그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을까요? 

예수님에게 행한 일에 대한 뉘우침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그에게 뉘우침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모든 희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조국 해방의 꿈을 이룰 것이라는 확신이,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에 
그 희망이 무너져 버리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엉터리 지도자에게 속아서, (시카리) 동지들을 떠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수치심과 모멸감을 견디고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을 없애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지요. 
인간적으로는 참 멋지죠. 남자답고, 투사답고, 혁명가 답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피조물이며, 죄성에 물든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때로는 넘어질 수도 있고, 때로는 틀릴 수도 있고, 
때로는 배신할 수도 있고, 때로는 수치스런 일을 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때로 절망 가운데 빠질 수 있다는 사실, 
때로는 바닥에 내던져진 그릇처럼 산산이 깨어질 수 있다는 사실, 
때로는 죽을 것 같은 모멸감과 수치감을 견뎌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는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약해질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설교 제목)

그는 끝까지 강하고 싶었고, 끝까지 옳고 싶었고, 끝까지 깨끗하고 싶었습니다. 
그 열망은 좋은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약한 인간성)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약해질 용기'가 없었기에, 그는 참담한 실패와 절망을 견디고 일어날 회복탄력성도 없었습니다. 
그는 쇠구슬처럼 강하고 싶었지만,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 쇠구슬은 그냥 바닥에 버려져 있게 된 것이지요. (회복탄력성이 없었죠)

▲반면 다른 11 제자는 '약해질 용기'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별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때로 틀릴 수도 있고, 때로 속을 수도 있고, 
때로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살기 위해 스승을 버렸다고 하는 사실로 인한 
실망감과, 모멸감과, 환멸감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거룩하고 온전하게 살아서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추구했지만, 
언제나 그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 우리가 잘 아는 시몬 베드로는, 뱃사람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그도 약한 것을, 죽기만큼이나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예수님이 그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자, 
그는 치를 떨면서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런 일을 없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지요. 
하지만 그는 결국 그렇게 하고 말았습니다. 

닭의 울음소리에 제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심하게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마음을 찢을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가 약해지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강해지려고 몸부림칠 때, 
그를 제외한 11제자는 예루살렘의 한 집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스승을 버렸다'는 수치심과 모멸감, 
또한 자신들도 잡혀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짓눌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감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깨어지고 찢어진 마음으로 서로를 부둥켜 안고 그 시간을 견디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검은 토요일, 블랙 새터데이'를 지나서, 부활의 아침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십자가 처형(금 9시)으로부터, 부활의 아침(주일 5시)까지 
이틀이 안 되는 참 짧은 시간입니다만, 이들에게는 영원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불안감과 두려움에 짓눌리면 하루가 천년처럼 느껴지게 되지요. 

영원 같은 시간을 지난 후, 열한 제자는 믿지도 않았고 상상도 하지 않았던 
부활의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 이후로 40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나면서 
그들의 믿음은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도 회복됩니다. 

40일 후, 그들은 더 이상 과거에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깊은 나락에까지 떨어져 보았던 그들이기에, 
이제는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지요.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귀와, 우리를 안아 줄 품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처럼 강해지기만을 원하고, 강해 보이기만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결국 자기를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 버리지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일입니다. 그 선택의 마지막은 불행입니다.
반면 11제자처럼 '약해질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사정을 들어줄 귀와 안아줄 품을 찾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그 귀가 되어 주시고, 품이 되어 주시지요.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들어줄 귀와 안아줄 품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고난과 불행 중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언제까지나 계셔주지도 않고요, 부모님이 모두 그러시지도 않습니다. 

저도 들어줄 귀와, 저를 안아줄 품이 되셨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저에게 일어난 일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저의 불행을 진심으로 아파해줄 분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좋은 일이 있어도, 아픈 일이 있어도.. 연락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사정을.. 들어줄 귀와, 안아줄 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것을 얻으려면,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그런 귀와 그런 품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그런 귀와 그런 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만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연약하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의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품어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들어줄 귀와, 안아줄 품이 되어줄 때, 
그 사람도 나에게 그렇게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열한 제자는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집에 모여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수치심과 혐오감, 낙심과 절망, 두려움과 염려로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해질 용기가 있었기에, 그 모든 감정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들어줄 귀가 되고, 안아줄 품이 되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영원과도 같았던 '암흑의 시간(토요일)'을 지나서, 부활의 아침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갑자기 어디로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에 
다시금 그 다락방에 모여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교회는.. 11 제자가 숨어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두려워 떨었던 그 다락방에 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들어줄 귀와 안아줄 품이 되어주는 곳이고요, 
그리고 그 귀와 품을 찾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믿음의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공동체는, 서로에게 들을 귀와 안아줄 품이 되어줄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사귐입니다. 

▲오늘부터 이제 새로 구성된 속회 cell group 로 모입니다. 
속회로 모일 때, 십자가 처형 후에 열한 제자가 모여 있었고, 
승천하신 후에 다시 모여 있던 그 다락방의 이미지를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속회로 모일 때, 무장을 풀어헤치시기 바랍니다. 
화장도 지우고요, 분장도 벗기고, 민낯으로 서로를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에게. 서로 들어줄 귀가 되어주고, 안아줄 품이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강해지려는 사람들은, 속회로 모여도 '말할 입'만 가지고 옵니다. 
속회가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들어줄 귀'를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사랑하라'는 거지요. 
어떻게 교우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자신을 열고 다가가서, 들어줄 귀가 되어주고, 안아줄 품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이는, 그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도와줄 수는 있겠지요. 지갑을 열어서 돈을 내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서로 자신을 열고, 상대방을 내 삶으로 초청하고, 
내가 그 사람의 삶으로 초청받는, 그 진정한 사귐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수적으로 아무리 많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해도, 
이와 같이 서로에게 들을 귀가 되어주고, 안아줄 품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가 되지 못한 겁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 모두 더욱 교회다와 집시다. 기도할 때마다 '약해질 용기'를 구하십시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믿음을 얻게 될 수 있고, 진실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혹시 우리 삶을 뿌리채 뽑아 버릴 것 같은 고난과 불행이 닥칠 때, 
열한 제자들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그 고난을 딛고 다시 바운스백 (회복탄력) 할 수 있습니다. 
그 회복탄력성은, 우리가 진심으로 약해질 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약해지기를 힘쓰는 금년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