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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떨림으로

LNCK 2024. 3. 12. 21:49

두렵고 떨림으로             행5:1~11           2024.03.10.녹취, 정리      

*본문은 '아나니아 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도입

만약 '당신의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나요?' 하고 제게 물으시면, 
제가 젊을 때 청년들 사역할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신학 공부가 힘들었고,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웠고, 미래도 불안정했지만 
함께 말씀 안에서 하나되고, 변화되어 가는 청년 공동체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 청년들이 이제는 청년이 아니죠.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나름대로 아주 신실하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꼽아보면 그 중에 교수가 된 분들만 해도, 모아보면 웬만한 대학교 하나가 될 정도입니다. 

최근에 그 중에 한 분이 큰 대학에서 학장을 맡았다 하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제가 축하한다고 했더니, 
'목사님 감사합니다. 20년 전에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오늘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하는 말씀을 전해 왔습니다. 
그때 청년들과 함께 말씀으로 훈련받으면서,

평생 살아갈 신앙의 가치관, 삶의 목표와 자세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하고 있는 '소명과 잠재력'의 원형도, 그때 시작한 거고요. 
그때 함께 성경 공부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새벽기도 하고, 함께 커피 마시던 풍성한 삶이 
'야~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던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답던 교회에도 시련이 왔습니다. 교회가 잘 성장한다는 소문도 나고 그랬어요. 
그런데 당시에 지역 종합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저희 교회 기사가 났었습니다. 
기독교 신문이 아닌 일간지에, 그렇게 대서특필된 예가 과거에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두 달이면 못 되어 가지고, 교회에 큰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교회 안에서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아주 소수였는데, 
그 소수가 교회 안에 큰 어려움을 만들어 놓았던 게 발견 되었습니다.

'교회'라는 배가 큰 풍랑에 휩싸였고, 거의 깨어질 뻔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겠다고 결심했는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숨겨진 죄악들이 드러나게 하시고, 
2주 만에 모든 문제들이 정리되고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교회가 급성장한 것보다, 교회의 갈등이 이렇게 단기간에 정리된 것이 
더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성도들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하나님 살아계셔서, 이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구나. 
하나님이 교회 안에 일하시고 계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목회자로서 제가 미숙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청년들 하고만 사역해 가지고요. 
청년들이 와서 열심히 하면, 
그냥 순수하게 다 세워주고, 힘을 실어주고, 중책을 맡기고 그랬습니다. 

근데 어른들 중에서는, 기성세대들 중에서는, 그렇게 하니까 어려움이 생기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점을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게 제 잘못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행5장에, 아나니아 와 삽비라 부부가 심판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장면만 보면요, 대단히 충격적이고 불편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설교하기 힘든 본문입니다. 

물론 간혹 이런 설교를 좋아하고, 자주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야단치고, 심판받고, 벌받는 이야기...

설교시간에 자주 다루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는 것 같아요. 

왜냐면 교회 안에 그런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되는 분들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게 지적) 한다고 안 바뀝니다. (그런 설교를) 들어야 될 사람들은 오히려 안 듣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사람들, 정말 순수한 성도들이 (그런 설교에) 위축되고, 상처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평생 목회해도, 일부러 이런 본문을 선택해서 설교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도행전을 순서대로 쭈욱 연속해서 강의하고 있잖아요. 
이런 본문을 만났는데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부담스럽지만 설교해야 되겠죠.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야기는,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필요하기에 기록되었습니다.
누가가 교회의 역사를 쓸 때, 수십 년에 걸친 긴 역사를, 
그 많은 사건들을 추려서 28장에 압축해서 썼습니다.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도 많았을 겁니다. 
마치 큰 마트에 가서, 그 중에서 고르고 골라서 카트에 담죠. 
누가도 전체 역사에서, 일부만,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사도행전에 담은 거예요. 
그걸 집에 가져와서 요리해서 밥상을 차려서 올린 것이 '사도행전' 입니다.

사도행전의 전체 과정은 '성령의 역사하셨다' 입니다.  
그러면 여기 밥상에 올라오니 이 음식은, 우리가 꼭 먹어야 할 영양소 들입니다. 
편식하지 맙시다. 불필요하게 뺄 게 없다는 뜻입니다.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 중에는, 혹시 내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을 수 있어요. 
축복의 말씀도 있지만, 경고의 말씀도 있습니다. 

교회가 막 부흥하고 신나게 달려가는 역사도 있지만, 
협박받고, 오해받고,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는 일들도 들어있습니다. 
그 일들 중에 '아나니아 와 삽비라 사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역사를 쓰면서 꼭 기억해야 될 부분은, 
즉 내러티브(이야기 서술)로 된 교회론을 가르칠 때에 
'교회는 이런 공동체야'를 가르치면서 
꼭 전해야 될 필수 영양소에 해당하는 메시지에는 
'본문의 심판의 메시지도 들어 있다'는 겁니다. 
불편하지만 우리가 꼭 듣고 새겨야 될 말씀입니다.

◑본문 해설

먼저, 행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 와 삽비라 이야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행4:36~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가 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습니다. 모두들 "바나바, 바나바!"하며 칭송하는 거예요. 
아나니아가 보니까 그가 너무 부러워요. 
'나도 저렇게 좀 인정 받고 싶다. 나도 바나바처럼 밭을 팔아서 바치면 존경받겠지...?' 

여러분, 돈 없는 사람들은, 돈 많이 버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돈 많이 버는 사람은, 누구를 부러워하는지 아십니까?

존경받는 사람을 몹시 부러워합니다.

자기가 돈은 많이 만지지만, 그렇다고 존경까지 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마 아나니아도, 그래서 바나바를 몹시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존경 받는 게) 자기 마음처럼 쉽게 될까요? 
'돈 낸다고 존경하고 알아주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그렇게 허술하고 물질적인 교회가 아니었어요. 

바나바 같은 신앙과 인품, 품격은 갖추지 못하고 
돈으로 존경을 사려고 했던 사람이 아나니아 입니다. 

이 사람의 행동을 보십시다. 
5:1~2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판 값의)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처음부터 부부가 계획을 같이 했다는 겁니다. 뭔가를 함께 모의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부부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하고, 사도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남편 혼자서 밭을 판 값의 일부를 교회로 가져갔는데,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하고' 

▲여기서 베드로는 6번의 질문을 합니다. 
1) 왜 네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였느냐? 
2) 왜 성령을 속였느냐?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왜 이것을 성령으로 된 일처럼 위조하느냐?' 하는 말입니다. 

3) 땅을 판 돈의 일부를 감추었느냐? 
4) 땅이 본래 너의 것이 아니었느냐? 
5) 판 이후에도 너의 권리 안에 있지 않았느냐? 
6) 왜 너의 마음을 이 일에 두었느냐? .. 라고 여섯 번이나 질문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한 달음에 쭉 읽지만,
여러분 사도행전에 대부분의 스피치들은 요약이에요. 

그러니까 성경 본문보다는 꽤 긴 대화가 오고 갔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과정에서 6번이나 질문합니다. 

여러분 '물어본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대답할 기회를 준다는 거예요. 
여섯 번의 질문은, 6번의 대답할 기회를 준 겁니다. 

'왜 속이느냐?' 물어봤을 때에 
'어 아시는구나' 그러면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할 기회가 있잖아요. 
여섯 번이나 기회를 줬는데, 아나니아는 그 기회를 다 흘려보냅니다. 놓칩니다. 

일곱 번째 말했을 때에,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려서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5 

여기서 주의해야 될 것은 베드로가 
'너 죽어라! 사형선고 한다.' 라고 심판을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질문하고,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죽었어요.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갑자기 심장마비인가?' 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절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삽비라는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때 아내 삽비라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들어왔을까요? 

자기 부부가 거액을 헌금했잖아요. 교회에 깜짝 놀랄 만한 거액을 자기 남편이 바쳤잖아요.
그때는 다 현찰로 헌금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삽비라는 '지금쯤 우리 부부가 교회에서 스타가 되어 있겠지? 박수와 환호가 넘쳐났겠지?' 
그 생각을 하면서, 교회로 모이던 곳으로 들어왔을 거예요.

   여러분 드라마를 보면, 백화점 명품관에 가서 하루에 수천만 원 쓰고 오는 사람에게는 
   백화점 직원들이 머리를 조아리잖아요. 

   백화점에 가서 돈 자랑하는 것 못지 않게, 교회에서 (돈 자랑) 하는 것도 은근 짜릿해요. 하하하 
   혹은 어떤 단체에 거액을 기부했을 때,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 존경의 눈빛들... 
   삽비라는 이런 기대를 하고 들어왔을 것 같아요. 
   막 자기 표정 관리하면서.. 이렇게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묻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8~9

이것도 정확하게 말하면 '너는 죽어야 돼!" 라는 엄중한 선포라기보다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베드로의 꿰뚫어 보는 능력, 
'앞에 그런 일이 났으니,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것이다'라고 아는 성령의 지혜입니다.
'베드로가 모를 것이다' 생각하고 부부가 일을 꾸몄잖아요. 그렇죠. 

여러분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은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베드로 사도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엄하게 심판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위에서 (밑줄로 그어) 설명했지만,

사실을 물어보는 과정에서,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침을 받아서 스스로 죽었고요,

삽비라에게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가르쳐 준 것입니다. 미리 대비하라고요.

(베드로가 무슨 환상 같은 것을 보았겠지요. 삽비라가 쓰러지고 내어가는...)  

◑1. 교회의 거룩성, 교회의 권위

'오늘날의 교회에 죄를 지어도 교회 시스템, 교회 문화에 징계가 없다. 
징계가 사라져서 문제다. 이거 되살려야 된다.'고들 말을 합니다. 맞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그런 분이 계세요. 
어떤 유력한 교인이 두 집 살림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만두라고 권면하고, 권면을 안 들으니까 징계했는데... 맞습니다. 

그 교회는, 그 두 집 살림하는 교인이 굉장히 헌금을 많이 했어요. 
작은 교회였는데, 교회 재정에 절반 정도를 담당하는 그런 교인이었습니다. 
그분이 없으면 교회 유지가 안 되는 형편에... 어떻게 해야 되나요?

이 목사님은 고민 고민하다가 개인적으로 찾아가 권면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간곡하게 권면해도 듣지 않길래, 교회 직분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했습니다. 
쫓아내지는 못해도 '이런 상황에서 교회 리더십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까 이 분이 교회를 나가 버렸습니다. 교회가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잘 한 것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교회가 교회일 수 없습니다. 

요즘 국회의원 선거 하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정치가 더럽다. 타락했다. 혼탁하다' 그러지만 
국회의원 선거를 해도, 무슨 흠결이 발견되면 '사과해라. 사퇴하라' 그러잖아요. 

여러분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가 혼탁한 정치보다 훨씬 더 못한 예가 많았습니다. 
교회는 사회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회의 징계가 필요한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될 점은 
오늘 이 아나니아 와 삽비라의 본문이 
'교회의 징계의 필요성과 절차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게 본문의 주제는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읽어야 됩니다. 
오늘 이 본문은, 교회를 구성하는 지도자들이 조직적으로 나서서 
어떤 절차를 갖고 징계하는 그런 게 주제가 아니에요. 
사도 베드로가 자기 권위를 갖고 심판한 것이.. 본문의 주제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주제입니까?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하나님은 스스로 챙겨나가십니다. 

그래서 대화하는 도중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아나니아를 치신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초고속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3천명이나 교회로 들어오던 시절이었어요.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교회가 가는 방향에 하나님이 브레이크를 밟으신 거예요. 급브레이크! 
급브레이크는 언제 밟습니까? 위험한 때죠.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급브레이크를 밟으시는 것은 
'이거 지금 stop 안 하면, 더 큰 사고가 곧 생길 것을 아시기 때문에' 밟으시는 거예요. 

우리는 교회를, 역사를, 우리 가정을 이끌고 가시는 운전자이신 
하나님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징계의 필요성은 있지만, 
오늘 이 사도행전 5장 본문이 '징계의 필요성과 절차' 
'말 안 들으면 이렇게 죽는다'는 말을 하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의 징계에 절차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다른 본문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먼저 찾아가서 권면하라.. 안 들으면 두 세 사람과 함께 가라' 하면서
대단히 신중하게 차근차근하게 접근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는 거예요. 
'교회의 거룩성과 주님의 몸된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지켜나가시는 하나님!' 

아나니아도, 삽비라도.. 사도 베드로가 심판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다. 왜냐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 스스로 지켜나가십니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심판과 징계와 권징을.. 먼저 주님께 내어드리고 잠잠이 기다리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서 사람이 권징하면 부작용이 일어나고,

권징은 반드시 '하나님의 대리권'으로서의 권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도 즉사시키는 것은 너무하시지 않나?' 그런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하고,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왜 (세월호 등의) 이런 일을 허용하시지?' 

저도 이해 안 되는 그런 부분들이 많아요. 그러나 믿습니다. 
우리가 장차 주님 앞에 가면, 다 알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지?'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있었는데 
주님 앞에 가면, 봄날에 눈이 녹듯이 다 녹아 내릴 것입니다. 

아나니아 와 삽비라에 대해서 적용해보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시고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있을 거예요. 분명히!              

상상하자면 이 부부가 거짓말을 이 때만 했을까요? 
평소에 거짓말을 한 번도 안 하고 정직하게 살다가, 이때 딱 한번 거짓말 했을까요? 

본문을 보면, 부부가 이미 많이 해본 솜씨처럼 보입니다.
만약 부부가 둘이서 사업을 했다면, 이것저것 속이면서 
'이게 우리 능력이야, 이게 수완이야' 그러면서 돈을 모았을 가능성이 많고요. 

많은 사람들을 속이면서 피눈물 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개연성입니다. 
물론 그래서 죽였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종합적으로 급살을) 행하신 거예요.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우리가 모르는 미래의 어떤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급브레이크를 밟으실 때에 
우리는 저 앞에 무엇이 있나 모르지만, 낭떠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끔찍한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전 예방 차원에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는 거죠.

 

이런 사람들의 거짓이 교회 안에서 제지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됐을까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순수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계시록의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메시지에도 '교회의 권위'를 지켜주시는 내용이 이렇게 나옵니다.

계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당시에 거짓말하는 유대인들로부터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결국은 하나님이, 그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교회 앞에 절하게 되는 일을 만들어 주신다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은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지켜주시고, 세워나가도록 역사하십니다.

 

◑2. 거짓의 심각성

우리 한국문화에서는 '거짓'을 그렇게 큰 죄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서양문화에서는 '거짓, 거짓말'을 아주 큰 죄로 여깁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십시오. 대통령도 거짓을 행하고, 진실하지 못하면,

현직에서 물러나야 할만큼.. 정직성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풍토인데,

이게 아마 기독교 문화와 전통이 내려와서..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공감대가 생겼을 것입니다.

사실 가정, 교회, 사회, 국가 공동체 안에서 '거짓'이 몰고오는 후폭풍, 파장은 
상상 할 수 없이 매우 큽니다.

 

일례로,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면 그것도 큰 죄지만,

어쩌면 그것보다 더 심각한 죄는, 그것을 숨기고 감추는 죄일 것입니다.

배우자가 잘못하는 것도, 정직하게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같이 살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끝까지 감추고, 시인하지 않는 것은.. 같이 계속 살기 힘듭니다. 이게 '거짓'이 몰고오는 파장입니다. 

몇 해 전에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서, 이라크인 약 20만명(추산), 미군이 약 5천명 가까이 죽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났지요.

그 전쟁의 원인으로 '사람 후세인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WMD)를 보유하고 있다'는..
나중에 사실은 거짓으로 판명된 가짜 정보 때문이었습니다.
거짓말, 거짓 정보 하나가.. 무려 20만이 넘는 인명을 살상하는 결과를 가져왔지요.

행5장은,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출발하는, 
아니 2천년 교회 역사에서 최초로 교회가 출범하는, 그런 역사적인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거짓이 없는 정결한 교회가 되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짓이 교회에 가져올 파괴적인 결과를 내다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생각에,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무서운 심판으로
거짓을 도모하고 말한 아나니아 와 삽비라 부부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아예 시작부터 '거짓이 없는 정결한' 교회로 세우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곁들여 생각할 것은, 여러분 '첫 인상'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입사를 하거나, 군대에 입대하면, 처음에는 좀 강력한 훈련을 시킵니다.
첫 인상이 강력하면.. 나머지 회사 생활, 군대 생활이 쉬워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첫 인상, 첫 훈련을 강력하게 시키시는 예가 성경에 종종 등장합니다.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통해, 처음 시작하는 교회를 '거짓'으로부터 지키시고,
-바울이 로마로 들어가는 첫 걸음에, 유라굴로 풍랑을 보내셔서 14일간이나 생사를 오가게 하시고,
-바울이 유럽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에, 빌립보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는 일을 당하게 하신 것도
 어쩌면 하나님의 '첫 훈련'이라는 것이죠. 첫 훈련 때는 하나님도 엄하신 면이 있습니다...

◑3.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1

그 부부는, 자기를 생각대로 되었더라면, 공동체 내에서 존경받았을 거예요.
이 사람들 본래 목표가 '바나바처럼 되는' 거였잖아요. 

아나니아 부부는 곧 목표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교회에서 이제 존경 받고 지도력을 행사할 힘이 생길 시점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교회를 아마도 좌지우지 하려 했을 거예요. (사회에서 그랬듯이요)

실제로 이런 일이 교회 역사에 많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역사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이 
교회 지도자가 되고, 장로가 되고, 실세가 되고, 목회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장로가 되지 말아야 될 사람이 장로가 되면.. 교회가 참 어려워집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평판을 조작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
그런 일에 유능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지도자가 되면..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집니다.

우리 장로교회는 노회장, 총회장, 이런 직위가 있습니다. 
이게 본래 마드레이트 moderator, 사회자예요. 회의할 때 진행하는 사회자예요. 

이게 필요한 섬김이고, 나름대로 귀한 직분입니다. 
근데 이게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권위가 부여되면서, 그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아나니아, 삽비라 클라스 예요. 그게 교회의 타락입니다. 
이런 경향의 극단적인 예가, 중세의 교황이잖아요.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지 못하고, 나서기 좋아하고, 으뜸 되기 좋아하는 사람들. 
그래서 종교개혁과 마르틴 루터는, 당시의 교황을 가리켜 적그리스도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현재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면 큰 일 납니다. 대단히 근시안적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무엇을 배워야 됩니까?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1

이런 두려움은 건강한 교회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무슨 두려움입니까? 
여러분, 거짓말 하는 사람이, 이 부부 두 사람 뿐이었을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아나니아 와 삽비라 같은 마음이 있다고 말해야 되지 않을까요? 

높아지고 싶은 마음, 거짓말을 해서라도 주목받고 싶은 욕심, 
거짓을 행해서라도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그 마음, 

▲'두려워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아멘 

'나도 예외가 아니다' 라는 거죠. 
아나니아, 삽비라, 혹은 우리가 
정말 나쁜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 사람들을 손가락질만 하고 끝나지 말고, 
더욱더 간절하게 조심해서 '내 안에는 그런 죄가 없나?' 살펴보고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 이게 아나니아, 삽비라 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른다' 그랬어요.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지금 그 죄가 드러나서, 허물이 드러나서, 창피 당하고 징계받는 저 사람이 
여기 그냥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누구는 먼저 들키고, 누구는 나중에 심판 받는 거예요.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는 줄 믿습니다.

이 대목에서, 선행도 마찬가지 예요. 
내 선행을 몰라줘도.. 여러분 선행도 언젠가는 '밝혀 드러난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봉사하고, 희생하고, 양보하고, 헌신하고데... 사람들이 몰라줘요. 
그래도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날 알아줄까?' 너무 머리 쓰지 마십시오 그러다 보면 복잡해져요. 

사람이 그렇게 머리 굴리다 보면, 진실성이 사라져요. 그래서 사람이 매력이 없는 거예요. 
메마른 거예요. 하는 말을 보면, 조목조목 다 맞는 것 같은데.. 감동이 없어요. 
영적 파워가 없어요... 

여러분,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열심히 선행하고, 섬기고, 
알아주고 못 알아주고는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그럴 때 은혜가 임합니다. 
단순성, Simplicity 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단순해지는게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 단순함의 반대는, 정신이 사납고 시끄러운 거예요. 

'이렇게 하자니 저 사람 신경 쓰이고. 저렇게 하자면 이 사람 눈치 보이고...' 막 인생이 복잡해요. 
그렇게 하지 말고, 단순해지는게 은혜입니다. 

밭을 팔았어요. 전부 팔았으면 '전부 팔았다' 그러고 
일부만 가져왔으면 '일부다' 그러고, 

다 헌금하면 좋겠는데 '아까워서 다는 못하겠어요. 나 아까워요.' 
그러면 '아깝다'고 말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단순한 겁니다. 

그걸 자꾸 어떻게 포장할까? 어떻게 말할까? 어떻게 잘 보일까? 
거기에 신경 쓰면.. 사람이 비루해지고 저열해집니다. 

△여러분 품격 있는 삶이 어디서 오는지 아십니까?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아멘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결정적인 소중한 자질이 '품격'이에요. 
사람들이 똑똑한데, 무게가 없어요. 말에 신뢰가 없어요. 
어른이라고 하는데 권위가 없어요. 

나의 유불리에 따라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 말했다, 저 말했다... 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어른들이 있어요. 
여러분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못 믿어요. 신뢰가 없어요. 
정직하지 못한 사람, 거짓말을 종종 하는 사람은, 스스로 불안에 시달립니다. 

△사도 베드로도 지금 여기 행5장에서 거룩하게 서 있지만, 본래는 대단히 촐싹대는 사람이었습니다. 
막 나서고, 막 자기를 알아 달라고 하고,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안했어요. 

근데 그 사람이 성령 충만한 후에, 십자가 은혜로 
지금 교회에서 태산같이 중심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게 품격이에요. 

그 품격이 어디서 나옵니까? 요즘에 그런 말을 많이 하죠. 
'자신감을 가져라. 자존감을 회복해라' 아니에요. 

그럼 남의 말도 못 믿고, 나 자신도 못 믿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감을 가집니까? 
'넌 할 수 있어!' 이러면 그게 멋있게 들리지만, 그게 해결책이 아닙니다. 
'네 자신을 믿으라' 하는 것은 결코 해답이 못 돼요.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4.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져'  

'곧 그가 (삽비라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10
여러분 '엎드러진다' 라는 말은 굉장히 독특한 단어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부부가 사도들 몰래 뭔가를 모의를 했는데,

교회와 사도의 권위를 무시했었는데,

결국 삽비라는, 강제로 사도의 발 앞에 엎드러지게 (권위에 굴복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엎드러지다'는 말에는, 그냥 쓰러지다는 뜻도 있지만,         *핍토

엎드려 경배하다는 뜻도 들이있어요.  *prostrate

성경에서 '엎드려 절하세' 절한다는 것은 '경배한다'는 말이에요. 
권위를 인정하고 엎드려서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삽비라가 죽었는데 '엎드려졌다'는 말은, 이 단어의 뜻은 
그냥 픽 이렇게 옆이나 뒤로 쓰러진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앞으로 쓰러져서 그냥 죽은 거 같은데 
'사도들 발 앞에 큰절 하듯이 납작 엎드린 모양을 취했다'라는 그 말이에요.

사도의 권위,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다여 거짓을 도모했다가,

결국은 사도와 교회의 권위 앞에 고꾸라져 절했다는 것입니다. 강제적으로!  
그런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주 놀라운 장면입니다. 
이것은 문학적으로 탁월한 상징이고,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4:34~35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37절 '그(바나바)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바로 앞에 두니라' 

초대교회 성도들과 바나바는, 사도의 권위 앞에 자발적으로 '엎드리는' 거예요. 
그렇지만 아나니아 내외는, 사도와 교회의 권위를 속이고 거짓을 행했으나,

결국은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10

강제적으로 엎드러지게,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게 된 것으로.. 이 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앞서 하나님은 스스로 교회의 권위를 지켜나가신다고 했는데 (안 그랬으면 교회가 벌써 망했겠죠)

하나님은 스스로 사도의 권위를 지켜나가신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강제로라도, 삽비라의 '엎드려짐'을 받아내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훌륭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사도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가 무엇입니까? 
'다 팔았는데 다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헌금 작게 했다고 벌하지 않으십니다. 

거짓말? 물론 거짓은 큰 죄인데 
그것에 못지 않게, 아나니아 내외가 저질렀던 잘못은,

사도와 교회의 권위를 깔본 것입니다. 업신여긴 것입니다.

아마 누가는, 본문의 막바지인 10절에 이런 내용 '엎드러지다'를 기록함으로써, 

사도와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지켜가시는 하나님을.. 본문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여러분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게 거짓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굉장히 부모들이 화를냅니다. 왜요?
   거짓말하는 거 좋지 않으니까요? 물론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자녀들이 거짓말을 하면, 부모가 어떤 생각 드는가 하면, 
   '얘가 나를 바보로 아나?' 
   '요 조그만 것이 나를 바보로 아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이 거짓말은 그냥 사실과 다른 말했다는 것 이전에 
'내가 성령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내가 더 똑똑하고, 더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보세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둘이가 알면서, 사도들은 모를 거라 생각을 한 거죠. 하나님은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이 둘이 공모할 때는 자기들은 알아요. '이렇게 하면 될 거야' 
'저 사도는 모르겠지..' 
'우리가 적당하게 생색내고 이렇게 수완을 발휘해서 박는 방법을 우리는 안다.'라는 거예요. 

'저 시골에서 올라온 사도들, 뭐 성경이나 좀 알겠지 
세상 돌아가는 것은 저것들이 어떻게 알아?' 하는 그 교만!
자기들이 '사도들 머리 위에 올라서서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가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내 생각은 안 그래' 교만입니다. 
태초의 죄예요. 권위를 업신여기는 겁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인들이 '성경에는 이렇게 나오지만 내 생각은 달라' 
'목사님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저거는 아니야' 
'세상 그렇게 해서는 못 살아, 내 생각에는 안 그래!' 
이렇게 내가 말씀의 권위 위에 서 있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은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판단 받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내가 말씀을 판단하는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이 죄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똑같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도 교만이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도 결국에는 권위를 업신여기는 교만이에요. 

그러니까 거짓말하는 거예요. 
'내 머리로 하나님도 적당히 속일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 말솜씨로, 내 정치력으로 
그 정도의 얼버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권위를 업신여기는 교만이에요. 

갈6: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언제 사람들이 하나님을 업신여깁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 망하는 길로 가는 겁니다. 더 크게 망하는 길로 가는 거예요. 

▲본문은, 우리에게 '엎드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특별히 필요한 은혜입니다. 

여러분 엎드린다는 거예요. 타인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나의 주체성, 존엄이 파괴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엎드릴 줄 모르고, 어디에 가서도 고개 숙일지 모르고, 
늘 고개에 들고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세요. 
한 번도 고개 숙일지 모르고, 늘 빳빳하게 고개 들고 사는 사람들 중에서 
잘 사는 사람 본 적이 있습니까, 주위에서 인정받는 사람 본 적이 있습니까? 

주위에서 존경받는 사람,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내 존엄은 내가 지키는게 아니에요. 엎드릴 때 주어집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전에 죄에 빠져서 평안함이 없을 때 예수 십자가의 공로 힘입어 
그 발 아래 엎드려 참된 평화 얻음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그 발 아래 엎드려 참된 평화 얻음은'
여러분, 우리 마음에 참된 평화가 언제 임합니까? 
그 발 앞에 엎드릴 때에 참 평안이 임하고, 참 자유가 생기는 줄 믿습니다. 

저는 찬송가 부를 때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힌 가사가 있지?' 

'그 발 앞에 엎드려 참된 평화 얻음은'
우리는 엎드리면 비굴해지고, 엎드리면 평화가 깨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본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본 사람은요, 
여기서 평안을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참 자유를 얻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이 찬송 '그 발 아래 엎드려 참된 평화 얻음은' 
분명히 경험해 본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 생생한 평화를, 그 자유를 누려보지 않고는.. 고백할 수 없는 말이에요.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리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엎드리고
이 놀라운 신비를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엎드릴수록 평안을 누리고, 자유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낮아질수록 겸손해질수록 더욱더 존귀해지는 은혜, 
하나님 우리에게 공급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