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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 거룩> 조각글 모음 1

LNCK 2024. 3. 15. 20:18

<구별, 거룩> 조각글 모음 1      롬6:19         <구별, 거룩>관련글

 

※여러 설교에 나오는 ‘구별, 거룩’에 대한 대목만 발췌해서 모아봅니다.

 

▲레위기에서 ‘거룩하다’는 단어를 원 의미에 가깝게 다른 단어로 대치하면

‘구별한다’ separate, set apart 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되는 ‘구별’이나 ‘분리’라는 단어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①‘속되고 더러운 것에서의 분리’의 의미도 있지만 (No)

②'이제 구별해 놓은 것을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 한다'는 뜻도 된다. (Yes)

 

그래서 성경에는 ‘거룩하다’는 말이 아주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된다.

①성전, 성소(거룩한 곳)라는 말은

단순히 그 장소에서는 죄가 범해지지 않고 깨끗해서 성소인가?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그 장소가 쓰임을 받기 때문이다.

 

②성일(안식일, 거룩한 날)을 생각해 보자.

죄를 안 짓는 날도 되지만,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전념하는 날이란 의미의 ‘거룩함’이다.

 

③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된 우리들 스스로를 성도라고 부른다.

단순히 죄를 짓지 말고 사는 ‘거룩한 무리’ 보다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일, 거룩한 목적에 드려지는, 쓰임 받는 무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섬김은 성도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성별 consecration ('구별'과 같은 말)

 

1) 단어의 뜻 (아래 3가지 의미가 종합적으로 쓰인다)

-성별, 또는 구별(신성하게 떼어놓는다. 구별시킨다).

 

-헌신 devotion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예) 문학에 자기를 consecration했다는 말을 쓴다.

 

-봉헌, 성직 위임식의 의미

제사장의 위임식, 오늘날 사제 서품, 목사 임직, 예배당 봉헌 때 쓰인다.

 

‘임직’이라면 무슨 임명장 받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실제로는 무서운 말이다.

남은 인생 세상과 확 분리되고 떨어져야 하는데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2) 성별이란? – 하나님께 자기 몸과 마음 전체를 바치는 것, 드리는 것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롬6:19)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롬 12:1)

 

구약 시대엔 짐승의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헌신했다.

신약 시대에 바울은, 너희 몸을 산 제사의 제물로 드리라고 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 받은 모든 사람은 성별이 필요하다.

 

3) 역사상 모든 부흥운동과 영적 각성은 “성결의 회복”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의 케직 사경회도 무슨 심오한 말씀을 배웠다기보다는 “성결의 회복”이었다.

 

케직 사경회(1875)의 부흥이 있고 난후, 성결이 회복된 후,

세계 선교 부흥(SVM 학생자발운동, 1886~ )이 일어났다.

 

오늘날 한국 청년들의 선교 동참의 열기가 조금씩 식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먼저 성결이 회복되어야, 선교의 회복이 뒤따를 것이다.

 

비록 거창한 해외 선교가 아니더라도

성결한 사람은, 주변에 넘어진 사람을 도울 영적 힘이 생긴다.

 

그러나 성결치 못한 사람은, 주변에 넘어진 형제를 도울 아무 영적 힘이 없다.

심지어는 자기 스스로를 지탱할 힘도 없게 된다.

 

4) 성결이 체크 되어야

우리는 교회에 모여 같이 기도 드리고, 성경공부하고, 주안에서 서로 교제도 나눈다.

그러나 성결의 기반이 부실하면, 아무 능력 없는 모임이 되고 만다.

이것이 계속되면 사탄이 교회 모임을 마음 놓고 유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결의 기반이 확실하면, 우리는 위로 능력을 청구할 수 있고,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5) 여호수아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모든 주변 나라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사사기 때는,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에게 두려움을 받는 민족이었다.

 

오늘 내 삶에 두려움이 많은가? 아니면 두려움 없이 담대한가?

두려움이 많다면, 내가 성결하지 못하다는 이유이며, 그래서 마귀에게 유린당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성결 하도록 도와주려면, 내가 먼저 성결 되어야 한다.

내가 성결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성결 되도록 도와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9:19)

 

성결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설교로 다른 사람을 가르쳐도 별로 효과 없다.

오직 성결을 행하면서 가르칠때, 듣는 사람들이 변화될 것이다.

 

예를들면, 부인에게 충실치 못한 남편이 아무리 부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 말이 부인의 마음에 와 닿을리 없는 것과 같다.

오늘 나의 설교는 공허한 외침이 아닌지…..

 

6) 성별은 취소cancel가 안 된다

우리는 타인과 무슨 계약을 한 후에, 사정에 따라서 취소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위약금, 벌금을 낼 때도 있지만, 취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피에 씻은 사람은, 성별에 반열에 들어선 사람은

취소cancel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번제물이 제단 위에서 이미 태워졌는데, 원상복귀가 어려운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 믿은 사람이 범죄하면 주님께 가중처벌을 받는 면이 있다.

성별된 사람이 성별된 삶을 살지 못하니까 그렇다.

 

죄인이 범죄하면…. 죄인이니까…..이해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성별된 사람이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면

무르고 싶은데 취소는 안 되고……

매는 두 배로 맞고……

그러니까 성별되어 사는 것이 사실은 제일 편한 삶이다.

 

7) 우리가 성별 되면, 주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일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말할 때 ï 주체가 ‘우리’에게 있다. Good!

“주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고 말할 때 ï 일하는 주체가 ‘주님’께 있다. Better!

 

우리가 성별 되지 못하면, 주님이 우리 속에(또는 가운데) 거하실 수 없으므로

주님이 우리 통해 일하지 못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성별 되면, 주님이 우리 속에 거하실 수 있으므로

주님이 우리 통해 일하신다.

 

성결하지 못한 하루는 그 날 하루를 낭비한 것과 같다.

 

 

▲성도는 구별되어진 자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예레미야 1:5)

 

어찌 예레미야뿐이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가 부름 받았고

보냄 받은 존재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보내졌다면

어느 시대에, 어느 가정에,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이 선택하셨다고 믿어야 한다.

 

혹자는 불우한 가정환경, 신체적 장애 때문에 ‘실수’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될 수 없듯이,

참새와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사람은...

하나님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보내셨다. 태어나게 하셨다.

 

우리를 꼭 필요로 하는 시대에, 우리를 꼭 필요로 하는 환경 가운데,

적절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도록 하셨다고 믿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이며 섭리임을 믿어야 한다.

 

▲성도가 세상에 쉽게 동화되는 이유

염전을 하시던 장로님의 이야기다.

어느 날, 장로님이 염전 일을 하다 실수로 소금 가마니를 바다에 빠뜨리셨다.

금세 건졌는데, 커다란 가마니 속 소금이 거의 다 녹아버려 있었다.

 

소금이 물에 잘 녹는 건 알았지만,

김장때 배추를 절이기 위해 소금을 물에 녹일 때면

물을 힘껏 휘젓고도 한참을 기다려야만 겨우 녹는데,

소금이 가득 찬 가마니를 즉시 건졌는데도, 소금이 많이 녹아 없어져 있었다.

 

장로님은 매우 의아해했지만, 금방 이유를 깨달았다.

소금은 애초에 바다로부터 취한 것이기 때문에

담수에서와 달리 금세 녹아버린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 바다로부터 취한 소금은 순전하게 구별되었다가도,

바다를 만나면 금세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취한 존재다.

따라서 세상과 섞이기 시작하면 금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의 깊음이 필요하다.

항상 세상의 유혹들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자신의 구별됨을 순전하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살린 하시딤, 바리새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시대의 바리새파는 원래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원래는 뼈대 있고, 명문가 가문들이다. 우리로 친다면 독립운동가 가문들이다.

 

‘하시딤’이라는 뜻은 ‘구별된 사람들’ 이라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하고 다르게 살아가자, 구별되게 살아가자,

그런 특심한 신앙인이 ‘하시딤’이었다.

 

팔레스틴을 통치하던 이방세력(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이

“믿으면 죽인다!” 그러니까

대부분 유대인들은 믿음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변절했다.

 

우리도 일제시대 때, 6.25때, 예수 믿으면 핍박 받고 죽이고 그랬을 때

믿음 지키는 사람들 보다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않았는가!

 

당시에 이스라엘도 여호와 신앙을 지키면 죽이고, 끓는 물에 집어넣고,

자식들 한명씩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죽이면서

자식 살리고 싶으면 여호와를 부인해라, 그렇게 괴롭혔다.

 

이러면 대부분,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신앙을 포기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내가 죽으면 죽었지, 신앙 포기 못한다.

우리 식구 다 죽어도, 우리는 신앙 포기할 수 없다.

믿음을 지키다 그렇게 죽어가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하시딤이었다.

 

이 사람들 때문에 믿음을 지키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서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유대 나라를 살린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파 가문의 조상인 하시딤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개혁하지 않으면 그 좋은 것도 망하고 부패한다.

아무리 하시딤이 좋았고, 바리새파가 그 정신을 승계했어도

그 내부에서 다시 새롭게 개혁하지 않으면, 속에서 다 부패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독립투쟁 하다가, 나라가 자유를 얻으면서 이들이 권력을 얻게 되었다.

손에 돈이 들어오고, 권력이 생기고, 힘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바뀐다...

 

▲거룩함이란 다른 말로 '구별됨' 또는 '성별'

 

비록 우리가 아직 우리의 거룩함을 완전히 이룬 것은 아니지만,

성도는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사하는 그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거룩함’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거룩함holy’이란, 종종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신성함devine’ 또는 ‘완벽함perfect, 흠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신성함’과 ‘완벽함’으로 거룩함을 나타내려 했다.

곧 외식적인 기도, 규례, 옷차림 등을 통해서였다.)

 

거룩함이란 ‘구별됨, 세상 사람과 다름, 따로 떼 놓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룩함’은 ‘동사, 즉 행동을 뜻하는 말’이며,

결코 ‘명사, 즉 어떤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행하라’는 뜻이다.

 

물론 그 행동은 하나님처럼 남들을 판단하거나

자기 멋대로 남들 위에 군림하며 다스리는 식의 행동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행동하라’는 뜻은,

하나님처럼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처럼 어떤 경우든지 친절하며,

누구든지 긍휼의 마음을 가지며,

사람들을 포용하고,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포용하고,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함을 뜻한다.

 

이런 행동은 분명히 세상 사람들의 행동 방식과는 ‘전혀 다른’(구별된)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너희의 거룩함’이라 가르친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내 매일의 실제 삶에 나타난다.

 

즉, 긍휼, 지혜, 인내, 용서, 겸손, 치료, 사랑 등이

매일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위에 열거한 긍휼~사랑)은 분명히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구별된, 거룩한)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복음화 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거룩함을 보고,

우리가 크리스천임을 인정하게 된다.

 

▲성벽은 구별의 표시

 

에스라가 성전을 회복한 후에

느헤미야가 성벽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벽은 분별의 성벽이요, 구별의 성벽이요, 방어의 성벽이다.

오늘날에는 이 방어벽이 무너진 상태에 있다.

오늘날에는 분별의 성벽이 무너져 있어서 교회가 분별력이 없다.

 

①분별, 구별의 성벽

이것은 어떤 차별적 개념, 남을 무시하고 스스로 고상 떠는 개념이 아니다.

세상적 방식을 배격하고, 신앙적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은 사람이나 별 차이 없는 것... 구별이 안 되는 것

교회 모임과 세상 모임이 구별이 안 되는 것

이런 것들이 떠나가고

성도와 교회가 구약대로, 신약대로 반드시 구별될 것이다.

성벽의 회복을 통해!

 

우리는 교회 일을 할 때에도 우리의 세상적인 방법을 그대로 한다.

이런 일도 반드시 분별되어져야 할 분야이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다” 레10:3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성벽이 회복되어짐으로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기준, 세상의 평가가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 가치관,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평가가

다스리고 통치하는 그러한 구별의 성벽이 세워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것들이 세상의 가치관이 세상의 평가와 세상의 방법이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래서 그 안에는 하나님의 것이 다스리도록 하나님이 성벽을 세우실 것이다.

 

성벽이 무어지고 여우들이 들락거리면 이방의 조롱을 당한다.

그러나 성벽이 굳게 세워지면... 이방이 두려워할 것이다.

 

그 날에는 길갈에서 애굽의 수치가 물러간 것처럼, 교회의 수치가 물러가고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높이시매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한 것처럼 revered

세상이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도 그렇지 않은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던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 때문에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올바로 설수 있었던 것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성별된 사람

패니 크로스비는 한 평생을 살면서 수많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경험했지만

그는 거의 한 번도 원망, 불평, 증오의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85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한 순간도 어느 사람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를 품은 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좋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를

항상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를 성별 시켜서 그 분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베푸신 그 많은 축복을 기억할 때

내가 어떻게 감히 불평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불행한 환경 중에서도, 원망이나 불평이나 증오의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한 평생을 산 사람은 분명히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패니는 어렸을 때 이미 자기가 맹인 된 것이

자기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도록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부모 공경은, 세상 사람과 성도가 구별(=거룩)되는 지점

이 순간, 세상 사람들은 대개 부모를 배척해 버린다.

부모를 미워해 버린다.

요즘, 부모와 더불어 아예 말도 끊고 지내는 자식들이 많다고 한다.

부모를 요양원에 팽개쳐 버리고 찾아가지도 않고,

아예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부모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를 섬길 때, 자기 취향과 자기중심적으로 섬긴다.

자기 마음에 들면 섬기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하고 배척한다.

 

성도는 그런 세상 사람들과 구별(거룩)되어야 한다.

부모를 섬기되, 하나님을 섬기듯이, 경외함으로 섬긴다.

내 머리로 이해 안 되어도, 여전히 공경한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성도, 교회란.. 세상에서 구별된 자, 구벼된 ㅈ들이 모임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성도saint’로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가?

물론 연약해서 때때로 범죄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성도는 성도(거룩한 자)다.

 

바울이 '성도'라고 부른 초대교회 신자들도,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다고 그들을 ‘성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라고 말했다.

 

당신의 행동거지가... 당신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누구인가에 따라... 당신의 행동방식이 결정될 것이다.

 

What you do doesn't determine who you are;

who you are determines what you do.

 

자기를 성도(거룩하게 구별된 자)로 분명히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걸맞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표식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는

'마치 유대교의 안식일 규례처럼'

내가 크리스천 공동체의 일원인 것을 밖으로 알리는

외적인 표지mark가 과연 무엇일까?

 

크리스천이 이 세상과 구별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의 철두철미한 안식일 규례처럼)

사도 요한 그것을 너무나 명쾌하게 가르쳐 준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13:35

 

그래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사랑의 원리다.

사랑이 있을 때, 그 사랑으로

우리 믿는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향해서

‘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점이 세상과 다르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결정적으로 세상과 구별되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형제사랑이다.

 

요한복음 외에도, 요한일서, 마태복음, 고린도전서 등

다른 성경도 다 마찬가지다.

 

전도/선교의 기초는 ‘형제 사랑’

그런데 우리가 하는 ‘사랑’이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초라하다.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문제없지, 그러니까 나는 크리스천이야!’

그렇게 생각한다.

문제는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전도, 선교를 하면서 사는데,

우리는 가장 중요한 기초부분에서 매우 흔들리고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했는데,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 안 하면... 전도의 문이 닫히는 것이다.

 

많은 교회가,

세상에 나가서 복음 전도하는 열정을 가지자고 강조한다.

그것을 갖추고자 교회마다 피나게 노력한다.

 

그래서 교회마다 예배드리자 그러고,

나가서 전도하자, 선교하자 그러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진짜 매력인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 무관심하고, 너무나 어기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온갖 고난을 이겼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구별되었다>는 의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고전1:1

나는 부르심을 받은 독특한 사람, 구별된 사람,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있기에 온갖 핍박 속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어도 ,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아도

사역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거룩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달 내내 특별새벽기도 하고

선교 중에 아침, 저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낮에는 교회 목회자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 날에는 해수욕장에서 청년들과 거친 파도에 허우적대기도 하고.

금요철야 기도에 강단에 섰는데

디지털로 비유하면 화소가 없어지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었던 이유는,

산삼으로 깍두기를 해 먹어서가 아니라

체력이 타고 나서도 아니고,

거룩함 즉 구별되었다는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책임감.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며,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음식법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먹어야하는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이 나옵니다.

 

거룩함을 위해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구별됨을 위해서 음식을 구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통하여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날마다, 날마다 재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구별된 음식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술과 담배. 술자리에서 '술, 담배 안합니다' 말하는 순간

핍박을 당하면서 구별되고 거룩이 됩니다.

 

크리스천임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음식법은 구별된다는 의식을 주기 위한 시금석이었다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크리스천은 주일의 약속을 피합니다.

'예배 드려야 해' 하며 구별되는 것입니다.

불편합니다. 피곤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별될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 대안이 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세상과는 다른 생각과 다른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위기상황이 되면 세상에 대안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사회에서도 거룩, 구별의 능력이 있습니다.

1만7천의 해병대는 27만과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특별한 군대라고 합니다. 박수도 특별하게 치고 그러합니다.

‘다르다’(구별되었다, 거룩하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학생들이 뱃지를 달고 다닐 때가 있었습니다.

구별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무언가 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 이상의, 거룩의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은 거룩한 성도입니까. 부르심을 입었습니까?

구별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습니까?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 거룩의 자의식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