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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극복하게 하는 기도

LNCK 2024. 3. 17. 19:21

https://www.youtube.com/watch?v=YZyG_Gi5n5Q

환난을 극복하게 하는 기도     행4:23~31      2024.02.24.

도입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도입 / 기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 <기도문 모음

요즘 사순절 새벽기도회에서 <믿음의 선조들이 남긴 기도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아마 지금까지 그 기도문에 자기 마음을 실어 보신 분들이라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은 누구의 기도문이 나올까?' 
하는 그런 기대를 가지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즉흥적으로 터져나오는 기도가 좋은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니까, 
꾸밈없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 중에 이렇게 회중을 대표해서 기도할 때는, 미리 잘 준비해야 되겠지만 
홀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있는 그대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 사이에는 '기도는 저절로 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퍼져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냥 내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되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도 일면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기도생활에 있어서 성장하지 못하는, 매우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는 배워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세례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청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 속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에만 머물러 있으면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한계 안에 갇히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깨닫고, 배워서 변화받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기도 안에 갇히지 않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이 써 놓은 좋은 기도문을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기도로 드리는 것은 아주 유익한 영적 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 The Lord's Prayer> 를 알려 주신 것이지요.
이 주기도는 암송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기도의 교과서 같은 것입니다. 

우리 성경 안에는 또한 <시편>이 있습니다. 
그것을 차례로 읽고 묵상하다 보면, 우리의 기도가 변하고, 
기도가 변하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태도도 변하고, 삶도 변화합니다. 

제가 30대 후반에 영적인 어둠을 겪으면서
이 <시편 기도>의 그 능력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분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면 
'시편을 읽고 (그 시편 내용을 따라서, 근거로 해서) 기도하라'고 늘 조언을 해줍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믿음의 위인들이 남긴 기도문들을 읽고, 
자신의 기도로 담아 올리는 것도 아주 유익한 일입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좋은 기도문들을 엮어서 만든 <기도 선집>도 있습니다. 
저도 한 20여 년 전에, 그런 기도 선집을 책으로 펴낸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그 이후로, 저의 기도 생활에 아주 좋은 친구가 되고 있습니다. 

굳이 책을 사지 않더라도, 구글에 들어가서 검색을 조금만 하면, 
좋은 기도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론 / 우리는 본문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주님께 올린 기도문> 중의 한 편을

   오늘의 설교 본문으로 방금 읽었습니다. 행4:24~30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서 장애인을 온전하게 한 일로 인해서 
산헤드린 앞에 불려가 심문을 당했습니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통해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위협을 주고 일단 풀어줍니다.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보고합니다. 

하룻밤 동안,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 두 사도로 인해서, 모든 성도들이 얼마나 걱정을 했겠습니까. 

그들은 반갑게 만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요. 
본문의 24~30절까지는 그때 드린 기도문입니다. 

아마도 그 모임 중에서 누군가 리더가, 대표로 기도한 그 기도가, 
여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의 기도 역시도,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가만히 보면 매우 중요한, 우리의 모범이 될 만한 그런 기도문입니다.

특히 환난을 당한 성도와 교회에게요!

성도가 여러 가지 환란, 혹은 어려움을 당할 때 드릴 수 있는 기도문이죠.
그때 어떤 기도를 드리면 되겠는지... 우리에게 큰 모델이 됩니다.

이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요. 

 

▲1. 첫째는 기도자가 기도하는 대상에게 말을 겁니다. 
24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주님' 하고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이지요. 

본문의 기도자는, 옛날 정한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렸던 우리 조상들처럼 
'거기 누가 계시다면, 제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허공에 대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성부 하나님과, 
십자가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신 예수님과, 
그리고 오늘 우리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기도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인간사를 다스리고 계심을 믿기에 
그분을 향해 말을 거는 것이지요.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의 하나님을 상상하며, 
마음 다해 '주님, 아버지, 혹은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기도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담아 부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도가 됩니다. 

여러분도 아마, 누군가가 자기 마음을 담아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 줄 때, 
그때 받는 감동과, 위로와, 힘을 얻는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누군가를 생각하며... 대개 어머니가 그런 대상이지요. 
누군가를 생각하며 내 앞에 있지는 않지만, 그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무너지는 마음을 잡아주는 힘이 되지요. 
사람도 그렇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제가 신학생 때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과거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에 파송받아 갔습니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남자 교인이 계신데요. 
그분은 새벽예배가 끝나면 한 20~30분 기도하다 가시는데, 
기도하는 중에 이 분은 "아이고 아버지"라는 말만 반복하셨다고 합니다. 

"아이고 아버지!" 하고는 한참 아무 말이 없다가, 
또 "아이고 아버지!"만 반복하면서... 그렇게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셨다는 거지요.

이 초보 전도사는 '무슨 저런 기도가 있나?' 하고 이상하게 여겼다지요. 
그런데 얼마 후에 그분의 삶의 형편을 알게 되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잃고, 홀로 되신 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분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말로는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자신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아이고 아버지"라는 한마디로 표현하신 것이지요.」

그 외마디 외침이, 
매일 그분의 그 죽지 못해 사는, 고단한 삶을 붙들어 주는 힘이 된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말을 거는 것은 이토록 중요합니다. 
처음 기도를 시작(입문)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 혹은 주님"이라는 한 마디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경우에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을 거는 것처럼, 용기를 내서 그분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지금 내가 말을 걸려고 하는 그 성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상상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작은 상상력으로는, 알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상상이 안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 전체를 감싸고 계시는 그분을 상상한 후에, 
그분을 향해 "하나님, or 아버지, or 주님"하고 입을 열어 불러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상상했다면, 그분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며, 
그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크신 분이, 이토록 작은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토록 거룩하신 분이, 이토록 더러운 나의 기도를 귀 기울이신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분 앞에 고개 숙여 말을 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셨다'고 하는 복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감히 "아버지 혹은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떻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는 
그 십자가의 메시지를 우리가 믿기에 
그 믿음을 가지고, 감히 입을 열어서 그분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 

알고 보면 그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격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2. 둘째로 본문의 기도자는, 지금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환란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백합니다.  4:25~26

그는 기도 중에 시2:1~2절을 인용을 하지요.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 시편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면 
사람들이 그분을 거부하고 배척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자는, 구약 성경의 예언들을 통해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과 그분을 믿는 신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본문의 기도자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4:27~28절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는 말은,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하여 두신 일들을 모두 행하였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시편 2편이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한 그 사건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졌고,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즉 구원자로 보냄 받은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을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과 한패가 되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서 정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 하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규하셨지만, 
그분이 그렇게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권력자들과 이방 권력자들의 협잡으로 일어난 이 비극도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자는, 지금 그들이 당하고 있는 혐오와 거부와 박해는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혐오와 배척과 박해를 당한 것처럼, 
제자들도 동일하게 그런 환란을 겪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그런 일을 장차 당할 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환란의 과정에 함께 하시고 
그 모든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일을 당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특별히 당황스럽고 두렵고 혼란스러운 일을 당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물론 인간이기에, 잠시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낙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고, 평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늘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자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면 
혹은 그런 눈으로 세상사와 인간사를 보려면, 
자주 일손을 멈추고, '누가 이 모든 일을 다스리고 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의 기도자가,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환란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시편 2편에 나오는 예언을 통해서 본 까닭입니다

'모든 것은, 내 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따라서 본문의 기도자처럼,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일들이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견디기 힘들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본문의 기도자는 하나님께 두 가지를 간구합니다. 

1) 첫 번째 간구가 29절에 있는데요.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환란과 어려움을 당할 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혐오하고, 배척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징계해 달라거나, 
혹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의 기도자는 그런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혹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들을 똑같이 배척하고, 
나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삼습니다. 

'나는 하나님 편이고, 다른 사람들은 악마 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자신을 혐오하고, 배척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원수로 여기고, 그들을 저주하는 기도를 드리기 쉽습니다. 

저주하는 기도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시편에 보면 '저주 기도'가 여러 편 나옵니다. 

시편에 나오는 '저주 기도'는 
'이렇게 저주하는 기도를 드리라'고.. 
우리에게 그것을 본받아서 하라고 수록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분노와 원한이 사무쳐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때, 
그럴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기도할 때, 원수로 여겨졌던 그 사람을, 
마침내 그런 기도를 통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용서를 위해 떼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의 기도자는 자신들을 배척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징계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박해를 멈춰 달라고 구하지도 않습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필요한 일은, 
그런 환란을 당해서, 그 일로 인해서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기도자는, 바로 그것을 기도합니다. 
'혐오와 거부와 박해로 인해서, 말씀을 전하는 일에 물러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하던 일을 멈추거나 피하지 않게 해달라고... 
환경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동안 해오던 하나님의 일을 지속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2) 두 번째 간구는 4:30절 '그리고 주님께서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병을 낫게 해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환란을 각오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계속할 것이니, 
주님은 주님의 일을 계속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입니다. 

사실 이 두 번째 기도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주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한다고 해서 일하시고, 
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하지 않는 주님은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왜 본문의 기도자는 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속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그분께 더욱 신실하게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활동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가 환난을 당할 때

이렇게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했을 때, 
그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기도자의 기도(본문)에 그들의 마음을 실었습니다.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누가는 이렇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31절에 보면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렸다' 하는 말은 
성령을 체험할 때, 가끔 일어나는 진동의 현상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하실 때 간혹,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복음의 불길을 끄려고 그들을 박해했는데 
믿음의 공동체가 그 환란을 당해서, 뜨겁게 한 마음으로 기도하자 
그로 인해서 복음의 불길은 꺼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던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의 여정에도, 믿음의 공동체의 여정에도, 
환란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환란을 면제 받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다면, 필경 시험 당하고 낙오하게 될 것입니다. 
환란은, 믿는 이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믿는 사람들이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환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랄 것은, 환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당하지만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환란이 어떤 것인지를 똑바로 보아야 하고, 올바로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의 기도자는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모두는, 여러 가지 환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을 당할 수도 있고, 사고나 노쇠함으로 인한 장애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어려움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큰 실수를 해서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요, 해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판단 착오로 인해서, 수치스러운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갑작스럽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지요. 
관계의 문제로 인해서 사면초가와 같은 그런 상황에 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몰릴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나님 앞에 머물러 앉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기도가 나오지 않죠, 
그럴 때면 하나님 앞에 잠잠히 앉아 있기만 해도 됩니다.      

그 자리에서 지금 자신이 당한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그럴 때, 지금 내가 당한 일이 정말 너무도 억울하고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너무도 절망스럽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 상황을 보고 계시고, 섭리하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지금 내가 당하는 어떤 재앙이나 불행도 
끝까지 재앙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나면, 비로소 기도가 나옵니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을 믿으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지를 알게 되지요. 

내가 직접 대면하기에 어려운 그 상황을, 대면할 용기를 구하고, 
직면한 상황 때문에 뒷걸음치거나 곁길로 피해 가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의롭고 선하고 바르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믿음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란을 겪지 않는 교회는 없습니다. 
사탄은, 살아있는 교회를, 끊임없이 흔들기 때문입니다. 

내적 요인으로 인해서든, 외적 요인으로 인해서든 
믿음의 공동체는, 크고 작은 환란을 (주기적으로)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환란을 당하여 흔들리고, 분열되고, 무너지는 것은 환란 때문이 아닙니다. 
환란을 바르게 보고, 그 환란에 바르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환란에 대해 믿음의 공동체가 바르게 대응한다면, 
그 환란을 통해, 더 견고하고 강한 공동체로 성숙되고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교회는 불완전한 존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해서 
서로를 보듬고 하나 되기를 힘쓰는 곳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 각자가 새롭게 빚어지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교인들 사이에 서로 상처를 주는 일이 일어날 수 있고요. 

교회가 내린 결정이, 내가 생각하는 그 의견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속한 교단의 정책이 우리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잘못 따르면 환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적인 문제든, 외적인 문제든..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교회가 할 일은, 모여서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당면한 이 환난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손을 뗐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조차, 하나님의 다스림과 섭리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바꾸려고 힘쓰는 것은 
때때로 스스로를 짓누르는 일이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섭리 안에 있음을 믿고 
우리는 그런 상황으로 인해서 물러서거나 분열되지 말고 
견고히 서서, 지금까지 해온 일을 계속할 힘과 용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구할 것은, 더욱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영혼을 구하고, 세상을 섬기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도하고 힘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견고하고 강한 믿음의 공동체로 연단될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인생여정에서 당해야 하는 환란들을 
제대로 보고, 바른 기도를 함으로써 
환난을 이겨내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앞으로 어떤 환란을 당하든, 흔들리지 말고 
모든 지체가 서로 연합해서, 한마음으로 기도함으로써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찬양을 하나 부르려고 하는데요. 
이 찬송을 우리의 기도로 담아 올리십시다. 

「세상의 유혹 시험이 내게 몰려올 때에
나의 힘으론 그것들 모두 이길 수 없네
거대한 폭풍 가운데 위축된 나의 영혼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이고 있을 때

세상의 유혹 시험이 내게 몰려올 때에
나의 힘으론 그것들 모두 이길 수 없네
거대한 폭풍 가운데 위축된 나의 영혼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이고 있을 때

(후렴) 주를 찬양 손을 들고 찬양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 아니니
주를 찬양 손을 들고 찬양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2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지금도 우리들을
실패와 절망으로 넘어뜨리려 하네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없는 듯
믿음의 눈을 들면 보이는 분 계시네
지금도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사망과 어둠의 권세 물리치신 예수님」

......................................

 

▲ <특별 기도의 능력 The Power of Extraordinary Prayer>이란 책에서

저자 밥 백키는,

‘기도 합주회’ concert of prayer

(그 지역의 다른 교회, 교파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의 역사가

1700년대 초기에,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기도 합주회’가 그 당시 ‘1차영적대각성 운동’의 촉매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 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주회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아무리 어둡거나 밝든지에 관계없이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할 때, 하나님이, 지난 역사보다,

지금 우리에게 더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그 확신 가운데서 태동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기도로)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이루실 일들에, 우리가 서로 함께 (기도로) 동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그 놀라운 뜻을, 이 땅에 이루시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고, 그냥 방관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지체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기도하지 않을 때! 말입니다.

 

위대하고 분명한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재림)의 비전이, 지금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모든 나라, 민족, 족속, 방언들이 연합해서, 함께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보좌 앞에 설 것입니다.

 

이 비전을 실제로 우리가 가졌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편안히 쉴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도 편히 쉬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도록,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밥 백키가 지적한 비전과, 같은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특별기도모임’에 모이라는 호소에, 적극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정말 깜짝 놀랄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우리가 주일마다 기도하고, 매일 저녁 합심기도 했던

북한에 억류됐던 임현수 목사님이 석방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어요. *2017.08.10. 억류 31개월만에.

어떻게 이렇게 예상치도 못하게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나...’

 

내일모레는 8.15 광복절인데, ‘남북이 통일되는 것도

아마 이렇게 하나님이 갑작스레 소식을 주실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작년에 토론토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님이 담임하셨던 그 교회에서,

제게 부흥회 인도 요청이 왔습니다.

 

담임 목사님이셨던 임현수 목사님이, 북한에 그렇게 억류되고

온 교우들이 그 일로 인해서 마음이 낙심하고

그리고 안타깝게 기도하는 그 교회에, 유목사님이 강ㅅ로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어 달라고...

 

저는 주님의 부르심인 줄 알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리고 이제 내일 출국합니다.

 

그 임현수 목사님의 사모님이 한동안 저희 교회 나오셨어요. *선한목자교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으시고

저희 교회 게스트하우스에 묵으시기도 했습니다.

 

그 임현수 목사님 사모님이 참 믿음이 귀한 분이더라고요.

이번에 금빛교회 부흥회 인도 약속을 하고는, 제가 그 사모님에게 말씀드렸어요

 

우리가 그 금빛교회 부흥회 때 임현수 목사님도 함께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근데 그게 정말 꿈과 같이 그렇게 이루어지게 되었어요.

(갑자기 석방되었으니까)

 

임현수 목사 사모님께서 토론토 큰빛교회 교우들에게 쓴 편지가 있습니다

그 편지 중 일부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억류되면서 인간적으로는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고 화가 났지만

제가 억류되고 일주일 도던 어느 새벽에

주님이 확실하게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의 남편을 북한에 보냈다 염려하지 마라

내가 함께 하고 있다!”

 

전 그 말씀에 너무 감사해서 펑펑 소리 내어 얼마 동안 울었습니다.

그 후 위로부터 사람이 형용할 수 없는 감사한 마음을

내려 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북한의 상황을 보면 정말 겁이 날 정도로 어수선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 영혼을 생각한다면,

어느 누군가가 밀알이 되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남편 목사님이라는 생각에

저는 또 한 번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무 급하셔서 영혼 구원을 위해

그 땅에 (임현수) 목사님을 강제적으로 몰아ᄀᆞᆻ다다는 사실에

저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한번 사는 인생, 주님 나라 위해 목숨 걸고 기도하고

목숨 걸고 전도하고, 목숨 걸고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길

축복해 드리고 싶습니다.”